1장


나는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이다. 더없이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내가 이 점을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나는 대략 이렇게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 P9

나는 단지 이야기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 P10

손이 떨린다. 고함치고 싶다. 아니면 뭐라도 박살 내고 싶다.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다・・・・・・ 이런 기분으로는 이야기를 차분히 펼쳐나갈 수가 없다. 심장을 긁어댄다. 끔찍한 느낌이다. 진정해야 한다.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태연자약할 것. 주지한바와 같이 초콜릿은・・・・・・ (초콜릿 생산 장면을 상상해보시라.) - P11

나는 방금 긴 간극이 있었음을 독자에게 알릴 필요를 느낀다. 그사이 후지산을 닮은 산 위에 떠 있는 연노란색 구름들을 불태우며 길을가던 태양이 졌다. 무거운 피로감에 잠겨 한동안 나는 앉아 있었다. 소음과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여백에 코를 그리기도 하고, 선잠이 들락 말락 하다 갑자기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 P12

요컨대 나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그는 한 시간 후에 올 거라했다. 할 일도 없는데 좀 거닐까 하고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불었다. 날은 쾌청했다. 얼룩덜룩한 그림자가 여기저기 드리워 있었다. 여기서 부는 바람의 먼 친척뻘인 바람이 좁은 거리를 따라 날아다녔다. - P12

저 멀리에서는 멋지게 생긴 가파른 산이 벽이 되어 하늘 위로 솟구쳐 있었다. 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의 장관은 눈속임이었다. 계단이 난 오솔길이 키 작은 너도밤나무와 딱총나무 사이를 지그재그로 지나고 있었다. 자, 자! 이제 금방이라도 경이로운 야생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어떤 장소에 다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곳은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P13

나는 옹이투성이인 난간에 팔꿈치를 괸 채 저 아래 옅은 안개에 덮인 프라하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지붕들, 연기 나는 굴뚝들, 병영, 작은 백마. 다른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 P13

오케스트라, 팡파르! 아니 이게 낫겠다. 곡예를 할 때처럼 숨을 헐떡이며 쪼개져라고 북을 쳐라! 믿기지 않는 순간이다. 이게 지금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내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른 사람이 그 모습을 봤다면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 P14

일단 벌써 중요한 대목에 도달했고 가려움증을 가라앉혔으니, 자, 이쯤에서 내 이야기에 이렇게 명령하는 게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쉬어! 조용히 되돌아가! 그리고 그날 아침 내 기분이 어땠는지,
계약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산책하러 나선 길에 언덕을 기어올라서는, 바람 부는 5월 어느 날의 푸른 하늘 사이로 저 멀리 둥글둥글하고 불그스레한 가스탱크를 바라보았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분명히 밝혀! 되돌아가서 밝히자. - P15

올 한 해 나는, 강하게 발달했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내 정신이 골몰해 세운 저 논리의 집이 지닌 놀라운 명확성과 조화를 철저히 시험했다. 직관의 유회, 창작, 영감, 내 생을 치장해온 고상한 모든 것이, 말하자면 문외한에게는, 심지어 똑똑한 문외한에게도 가벼운 광기의 서곡으로 비칠수 있으리라. 하지만 진정하시라.  - P15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생의 파문이 얼굴에일었다. 그로 인해 약간 흐릿해지긴 했지만, 기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하품을 주체하지 못하며 기름진 어두운 금발 머리를 긁기 시작했다. - P16

"담배 있습니까?" 체코어로 그가 물었다. 예기치 못하게 낮고 차분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그는 두 손가락을 벌려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
나는 내 커다란 가죽 담뱃갑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에게서 한순간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는 손바닥을 땅에 짚고 조금 움직였다. 그사이에 나는 그의 귀와 움푹 들어간 관자놀이를 살펴보았다.
"독일제구먼." 그가 말하며 미소 지었다. 잇몸이 드러났다. - P17

내가 물었다. "당신 뭐요, 하는 일 없소?"
그는 애처롭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다시 침을 뱉었다. 하층민은침이 어쩌면 그리 많이 나는지 나는 항상 놀란다.
"나는 내 부츠보다 더 오래 걸을 수 있지요." 자기 두 발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그의 신발은 정말로 보잘것없었다. - P18

"이보시오." 나는 참지 못했다. "정말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겠소?"
그가 몸을 돌려 일어나 앉았다. "뭘 말입니까?" 그가 물었다. 미심쩍어하는 음울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갔다.
내가 말했다. "눈이 멀었구먼."
한십초 남짓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왼손은 들리지 않았다. 거의 그걸 기대했는데, 나는 왼쪽 눈을 게슴츠레 떠보았지만, 그의 두 눈은 열린 그대로였다. - P19

나는 그의 머리를 내 머리 쪽으로 당겨서 관자놀이를 맞댔다. 거울속에서 두 쌍의 눈이 춤추듯 헤엄치듯 움직였다.
거들먹거리며 그가 말했다. "부자가 가난뱅이를 닮을 리가 있겠소. 잘 알면서 그러시네・・・・・・ 그러고 보니 저잣거리에서 봤던 쌍둥이가떠오릅니다. 1926년 8월인가 9월이었소. 아니 8월이었던 것 같네요. 거기서는 정말 그 둘을 분간할 수 없었소. 다른 점을 찾는 사람에게100마르크를 걸었지요. ‘좋소‘ 하고 붉은 머리의 프리츠가 말하더니느닷없이 쌍둥이 중 한 녀석의 귀싸대기를 찰싹 때리는 겁니다. 그러고는 말하길, ‘보세요. 이 사람은 귀가 빨간데, 저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당신 100 마르크 이리 주세요.‘ 배꼽을 잡았지요!" - P20

"현재로선 자넬 도와줄 길이 전혀 없네." 나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한테 자네 주소를 줘보게." 나는 수첩과 은 연필을 꺼냈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별장에서 산다고 말해봐야 소용없는 노릇이겠지요. 숲보다는 건초 더미 위에서 자는 게 더 낫지요. 그렇지만 딱딱한 벤치보다는 숲에서 자는 게 더 낫소."
"하지만 그래도 자넬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알고 싶군." 내가 말했다. - P21

교회의 먼지가 밀려들어 콧구멍이 꽉 막혔다. 코를 풀며 침대 끝에걸터앉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콧속의 가려움, 허기, 레스토랑에서 먹은 송아지 커틀릿의 불그레한 맛 같은 존재의 사소한 징후들이 이상하게 내 주의를 끌었던 것이 기억난다. - P22

실로 그 사람은 특히 자고 있을 때, 이목구비의 움직임이 없을 때, 내 얼굴을, 내 마스크를, 티 없이 깨끗한 내 시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시체라고 말하는 이유는 오직 내 생각을 극도로 선명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생각? 바로 이런 생각 말이다. 우리는 똑같은 이목구비를 지녔다. 그리고 완전한 수면 상태에서 이 동일성은 아주 분명해졌다. 죽음, 그것은 얼굴의 안식. 얼굴의예술적 완벽이다. 생은 그저 내 분신을 망칠 따름이다. 그렇게 바람은나르시스의 행복에 안개를 드리운다. 그렇게 화가가 없을 때, 그의 제자가 들어와서 시키지 않은 덧칠로 대가의 초상화를 망친다. - P23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여러분 모두를 납득시키고 싶다. 불한당인 당신들을 강제로라도 믿게 만들고 싶다.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말 그 자체의 본성 탓에 닮은 두 얼굴을 말로는 완전히 묘사할 수 없다는 점이 두렵다.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물감으로 그들을 나란히 그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말하는 바가 관객에게 분명해지지 않을까? - P24

나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내가 내 주장을 입증했음을 알기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멋지다. 독자여, 그대는 이미 우리를 보고 있다. 둘이지만 하나인 얼굴! 하지만 가능한 결함들을, 자연의 책에 존재하는 사소한 오식들을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생각지는 마시라. 유심히 보시라. 내 치아는 크고 누렇다. 반면 그의 치아는 더 조밀하고 하얗다. 그러나 과연 이게 중요한가? 내 이마에는 다 그리지 못한 ‘생각‘ 같은 혈관이 부풀어오른다.**


** 이마에 혈관이 불완전한 M자 모양으로 부풀어오른다는 뜻. ‘생각‘을 뜻하는 러시아어
‘미술‘과 러시아어 철자 M의 옛 명칭 ‘미슬레테‘를 연관시킨 언어유희. - P25

바로 지금 나는 단춧구멍에 온전히 남은 마지막 제비꽃을 꽂은 채 팔을 늘어뜨리고 자고 있는 그를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나란히 있는 우리를 주목하고 벌떡 일어나 에워싼 다음 경찰서로 끌고 가지는 않을까? 왜? 왜 나는 이 글을 쓰는 걸까? 그저 익숙한 펜 놀림인가? 아니면 두 사람이 두 방울의 피처럼 서로 닮았다는 것 자체가 실제로 이미 범죄인 걸까? - P26

2장


나는 거리를 두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데, 스스로의 모델이 되는 데 몹시 익숙해져버렸다. 바로 그 까닭에 내 문체는 꾸밈없는 자연스러움의 은총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제 도무지 원래의 내 껍질 속으로 돌아가서 옛 자아 안에 편안히 기거할 수 없다. - P27

 나는 늘 같은 가게에서 담배를 사곤 했는데, 행복한 미소가 변함없이 날 맞아주었다. 버터와 달걀을 사던 가게에서도 그와 같은 미소가 아내를 맞이했다. 토요일이면 우리는 카페에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갔다. 우리는 중산층 중에서도 잘사는 축에 속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무실에서 돌아오면신발을 벗고 소파에 누워 석간신문을 펼치지 않았다. - P28

아니, 여기에서 ‘증오‘는 너무 강렬한 단어인 것 같다. 그건 뭔가 가정적이고 기초적이며 여자들한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특히 일요일이면) 비나 (특히 새 아파트에서) 빈대를 좋아하지 않듯이, 아내는 볼셰비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 P28

아내는 로이드 조지를 증오한다. 그 사람 때문에 러시아가 파멸했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 손으로 목 졸라 죽여버려도 시원찮을 영국 놈들" 독일인들은 밀폐된 열차 때문에 혼이 난다. (그건 레닌이 수입한 볼셰비즘의 통조림이다.)****


*** 소비에트 혁명 직후 벌어진 내전 당시 (1918~1922) 영국의 총리로 볼셰비키와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러시아 망명자들의 증오를 샀다.
**** 1917년 2월 혁명 직후 스위스에 머물던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독일제국 정부가 독일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가해준 덕분에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독일정부는 레닌이 독일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밀폐된 열차를 제공했다. - P31

아내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관찰력이 부족하다. 한번은 그녀가 ‘신비주의자‘라는 말을 항상 지소사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검은 토가를 두른, 얼굴이 별처럼 초롱초롱하고 몸집 큰 어떤 진정한
‘신비주의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음을 알게 된 적이 있다.

** ‘신비주의자‘를 뜻하는 러시아어 ‘미스티크‘의 ‘이크‘를 지소(指小) 접미사로 착각했고, 그래서 진정한 ‘큰‘ 신비주의자인 ‘미스트‘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 P32

아내에게 나는 이상적인 남자였다. 나는 명석하고 결단력이 있다.
게다가 나보다 더 맵시 있게 차려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 큰바지에 새 턱시도를 걸쳤던 때가 기억난다. 그녀는 조용히 두 손을 꼭쥐더니 살짝 기운이 빠진 듯 의자에 주저앉아 소곤거렸다. "오, 게르만!......" 그건 천국의 비애에 가까운 환희였다.
아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며 그녀와 타협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건 그녀의 행복을 위한 선하고 유용한 일이라는 느낌,
아마도 나는 이런 분명치 않은 느낌과 함께 쉽게 믿는 그녀의 성향을 이용하고 있었다. - P35

조건 없이 맹목적으로, 일종의 자연적인 헌신으로 아내는 나를 사랑했다. 내가 왜 다시 과거시제로 빠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뭐 상관없다. 그게 더 쓰기 편하다. 그래, 그녀는 날 사랑했다. 사랑에 충실했다. 아내는 내 얼굴을 이쪽저쪽 찬찬히 뜯어보기를 좋아했다. - P36

내가 프라하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리다는 부엌에 있었다. 컵에 달걀을 풀어 고골모골 거품을 내고 있었다...... "목이 아파요." 그녀가 걱정스레 말했다. 레인지 모서리에 컵을 세워두고 손등으로 노란 입술을 닦더니 내 손에 입을 맞추었다.

*달걀에 설탕 등을 넣어 거품을 낸 음료로 목이 쉬거나 아플 때 치료 수단으로 쓰인다. - P37

나는 그 만남에 며칠을 짓눌려 있었다. 지금 내 분신이 내가 모르는 길을 따라 터덜터덜 걷고 있고, 잘 먹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비에 젖고 있으며, 오한에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상하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일을 찾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가 아늑하고 따뜻하게 지낸다고, 하다못해 안전히 감옥에라도 갇혀 있다고 확인할 수 있다면야 기분이 좀 나으련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 P39

6월 중순 우리는 (아르달리온의 열렬한 설득에 못 이겨) 처음 그곳에 갔다. 내 기억으로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아르달리온을 태우러 그의 집에 들러서 창을 바라보며 연신 경적을 빵빵댔다. 창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리다가 손으로 확성기를 만들어 소리를 질렀다. "아르달리오샤!" 술집 간판 바로 위에 있는 아래쪽 창에서 커튼이 사납게 홱 젖혀졌다. - P41

"내 땅이다! 이제 알겠어!" 정오 무렵 쾨니히스도르프를 지나 아르달리온이 아는 큰길로 접어들었을 때 그가 환호성을 질렀다. "어디서돌려 들어가야 할지 알려드리지요. 안녕, 안녕, 내 오랜 나무들아!"
"아르달리온칙, 바보짓 좀 하지 마." 리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길 양쪽에 펼쳐진 울퉁불퉁한 황무지, 모래밭과 히스 꽃 군집. 작은소나무들이 간간이 섞여 있었다. - P42

리다가 말했다. "아르달리오샤, 우리 그냥 큰길로 곧장 발다우로가는 게 어때. 거기 큰 호수랑 카페가 있다고 했잖아."
"절대 안 돼." 아르달리온이 흥분해서 반대했다. "첫째, 그 카페는이제 막 설계에 들어갔다고. 그리고 둘째, 내 땅에도 호수가 있어. 자,
자, 어서요!" 그가 내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쭉 가세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 P44

"내려서 걸어가는 게 어떨까요?" 리다가 제안했다.
"당신 말이 맞아. 누가 새 차를 훔칠 생각을 하겠어?" 내가 말했다.
"그래, 이건 위험해." 그녀가 즉시 동의했다. "그럼 당신들 둘이서갔다 오는 게 어때? (그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르달리온이 당신에게 땅을 보여주고, 난 여기서 당신들을 기다리지 뭐. 그다음에 발다우로 가서 수영하고 카페에 좀 앉아 있자."
"무례하군요, 마담!" 격한 어조로 아르달리온이 말했다. - P45

"대체 뭐 하느라 안 돌아오는 거야? 길을 잃고 헤매는 거 아닐까?"
나는 차에서 나와 잠시 주위를 서성거렸다. 흠집투성이였다. 무료해하던 리다가 아르달리온의 불룩한 서류가방을 만지작거리더니 열어보았다. 나는 몇 걸음 물러섰다. 아냐, 아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발에 밟힌 잔가지를 살펴보고는 돌아왔다. 리다는 차 발판에 걸터앉아 휘파람을 불었다. 둘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침묵. 그녀는 입을 일그러뜨리며 옆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 P47

"당신 얼굴은 까다롭네요." 그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 보여줘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리다가 소리쳤다.
"머리 좀 들어보세요." 아르달리온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됐어요."
"아이. 좀 보여줘." 잠시 후 리다가 다시 소리쳤다.
"내 보드카를 어디다 팽개쳤는지 먼저 보여주시지." 아르달리온이 투덜거렸다.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은 안 돼." 리다가 대꾸했다.
"넌 내가 있을 때는 술 못 마실 줄 알아." - P49

"그런데 말이오, 모든 얼굴이 정말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하나요? 우선 실제로 특정한 얼굴형이 있잖소. 이를테면 동물형 얼굴 같은 유인원같이 생긴 사람도 있고, 쥐같이 생긴 사람도 있고, 돼지형 얼굴도있고...... 그다음 유명한 사람들의 얼굴형도 있잖습니까. 나폴레옹타입 남자나, 빅토리아 여왕 타입 여자 같은 경우 말이오. 난 내가 아문센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을 듣곤 했소. 톨스토이풍 코를 난 심심찮게 봤어요. 음, 또 미술 작품형도 있지 않소. 성화(聖畵)에 나오는 얼굴, 성모형 얼굴. 생활 방식이나 직업 때문에 닮은 얼굴형은 또 어떻소......" - P50

3장

우리 이 장을 어떻게 시작할까? 몇 가지 제안을 할 테니 골라보시라. 첫번째 안이다. 이건 실제 작가나 작가의 대리인에 의해 서사가전개되는 일인칭 소설들에서 흔히 만나게 된다. - P52

(전략).
그런데 이 기법은 남용되어왔다. 작가입네 하고 거짓을 떠벌리는 장사치들이 찢어발겨서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이건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진실해졌으니까. 그럼 이제 두번째 안으로 주의를 돌리자.
요점은 곧장 새 인물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오를로비우스는 불만스러웠다. - P53

문학과 관련하여 나는 모르는 게 없다. 내겐 늘 이런 기벽(奇癖)이있었다. 어릴 적 나는 시와 긴 이야기를 쓰곤 했다. - P55

 어리석은 상황 속에 말을 집어넣기. 말장난의 위장결혼으로 말들을 결합하기. 안팎을 뒤집기. 불시에 덮치기. 내가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것들이다. ‘베테리나르‘라는 말 속에서 소비에트의 ‘베테르‘는 무얼 하고 있는가? ‘압토마트‘ 속의 ‘토마트‘는 어디서 온 걸까? ‘주브르‘로 ‘아르부스‘를 어떻게 만들지?*** 나는 수년간 더없이 기이하고 끔찍한 꿈에 시달려왔다.


*** 러시아어로 ‘베테리나르‘는 수의사, ‘베테르‘는 바람, ‘압토마트‘는 자동기계 혹은 기관총, ‘토마트‘는 토마토, ‘주브르‘는 들소 혹은 고수(高手), ‘아르부스‘는 수박이라는 뜻. - P56

내 것, 내 것을, 청소년 시절 내 실험들을 무의미한 소리들에 대한내 사랑을・・・・・・ 그건 그렇고 그 시절 나는 이른바 어떤 범죄적 성향을 가졌던 걸까? 지금 나를 골몰케 하는 건 바로 이 물음이다. - P57

"말하기 무겁지만, 내가 보기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젊었을때 나는 최상의 것만을 가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최상의 것‘은 그의 입에서 극도로 침울하고도 번드르르하게 울려나왔다.) 그때 이후로 이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내 생각을 지배하는 건 옵티미스무스*입니다."
"당신 직업에 꼭 필요하지요." 미소를 머금으며 내가 말했다.
오를로비우스가 도끼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고객을 확보해주는 건 페시미스무스**입니다."


* ‘낙관주의‘라는 뜻의 라틴어.
** ‘비관주의‘라는 뜻의 라틴어 - P58

"빌어먹을 놈의 초콜릿 사업이 결딴나게 생겼어." 내가 말했다. 나도 하품이 나왔다.
"다 잘될 거예요." 리다가 중얼거렸다. "그냥 좀 쉬어요."
"휴식이 아니라 삶의 변화가 필요해." 거짓 한숨을 내쉬며 내가 말했다.
"삶의 변화라." 리다가 말했다. - P60

"알아맞혀봐. 자, 첫번째 마디, 이건 프랑스어로 ‘덥다‘는 뜻이야. 두번째 마디는 튀르크인을 꽂아 죽이는 뾰족한 ‘말뚝‘이야. 세번째 마디, 이건 우리가 이르든 늦든 다다르게 될 곳이지. 이것들을 합한 게날 파멸로 이끌어."*
바스락 소리를 내며 자동차가 지나갔다.

*한 낱말을 여러 마디로 나눠 맞히는 낱말 수수께끼. 각 마디의 발음을 표기하면 쇼-콜-아트(지옥)이고, 전체 단어는 ‘쇼콜라‘, 곧 ‘초콜릿‘이다. - P60

"난 눈은 항상 마지막에 그려요." 아르달리온이 우쭐대며 말했다.
그는 팔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이제 그리기 시작한 초상화를 두고 고개를 이리 숙였다 저리 숙였다 했다. 그는 자주 와서 목탄으로 나를그리곤 했다. 우리는 보통 발코니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나는 시간이 남아돌았다. 그래서 짤막한 휴가 비슷한 뭔가를 궁리해냈다. - P62

내 삶은 온통 망가지고 꼬였다. 그런데도 난 여기에서 이 발랄한 묘사 한 토막과 이 친밀한 일인칭 복수와 여행자에게, 별장의 휴가객에게, 그림같이 어우러진 초목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이 눈길과노닥거리는 바보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독자여, 참으시게. 내가 지금 그대를 거닐게 하는 건 다 까닭이 있어서라네. - P64

나는 수차 이 단조로운 산책을 반복했다. 숲에서 단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오지(奧地). 정적. 호숫가 땅은 한 군데도 팔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사업 전체가 망해갔다. 그곳에 갈 때면 하루 종일 사람이라곤 우리 셋뿐이어서 원하면 발가벗고 수영해도 거리낄 게 없었다. - P65

자, 이제, 친애하는 독자여, 아무도 없는 건물 6층에 있는 조그마한 사무실을 상상해보자. 타이피스트는 떠났고 나 혼자다. 창에는 구름낀 하늘. 벽에는 달력. 어쩐지 황소의 혀를 닮은 거대한 검은색 숫자9. 9월 9일. 탁자 위에는 채권자들이 보낸 편지의 모습을 한 연이은걱정거리와 나를 배신한 라일락 부인이 그려진 초콜릿 상자, 상징적으로 비어 있다. 아무도 없다. 타자기의 덮개는 열려 있다. 정적. - P67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멍한 상태를 떨쳐냈다.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열쇠를 꺼내 죄다 잠그고 떠날 참이었다. 거의 벗어나려는 순간,
그러나 나는 복도에서 멈췄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떠날 수 없었다. 나는 되돌아갔다. 창가에 서서 건너편 집을 바라보았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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