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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목적지가 분명해 보였다. 특히 남자 쪽이 그랬다. 그는 툭 불거진 매부리코에 덥수룩한 수염이 눈에 띄는 백인이었는데, 배에서 내릴 때부터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아마 약도인 모양이었다. 꽤 믿음직스러운 정보인 듯했다. - P83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이내 큰길을 사이에 두고 그를따라 천천히 걸었다. 아마 연주가 알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말했다. 인천항에 도착한 외국인들은 신경쓰지말라고 그들은 늘 갈 곳이 정해져 있다고 했다. - P84
그애는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썼고 서슴없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생각해보면, 그애 역시 매혹되었던 것 같다. 나를 가르치는 일에 말이다.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을 테니까.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좋았겠지. 이제 그 친구는 세상에 없다. - P85
그녀도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올려 묶곤 했다. 물론 저 여자와 모습이 같지는 않았지만, 뭐랄까, 분위기가 묘하게 비슷했다. - P86
"하이!" 여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대답했다. "Hi." 그러자 남자도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었다. 목덜미의 열기가 온몸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나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아, 이제 어떻게 하지? - P87
남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남자의 말을 알아듣고 곧장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여자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녀는 남자의 그런 태도에 별로 불만이 없어 보였다. 무표정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순간 그녀에게 느꼈던 친근감이 아주빠르게 스르륵 사라졌던 것이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 P88
나는 재빨리 돌아섰다. 그들이 걸어가는 방향에는 대불호텔이있었다. 나는 그들을 눈으로 좇았다.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내 시야에 있었다. 나는 다시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남자가 쪽지를 든 손으로 저 앞 어딘가를 가리켰다. - P89
문 옆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던 뢰이한이 나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먼지투성이로 어디 부엌에 들어오느냐는 힐난이 눈빛에 가득 담겨 있었다. - P90
나는 금세 삼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도착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가파른 나무 계단이 삐걱댔다. 나는 소리쳤다. "연주야! 손님이야!"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낡아빠진 이 건물에서는 늘 소리가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울렸다. - P91
홀.
삼층에 올라서자마자 보이는 커다랗고 넓은 공간. 한때 그곳은사람들로 가득했다. 대불호텔을 찾은 이들의 사교장이었고, 중화루에서 가장 많은 손님을 수용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관리하기 힘든, 쓸데없이 넓은 공간에 불과했다. - P92
소문에 고연주가 중화루에 그렇게 오래 머무르고 있는 건 라이가문 누군가의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차오는 조금 결벽적인구석이 있는 남자라서 그 소문에 진저리를 냈다. 그는 아무리 버릴 물건이라 해도 중화루가 그런 추잡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원치 않았다. - P93
들어보니, 이 건물에서 고연주를 내보내려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뢰진한은 영업을 정리하며 고연주에게 나가달라는 말을 했다. 통역사를 두던 화려한 시절은 끝났던 것이다. 고연주는 당장 갈 곳이 없으니 중화루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부엌일이든 청소든 뭐라도 하겠다고 말이다. 그간의 정이 있는지라 뢰진한은 거절하지 못했다. - P94
차오는 웃으면서 뢰이한의 어깨에손을 올렸다. 그러더니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로 이렇게말했다. "너는 아버지를 닮았구나.‘ 차오는 거친 일을 대신할 사람들을 고용했다. 그들에게도 일이 생겼다. 한 명은 잠긴 문을 흔들다가 팔이 빠졌고, 다른 한 명은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머리가 아프다며 쓰러졌다. - P95
이후 차오는 연주를 내버려뒀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이 건물에 머물고 싶으면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95
연주가 화교의 첩실 노릇도 부족해 이제는 몸까지 팔려 든다고 말이다. 그리고 또 말했다.
"아이고, 귀신이 들러붙지 않고서야 저런 팔자는 없지."
나는 그 말을 종종 따라 하곤 했다.
저런 팔자는 없지. 저런 팔자는 없어.
어쨌든 연주의 사업은 나쁘지 않게 돌아갔다. 차오는 연주를 내좋지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머물게 하지도 못했다. 그에게 연주는 비쩍 마른 계륵이었다. - P97
(전략). 그날 저녁, 차오는 온갖 재료를공수해서 산둥 지방의 요리를 만들어 냈다.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헨드릭 하멜은 음식을 거의 다 남겼다. 대신 꽤 큰 돈을 지불하고갔다. 근래 차오가 벌어들인 돈 중 가장 거금이었다. 다음날 차오는 연주를 불러 말했다. "좀더 지켜보마 잘 유지해라."
그때부터다. 연주가 내게 부탁을 했다. 대불호텔의 호객을 도와달라고. - P98
한 사람에 백오십 환. 연주는 데려오는 사람 수만큼 값을 쳐줬고 별다른 흥정도 하려 들지 않았다. 돈을 번 날, 나는 당숙모 앞에서 당당했다. (중략). 안심하지 마. 더 긴장해. 1950년 9월 10일, 나는 부모님과 오빠, 그리고 언니까지 모든 가족을 잃었다. 그날, 마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폭격이 있었다. - P99
당숙은 아버지가 가장 가깝게 지낸 사촌형이었고, 월미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살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찾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진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뿐이다. - P100
(전략). 저년도 부역자의 딸이오. 지금고향에서 도망쳐 이 바닷가로 숨어들었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숙모를 찾아갔다. 아아, 나는 그때 고작 열다섯 살이었다.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전부란 겨우 그런 것이었다. 당숙모를 붙잡고 외치는 것. "숙모! 저 영현이예요. 저 기억하세요? 기억하시죠?"
그리고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뭐든 할게요. 뭐든지 할게요. - P101
이후 나는 늘 기억했다. 당숙모가 나를 거둬줬다는 사실을 삯바느질을 하고 떡을 팔며 홀로 네 아이를 키우는 여자가 먼 친척아이를 떠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비밀을 떠안아줬다는 사실을. 그걸 절대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 집안일을 하고, 바느질감을 나르고, 동생들을 돌보고, 시장에 나가 떡장사를 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 P102
우리의 관계는 동등했다. 그녀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을 때마다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어떤 불길한 씨앗이 훅 뽑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연주에게는 귀신이 붙었다고. 드센 팔자라고. 하지만 연주는 끝끝내 살아남았다. - P104
"Hi,"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자였다. 그녀가 나를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한 듯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하고서 곧장 연주의 눈치를 봤다. - P104
그날 연주와 여자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집에 돌아갈 무렵, 혹시 무슨 일 없었느냐는 나의 질문에 연주가 그렇게 대답했다. 이상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설명하기도 어려웠고,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래도 연주는 그 여자가 나에 대해 한 말은 전해줬다. "너랑 내가 많이 닮았대." - P106
다음날, 또다시 아침 일찍 나가려는데 갑자기 당숙모가 나를 불렀다. "영현아, 오늘도 손님이 없을 것 같니?" 은근히 떠보는 듯한 질문이 꺼림칙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며 당숙모의 눈치를 봤다. 그러자 당숙모가 때마침 잘됐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오늘 나가지 말렴. 이불 빨래가 밀렸다.‘ - P107
하지만 나는 당숙모가 시장에 일을 보러 나가자마자 곧장 선착장으로 갔다. 배들이 오가는 걸 한참 동안 쳐다봤다. 밀물과 썰물이 뒤바뀌는 걸 지켜봤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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