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우리의 생활이 그러하듯이, 우리 독일의 대학생활도 매우 중요한 점에서는 미국화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나이 많은 장인(匠人)이 자기 직업에서 그러했던 바와 같이, 직공I)이 노동수단(본질적으로는 장서)을 직접 소유하고 있는 학과들 - 나의 학과는 아직도 상당한 정도로 이러한 사정에 있습니다만 - 에서도 이러한 발전이 계속 진척될 것이라고나는 확신합니다. 이러한 발전이 완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 P14

이러한 종류의 대(大)자본주의적인 대학기업(Universitätsunternehmen)의우두머리와 낡은 스타일의 일반적인 교수 사이에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대단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내적인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을 자세하게 다루고 싶지 않습니다. - P15

 인간적인 약점은 다른 모든 선발의 경우에서와 같이 [대학에서의] 이러한 선발에서도 당연히 나타납니다. 그렇게도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대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정에 대해서 교수단이나 문교당국자들의 인격적인 결함에 그 책임을 지운다면, 그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 P16

교황선출에서 그 선례(先例)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와같은 종류의 인선(人選)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명백한 예입니다. ‘인기 있는 사람‘ 이라고 일컬어지는 추기경이 선출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 P16

대학의 어떤 교수도 자기가 임명될 때 벌어졌던 토론에 대해서 회상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토론이 유쾌했던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 P17

우리 나라의 대학들, 특히 작은 대학들은 서로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아주 우스꽝스러운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대학도시의 하숙집주인들은 천 명째의 학생이 오면 축제를 베풀어서 축하하며, 이천 명째의 학생이 오면 아주 기꺼이 횃불 행렬을 통해 축하합니다. 수강료의 수익은-이것은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만-바로 인접한 학과들에 ‘인기있는‘ [많은 학생들을 끓어모으는] 교수가 있다는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습니다. - P19

만약 어느 강사에 대해서 그가 교사로서는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다면, 설령 그가 세계 최고의 학자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에게는 대학에서의 사형선고나 거의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좋은 교사인지 아니면 좋지 않은 교사인지라는 문제는 학생 여러분들이 그에게 베풀어주는 출석수(出席數)로 대답되고 있습니다.  - P19

사실, 우리가 독일 대학의 전통에 따라서 대학에서 행해야 하는 학문훈련은 정신귀족적인(geistesaristokratische)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숨겨서는 안 됩니다.  - P20

학자라는 직업의 외적인 조건에 대해서 이 정도는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실제로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 즉 학문에대한 내적인 소명에 대해서 듣고 싶어 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 P22

. 학문과는 무관한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비웃음을 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정열, 아울러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하는 것을 보는 데에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는 저 확신이 없는 사람은 학문에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어떤 다른 일을 하십시오. 왜냐하면정열을 갖지 않고서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에게는 가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P23

그러나 정열이 아무리 많고 순수하며 깊다 하더라도, 그러한 정열만으로는 결과를 억지로라도 좀처럼 얻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 P23

오늘날 젊은이들 사이에 매우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은 학문이 모든 ‘혼(Seele)‘ 보다는 단지 냉정한 이해력만을 동반하면서 ‘공장에서 처럼 실험실이나 통계실에서 만들어지는 계산문제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 P24

 우리들의 가장 좋은 문제제기와 인식 중 많은 것은 바로 아마추어들 덕분에 얻은 것입니다. 아마추어가 전문가와 구별되는 점은 단지-헬름홀츠가 로베르트 마이어⁶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아마추어에게는 작업방법의 확고한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로서는 대개의 경우 착상의 의의를 사후검증하고 평가하거나 그 착상을 일관되게 전개시킬 수없다는 사실뿐입니다.


6 율리우스 로베르트 폰 마이어 (Julius Robert von Mayer. 1814~1878): 독일의 의사이자 물리학자.
- P25

어쨌든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은 모든 과학연구의 밑에 깔려 있는이러한 요행, 즉 ‘영감‘이 떠오르느냐 안 떠오르느냐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훌륭한 연구가이면서도 그 자신의 가치 있는 착상을 갖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은 학문에서만 그러하며, 예를 들어 [상점] 계산대에서는 사정이 실험실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잘못입니다.  - P26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학문상의 영감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우리들에게 숨겨진 운명에 달려 있습니다만, 또한 ‘천부적인 재능에도 달려 있습니다. 어쨌든 이 의심할 바 없는 진리때문은 아닙니다만, 매우 통속적인 생각이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아주 명백할 정도로 몇몇 우상을 떠받들게 하였습니다. - P27

존경하는 참석자 여러분! 학문 영역에서는 일에 완전히 헌신하는 사람만이 ‘인격‘이 있습니다. - P28

학문연구는 진보(Fortschritt)라는 흘러감 속에 얽매여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술 영역에는-그러한 의미의-진보가 없습니다. - P30

학문상의 모든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성취에 의해] ‘가‘ 되어 시대에 뒤떨어지기를 원합니다(will), 학문에 몸을 바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이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물론 학문상의 업적들이 그 예술적인 성질 때문에 ‘향유수단(Genußmittel)‘으로서 또는 연구를 위한 훈련수단으로서 오랫동안 변함없이 중요성을 지니는 경우도 있을 수있습니다. - P31

여기서 우리는 학문의 의미문제(Sinnproblem)에 당면합니다. 왜냐하면 [진보라는] 그러한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 별로 자명(自明)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결코 끝나지 않으며 또끝날 수도 없는 것을 사람들은 왜 하는 것입니까? - P31

학문의 진보는 우리가 몇천 년 전부터 복종해온 저 주지주의화과정(主義化過程, Intellektualisierungsprozeß)의 한 단편,
더욱이 가장 중요한 단편입니다. 그런데 이 주지주의화과정에 대해서는 오늘날 일반적으로는 아주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이 취해지고 있습니다. - P32

즉 그것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배워서 알 수 있다는것, 따라서 생활에 개입하는 그 어떤 힘도 근본적으로는 결코 신비하고 계산할 수 없는 힘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모든 사물은- 원칙적으로는 계산을 통해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거나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계의 탈주술화(Entzauberung der Welt)를 뜻합니다. - P34

 진보에 대한 헌신이 의미 있는 소명이 될 수 있을 만큼, ‘진보‘ 자체가 기술적인 것을 넘어선다고 인정할 수 있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반드시 제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학문에 대한 소명을 묻는 것, 요컨대 학문에 몸을 바치는 자에게 있어서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가아니라, 이미 다른 것을 묻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생활 전체속에서의 학문의 사명은 무엇이며 또 그것의 가치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 P36

그러면 오늘날에는 누가 학문에 대해 그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요? 특히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오히려 그 반대로 느끼고 있습니다. 즉 학문이라는 사유 구성물은 인위적인 추상들의 비실제적인 왕국이며, 이 인위적인 추상들은 그 마른 손으로 현실생활의 피와 활기를 낚아채려고 하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P37

 《국가론》에서의 플라톤의 열광적인 감격은 결국 모든 과학적 인식의 중대한 수단 중 그 하나의 의미가 당시에 처음으로 의식되어 발견되었다는사실에 의해 설명되는데, 그 수단이란 개념(Begriff)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의의는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드러났습니다. - P38

고대 그리스인의 이러한 발견 이외에 과학연구의 두 번째중대한 도구가 르네상스시대의 산물로서 나타났는데, 그것은 경험을 믿을 수 있게끔 검증하는 수단인 합리적인 실험이었습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경험과학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실험은 있었습니다. - P39

아니 반대로,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본성 그리고 이와 함께 자연 일반으로 되돌아가기위해서는 학문의 주지주의로부터 빠져나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진정한 예술에 도달하는 길로서의 학문은 어떻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비판할 필요도 없습니다-그러나 정밀 자연과학이 발생한 시대에는 과학에게서 더욱 많은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 P41

 특히 자연과학 쪽에 있는 몇몇 잘난척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누가 오늘날에 아직도 천문학이나 생리학, 물리학, 화학 등의 지식이 세계의 의미에 대해서 뭔가를 실로 조금이라도 가르쳐줄 수 있다고 믿고 있겠습니까? 설령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의미‘에 대해서 어떤 방법으로 그 단서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자연과학들은세계의 ‘의미‘와 같은 어떤 것이 있다는 믿음을 근본적으로 없애버리기에 적합합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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