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그나츠 예조베르의 『꿈의 책』에 실린 꿈들


꿈을 꾸고 사나흘이 지난 지금까지 자꾸 생각나는 꿈이 있다. 캄캄해지기 직전 어스름 속에서 내 앞으로 시골길이 나 있었다. 양쪽으로 키 큰 나무들이 서 있었고 그 오른쪽으로 높은 벽이 세워져 있었다. - P48

학생 혁명이 일어나는 꿈을 꾸었다. 거기서 슈테른하임*이 모종의 역할을 수행했고, 나중에 그가 그것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 보고서의 한 문장이 한 글자 한 글자눈에 들어왔다.

*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독일에서 활동한 표현주의 극작가이자 단편소설 작가. - P49

8. 너무나 가까운

(전략). 그런 그리움은 왜 생기는 것일까? 내가 그리워한 대상은 왜그렇게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 있었던 것일까?
답: 꿈에서 내가 그 대상에 너무 가까이 가 있었기 때문에. - P51

. 상상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 사이의 문턱을 이미 넘어서 있는 그리움. 그런 그리움은이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 뿐이다. - P51

10

꿈꾸는 사람의 자화상들


손자

할머니 댁 방문 일정이 잡혀 있었다. 합승마차를 타고갔다. 저녁이었다. 마차 창문으로 불빛이 보였다. 베스텐 구시가 몇몇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었다. 이것은 그 시절 불빛인데 여전하네.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 P57

 도넛 모양의 구름 덩어리를 지붕들이 가리고 있었다. 그 구름들로 생각을 옮겨가려던 나는 그 구름들이 나를 "달"
이라고 불러서 깜짝 놀랐다. - P57

관찰자

어느 대도시의 언덕 위 로마 시대의 아레나. 밤이다. 마차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데, 경기는 그리스도와 관련돼있다. (어두운 의식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꿈의 한가운데 메타*가 서 있다.


* 콜로세움 옆에 세워져 있는 분수 건축물 메타 수단스를 가리키는 듯하다. - P58

전차는 쌩하니가버리고, 내 앞에는 난데없이 그녀의 친구가 서 있다.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그 얼굴의 흉악한 인상은 웃음을 참는 표정 때문에 도드라진다. 그가 들어 올린 두손에는 작은 막대기가 들려 있다. 그는 "나는 네가 선지자 다니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과 함께 내 머리 위에서 막대기를 깨부순다. 그러자 나는 맹인이 되었다. - P59

구애자

나는 여자 친구와 함께 야외에 나와 등산 겸 산책 겸 거닐고 있었다. 산봉우리에 가까워질 즈음이었다. - P60

사랑하는 여자 친구에게 입을 맞추려고 몸을 그렸다.
그녀는 나에게 입 대신 뺨을 내밀었다. 뺨이 상아 재질이라는 것, 뺨 전체에 검은 선들이 정교하게 돋을새김되어 있다는 것을 입을 맞추는 동안 알아차렸다. 나는그 도드라진 선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 P60

비밀 엄수자

(전략). 나는 길 없는 가파른 비탈을 올라 인적 없는 큰길 앞에 섰다. 음산하고 쇠잔한 북유럽 전나무 숲속에 난 넓은 길이었다. 나는 길을 가로질러 건넌 다음 뒤를 돌아보았다. 사슴 같기도하고 토끼 같기도 한 무언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나는 개의치 않고 곧장 앞쪽으로 갔다. 나는 그곳 포시타노를 알고 있었다.  - P63

(전략). 아주 야트막한 높이에서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이어 엄청나게 큰 뿔 두 개가 나 있는 거대한 소를발견해 겁에 질렸다. 내가 두 동물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 두 동물은 이미 철책 구멍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철책에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구멍이 나 있었던 것이다. - P64

연감 편찬자

황제가 법정에 올라섰다. 무대 위에 놓인 탁자 하나가전부인 법정이었다. 이 탁자 앞에서 증인 심문이 이루어졌다. 이번 증인은 아이를 동반한 여자였다. - P64

#출처: Walter Benjamin, Träume, Herausgegeben von Burkhardt Lindner, Frankfurt am Main: Suhrkamp, 2008. 이 글들은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IV, 420-425쪽에도 실려 있는데, Träume에 수록된 버전과는 약간 다르다. 전집 편집진에 따르면, 벤야민은 꿈 이야기들을 발표용 글로 만들어낼 때 여러 해에 걸쳐 쓴 여러 권의 공책을 토대로 삼았다고 한다. 같은 글을 각각 다른 버전으로 각각 다른 지면에 게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관찰자」와 「비밀 엄수자」는 이그나츠 예조베르의 「꿈의 책』에도 실린 바 있다. 한편 「구애자」는 이비사 연작‘에 속한 단편으로 처음 나왔고, 「연감 편찬자는 1932년 이비사에서 집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손자」 집필 역시 벤야민이 유년시절 기억을 짜맞추기 시작한 1932년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벤야민은 이 꿈 이야기들을 프라하에서 발행되던 저널 <더 월드 인워즈>에 보낸 적도 있었지만, 그 원고는 "저널 폐간"이라는 소인과 함께 반송되었다. 이 중 「식자」와 「연감 편찬자」는 1934년에 ‘장난감으로 허영 채우기‘라는 제목으로 취리히에서 발행하는 일간지 <데어외펜틀리헤 던스트>에 게재되기도 했다. - P65

12

꿈2

베를린이었다. 나는 알아보기가 지극히 어려운 소녀들과 함께 승합마차에 타고 있었다. 문득 하늘이 어두워졌다. "소돔이야." 할머니 모자를 쓴 성숙한 연령대의숙녀가(그녀는 갑자기 마차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말했다. 우리는 여차저차해서 기차역 구내에 진입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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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육군 군의관을 지낸 존 H. 왓슨의 회상


나는 1878년, 런던 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육군이 정한 외과의사 교육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네틀리로 갔다. 교육이 끝난 뒤에 나는 부외과의사로 노섬버랜드 제5보병 연대에 정식으로 배속되었다. 당시 연대는 인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내가 부임하기도 전에 제2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 P9

 내가 너무 쇠약하고 수척해진 것을 보고 의무국에서는 당장 나를 본국으로 송환하기로 결정했다.
(중략).
영국에 피붙이라곤 없었으므로 나는 공기처럼 자유로웠다. 아니 하루 11실링 6펜스의 수입이 한 사내에게 허용하는 만큼만 자유로웠다. - P11

스탬포드 군은 나의 불운에 관한 얘기를 들은 뒤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하숙을 구할 생각이네」
나는 대답했다.
「적당한 비용으로 편안한 숙소를 얻으려고 지금 알아보고있는 중이지」
「거참 이상한 일이군요」옛 친구가 대답했다.
「오늘 누가 제 앞에서 바로 그런 얘기를 했거든요」 - P12

스탬포드 군은 포도주 잔 너머로 나를 쳐다보았는데 그 눈길이 다소 야릇하게 느껴졌다. 그가 말했다.
「박사님은 셜록 홈즈를 잘 모르시는데, 같이 살게 되면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실 겁니다」
「왜, 그 사람한테 뭐 안 좋은 점이라도 있나?」
「아, 그 친구한테 무슨 나쁜 점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게 약간 괴상하고 과학의 광신자이지요. 사람됨은 점잖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P13

홀본을 나와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을 향해 가는 동안, 스탬포드는 내가 동거인으로 낙점한 신사에 대한 얘기를 몇 가지 더 늘어놓았다.
「그 친구와 잘 지내지 못하더라도 저를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 P14

스탬포드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보기에 홈즈의 학구열은 다소 과한 데가 있습니다. 그게 거의 냉혈한에 가까운 수준이 되니까요. 그는 최근에 발견된 알칼로이드(식물체 속에 들어 있는 질소를 함유한 염기성 유기 화합물의 총칭. 동물에 대해 특이하고 강력한 생리 작용을 가지는 것들이 많은데 약리 작용과 함께 독 작용도 일으킨다 옮긴이)를 서슴지 않고 친구에게 투여할 위인입니다. 무슨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약효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순수한 탐구 정신에서 말이지요. 물론 공정하게 말하자면 자기 자신한테도 똑같은 행동을 할 거라는 얘기를 덧붙여야 할겁니다. 그 친구는 명확하고 엄밀한 지식에 굶주려 있는 것 같습니다」 - P15

「예, 사체에 멍이 얼마나 많이 생길 수 있는지 확인하기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그 친구가 그런 짓을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의대생이 아니라고?」
「예. 그 친구의 연구 목표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다 왔으니까 박사님이 직접 보고 판단하십시오」 - P16

그는 시험관을 든 채 이쪽으로 달려오며 스탬포드 군을 향해 소리 질렀다.
「나는 혈액 속의 헤모글로빈에 의해서만 침전되는 시약을발견했소이다」
설령 금맥을 찾아냈다 해도 이처럼 기뻐할 순 없을 것이다.
「왓슨 박사님, 이쪽이 셜록 홈즈 씨입니다」
(중략).
그는 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인사하며 내 손을 쥐었는데 그의 손아귀 힘이 만만치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다가 오셨군요」 - P17

「범죄 수사는 어느 한 지점에서 매번 벽에 부닥치곤 했습니다. 누군가 용의선상에 떠오르는 것은 사건이 일어난 지몇 달 뒤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용의자의 이불과 옷을 조사해보니 갈색 얼룩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핏자국일까요 흙탕물 자국일까요, 아니면 녹물이나 과즙 얼룩일까요? 바로 이것이 수많은 수사관들을 괴롭혀온 문제입니다. 왜냐? 믿을 만한 검사법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셜록 홈즈검사법이 탄생했으니 문제는 해결된 겁니다」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 P19

셜록 홈즈는 나와 하숙집을 같이 쓴다는 생각에 내심 흐뭇한 눈치였다. 그가 말했다.
「나는 베이커가의 2층 독채를 봐놨습니다. 우리한테 꼭 맞을 만한 집이지요. 혹시 독한 담배 연기를 싫어하시는지요?」
「제가 늘 <십스>를 피우는 형편인걸요」
나는 대답했다.
「그것 참 잘됐군요. 그런데 나는 화학 약품을 집에 갖다놓고 이따금씩 실험도 한답니다. 그것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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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택적 집행

정부는 법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 ‘법을 적용함으로써 정적을 처벌할 수 있다.⁹¹ - P85

91 Daniel Brinks, Steven Levitsky, and María Victoria Murillo, UnderstandingInstitutional Weakness: Power and Design in Latin American Institutions (New York: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 P385

블라디미르 푸틴은 선택적 법 집행의 대가다. (중략). 권력의 자리에 오른 지두 달밖에 되지 않았던 2000년 7월, 푸틴은 러시아의 주요 올리가르히oligarch 21명을 크렘린궁 회의실로 불러들였다.⁹⁴ (중략). 그러나 보리스 베레좁스키 Boris Berezovsky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소유했던 TV 방송국은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를 이어나갔고, 그는 결국 처벌받았다. 베레좁스키는 언론사를 빼앗겼고, 사기와 횡령 혐의로 결국 망명길에 올랐다. - P87

94 Marshall I., Goldman, Petrostate: Putin, Power, and the New Russia (Oxford: OxfordUniversity Press, 2008), pp.102-3. - P385

4. 법률전쟁

마지막으로 정치인들은 공정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정적을 겨냥한 ‘새로운‘ 법을 만들기도 한다. 이를 일컬어 법률전쟁 aware 이라고 부른다.⁹⁷ - P87

97 이 정의는 법률 제도를 동원하여 정적을 공격한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널리사용되는 표현을 다듬은 것이다. - P385

헝가리의 합법적인 독재

21세기의 독재 정권 대부분이 헌법적 강경 태도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들은 합리적으로 보이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민주주의를 점차 후퇴시킨다. 즉, 표면적으로 선거의 투명성을 높이고, 부패를 척결하고, 효율적인 사법부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법안과 기존 법률을 재해석하는 법원 판결, 그리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지만 그들에게 유리하게 재발견해낸 법률을 동원한다. 이러한 방법은 법률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는다. - P89

헌법적 강경 태도를 기반으로 삼은 독재 정권에 대한 대표적 사례로, 빅토르 오르반 Viktor Orbán 의 헝가리를 꼽을 수 있다. - P89

그러나 오르반이 말했듯이 "정치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¹⁰² 경쟁 정당인 헝가리 사회당이 스캔들 여파로 지지를 잃어버리자 피데스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사회주의자 총리가 유권자들에게 경제 상태와 관련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인정하는 테이프가 나온 것이다. - P90

102 Paul Lendvai, Orbán: Europe‘s New Strongma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p.149 - P386

오르반은 자신의 당이 차지한 압도적 과반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정적들에 대한 불공정한 경쟁 우위를 확보했다. 그의 첫 행보 중 하나는 사법부 장악이었다.(중략).  그리고 또 다른 헌법 수정을 통해서 헌법재판소 판사 수를 11명에서 15명으로 늘렸고, 이로 인해 생긴 네 자리를 측근으로 메웠다.¹⁰⁶ - P91

105 Miklós Bánkuti, Gábor Halmai, and Kim Lane Scheppele, "Hungary‘s IlliberalTurn: Disabling the Constitution", Journal of Democracy, 23, no. 3 (July 2012), p.140 - P386

 그다음, 오르반은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가던 대법원장 안드라스 바카Andras Baka를 자리에서 물러나게만들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대법원장이 되기 위해서는헝가리 내에서 사법부 경력이 5년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자격 조건을 새롭게 요구한 법률이었다. (중략). 바카는 유럽 인권재판소 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 에서 17년간 근무한 권위 있는 판사였지만 헝가리 내에서 판사 경력은 5년이 되지 않았다. 결국 바카는 물러나야 했다.¹⁰⁷ - P91

107 Paul Lendvai, Hungary: Between Democracy and Authoritarianism (New York:Columbia University Press, 2012), p.222. - P386

2013년에 헝가리 사법부는 포획되었고 "정권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말았다.¹¹⁰ 한 헌법재판소 판사는 오르반이 "합헌의 허울을 쓰고 헌법적 방안을 동원하여 (…) 위헌적인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말했다.¹¹¹ - P92

110 Bozóki and Simon, "Two Faces of Hungary", p.231.
111 Lendvai, Orbán, p.110. - P386

(전략).
또한 오르반은 합법적으로 ‘민영 언론‘도 장악했다. 피데스 정권은 음지에서 일을 하면서 비즈니스 세상에서 활동하는 오르반 측근들이 주요 언론 매체를 사들이거나 독립적인 언론 매체를 소유한 모기업의 경영권을 차지하도록 도움을 줬다. 오르반을 지지하는 새로운 언론 소유주들은 독립적인 언론이 자기검열을하도록 압박을 가했고, 몇몇의 경우 완전히 문을 닫기도 했다.¹¹⁵ - P92

115 Lendvai, Orbán, pp.158-63. - P386

2010년에 제정된 법률은 "편파적"이고 "모욕적"인, 혹은 "공중도덕"에 반하는 기사의 보도를 금지했다. 그 새로운 법률을 위반할 경우, 최대 90만 달러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피데스정권은 이 법률을 집행하기 위해 충직한 인물들로 언론위원회를 설립했다.¹¹⁸ - P93

118 Bánkuti, Halmai, and Scheppele, "Hungary‘s Illiberal Turn", p.140: Lendvai,
Orbán, p.115; U.S. Department of State, "Hungary 2013 Human Rights Report", p.25; "Hungary: Media Law Endangers Press Freedom". - P387

마지막으로 오르반 정권은 헌법적 강경 태도를 바탕으로 선거의 운동장을 기울였다. 가장 먼저, 그들은 선거관리위원회를 장악했다. (중략). 그러나 피데스는 이러한 관행을 깨고 나머지 다섯 개 자리 역시 그들에게 충직한 인물로 채웠다. 그렇게 피데스는 선거관리위원회 다수를 기반으로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¹²⁶ - P94

126 Lendvai, Orbán, pp.129-30; Dylan Difford, "How Do Elections Work inHungary?", Electoral Reform Society, April 1, 2022. - P387

이러한 모든 시도는 효과를 드러냈다. 2014년 선거에서 피데스는 2010년과 비교해서 60만 표를 잃었다. 그들이 보통선거에서 차지한 득표율은 53퍼센트에서 45퍼센트로 하락했다.¹³¹ 그럼에도피데스는 2010년과 동일한 수의 의석을 차지했다. 즉, 투표에서 과반을 얻지 못했음에도 의회 2/3 의석을 그대로 유지했다. - P95

131 Lendvai, Orbán, p.128. - P387

빅토르 오르반은 놀라운 업적을 일궈냈다. 그는 완전히 성숙한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거의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서 그렇게 했다. 어떠한 유혈 사태도, 대규모 체포도, 정치적 수감이나 추방도 없었다. - P95

4장


왜 공화당은
민주주의를
저버렸나

(전략).
당시 주요한 정치인 중에는 중서부 지역의 보수주의자이자 하원 법사위원회 간부인 오하이오주 공화당 하원 의원 윌리엄 맥컬록 William McCulloch이 있었다. 오하이오주 노예제 폐지론자의 후손인 맥컬록은 1964년 시민권법을 지지했다. 그가 이끄는 공화당의 하원의원들 중 80퍼센트가 시민권법 관련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민주당 하원 의원 61퍼센트의 찬성과 함께).² - P138

4장 왜 공화당은 민주주의를 저버렸나


2 Geoffrey M. Kabaservice, Rule and Ruin: The Downfall of Moderation and theDestruction of the Republican Party, from Eisenhower to the Tea Party (Oxford:Oxford University Press, 2012), p.100. - P395

그러나 그로부터 60년 후, 공화당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1965년 투표권법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바로 그 정당이 2021년에는 그 법을 복구하기 위한 연방 차원의 입법 시도를 만장일치로 거부했다.⁵ - P139

5 공화당 보수주의자들은 이전 투표권법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예를 들어 1970년에닉슨 행정부는 투표권법의 핵심인 5항을 폐지하고자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AriBerman, Give Us the Ballot: The Modern Struggle for Voting Rights in America (New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15). - P395

미국의 공화당은 수십 년간 영국의 보수당이나 캐나다의 보수당, 혹은 독일의 기독민주당처럼 주류 중도 우파 정당이었다. 공화당 지도부는 전반적으로 민주주의를 향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그렇지 않았다.
전 세계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 V-Dem(Vari-eties of Democracy) Institute는 전 세계 주요 정당들을 대상으로 매년 반자유주의 liberalism" 점수를 발표한다.⁸ (중략). 미국의 공화당도 그랬다. 적어도 1990년대 말까지는 말이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공화당의반자유주의 점수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 P139

8 Anna Luhrmann et al., "New Global Data on Political Parties: V-Party", V-DemInstitute Briefing Paper No. 9, Oct. 26, 2020, pp.1-2. - P395

왜 공화당은 다른 길로 나아갔던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미국의 민주주의에 무엇을 의미하는가?¹⁰ - P140

10 이 질문에 관한 중요한 저서는 다음과 같다. Daniel Schlozman, When MovementsAnchor Parties: Electoral Alignments in American History (Princeton, N.J.: PrincetonUniversity Press, 2015); E. J. Dionne, Why the Right Went Wrong: Conservatism—from Goldwater to Trump and Beyond(New York: Simon & Schuster, 2016); ThedaSkocpol and Vanessa Williamson, The Tea Party and the Remaking of RepublicanConservativ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6); Sam Rosenfeld,
The Polarizers: Postwar Architects of Our Partisan Era (Princeton, N.J.: PrincetonUniversity Press, 2017); Jacob Hacker and Paul Pierson, Let Them Eat Tweets: Howthe Right Rules in an Age of Extreme Inequality (New York: W. W. Norton, 2020). - P395

증오의 표밭이 된 남부

역설적이게도 공화당의 전환은 그들이 구축하고자 했던 다인종 민주주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의 전환은 하룻밤 새 이뤄진 것이 아니다. 20세기 전반에 공화당은 북동부 지역의 제조업 이해관계자, 중서부 지역의 농부, 소도시 보수주의자, 남부 이외 지역의 백인 기독교 유권자와 더불어 기업과 부자를 대변하는 정당이었다.¹¹ - P140

11 Lewis L. Gould, The Republicans: A History of the Grand Old Party (Oxford: OxfordUniversity Press, 2014); Heather Cox Richardson, To Make Men Free: A History ofthe Republican Party (New York: Basic Books, 2014). - P395

공화당은 이제 보수 정당들이 역사적으로 직면했던 똑같은 "보수주의 딜레마"에 직면했다.¹⁴ 즉, 그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주요 유권자 집단의 이해관계와 영향력, - P141

14 Ziblatt, Conservative Parties and the Birth of Democracy, pp.33-37: Hacker and Pierson, Let Them Eat Tweets, p.21. - P396

공화당 지도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남부 지역에 집중했다.¹⁵ 재건 시대 정당인 공화당은 20세기 중반에는 짐 크로의 남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남부 지역의 두 역사가가 지적한 것처럼, "공화당"이라는 용어는 여전히남부에서 "저주의 말"로 통했다.¹⁶ - P141

15 Eric Schickler, Racial Realignment: The Transformation of American Liberalism,
1932-1965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6), pp.252-53; BorisHeersink and Jeffrey A. Jenkins, Republican Party Politics and the American South,
1865-1968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pp. 163-76:Sam Rosenfeld, The Polarizers: Postwar Architects of Our Partisan Era (Chicago: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7), pp.70-89.

16 Black and Black, Rise of Southern Republicans, p.57. - P396

(전략). 이는 "평둥을당연하게 여기는 정책에서 소외된, 그리고 분노와 혐오를 느끼는 남부 지역의 백인들을 끌어 모으고 [소수] 집단을 위해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고자 했던 공화당의 10년에 걸친 장기 전략이었다.²⁶ - P144

26 Angie Maxwell and Todd G. Shields, The Long Southern Strategy: How ChasingWhite Voters in the South Changed American Politics (New York: Oxford UniversityPress, 2019), p.8. - P396

공화당이 그 전략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때는 시민권법의 해인 1964년이었다. 공화당 하원 의원 대부분이 시민권법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강력한 세력이 흐름을 다른 방향으로 몰아갔다.²⁷ 그 세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인물은 배리 골드워터 Barry Goldwater 상원 의원으로, 그는 1964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이기도 했다. - P144

27 Schickler, Racial Realignment, pp.237-38. - P396

시민권 혁명은 미국의 정당 시스템을 크게 흔들었다.³⁰ 1964년 이후로 민주당은 시민권 정당을 자처하면서 흑인 유권자 다수를 끌어들였다. 반면 공화당은 점차 인종적 보수주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전통적인 인종적 수직체계의 해체에 반대하는 유권자를 끌어들였다. - P145

30 Edward G. Carmines and James A. Stimson, Issue Evolution: Race and theTransformation of American Politics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9), pp.38-39, 164-66; Donald R. Kinder and Lynn M. Sanders, Divided byColor: Racial Politics and Democratic Ideal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pp.206-7. - P397

공화당은 이처럼 인종적 보수주의를 취함으로써 선거에서 이득을 얻었다. 1960년대에 백인은 미국 인구에서 거의 90퍼센트를 차지했다. 당시 공공 여론조사 결과는 북부와 남부 모두에서 백인들 상당수가 시민권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보여줬다.³² - P145

32 Klinkner, Unsteady March, p.275. - P397

시민권에 대한 백인들의 반발이 거세지는 가운데, 전략가 케빈필립스 Kevin Phillips가 언급했던 신흥 공화당 다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³⁶ 필립스는 인종적으로 분열된, 그리고 여전히 백인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사회에서 공화당이 "민주당을 ‘흑인 정당‘으로 낙인찍고 남부 지역의 인종적 전통의 수호자로 [스스로를]내세운다면" 다수의 지위를 다시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¾⁷ - P146

36 Black and Black, Rise of Southern Republicans, p.205: Kevin Phillips, The EmergingRepublican Majority (New Rochelle, NY.: Arlington House, 1969).

37 Sundquist, Dynamics of the Party System, pp.364-65. - P397

주로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는1980년까지도 정치적 고향이 없었다.⁴⁵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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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2월 6일 오후¹, 주로 재향군인회와 우파민병대 ("연맹 league"이라고도 하는), 청년애국단, 프랑스행동, 크루아드푀 Croix deFeu(불의 십자가) 같은 단체 회원들로 구성된 수만 명의 분노한 젊은 남성들이 강건너 프랑스 국회의사당과 마주한 유명한 콩코르드 광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² 이념과 목표는 달랐지만 그들은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 뭉쳤다. - P56

2장 독재의 평범성


1 프랑스의 1934년 2월 6일 사건과 미국의 2021년 1월 6일 사건에 대한 비교는 다John Ganz, Feb 6 1934/Jan 6 2021: What Do the Two Events ReallyHave in Common?", Unpopular Front, July 15, 2021, johnganz.substack.com/p/feb-6-1934jan-6-2021: , Baptiste Roger-Lacan, "Le 6 février de DonaldTrump, Le Grand Continent, Jan. 7, 2021.

2William Irvine, French Conservatism in Crisis: The Republican Federation ofFrance in the 1930s (Baton Rouge: Louisiana State University Press, 1979), p.105. - P381

프랑스 민주주의는 1934년 2월 6일 폭동으로 무너지는 않았다. 그러나 치명타를 입었다. - P57

많은 프랑스 정치인은 그 폭동에 분노를 표출했다. 온건한 보수주의자 알베르 르브룅Albert Lebrun 대통령은 시위를 "공화국 제도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난했다.¹³ 좌파 정당(사회당과 공산당)과 중도 진보 정당(급진당) 또한 거센 비난에 합류했다.¹⁴ - P58

13 Shirer, Collapse of the Third Republic, pp.226, 954(n16).
14 이 협력은 좌파 성향의 인민전선 정부(1936-1938) 수립을 위한 근간이 되었Julian Jackson, The Popular Front in France: Defending Democracy, 1934-1938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 P381

반면 프랑스의 주요 보수주의 정당인 공화연맹당Fédération répub-licaine 은 놀랍게도 극단주의 집단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봤다. 1903년에 설립된 공화연맹당은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알려진 루이 마랭 Louis Marin이 오랫동안 이끈 정당이었다.¹⁵ - P58

15 Irvine, French Conservativism in Crisis, p.100. - P381

공화연맹당 의원 중 35명 이상이 청년애국단으로 활동했다.¹⁶ 그리고 청년애국단 지도부 세 명은 동시에 공화연맹당 지도부로 활동했다. - P59

16  Irvine, French Conservativism in Crisis, pp.107-108. - P381

폭동이 끝나고 여러 유명 보수주의자들은 그 사건을 가볍게 치부하거나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2월 6일의 의미"에 대한 정의는이제 많은 것이 걸린 정치적 싸움이 되었다.²¹ - P60

21 Jenkins and Millington, France and Fascism, p.136-148 - P382

또한 주류 보수주의 정치인과 언론 매체 대부분은 사실과 완전히 다른 설명을 내놨다. 그들은 시위자들이 부패와 공산주의, 정치적 교착 상태로부터 공화국을 구하고자 했던 영웅적인 애국자라고 주장했다.²³ 그리고 폭력에 대해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경찰이라고 말했다.²⁴ - P60

23 Irvine, French Conservatism in Crisis, pp. 117-18; Jenkins and Millington, Franceand Fascism, p.132.
24 Jenkins and Millington, France and Fascism, pp.131-33. - P382

2월 6일 폭동을 지지하고 공개적으로 옹호했던 프랑스 보수주의자들은 그 사건에 대한 공식 수사를 방해하고자 했다. 폭동 이후로 구성된 44인의 ‘의회조사위원회commission d‘enquéte‘는 인터뷰와 증언, 경찰 서류 및 다양한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정보를 담은 수천 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내놨다. 조사위원회는 의회내 정당의 의석수를 기준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우파의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 P61

. 언론계 소문과 고발로부터 정보를얻은 이들은 사실을 파헤치려는 위원회 활동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다. 이들 위원은 폭동을 일으킨 이들의 진실성을 입증하고 그들을 희생자로 인정하는 표현을 보고서에 포함시키고자 했으며, 의회와 경찰에 대해 많은 비난을 쏟아냈다.²⁸ - P61

28 Rapport général: Evénements du 6 février 1934 procès verbaux de la commission, p.2820. - P382

 조사위원회 위원장이 지금까지 확인한 내용을 공개했을때, 공화연맹당의 한 주요 위원은 이에 대한 비난을 주도했다. 그는 발표 내용을 공식적으로 부인하면서 시위자들은 "숭고"한 이들이었고 정부와 경찰이 잘못을 저질렀으며 의회에 침입하려고했던 모든 이들에 대한 체포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식으로 사건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내놨다. 결국 공화연맹당 의원들 모두 위원회에서 사퇴했다.³⁰ - P62

30 Rapport général: Evénements du 6 février 1934 procès verbaux de la commission, p.2839-40 - P382

그렇게 나온 조사위원회 보고서에는 알맹이가 빠져 있었다. 2월 6일 사건에 대한 아무런 해명이 없는 상태에서 프랑스 민주주의는 힘을 잃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 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 P62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


(전략).
민주주의에 헌신적인 정치인들, 혹은 정치학자 후안 린츠Juan Linz가 충직한 민주주의자oyal democrat 라고 부른 사람들은 언제나 세가지 기본적인 행동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³¹ 첫째, 승패를 떠나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³² (중략). 둘째, 민주주의자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혹은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을 사용하는 전략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 P63

31 Juan Linz, The Breakdown of Democratic Regimes(Baltimore: Johns HopkinsUniversity Press, 1978), pp.58-64.

32 민주주의 사회에서 패배의 중요성에 관한 좀 더 깊이 있는 논의는 다음을 참조.
Jan-Werner Müller, Democracy Rules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21),
- P382

충직한 민주주의자에게 요구되는 또 하나의 미묘한 원칙이 있다. 그것은 반민주주의 세력과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것이다. (중략). 린츠는 이들을 가리켜
"표면적으로 충직한semi-loyal" 민주주의자라고 불렀다.³³ - P63

33 Linz, Breakdown of Democratic Regimes. - P382

 표면적으로 충직한 정치인은 민주주의가 무너지는과정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지만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³⁴ 충직한 민주주의자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을 일관적이고 확고하게 거부하는 데 반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다소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 즉,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폭력이나 반민주적 극단주의에 눈을 감는다. - P64

33 Linz, Breakdown of Democratic Regimes, p.38 - P382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서 네 가지 기본 원칙을 따른다. 첫째, 그들은 당의 주류에 반대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내쫓으려고 한다‘. - P65

둘째,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반민주적인 행동에 관여한 연합단체와 모든 관계를 정치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끊는다. 그리고 이들 단체와 협력을 중단할 뿐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또한 공식 석상에 그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 P66

셋째,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연합을 형성했거나 이념적으로 가까운 단체가 관여한 상황에서도 ‘정치적 폭력과 다양한 반민주적 행동을 확실하게 비판한다. 극단적인 양극화나 위기의 시기에는 반민주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얻을수 있다. - P66

반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연합 단체의 폭력적이거나 반민주적인 행동을 부인하거나 과소평가한다. 그들은 오로지 "위장 전술"의 차원에서 폭력을 비난한다. - P67

마지막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를 고립시키거나 물리치기 위해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경쟁 정당과 손을 잡는다‘.³⁸ - P67

38 Linz, Breakdown of Democratic Regimes, p.37. - P382

충직한 민주주의자가 되기 위한 이러한 원칙은 간단하고 쉬워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당 지지자 상당수가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에 동조하는 상황에서 정당 지도자들이 이들 극단주의자를 비난하거나 관계를 끊을 때,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럼에도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그렇게 한다. - P68

극단주의자 두둔하기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의 행동은 대개 별문제가 없어보인다. 어쨌든 일반적으로 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은 덕망 있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 P72

가장 먼저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반민주 세력을비호한다.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이 주류 정당으로부터 암묵적인 지지를 받을 때, 그들은 법적으로 처벌을 받거나 공직에서쫓겨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 P73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보호하는 선에서 멈추지 않고 이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 P74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에 걸쳐 있는 정치인들이 폭력적이거나 반민주적인 행동을 거부할 때, 극단주의자들은 고립되고, 힘을 잃고, 포기한다. - P75

 그러나 주류 정당이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암묵적으로 지지할 때, 이는 반민주적인 행동에 따른 처벌 수위가 낮아졌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다. 그들에 대한 억제는 사라진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 세력을 정당화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더 급진적으로 만들기도한다.
이것이 바로 독재의 평범성banality of authoritarianism이 의미하는 바다.⁶⁵ - P76

65.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 A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1963: London: Penguin, 2006). - P384

법을 무기로 활용하는 네 가지 방법

주류 정치인들은 반민주적 극단주의를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어줌으로써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리는 데 동참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다른 방식으로도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 그것은 바로 ‘헌법적 강경 태도 constitutional hardball‘를 통해서다.⁶⁶ 그들은 헌법을 거시적인 차원에서 따르지만 그 정신을 교묘하게 훼손시킨다. - P77

66 "헌법적 강경 태도"는 헌법학자 마크 투쉬넷Mark Tushnet이 만든 용어다. MarkTushnet, "Constitutional Hardball", John Marshall Law Review 37 (2004), pp.523-54., Steven Levitsky and Daniel Ziblatt, How Democracies Die(New York:Crown, 2018 참조. - P384

. 정치인들은 노골적으로 법을 어기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 P77

67 학자들은 "전제적 법률주의 autocratic legalism"라는 용어를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 Javier Corrales, "Autocratic Legalism in Venezuela", Journal of Democracy26, no.2 (April 2015), pp.37-51: Kim Lane Scheppele, "Autocratic Legalism", University of Chicago Law Review 85, no.2, art.2(2018). - P384

1. 허점을 이용하기

어떠한 법이나 법률 체계도 모든 우발적인 사건을 다루지는 못한다. 기존의 법과 절차를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상황은 언제나 존재한다. (얼마나 부적절하든간에) 어떤 행동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더라도 얼마든지 그 행동을 허용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 P78

정치인들은 종종 법망의 허점을 계속해서 이용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약화시킨다. 한 가지 사례로, 2016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안토닌 스칼리아Antonin Scalia 대법관의 사망으로 연방대법원의 새로운 대법관을 임명하고자 했을 때 상원이 거부한 것을 들 수 있다. (중략). 연방대법원 공석을 메우기 위한 대통령 권한을 부정했던 것은 명백하게도 헌법 정신을훼손한 행위였다. 이로써 공화당 상원 의원들이 연방대법원 공석을 빼앗았다(2017년 도널드 트럼프는 닐 고서치 Nell Gorsuch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하지만 미국 헌법에는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을 상원이 ‘언제‘ 승인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화당은 합법적으로 그 자리를 훔칠 수 있었다. - P79

2. 과도하거나 부당한 법의 사용

어떤 법은 자제해서 사용하도록, 혹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적용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러한 법은 특별한 권한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인내심을 발휘하거나 스스로 자제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중략).
혹은 탄핵을 생각해보자. 대통령제 민주주의하에서 헌법은 일반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는 권한을 입법부에게부여한다. 동시에 그러한 권한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인식을 요구한다. - P80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는 권한은 얼마든지 남용될 수 있다. 페루의 경우를 보자. 페루 헌법 113조에 따르면, 대통령이 사망하거나, 사임하거나, 혹은 "영구적인 신체적·도덕적 무능" 상태라고 의회의 2/3가 판단할 때, 대통령직은 "공석"이 된다. 그런데 페루 헌법은 "도덕적 무능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정신적 무능의 상태는 대단히 엄격하게 해석되었다. 그러나 대통령과 의회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페루입법가들은 "도덕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모든 사안에 대해 "도덕적 무능"의 법리를 적용하기 시작했다.⁷¹ - P81

71 Abraham García Chávarry, "Tres maneras de conceptualizar la figura depermanente incapacidad moral del presidente de la República como causal devacancia en el cargo", IDEHPUCP, Nov. 17, 2020. - P384

선출된 지도자를 내쫓기 위해 법을 부당하게 사용한 대표적인사례는 태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추방된 전 총리 탁신 친나왓의측근이기도 한 태국 총리 사막 순다라벳Samak Sundaravel은 2008년에 절차상 문제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중략). 그러나 양극화된 태국 사회에서수천 명의 반정부 시위자들은 총리 관저를 에워쌌고, 태국 헌법재판소는 결국 사막이 헌법 267조를 위반했다고 판결을 내렸다.⁷⁵ - P82

75 "Thai Leader Ordered to Quitover Cooking Show", MSNBC, Sept. 8, 2008. - P384

267조는 공직자가 임기 중에 외부 비즈니스에 관여하는 것을 금하는 조항이었다. (중략).
헌법 조항을 부당하게 사용할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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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조와 채도가 제각기 다른 사진들을 타일 삼아 만들어진거대한 모자이크화가 갓난아이의 형상을 그린다. 얇은 담요 같은 살가죽이 뼈를 가까스로 덮었고 두개골은 일그러진 알루미늄 캔보다 연약해 보인다. 짤따란 머리카락에만 윤기가흐르는데 다시 보자 파리 떼가 더덕더덕 붙어 피를 빠는 중이다. 아이의 입이 벌어지지만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도리어 가없는 침묵이 사방에서 밀어닥친다. - P136

(전략).
"가서 하느님의 진노를 땅에 쏟아라!"
그러자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마천루들의 수천 개 창문, 그수천 개 창문에서 번쩍이던 수백만 개의 조명들이 유성우로 변해 쏟아졌다. 발밑의 땅이 흔들리며 벌어지더니 까마득한 어둠을 향해 열렸고 직진하던 자동차들이 일제히 뒤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소란의 복판을 꿰뚫는 응급차 사이렌 소리저 응급차는 여자아이를 데리러 가는 중일까? - P137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그런 사고를 일부러 내요. 실수 맞으니까 모츠나베도 시켜줘요. 죽었다 살아나서 그런가 몸이 허하네."
"며칠 내내 근태도 엉망인 새끼가 이것도 시켜달라, 저것도 시켜달라야 명령하는 게 아주 습관이 되어 있어. 그럴 거면네가 학원장 해라."
"주시면 감사히 받죠. 법무사는 제가 알아볼 테니 명의 이전 서류만 준비하시면..
" - P141

"너 지금 본가에서 지내는 중이지? 부모님이 보면 한 달 만에 잘린 줄 알겠다."
"부모님 관련해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사고 난 게 아버지 차거든요. 솔직히 내가 이 처지에 제네시스가 어디서 나요. 빌린 거지."
"좆됐구나"
김형은 그 한마디로 우혁의 상황을 갈음했다. - P143

80억 명의 절반가량은 식상한 비참에 시달리고 있지만 자신은 한 접시에 65,000원인 사시미를 즐기는 중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자신에게 좋지 않은데, 주변 사람들은 지금의 세상을 그럭저럭 기꺼워하는 듯해서 우혁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 P144

"자기는 예수가 아니라길래 그냥 믿었죠, 뭐."
"태연하게 남을 속여먹는 새끼가 그런 건 무턱대고 믿어.
도대체 넌 뭐가 문제일까?"
"문제 많죠. 너무 많아서 짚을 수가 없죠."
우혁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자신이 정말로 이상한 질문을 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 P148

 소년은 구원이 불가능한 목표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한부 환자를 마주한 호스피스 직원처럼 미혼모와 걸인과 병자와 고아를 돌보다가, 마지막 순간 결단을 미뤘다. 그러나 서른 두 명의 추종자들은 대환난을 믿었으므로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 P149

세계는 하나의 끈끈이 통이었으며, 그곳에 갇힌 벼룩파리들은 서로를 잡아먹거나 사랑하면서 점차 수를 불렸다. 동족 포식에 만족하는 개체가 있는가 하면 살충제를 얻어맞을 각오로 통을 부수고 나가자며 강변하는 개체도 있었다. - P150

폐쇄된 생태계의 동역학을 상상하던 우혁은 문득 스스로가 얼간이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깨닫고 의기소침해졌다. 통바깥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끈끈이에 빠져버린 얼간이. 이런 주제에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운명을 걱정하는 것은 분수를 모르는 짓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 P151

"아니, 그게 아니라, 걔가 태워준 보답으로 주식 종목 찍어준다고 했단 말예요."
(중략).
"그걸 안 들었어요. 내가 안 들어도 괜찮다고 했어. 그 상황에서 종목 받아 적고 있으면 너무 속물적인 느낌이라서 그런데 아까 알아보니까 교통사고로 감옥 갈 수도 있다던데, 나 1심에서 법정 구속 되면 어떡하지. 은행 빚도 아직 해결 안됐고, 징역 살고 나오면 나이도 거의 마흔에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출소하면 뭐 먹고 살지? 아버지가 합의금도 안 내줄 텐데 그냥 자살할까?" - P151

우혁은 남들이 보기엔 자신의 꼬락서니가 도대체 어떨까 생각하다가 도망치듯이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푹 자고 일어난 뒤에는 세상이 훨씬 고요해져 있었다. 내면의 소란이 가라앉았다기보다는, 긴박하게 진행되던 무대가막을 내리고 인터미션에 접어듦으로써 참여자들에게 짧은휴식 시간을 부여하는 듯했다. - P153

"혹시 사고 이후로 어지럼증, 난청, 각종 트라우마 증상, 업무 처리상의 장애, 심각한 정신적 둔마 등을 겪고 계신가요?"
"그건 아닌데요"
조사관은 혹시 모르니 정신과 검사를 받아보라며 권유했고, 형사 합의의 중요성을 알려주었으며, 운이 나쁘면 징역형을 살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 P155

"사실 제가 도박 빚 때문에 카드가 막혔고, 계좌도 압류당한지라 신용 회복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새마을금고에서 신규 계좌 터서 겨우 금융 생활하고 있구요. 그런데 세상살이가 쉽지 않더라고요. 이번 달 월급 받자마자 여차저차해서, 이백오십이 하루 만에 삼십으로 줄었거든요. 텔레그램으로 긴급 알바를 구했죠. 그러니까 전 동승자가 누군지도모르고, 왜 거기까지 데려가달라 했는지도 알 수가 없죠. 수고비는 이더리움으로 받기로 했는데 그것도 날아갔고, 아버지 차도 박살 났고, 휴대폰도 고장 났고....... - P156

"그러면 계좌 압류당한 잠재적 전과자랑 만나는 건 괜찮은일이야? 넌 성범죄 안 저질렀으면 좀비랑도 사귀고 결혼할 거야? 어? 말 나온 김에 이건 확실히 하고 가자. 솔직히 대답해봐. 교통사고, 실수 아니지? 일부러 갖다 박은 거지?"
(중략).
우혁은 첫사랑과의 한때를 고백하는 소년처럼 수줍게 웃다가 소름 끼치는 감각에 움찔했다. 이런 말을 웃으며 하는 걸 보니 아직 완치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 P161

 제발 이것으로 끝이 아니길 빌면서 조강현이든 새천년파든 누군가는 연락하기를 기도하면서.

안녕하세요, 그랜저 차주입니다. 사고 관련하여 만나 뵙고 싶은데 언제쯤 시간 괜찮으실지요. 논의 필요하실 경우 전화 주셔도 좋겠습니다.

(중략). 전일, 전 시간 가능하다고 답하자 내일 오후 2시까지 웨스턴조선호텔 1층 로비로 오라는 통보가 떨어졌다. - P162

을지로입구역 7, 8번 출구 방면 블록은 롯데 상표로 뒤덮여 있었다. (중략). 우혁은 롯데호텔 35층에 피에르가니에르 서울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했고, 미슐랭 3스타 파인다이닝을 즐기는 사람과 프랜차이즈 햄버거를 먹는 사람의 거리가 고작 100여 미터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은근한 섬뜩함을 느꼈다. 그 감각은 속물 의식의 발로라기보다는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때의 아득함과 비슷했다. - P162

롯데백화점 뒤편에 자리 잡은 웨스틴조선호텔 건물은 곡선이 가미된 테트라포드를 연상시키는 형태였다. (중략). 심지어 1층에 입점한 베이커리는 특색 없는 단팥빵을 개당 5,500원에 파는 중이었다. - P163

말인즉슨 세상에는 5성급 호텔에 투숙함으로써 미래와 현재를 동시에 놓쳐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치를 일상처럼 누리는 사람도 있기 마련인데, 조강현은 아무래도 후자였다. 보육원 출신의 신학교 자퇴생으로 시작해 금융 트레이더로, 부동산 개발업자 겸 IT 기업가로, 계열사를 여럿 거느린 대기업의 회장으로 발돋움한 인물. 개연성 없는 추진력과 불가사의한 요행이 그를 따라다녔다. - P164

 조강현은 몇 차례 검찰에불려갔으나 매번 무혐의로 빠져나왔으며 강도 높은 세무조사에도 책잡힌 적이 없었다. 사회 환원과 복지 재단 운영에도 진심 어린 일관성을 보여줬다.
경제지 칼럼이 논평하기를 조 회장의 행보는 기적에 가깝다고 했다. 그건 실제로 기적이었을 것이다. - P164

내가 여기서 맡은 역할은 뭐지?
내가 이 상황에서 뭘 할 수 있지?
나는 이제 어떻게 되지?
우혁은 소년의 도주를 기꺼이 도운 데다가 기적을 겪은 것치고는 상당히 침착한 상태였다. 이것만으로도 소년과의 친분이 깊으리라는 추론이 성립할 터였다. - P165

최대한 신중하게 행동해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중략). 그동안 가망 없는 의식이 현실로부터 달아나 오래전에 보았던 스포츠조선연재소설 속으로 빠져들었다. 섹스와 폭력이 가득한 펄프 픽션이었다. - P165

16층 1611호, 권오성은 객실 문이 닫히자마자 휴대전화 반납을 요구하더니 휴대용 금속 탐지기를 꺼내 들었다.
"실례합니다만, 보안이 중요한 사안인 점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녹음기라도 있으면 곤란하거든요."
"오랜만에 강원랜드 온 기분인데요. 인간들이 자꾸 몰래카메라를 가져와서, 거기 입구에 금속 탐지기를 설치해놓죠. 공항 보안 검색대처럼요."
권오성은 못 들은 척했으며 우혁에게는 녹음기가 없었다. - P167

 양양고속도로에서 본 환상과 대조하자면, 조강현은 정확히 세월만큼만 나이 들었을 뿐 본연의 인상 자체는 여전했다. 얼굴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이 대기업 회장의 내면에는 아직 이도유를 어르신이라 부르며 따르던 청년이 남아 있는 것이다.  - P168

"그렇죠, 무슨 일 하는 분이신지 저는 잘 모르니까. 일단 그랜저 차주가 아니시고, 돈이 많으신 건 알겠는데……."
거기까지 말한 순간 고개가 제멋대로 돌아가 조강현의 손목시계를 살폈다. 롤렉스 서브마리너쯤은 걸려 있으리라 예상하면서. 그런데 뜻밖에도 서브마리너가 아니었다.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도 아니고 오데마피게 로얄오크조차 아니었다. 그냥 15,000원짜리 카시오 시계였다. 왜지? 진짜 돌아버리겠다. 우혁은 탄산수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제정신을 차렸다. - P169

"설악산까지 태워주면 주식 종목을 골라주겠다……………. 생면부지의 소년이 그런 제안을 건넨다면 허무맹랑한 소리라고만 여길 텐데, 선뜻 받아들인 이유는 뭡니까?"
"걔가 불러주는 대로만 했더니 바카라 사이트에서 17연승을 했거든요. 더 불렸다가는 출금이 막힐 것 같아서 5만 원 출발로 1300만 원 마감하는 선에서 멈췄는데요..... 그런 업체들은 대박 낸 사람들한테 돈 주기 아까워하거든요. 출금신청을 하면 계정을 지워버리고 모른 척하죠." - P170

"온라인 도박은 불법인데요. 경찰한테 바카라 이야기를 하면 안 되죠."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나 보편 상식에 비추어 보자면 죽은 자의 소생은 바카라 17연승 이상의 기적일 텐데요." - P170

"선생님은 갑작스러운 추격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당황하지도 않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전속력으로 K5에 부딪혔어요. 동승자는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와서 가드레일 밑으로 떨어졌고요. 사전에 협의하지 않았다면, 즉 소생을 약속받은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결정이지요. 제출하신 10분간의 블랙박스에도 관련 대화가 없는 걸 보면 협의는 그 전에 이루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혹은 녹음되지 않을 방법으로 소통할 만큼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 모르쇠로 나오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둘 중 뭡니까?"
"그냥 짜증 나서 갖다 박은 건데요. 걔가 살려줬다면 고마운 일이죠."
조강현의 얼굴에 끔찍하다는 기색이 얼핏 스쳤다.  - P171

그는 본격적으로 얼간이 흉내를 내기 시작하면 어조와 표정부터 바뀌는 인간이었고, 김 형쯤 되는 상대가 아니고서야 대개 속아 넘어갔다. 멀쩡한 인간이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진 않으리라 믿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까지 상식이 결여된 반응이 계속되면 답답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 P171

"그렇다면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선생님이 완벽한 사회부적응자라 원시인에 가까운 행동 패턴을 취하고 있다는 겁니다. 땅 밑에서 해가 기어 나오고 나무가 과실을 맺는 것이 일상적인 기적이듯, 이 원시인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기적을 겪은 겁니다. 이 경우 저는 선생님과 볼일이 없습니다. 법대로 처리하면 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선생님이 나름대로 의리가 있거니와 거짓말도 잘하는 인간이라는겁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좋은 거래가 가능할 겁니다. 선생님과 저만 가능한 거래지요. K5 측과 협상이 가능할 거라고생각하시진 않을 테니까요." - P172

"(전략). 만약 회장님께서 판단하시기에 이용 가치가 없다 싶어도, 이런 사정은 살펴주시면 좋겠습니다. 돈 1, 2억에 아등바등하는 소시민 자살시키는 취미는 없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회장님께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입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유감이긴 한데요."
"마지막 말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군요." - P173

"그렇다면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이도유와는 어떤 관계고, 어디까지 알고 있지요?"
이제부터는 우혁이 진지해질 차례였다. 신뢰를 얻어내기위해서는, 최소한 자비라도 구걸하기 위해서는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 P174

"아뇨,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단서가 없다는 건 반대로 뭐든 속일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한 단어로 줄이자면정보 비대칭이지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새천년파 측에서도 최선생님을 예의 주시 중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쪽은 정보가 시급한 상황이에요. 이도유를 회수했는데도 종말을 불러오는 조건을 몰라서 행동을 개시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최우혁 선생님, 저와 일 하나 하실까요?" - P175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이도유를 찾아다닐 이유가 뭐란 말인가? 보다 적극적인 외연 확장이 필요해서? 물욕이 원인이라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긴 했다. 조강현은 눈에 띄게 청렴한 기업가였지만 소년은 그에게 치를 떨었다. - P176

"그렇게나 중요한 업무를 맡겨주신다면 저야 고마운 일인데요. 정말 고마운 일인데, 따로 설명을 들을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중략).
"아뇨, 직설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도 이도유한테서 귀띔받은 게 있거든요. 회장님더러 제일 음흉하고 위험한 인간이라 그러던데요. 정황만 보더라도, 안전한 사람에게서 도망칠리가 없을 테고요. 새천년파가 곰이라 쳐요. 곰 우리에서 어린애를 빼내는 건 좋은 일이죠. 하지만 곰 우리에서 빼낸 어린애를 사자한테 던져주는 건 헛짓거리고요. 저는 은인을 사자 먹잇감으로 가져다 바치고 싶지 않은 겁니다." - P177

조강현이 언급한 것은 <마태복음> 4장에 묘사된 사건이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예수는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러는 동안 사탄이 다가와 예수를 시험에 빠뜨린다. 두 차례의 겁박과 조롱이 실패로 돌아간 뒤, 사탄은 수법을 바꾸어 그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려간다. 그러고는 온땅의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과 손잡기만 하면 이 모두가 예수의 몫이 되리라 속삭인다. 예수가 그 유혹마저 거절하자 사탄은 완전히 물러난다……………… - P180

즉 인간의 고통을 진실로 겪어본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이조물주란 구원의 약속을 안겨준 뒤 기약 없는 기다림을 가하는, 평생에 걸쳐 구원을 믿었음에도 그것을 결국 목도하지는 못하고 비참 속에 죽어가는 인간을 무수히 만들어내는 그런 작자였던 겁니다. - P181

우혁은 조강현의 설명을 정리해봤다. 일단 몰트만이 하느님과 예수의 실제적인 분리를 말한 것까지는 건조한 사실이었지만, 그의 분석에는 정반대의 측면이 수반됐다. 분리를 통해 두 위격이 가장 강력하게 결합되었다는 역설이었다.  - P182

나는 정확히 어떤 경위로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인가?
"
"그렇다면 이도유는 예수가 맞는 건지......."
"엄밀히 말하면, 아닙니다. (후략)."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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