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일 - 낮과 밤이 거의 같은 길이가 되는 그날, 해질녘이었다.
‘암흑관‘이란 별명을 지닌 우라도 가문의 저택에 있는 한 방에서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택은 호수의 작은 섬을 통째로 집터로 삼아, 대략 네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 P78

그저 오래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듣던 대로 분명히 매우 이상하게지어진 건물이기도 했다.
검은 지붕에 검은 벽, 검은 문에 검은 창이었다. 온통 검은 외관은 누가 보더라도 이상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 P78

시각은 오후 6시20분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간유리를 끼운 안쪽에 있는 올렸다 내렸다 하는 문과 바깥쪽의 검은 덧문을 모두 열어놓은 창밖에서는 떠도는 어둠의 농도가 시시각각 짙어지고 있었다.
저녁놀이 물드는 야릇하게 어두운 풍경 속에, 울창한 정원수의 검은그림자 너머로 더욱 새카맣게 보이는 탑 그림자가 보였다. - P79

뭔가 희읍스름한 것이 움직였다.
어, 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뭘까? 저기 누군가 사람이 있는 걸까?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실내를 둘러보았다. - P79

벽이나 바닥, 천장까지도 역시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진 방이다. 그래서 중앙에 놓인 카펫의 매우 탁한 붉은색이 섬뜩할 정도로 선명해보인다.
가죽 안락의자에 조용히 앉아, 우라도 겐지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검은 구두에 검은 바지, 검은 셔츠, 검고 얇은 카디건. 이 저택의 기본 색에 맞춘 듯이 온통 검은색 차림이었다. - P79

(전략) 될 수 있으면 그러지 말아달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젠 나도 귀에 익어, 아예 그 시인처럼 검은 중절모를 즐겨 쓰기까지 한다.
"여기서 저쪽 탑이 보이는군요."
"아아, 십각탑‘ 말이군. 흥미가 있다면 내일 내가 안내해주지."
"탑 위에 지금 누군가가."
"뭐?"라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고, 겐지는 피우던 담배를 손가락사이에 끼운 채로 일어섰다.
"이상하군. 거긴 분명히・・・・" - P80

겐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단을 밟는 둔탁한 발소리가 다가온다. 그때 그것을 가로막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낮은 땅울림 같은 소리가 난다…… 싶었더니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충격. 나는 창틀을 잡고 얼른 자세를 낮췄다. "또?"라고 겐지가등 뒤에서 소리쳤다. 오늘 벌써 두 번째 지진이다. - P80

자세를 낮춘 채로 얼른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검은 탑의 발코니에서 땅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그 사람의그림자를앗, 하는 외마디 소리가 내 입에서 새어나왔다. 바로 그때 난로 위에 있던 탁상시계가 반응을 쳤다. 영롱한 음색으로, 오후 6시 반.
희미해지는 종소리의 여운과 함께, 이윽고 땅의 흔들림도 잦아들었다. - P81

겐지는 실내를 쭉 둘러보면서 반쯤 안도했다는 표현일까, 약간 장난스럽게 두 팔을 펼쳐보였다. 홀쭉한 그의 몸에 걸친 헐렁한 검은카디건, 앞단추를 채우지 않아 옷의 앞뒤 폭이 들어 올린 팔의 넓이만큼 좌우로 펼쳐져 마치 박쥐 날개처럼 보였다.
"집은 그래도 무사한 모양이군. 다행일세." - P82

겐지는 담배를 집어들고, 카펫의 불에 탄 부분을 구두 바닥으로 짓밟았다.
"이 저택은 옛날부터 불과 궁합이 맞지 않는 것 같군. 예전에도 몇번인가 불이 났었다네. ‘북관‘ 같은 건물은 완전히 타버려서 통째로다시 지었지. 내가 어렸을 때의 일일세." - P82

"아참, 그러고 보니 십각탑에 사람이 있다고?"
"떨어졌습니다."
"뭐?"
"그 사람이 탑에서 떨어지는 걸 방금 제 눈으로 봤습니다."
"정말인가?"
"비명도 들린 것 같고요. 발코니에 나와 있었는데 지진이 나서, 그때"
"균형을 잃고 떨어져버렸다?" - P83

현관홀로 내려가는 넓은 계단이 꺾어지는 부분에 있는 층계참에서 마르고 키가 큰, 검은 양장 차림의 여성과 마주쳤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왔던 사람으로, 겐지는 ‘츠루코鶴子 씨‘ 라고 불렀다. 우라도 집안에서 일하는 고용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P83

우리가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것을 보고 츠루코는 우뚝 멈춰 섰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눈치 채고, "겐지 도련님" 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겐지가 아무 대꾸도 없이 옆을 지나치려 하자 그녀는 더욱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겐지 도련님?"
"탑 열쇠 어디 있나?" - P84

희미한 별빛에 의지해 검게 솟은 ‘십각탑‘ 을 올려다보았다. 건물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없다. 정면 입구에 문이 보였지만, 그것은닫혀 있었다. ‘내내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고 하는 그 문이 신경 쓰이는지, 겐지는 우선 그리로 달려가려다 생각을 바꾼 듯이 바로 걸음을멈췄다.
"저쪽인가?"
중얼거리며 왼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동관‘ 쪽 방향이었다. - P85

"누구...아니, 신타愼太로구나."
반소매 셔츠에 잔바지 차림의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뭐하는 게냐, 이런데서?"
(중략)
"저기."
왼손을 들어 지금 자기가 나온 나무 뒤편을 가리켰다.
"누워 있어, 누가."
"누워 있어?"
"모르는 사람 저기……."
"거기 누가 있는 거로구나."
겐지가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다가가자 소년은 심하게 몸을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쁜 장난을 치다가 야단을 맞기라도 한듯한 반응이었다. - P87

오른손은 여전히 주머니에 찌른 채로 소년은 뛰어 사라져갔다. 우리가 온 길과 반대 방향-저택의 뒷마당 쪽일까?-으로.
"누굽니까. 지금 저 애는?"
겐지에게 물었다.
"시노부 씨 아들일세." - P87

"거실에 차를 가져왔던 사람 있잖아. 하토리 시노부羽鳥しのぶ라고.
지금 저 애는 그 사람 아들인데, 이름이 신타지."
말을 끊고, 겐지는 검지로 자기 관자놀이 부근을 살짝 찔렀다.
"약간 지능에 문제가 있네."
"저 애가, 왜?"
"아.… 아니, 그보단 저쪽이 먼저지." - P88

3

명치까지 오는 키의 진달래 정원수가 잔뜩 심어진 그 바로 앞ㅡ.
무성한 잡초에 파묻히듯 엎드린 봄이 달빛을 받아 뿌옇게 보았다.
전체적인 복장이나 체격, 머리 길이로 미루어 여자는 아니었다. 남자였고, 그리고 젊다. - P88

"누구죠? 이 사람은?"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겐지는 구부리고 있던 윗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보더니 머리 위로 시선을 향하며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군. 아마......"
그때 "겐지 도련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단풍나무 뒤에서 들려왔다. 손전등을 가지러 갔던 츠루코가 온 모양이었다. - P89

"이 분이, 탑 위에서?"
"그런 모양이군.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아. 그리 크게 다치지는 않은것 같은데."
손전등을 켜면서 겐지는 다시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츠루코 씨, 도와줘. 일단 뒤집어야겠어." - P89

받아든 손전등의 빛을 누워 있는 남자의 얼굴에 비쳤다. 역시 젊은남자였다. 겐지와 비슷한 또래의 나이.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눈은 감고 있었다. 뺨과 콧등에 진흙 같은 것이 지저분하게 묻어있지만, 심하게 일그러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피가 묻어있는 것 같았지만, 이렇다 할 큰 외상은 없는 모양이었다. - P90

겐지가 청년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동안, 츠루코는 재빨리 셔츠 단추를 풀고, 바지 벨트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녀 또한 이런 조치에는 익숙해보였다.
여기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겠군."
이윽고 겐지가 말했다.
"골절도 없는 모양이야. 움직여도 괜찮겠지. 일단 집안으로 옮겨야겠네." - P91

청년이 입은 옅은 회색 재킷은 얼굴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심하게 지저분했다. 바지도 마찬가지였다. 겐지와 호흡을 맞춰 몸을 들어올렸다. 천천히 이동을 시작하면서 나는 청년의 왼손에 손수건이 둘러져 있다는 것을 보았다. 탑에서 떨어지기 전에 이미 부상을 당했는지, 그 흰 손수건에는 검붉은 피가 배어 있었다.
"저어, 겐지 선배." - P91

청년을 들고 ‘동관‘의 현관으로 돌아오는 도중, 나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물어보았다.
"이 사람은 누구죠?"
"나도 궁금하군."
걸음을 옮기면서 겐지가 힘없이 대답했다.
"모르는 얼굴일세. 적어도 이 저택 안에 이런 사람은 살지 않지." - P92

아아・・・・・・ 이것은.
- 나는 대체 누굴까?
5개월 전의 봄날, 그것은 내가 품은 의문이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묻던.
- 어째서 나는 여기서 이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왜이 섬에 들어왔고, 저 탑 위에 올라갔을까? 빨리 정신을차려 설명해주면 속 시원할텐데."
달이 다시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 P93

 타고 왔던 차를 거기 세우고, 우리는 호숫가의잔교로 내려섰다.
섬으로 건너올 때는 엔진이 달린 소형 보트를 탔다. 그 배를 운전해 준 사람은 히루야마 다케오蛭山丈男라는 일꾼이었다. - P94

그때까지 담과 정원수에 가려 조금씩밖에 보이지 않던 이 저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저택은 처음에는 그림자처럼보였다. - P94

물론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확실한 실체로 거기 있었다. 검은벽, 검은 창, 검은 지붕, 검은 굴뚝, 검은.………….
"과연 이상한 저택이군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대답했다.
"특히 저 벽이 그렇군요."
"벽? -흐음."
"판자도 돌도 아닙니다." - P95

 딱딱한 비늘로 덮여 있는 파충류의 피부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이상한 모습이었다.
"건축 공법으로는 해삼벽 같은 겁니까?"
"해삼벽?"
흙을 쌓아올리는 벽 같은 데 사용하는 방법이죠. 본 적 없습니까?
평평한 벽돌을 붙이고 그 이음매를 메우는 부분은 희게 돋움처리를 한" - P96

날카로운 턱을 쓰다듬으며 겐지는 의미심장하게 슬쩍 웃음을 지었다.
"어느 건물이나 넓이에 비하면 창문이 적고, 게다가 대개 덧창이나 비를 막는 창으로 막혀 있지. 낮에도 안은 어둡네. 그야말로 암흑관이지."
"이상한 저택이군요. 정말로."
"그렇지.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내게는 이게 당연하지만 말일세.
이 집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은 나름대로 나이를 먹고 난 뒤였네."
겐지가 수다스럽게 말했지만 얼굴에 드러나는 피로의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 P97

"그렇지만 이렇게 외진 곳에 이런 저택을 짓다니."
"상식을 벗어났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겠죠." - P97

겐지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내 눈은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저택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받은 충격은 이미 옅어져, 이젠 흥미가 오히려 더 구체적인 건물의 모양새 쪽으로 옮겨가 있었다.
"키메라로군요." - P98

"이 저택이 지어진 시기가 분명히 메이지 시대 후반기라고 하셨죠?"
"그럴 걸세. 동관과 서관은."
"개화기 때 일본 각지에서 서양식을 모방한 건물이 지어졌죠. 집을 짓는 사람들이 모양새를 흉내 내 서양식 집을 지으려 했는데, 당연히 서양 스타일과 일본 스타일이 묘하게 뒤섞인 것이 되어버린 겁니다." - P98

"서양 스타일을 모방한 건축이란 게 일종의 경멸의 뜻이 담긴 표현이었다고 하더군요. 일본의 목수들이 고민해서 지은 어중간한 서양식 저택. 그 뒤에 나오는 ‘일본식과 서양식 절충형‘ 건축물도 일종의열등 콤플렉스를 담은 표현이겠죠. 하지만 저는 적어도 초기의 서양식을 모방한 건물들이 싫지 않아요." - P99

개화기에 지어진 이런 건물들은 대개 묘하게 밝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앞으로 일본은 세계를 향해 진출한다. 이 나라의 이 도시가 세계의 중심이 된다. 라고 하는 넘치는 의지가 표현된 밝고 편안한 분위기가 그 특징이다. 하지만 이 저택은 그반대다.
눈앞에 있는 이 건물은 어떤가?
그런 밝은 분위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오로지 검고, 어둡고, 안쪽을 향해 닫혀 있다.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건물은 이 키메라는 도대체 어떤 의도로 여기 지어진 것일까? - P100

5
‘십각탑‘ 에서 떨어진 정체불명의 청년을 안고 겐지와 나는 ‘동관으로 돌아왔다. - P101

이 저택을 처음 방문해 이 현관홀에 들어선 사람은 대부분 먼저 그바닥의 무늬에 눈길이 갈 것이다. 바깥 벽면과 마찬가지로 검은 평기와가 여기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둑판 모양으로 깔린 네모난평기와 이음매를 메우는 부분도 역시 검다. 더군다나 벽은 검은 칠을한 판자에 그 이음매도 검게 칠해져 있다. - P102

"호흡이나 맥박에는 큰 문제가 없으니 별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것은 머리에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느냐"
"노구치 선생님이라는 분은?"
"우리 주치의, 2주에 한 번 꼴로 구마모토 시내에서 왕진을 와 대개 이틀이나 사흘 정도 묵고 가네. 아버지의 어린 시절 친구이기도하고 말이야. 아마 어제부터 와 있었을 거야.………." - P103

얼굴에 묻은 진흙과 핏자국을 지우고 보니, 눈을 감고 있는 청년의표정은 뜻밖에 편안했다. 흰 피부에 상당히 점잖은 얼굴이라는 것을알 수 있었다. 나이는 역시 스물대여섯 정도일까?
"대체 누굴까?"
청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겐지가 중얼거렸다.
"신원을 알 수 있는 게 뭔가・・・・・・ 윗옷을 벗기는 게 좋겠군. 도와줘.
츄야." - P104

"방 네 개가 연속해서 있어."
겐지가 가르쳐주었다.
"이 건물의 남쪽 단층 부분이 모두 이 사랑방이야. 전부 열어두면운동회를 해도 될 걸세."
"예."
우리집도 그 지방에서는 제법 유지로 통한다. 집에는 일가친척들이 모이기 위한 큼직한 사랑방이 있지만, 이 정도로 넓은 방은 아니다. - P106

 저 사람이 노구치 선생인가?
180센티미터 정도의 키다. 체격이 좋다기보다는 한마디로 ‘거한 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맥주통 같은 그 체형에는 흰 가운보다 목욕 가운이 훨씬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 P106

 이윽고 겐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탑에서 떨어졌다고 들었네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단 나뭇가지에 걸렸다가 그 다음에 땅바닥에."
"대충 살펴봤는데, 골절이나 큰 외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호흡도 맥박도 또렷하지만 의식은 없는 것 같고요. 추락 쇼크 때문인 것 같습니다."
"머리에 다친 상처는?"
"커다란 혹이 후두부 윗부분에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왼손을 손수건으로 감싸고 있더군요. 추락하기 전에 난 상처인 모양입니다." - P107

겐지는 방에 들어와서 있던 츠루코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는 사람인가?"
"아뇨. 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 P108

6

(중략)
"그 선생님, 살짝 술 냄새가 나던데요."
목소리를 죽여 말하자, 겐지는 시원스럽게 생긴 눈에 살짝 웃음을지으며 말했다.
"여기 오면 늘 마시지. 저 정도면 반쯤 알코올 중독일 테니까. 술을전혀 마시지 않았을 때보다 오히려 컨디션이 더 좋을걸." - P108

겐지가 가벼운 말투로 불렀다. 시노부는 홀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에 멈춰서더니, 우리 얼굴을 고개를 숙인 채로 눈만 들어 쳐다보며꾸백 인사를 했다.
"아까 지진 때는 괜찮았나?"
겐지가 물었다.
"예, 그건."
약간 박자가 느린 대답이었다.
"건물이 어디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았고?"
"예."
역시 박자가 늦은 대답이었다. - P109

"아까 밖에서 신타를 만났어."
시노부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이때는 바로 반응이 나왔다.
"그 애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아니,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탑에서 떨어진 사람이 있는데, 신타가 그걸 제일 먼저 발견한 모양이더군."
"어두워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이야기해두었는데, 죄송합니다.
"신경 쓸 거 없다니까. 오히려 발견해줘서 고맙지." - P110

자 하며 겐지가 내게 내민 담배의 이름은 ‘피스‘, 약간 머뭇거리고나서 담배를 받아 입에 무니 겐지가 라이터 불을 빌려주었다. 처음피우는 이 필터 없는 담배의 연기는 내게 자극이 너무 심해 한 모금을 빼니 목이 무척 아팠다. - P111

"- 어디를?"
되묻자 겐지는 바지 주머니에서 손전등을 꺼내며 대답했다.
"다시 십각탑으로 탑 안을 한번 살펴보고 싶어서."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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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생소한 전개 방식의 도입부. 하지만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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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원래 무엇보다 더 그를 사로잡은 건 그녀의 별난 표정이었다. 줄리아나는 아무 이유 없이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유별나게 멍청해 보이는 모나리자 같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곤 했다. 그러면 상대는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쩔 줄을 몰랐다. - P31

지금도 그녀는 무척 가깝게, 마치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프랭크의 삶 속에서 줄리아나의 영혼은 그녀가 추구하던뭔가를 찾아 여전히 바삐 돌아다니고 있다.

그들 모두 자신처럼 우울한 조언을 얻었을까?
‘순간‘의 흐름은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대적이었을까? - P32

02.

다고미 노부스케는 자리에 앉아 (중략).
테일러 가에 있는 니폰타임스빌딩 20층에 자리 잡은 그의 호화로운 사무실에서는 샌프란시스코 만이 내려다보였다. - P33

이제 고객을 즐겁게 해주는 건 그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칠던이 어떤 물건을 가져오든 마찬가지였다. 고객이 깊은 인상을 받을 리가 없었다. - P34

고객은 이제 곧 독일의 메서슈미트9-E형 신형 로켓의 일등석에 앉아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한다. 다고미는 그런 로켓을 타본 적이 없다. 하지만 바이네스 씨를 만나는 자리에서는로켓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런 것에 아주 익숙한 듯 심드렁해보이도록 신경 써야 했다. 연습을 좀 해둬야했다. - P34

정치 얘기를 삼가는 건 기본이다. 최근 주요 관심사에 대해바이네스 씨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니까. 하지만 정치가 화제에 오를 수도 있다. 바이네스 씨는 스웨덴 사람이니 아마도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겠지.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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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구외적 언어는 무언가에 대해 개별적으로 생각하는 법과 더불어 하나의 문화로서 생각하는 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언어학자 조지 라코프George Lakoff가 제안하기로, 개념적 은유는 한 사회가 그 자신을 어떻게생각하는지에 큰 역할을 한다(Takoff & Johnson, 2008). - P355

라코프의 주장에 따르면, 이 개념적 은유들은 사고 과정에 제약을 가하고 영향을 미친다. 그는 ‘논쟁‘ 사례를 제시한다. 논쟁이란 전쟁과 같다고 하는 개념적 은유가 있다. 만약 논쟁을 그런 식으로 여긴다면,
‘나는 그가 논쟁에서 내놓은 주장을 사살했다‘거나 그는 상대방이 논쟁에서 내놓은 주장을 철저히 파괴했다‘는 말도 나올 만하다. - P356

 가령 이렇게 말한다. "너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라든가 "시간을 더 잘 짜야 해" 또는 "이 장치로 시간이 크게 절약돼". 라코프에 따르면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우리가 그러한 기본적인 개념적 은유를 지니고 있으며, 이런 은유들이 우리 문화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라코프는 이를 가리켜 프레이밍이라고 불렀다. - P356

라코프의 이론은 1980년대에 도입된 이래로 줄곧 유력한 견해였다. 하지만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로,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 포퓰리즘이 득세하면서 이론의 타당성이 새롭게 주목받았다. 라코프는 언어에 관해, 그리고 언어가 어떻게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 수십 년 동안 계속 생각하고 저술해왔다. - P357

 라코프의 주장에 따르면 단순한 반복이 목표의 전부다. 비록 여러분이 트럼프 대통령을 믿지 않더라도 여전히 이런 말과 개념은 받아들인다. 게다가 그것들은 사람들이 언급하고 리트윗하는 바람에 종종 증폭된다. 활성화가 확산된다. 생각들이 연결된다. - P358

(전략) 트럼프는 적어도 2가지 방법으로 그렇게 한다. 하나는 별명 사용하기다. 가령 이전 대선의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을가리켜 ‘구부러진 힐러리‘라고 부른다. 한편 ‘구부러진‘은 부정직함을 뜻하는 은유로 쓰인다. 우리는 ‘진실은 곧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359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한테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라코프에 따르면 이런 반복과 프레이밍 및 은유의 사용은 어쨌든 연관짓기 association를 이끌어낸다. 더 자주 들을수록 기억이 강해진다. 이는 단지 트럼프 대통령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라코프의 메시지는 다른 지도자,
정치인, 매체에도 해당한다. - P359

언어는 어떻게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가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준다. 언어와 언어적 맥락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또는 서두에서 내가 제시했듯이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다. 이런 발상에 대해 언어학자들이 이론을 내놓았는데, 언어상대성 linguistic relativity 이라는 이 이론은 우리의 모국어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방식에 영향을 준다고 본다. - P360

 즉, 사고가 언어에 대해 상대적relative 이다. 이런 주장의 가장 강한 형태를 가리켜 종종 언어결정론linguistic determinism 또는 ‘사피어 워프 가설 Sapir-whorf hypothesis‘ 이라고 한다.
에드워드 사피어 Edward Sapir와 제자 벤저민 워프Benjamin Whorf 의 이름을 딴명칭이다. - P360

출처가 불분명한 어느 이야기에 따르면, 언어학에 대한 그의 발상과 관심은 워프가 화재 방지 기술자 겸 검사원으로 일하는 동안 생겼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워프 직원들이 휘발유통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목격했다. 비록 직원들 말로는 통에 비어 있다는 표시가적혀 있긴 했지만 말이다. 만약 비어 있다면 그 주변에서 담배를 피워도안전하지 않은가? 아니다. 빈 휘발유통은 증기 때문에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증기에 불이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361

 달리 말해서, ‘비어 있는‘이 실제로는 비어 있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 P361

‘에스키모 언어에는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백 개나 된다‘는 주장을 들은 적이 있는가? 이 주장 뒤에는 때때로 다음 주장이 따라온다. 그러므로 에스키모 언어의 화자는 영어 화자에 비해 눈의 유형을 더 많이 구분할수 있다. 이 주장의 이면에 깃든 생각은 만약 여러분이 무언가에 대해 더많은 용어나 꼬리표를 갖고 있다면 더 많은 범주를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워프도 이에 관한 추정을 내놓았는데, (후략) - P362

하지만 언어가 지각과 인지를 제약하거나 결정한다는 이 주장은 대담하기 그지없었고 20세기 중반에 매우 도발적으로 여겨졌다. 인류학자와심리학자, 언어학자는 이 발상을 검증할 방법을 찾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도전은 엘리노어 로쉬의 연구에서 나왔다. 앞 장에서 나왔듯이 엘리노어 로쉬는 개념 및 가족 유사성에 대한 연구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 P363

워프 자신도 그 주장을 검중하거나 조사한 적이 없는데, 이 주장을 다룬 대다수의 보도는 북쪽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온갖 방언을 구별하지 않았다. 세상에 단 하나의 ‘에스키모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 P362

하지만 언어가 지각과 인지를 제약하거나 결정한다는 이 주장은 대담하기 그지없었고 20세기 중반에 매우 도발적으로 여겨졌다. 인류학자와 심리학자, 언어학자는 이 발상을 검증할 방법을 찾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 P363

만약 워프의 주장이 옳다면, 특히 ‘눈을 가리키는 단어‘ 사례와 같은 가장 강한 버전이 옳다면, 색깔을 나타내는 단어가 2개뿐인 언어는 그 두 색깔에 따라서 세상을 보게 된다. 다른 색깔도 볼 수 있을지 모르나, 이름이 동일한 색깔들을 구별해서 알아보기는 필시 어려울 것이다. - P363

로쉬(Heider, 1972)는 이 이론에 대해 파푸아뉴기니의 한 원주민 부족을대상으로 검증에 나섰다. 다니Dani죽은 색깔을 가리키는 단어가 둘뿐이기에 다니족의 언어에서는 색이 2가지 범주로 정의된다. 한 범주는 밀리mili라고 부르는데, 시원하고 어두운 색조를 가리킨다. - P364

‘색깔 칩colour chip‘이라고 하는 이 카드들은 먼셀 색체계 Munsellcolor system에서 가져왔다. 이 체계는 색상hue, 명도 value (밝기), 채도chroma (순도)라는 3요소에 따라 색깔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먼셀 체계는 1930년대 이후로 과학자와 디자이너, 화가에게 표준적인 색 언어로 사용되어왔다. - P364

로쉬가 실시한 과제 중 하나는 쌍연상학습paired associate learning 과제였다.
참가자들은 항목들로 이루어진 목록을 배우게 되는데, 각 항목은 참가자들이 이미 아는 것, 즉 기억 단서 역할을 하는 단어와 쌍을 맺고 있다. - P364

로쉬가 피실험자들에게 ‘최상의 예‘를 고르라고 했더니, 순도가 제일높은 색들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함이 드러났고 영어 화자들은 그런 중심 색들을 더 잘 기억할 수 있었다. 빨강에 대한 초점색은 대다수 영어 화자들이 빨강에 대한 최상의 예라고 여길 단일 칩이었다. 다른 칩들도 빨강이라고 불릴지 모르지만 해당 범주의 중심 내지는 최상의 예로 여겨지진 않았다. 그리고 좀 더 애매한 다른 칩들도 있었다. - P365

로쉬의 실험에서는 피실험자들한테 한 칩을 보여주고서 새로운 이름을 하나 가르쳤다. 16가지의 색과 단어 쌍에 대해 그렇게 했다. 로쉬는 영어 화자라면 초점색에 대한 쌍연상학습에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추론했다.
초점색은 기존 색 범주에 대한 원형을 활성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 P365

언어결정론으로 보자면, 그들은 영어 화자와 동일한 초점색을 가질 수가 없다. 다니족은 모국어로 인해영어 화자와는 다른 색 범주를 지니기 때문이다. 빨강에 대한 초점색을 보여주어도 다니족 언어 화자들에게는 기존의 언어적 범주를 활성화시키지않을 테니. 초점색에 대한 쌍연상학습과 비초점색에 대한 쌍연상학습 성적에 차이가 거의 없어야 마땅하다. - P366

더욱 최근의 연구도 언어결정론 이론에 계속 의심의 눈길을 던졌다. 바바라 몰트Barbara Malt 의 연구는 인공물과 제조된 물품을 대상으로 삼아 영어와 스페인어 사이의 언어적 차이를 연구했다(Malt, Sloman, Gennari, Shi &Wang, 1999). 이 실험에서는 참가자들에게 bottle, container, jug, jar와 같은 흔한 물체를 여러 개 보여주었다.  - P366

영어 화자들은 정확한 범주 경계에 관해서는 입장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다수는 무엇을 병으로 부를지 주전자나 그 밖의 명칭으로 부를지에 동의할 것이다. - P367

북미 영어 화자들이 jug jar 와 별도로 지칭하는 데 반해 스페인어 화자들은 보통 이 2가지를 단일 용어로 부른다. 달리 말해서 유리 bottle.
jug 및 jar는 전부 ‘frasco‘라고 부른다. 만약 언어결정론이 제조된 물품에도 참이라면, 스페인어 화자들은 표면적인 유사성에 따라 그것들을 상이한 범주로 구분하는 능력이 부족해야 마땅하다. - P367

어떻게 언어가 사고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최종적인 사례는 리라 보로디츠키 Lera Boroditsky의 연구에서 증명되었다(Boroditsky, Fuhrman &McCormick, 2011). 보로디츠키에 따르면 사람들은 상이한 언어별 문화별로 시간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하는 은유에 차이가 있다.  - P367

영어 화자와 스페인어 화자 피실험자들은 각종 보관용 물품을 전반적인 유사성을 통해 구분할 때 서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즉, 상이한 물품 전부에 대해 동일한 명칭을 갖고 있지만 스페인어 화자들은 유사성에따라 집단별로 분류하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영어 화자 피실험자들과 대량 동일한 방식으로 분류했다. - P367

영어 화자들은 종종 수평적이라는 듯이 시간에 대해 말한다. 즉, 수평적 은유로 인해 ‘마감을 뒤로 밀다(pushing back the deadline)‘라거나 ‘회의를 앞으로 옮기다(moving ameeting forward)‘와 같은 표현이 나온다. 한편 표준중국어 mandarin 화자들은종종 수직적이라는 듯이 시간에 대해 말한다. 즉, 사건의 시간적 순서를가리키기 위해 위와 아래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한다. - P368

나도 여전히 ‘이 프로젝트가 뒤로 처지네 (I‘ve been falling behind on thisproject)‘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긴 하지만, 시간을 수직 차원에서 생각하는데 꽤 익숙한 편이다. 영어에도 수직적인 시간 은유가 있는데, 가령 어떤것을 ‘하루의 맨 위에서 (at the top of the day)‘ 한다는 표현이 그런 예다. 예외도 있긴 하지만 이런 은유는 관용어와 문구에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깊게 침투해 있는 듯 보인다. - P368

개념적 은유와 언어가 피실험자의 장면 이해 능력에 영향을 주는지 검증하기 위해, 피실험자들한테 우선 수직이나 수평 차원을 향하도록 하는시각적 점화 표시 prime을 보여주었다. - P368

가령, 검은 공 옆에 흰 공이 놓인 사진과 함께 ‘검은 공이 흰공 앞에 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는것은 수평적 점화 표시다. 검은 공이 휜공 위에 놓인 사진과 함께 ‘검은공이 흰 공 위에 있다‘라는 문장이 적힌 것은 수직적 점화 표시다. - P369

하지만 후속 연구들에서 밝혀지기로 이 기본 방향성은 무효가 될 수 있다. 가령, 보로디츠키는영어 화자인 피실험자들에게 수직적 은유의 사례들을 보여주어 시간을 수직적으로 생각하도록 훈련시켰다. 이 경우, 훈련을 마친 후 영어 화자들은 이전의 수평적 점화 효과 대신에 수직적 점화 효과를 보였다.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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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관‘이란 그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가와미나미의 가슴은 이상하게 설레고 있었다. 암흑관・・・・・・ 암흑관? 설마 설마 ・・・・・ 하는 그런속마음을 뻔히 들여다보듯이 작은 외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도미시게 형님한테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서 말이야." - P54

"그건 그 나카무라 세이지라고 하는・・・・・…."
"으음, 그런 이름이었냐?"
작은 외할아버지는 또 씩 웃으며 말했다.
"자 한잔 해라. 다카아키."
따라 준 술을 시키는 대로 비우고 나서 가와미나미는 약간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그 암흑관이란 저택도 나카무라 세이지가?" - P55

"도미시게 형님한테 사건 이야기를 들은 순간, 오래 잊고 있던 그 저택 이야기가 생각나서 계속 마음에 걸리더구나. 나카무라 뭐라는이름 때문에도 기억이 나지만, 그 저택-암흑관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고 말이야." - P55

작은 외할아버지는 "그래"라고 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술잔에 새로 술을 따랐다.
"끔찍한 사건이 몇 번이나 일어났던 집이란 소문이 있었어.-아, 다카아키. 너도 한 잔 더 할래?"
몽롱한 뇌리에 본 적도 없는 저택, 암흑관의 그림자가 떠올라 불규칙하게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계속 출렁거렸다. - P56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가슴에 걸쳐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안전벨트를 묶은 자리다. 벨트를 벗기려고 들어 올린 왼손에서 다른 아픔을 느꼈다. 눈을 돌려 손을 보고, 저도 모르게 신음을 했다. 빨갛다. 피가나고 있었다. 손등에 꽤 큰 상처가 났다. 깨져 떨어진 유리 파편에 벤것일까? - P57

그런데, 아까 그것은 대체?
살펴보니 타이어는 네 개 모두 무사한 것 같았다. 펑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 지진이었을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컴컴한 숲의 서늘한 공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조용하다. - P58

다시 한숨을 내쉬며 지갑을 안주머니에 넣고, 가와미나미는 차를 등졌다. 쓰러진 풀과 나무에 난 흔적을 더듬어 원래 달리던 길로 돌아갔다.
이 길을 더 가면 문제의 저택이 나올 것이다. 거기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 P60

얼마간 걷다가 I** 마을 상점 주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얼굴 상처 자국을 쓰다듬던 그 손의 움직임. "조심하게"라고 반복하던 그 충고, 그 목소리에 겹쳐져 시시야 가도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 조심해, 코난 군.
이제 ‘걱정할 것 없다. 그냥 구경하러 가는 것일 뿐이니까‘ 라고는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 P61

15분도 채 안 걸었을 때였다. 길가에 낡은 팻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쓰러지기 직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혹시 조금 전의 지진 때문에 이렇게 된 걸까? 낡은 사각 나무 팻말에, 붉은색 페인트로 적은 빛바랜 각진 글씨 -.

여기부터는 우라도 가문 사유지
무단출입 금지 - P62

요즘 연락이 뜸하기는 했는데, 어디 멀리 가기라도 한 걸까? 그러고 보니 전에 올 가을에는 오이타에 있는 고향집에 잠깐 다녀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지금 고향에 가 있는 걸까?
한참 뒤에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시시야는 역시 부재중이었다. 어떻게 된 걸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전화를 걸어볼 만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구마시로 슌노스케神代舜之介. - P63

근대 건축사를 전공한 구마시로 씨는 세이지를 직접 담당한 지도교수는 아니었지만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세이지와는 ‘왠지 뜻이 맞았던 모양이다. 연구실 출입은 물론 요코하마에 있는 구마시로씨의 집에도 몇 차례 놀러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 P63

가와미나미가 이름을 대자 히로요는 "어머, 오래간만이네요"라며 기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 지내세요? 전 이제 곧 입시라 책을 많이 읽을 순 없지만, 그래도 시시야 선생님 작품은 모두 읽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제가 대학에합격하면 가와미나미 씨와 시시야 선생님도 불러서 축하 파티를 하자고 벌써 계획을 세우고 있다니까요.….…." - P64

"아하, 또 나카무라 군 이야긴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겠지. 그래. 뭘 묻고 싶은 거지?"
"예, 그게 말입니다………."
가와미나미가 구마모토 산속에 있다는 암흑관에 대해 이야기하자. 구마시로 교수는 "으음" 하며 낮게 신음했다. - P65

"글쎄, 어떤 이야기였더라. 원래 있었던 저택의 보수인지 개축인지, 사정이 있어서 그런 일을 도와준 적이 있다고 분명히・・・그 이상은 아무리 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가령 ‘암흑관‘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물인가 주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 뒤 그 건물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예정에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군"이란 말이었다. - P66

구마모토 산속에 암흑관이라는 ‘나카무라 세이지의 관이 있다. 내일 혼자 찾아갈 생각이다ㅡ라고. - P66

5

마치 그 풍경 자체가 숨을 죽이고 숲 속에 묻혀 있는 것 같았다. 호수가 거기 있었다. 낮게 드리웠던 구름이 어느새 옅어져, 선명한 저넉놀이 펼쳐지기 시작한 하늘 아래, 붉게 물든 호수가 괴이한 빛을내고 있었다.
호수 위에 섬이 떠 있었다. 성벽처럼 돌을 쌓아올린 벽이 둘러쳐져있었다. 그 너머에 있는 저것이-
저것이 암흑관인가? - P67

암갈색 석재를 쌓아올린 벽에 검게 칠한 평평한 지붕. 여기서는 창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은 뭐랄까, 거인을 위해 주문한 돌로된 관해 같은 느낌이었다. 건물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오두막이라고 부르기에는 꽤 중후한 모습이었다.
길 쪽으로 작은 현관이 있었고, 검게 칠한 문이 보였다.
"실례합니다."
가볍게 노크하면서 가와미나미는 소리쳐 불렀다.
"실례합니다. 계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 P68

건물이 무너져 있었다.
돌로 쌓은 벽 일부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건-이것도 조금 전 지진 때문일까? 무너진 상태를 보니 며칠전이나 예전에 무너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도 안 계세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 P69

가와미나미는 잔교로 향했다.
배가 한 척 있었다. 고물 왼쪽에 노가 달린, 손으로 젓는 작은 배가 잔교의 말뚝에 로프로 연결되어 있다.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잔교는 상당히 낡아 있었다. - P69

해질녘 호수에 뜬 섬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가와미나미는 문득 의문에 휩싸였다.
대체 나는 무엇을⋯⋯⋯⋯⋯
의문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두려움이 되어 점점 부풀어올랐다.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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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에서부터 높은 석축 담을 따라 완만한 경사의 돌계단이 놓여있었다. 말하자면, 이 섬 전체의 ‘현관‘으로 이어지는 통로인 모양이었다.
가와미나미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지만, 역시 숨이 차서 발걸음이 무거웠다. 도중에 한 번 벽에 기대어 쉴 수밖에 없었다. - P71

드넓은 집터였다. 얼마나 넓은지는 여기서 봐서는 짐작을 할 수 없다. 문에서 시작되는 오솔길은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정원수 사이를지나 안으로 이어진다. 흔히 저녁놀이 질 무렵 귀신들이 움직이기시작할 때라고 하는데, 그에 어울릴 정도로 괴이한 어두컴컴한 공간에 얼핏얼핏 드러나는 건물의 그림자는 날갸를 펼치고 대지에 엎드린 거대한 박쥐를 연상케 한다. - P71

(전략), 어둠 속에 녹아들듯 서 있는 그 검은 탑 앞으로 뻗어 있었다.
원형도 네모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다각형의 탑이었다. 같은 각도로 꺾어진 같은 폭의 벽이 여러 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셀 필요도 없이 가와미나미는 그 벽면의 숫자를 금방 눈치챘다. -열 개.
십각형 탑이다. 이것은. - P73

희미하게 스며드는 바깥의 빛에 이끌려 가와미나미는 창문 하나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열자 좁은 발코니가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 빛깔을 잃을 것 같은 검붉은 하늘이 보였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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