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를 끝내고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려는 순간, 메일 도착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아메미야가 보내준 것이었다. ‘아픈 건 아닌지 걱정이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그리고 SNS는 중단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단 한 줄도 읽지 마. 인터넷 세상에 내 편은 없어. 단 한 명도계정 삭제를 추천한다.‘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가즈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의 고마운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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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에서 2분이 지났을 때, 자동문이 열리고 백발의 마른 남자가 로비로 들어섰다. 고가의 블루종을 입고 있었다. 시라이시 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웃는 얼굴을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 P180
<메디닉스 재팬〉은 회원제 종합의료기관이다. - P181
곁에 둔 가방에서 작은 진동음이 울렸다. 미레이는 스마트폰을 꺼내 고객들에게 보이지 않게 데스크 밑에서 화면을 확인했다. SNS메시지를 보내온 것은 어머니 아야코였다. ‘오늘 저녁에 사쿠마 선생님이 집에 오시기로 했어. 19시쯤.‘ 알았어요. 라고 즉시 답장을 보냈다. 스마트폰을 가방에 챙겨 넣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등을 꼿꼿이 폈다. - P182
(전략). 아무나 들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라는 것은 개인정보를 다루는 업무이기 때문이다. 인선에 무엇보다 중요한 점이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은 미레이 자신이 아니라 시라이시 겐스케 변호사였다. 그럴 만큼 믿음을 쌓아온 아버지를 미레이도 존경하고 있었다. - P183
아버지가 스키를 취미로 하고 있어서 미레이도 어린 시절에는 거의 해마다 데려가곤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스키를 타지 않았고 가족이 함께 간 적도 없었다. 그래서 눈이 얼마나 내리든 거의 아무 관심도 없었다. "별로 안 내리지 않을까. 온난화 영향도 있고." 그렇게 무심히 대답했던 게 기억난다. 게다가 아버지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 P184
그날 저녁 때 미레이가 집에 돌아가자 어머니 아야코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라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는데 호출음만 울릴 뿐 연결이 안 된다고 했다. "스마트폰을 어딘가에 놔두고 잊어버린 거 아냐? 휴대전화 쪽으로 걸어보는 게 어때?" - P184
뭔가 착오이기를 빌었지만 그 바람은 경찰서 안치실에서 무너져내렸다. 평안, 이라고 할 만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그 전날 아침에 스키장의 눈을 걱정하던 내 아버지가 틀림없었다. - P185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입니까, 라고 안치실까지 안내해준 경관에게 연달아 물었지만 난처한 듯한 얼굴로, 현재 수사 중입니다, 라는 대답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 P186
고다이는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접했을 때의 일을 확인한 뒤, 최근에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는지 등을 물었다. 하지만 미레이에게는 짐작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 P186
다만 피고인을 변호하는 입장이라서 피해자 측 사람에게서 원한을 사는 일도 있었던 게 아니냐, 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미레이가 반론에 나섰다. - P187
미레이와 아야코는 서로 마주 보았다. 이 집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장소고 아버지의 입을 통해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형사들은 돌아갔다. 그 등짝에 ‘수확 없음‘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 P187
고다이의 목적은 구라키의 진술 일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런 얘기를 시라이시 겐스케에게서 들은 적이 있느냐고 고다이는 물었다. 여기에서도 미레이는 아야코와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시라이시가 혼자 야구장까지 경기를 보러 갔다는 것 자체가 뜻밖이었다. - P188
(전략). 기사를 읽고 아연했다. 이런 어이없는 이유가 범행 동기란 말인가.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이유를 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기가 어이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마음에 걸린 것은 ‘직접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이 진정성 있는 태도라는 말을 듣고‘라는 부분이었다. - P189
"네 아버지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지? 네 아버지는 상대가 절박해질 만큼 궁지에 몰아넣을 분이 아니잖니." 그렇게 말하고 아야코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 기사만으로는 모르겠다. 실제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얘기를 들어보지 않고서는 섣불리 판단할수 없어." - P190
아야코에 의하면, 만일 그 제도를 이용한다면 모치즈키가 지원 담당자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유족이 재판에 참여한다고해도 법률에 무지한 일반인이 복잡한 절차 등을 직접 처리한다는건 무리한 얘기다. - P191
살해 동기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뒤로 취재 요청이 거의 매일같이 들어왔다. 며칠 전에도 난바라라고 이름을 밝힌 프리랜서 기자가 집까지 찾아와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끈덕지게 졸랐다고 한다. "시라이시 겐스케 씨는 공소시효 만료로 면죄부가 주어지는 건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요, 그런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일은없었습니까?" 현관 앞에서 그런 식으로 물었다는 것이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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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 정각에 인터폰 차임벨이 울렸다. 아야코가 수화기를 들고 "네, 들어오세요"라고 답했다. (중랴).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아야코의 뒤를 따라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가 나타났다. 짧은 머리에 큼직한 검은 테 안경을 썼다. 30대 중반으로 보이지만 조금 더 많은지도 모른다. - P192
"의사 가족이라고 모두 의학을 잘 아는 것은 아니죠. 게다가 비교적 새로운 제도라서 변호사 중에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요." 명쾌한 어조로 사쿠마는 말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피해자나 유족이 내부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라는 것이겠지요." - P193
"이를테면 어떤 것을 정하면 될까요?" 미레이가 물었다. "우선 양형이에요. 검찰 측도 나름대로 구형을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피해자 참여인도 구형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 구형이 검찰 측과 달라도 되나요?" "네, 가능합니다. 살인 사건의 경우……." 사쿠마는 잠시 머뭇거리는 표정을 보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검찰의 구형과는 상관없이 유족이 극형을 원하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 P194
"신청서를 제출하면 재판소에서 회답이 올 거예요. 이번 사건의경우에는 허가가 나지 않는 일은 없을 겁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게시작됩니다. 아, 공판 전 정리 수속은 알고 계세요?" "그것도 조금 공부했어요." 아야코가 말했다. "재판 전의 준비 말이지요?" - P195
"네. 피해자 참여제도라는 게 생겼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아마 아버지도 그런 일은 하신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러실 거예요. 변호사 중에서도 특이한 케이스니까요. 무엇보다재판 때 검찰 측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근데 저는 사실 그쪽이 더 익숙해요."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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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쪽 자리에 나란히 앉은 두 여고생의 움직임이 가즈마는 아까부터 자꾸 마음에 걸렸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둘이 뭔가 속닥거리고 있다. 그녀들의 시선이 이따금 자신에게로 향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P197
하지만 누군가 실제로 말을 걸어온 것도 아니다. "당신, 구라키 용의자의 아들이지?"라고 느닷없이 캐묻는 사람 따위, 없었다. 그런데도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 P198
친구의 말에 가즈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말만으로도 고맙다만, 항상 바빠서 쩔쩔매는 너한테 그런 부탁은못 하겠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경우야." 그런데, 라고 가즈마는 말을 이었다. "회사 쪽은 어때, 요즘 시끌시끌하지 않아?" 아메미야는 종이컵을 손에 들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아. 회사 안에서 사건 얘기는 금지사항이야. 한동안 언론 쪽 인간들이 회사 현관 앞에서 어슬렁거렸는데 요새는 그것도안 보이더라고. 포기한 모양이야."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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