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를 끝내고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려는 순간, 메일 도착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아메미야가 보내준 것이었다.
‘아픈 건 아닌지 걱정이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그리고 SNS는 중단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단 한 줄도 읽지 마. 인터넷 세상에 내 편은 없어. 단 한 명도계정 삭제를 추천한다.‘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가즈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의 고마운 - P180

19



오전 10시에서 2분이 지났을 때, 자동문이 열리고 백발의 마른 남자가 로비로 들어섰다. 고가의 블루종을 입고 있었다.
시라이시 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웃는 얼굴을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 P180

<메디닉스 재팬〉은 회원제 종합의료기관이다. - P181

곁에 둔 가방에서 작은 진동음이 울렸다. 미레이는 스마트폰을 꺼내 고객들에게 보이지 않게 데스크 밑에서 화면을 확인했다. SNS메시지를 보내온 것은 어머니 아야코였다.
‘오늘 저녁에 사쿠마 선생님이 집에 오시기로 했어. 19시쯤.‘
알았어요. 라고 즉시 답장을 보냈다. 스마트폰을 가방에 챙겨 넣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등을 꼿꼿이 폈다. - P182

(전략).
아무나 들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라는 것은 개인정보를 다루는 업무이기 때문이다. 인선에 무엇보다 중요한 점이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은 미레이 자신이 아니라 시라이시 겐스케 변호사였다. 그럴 만큼 믿음을 쌓아온 아버지를 미레이도 존경하고 있었다. - P183

아버지가 스키를 취미로 하고 있어서 미레이도 어린 시절에는 거의 해마다 데려가곤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스키를 타지 않았고 가족이 함께 간 적도 없었다. 그래서 눈이 얼마나 내리든 거의 아무 관심도 없었다.
"별로 안 내리지 않을까. 온난화 영향도 있고." 그렇게 무심히 대답했던 게 기억난다. 게다가 아버지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 P184

그날 저녁 때 미레이가 집에 돌아가자 어머니 아야코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라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는데 호출음만 울릴 뿐 연결이 안 된다고 했다.
"스마트폰을 어딘가에 놔두고 잊어버린 거 아냐? 휴대전화 쪽으로 걸어보는 게 어때?" - P184

뭔가 착오이기를 빌었지만 그 바람은 경찰서 안치실에서  무너져내렸다. 평안, 이라고 할 만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그 전날 아침에 스키장의 눈을 걱정하던 내 아버지가 틀림없었다. - P185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입니까, 라고 안치실까지 안내해준 경관에게 연달아 물었지만 난처한 듯한 얼굴로, 현재 수사 중입니다, 라는 대답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 P186

고다이는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접했을 때의 일을 확인한 뒤, 최근에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는지 등을 물었다. 하지만 미레이에게는 짐작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 P186

다만 피고인을 변호하는 입장이라서 피해자 측 사람에게서 원한을 사는 일도 있었던 게 아니냐, 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미레이가 반론에 나섰다. - P187

미레이와 아야코는 서로 마주 보았다. 이 집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장소고 아버지의 입을 통해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형사들은 돌아갔다. 그 등짝에 ‘수확 없음‘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 P187

고다이의 목적은 구라키의 진술 일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런 얘기를 시라이시 겐스케에게서 들은 적이 있느냐고 고다이는 물었다.
여기에서도 미레이는 아야코와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시라이시가 혼자 야구장까지 경기를 보러 갔다는 것 자체가 뜻밖이었다. - P188

(전략).
기사를 읽고 아연했다. 이런 어이없는 이유가 범행 동기란 말인가.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이유를 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기가 어이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마음에 걸린 것은 ‘직접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이 진정성 있는 태도라는 말을 듣고‘라는 부분이었다. - P189

"네 아버지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지? 네 아버지는 상대가 절박해질 만큼 궁지에 몰아넣을 분이 아니잖니." 그렇게 말하고 아야코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 기사만으로는 모르겠다. 실제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얘기를 들어보지 않고서는 섣불리 판단할수 없어." - P190

아야코에 의하면, 만일 그 제도를 이용한다면 모치즈키가 지원 담당자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유족이 재판에 참여한다고해도 법률에 무지한 일반인이 복잡한 절차 등을 직접 처리한다는건 무리한 얘기다. - P191

살해 동기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뒤로 취재 요청이 거의 매일같이 들어왔다. 며칠 전에도 난바라라고 이름을 밝힌 프리랜서 기자가 집까지 찾아와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끈덕지게 졸랐다고 한다.
"시라이시 겐스케 씨는 공소시효 만료로 면죄부가 주어지는 건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요, 그런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일은없었습니까?" 현관 앞에서 그런 식으로 물었다는 것이다. - P191

20


오후 7시 정각에 인터폰 차임벨이 울렸다. 아야코가 수화기를 들고 "네, 들어오세요"라고 답했다. (중랴).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아야코의 뒤를 따라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가 나타났다. 짧은 머리에 큼직한 검은 테 안경을 썼다. 30대 중반으로 보이지만 조금 더 많은지도 모른다. - P192

"의사 가족이라고 모두 의학을 잘 아는 것은 아니죠. 게다가 비교적 새로운 제도라서 변호사 중에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요." 명쾌한 어조로 사쿠마는 말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피해자나 유족이 내부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라는 것이겠지요." - P193

"이를테면 어떤 것을 정하면 될까요?" 미레이가 물었다.
"우선 양형이에요. 검찰 측도 나름대로 구형을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피해자 참여인도 구형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 구형이 검찰 측과 달라도 되나요?"
"네, 가능합니다. 살인 사건의 경우……." 사쿠마는 잠시 머뭇거리는 표정을 보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검찰의 구형과는 상관없이 유족이 극형을 원하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 P194

"신청서를 제출하면 재판소에서 회답이 올 거예요. 이번 사건의경우에는 허가가 나지 않는 일은 없을 겁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게시작됩니다. 아, 공판 전 정리 수속은 알고 계세요?"
"그것도 조금 공부했어요." 아야코가 말했다. "재판 전의 준비 말이지요?" - P195

"네. 피해자 참여제도라는 게 생겼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아마 아버지도 그런 일은 하신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러실 거예요. 변호사 중에서도 특이한 케이스니까요. 무엇보다재판 때 검찰 측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근데 저는 사실 그쪽이 더 익숙해요." - P196

21

벽쪽 자리에 나란히 앉은 두 여고생의 움직임이 가즈마는 아까부터 자꾸 마음에 걸렸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둘이 뭔가 속닥거리고 있다. 그녀들의 시선이 이따금 자신에게로 향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P197

하지만 누군가 실제로 말을 걸어온 것도 아니다. "당신, 구라키 용의자의 아들이지?"라고 느닷없이 캐묻는 사람 따위, 없었다.
그런데도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 P198

친구의 말에 가즈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말만으로도 고맙다만, 항상 바빠서 쩔쩔매는 너한테 그런 부탁은못 하겠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경우야." 그런데, 라고 가즈마는 말을 이었다. "회사 쪽은 어때, 요즘 시끌시끌하지 않아?"
아메미야는 종이컵을 손에 들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아. 회사 안에서 사건 얘기는 금지사항이야. 한동안 언론 쪽 인간들이 회사 현관 앞에서 어슬렁거렸는데 요새는 그것도안 보이더라고. 포기한 모양이야."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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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현재 인공지능, 특히 AGI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특히 실리콘밸리 빅테크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시나리오입니다. 바로 인공지능이 AGI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 인간이 멍청해서 풀지못했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 P10

그래서 AGI를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하고, AGI를 향하는길에 걸림돌, 특히 국가 규제 같은 것들을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요지입니다. - P10

AGI가 인간에게 가져다줄 장기적 혜택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단기적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에 너무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이런 주장을 보통 효과적 가속주의 EffectiAccelerationism (e/acc)라고도 부릅니다. - P11

(전략). 대부분 계속 인공지능한테 쫓겨 다니고, 또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막 기도를 하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두 번째 시나리오입니다. - P11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시점은, AGI가 아직 완전히 모습을드러내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극히 짧은 ‘골든아워‘ 일지도 모릅니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고, 논의는이미 실존적 위기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 P12

AGI를 향해 전 세계가 서로 앞다투어 달려가는 이 시점에우리에게는 마지막 선택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낙관도 무조건적인 비관도 아닌 바로 현실적인 준비입니다. - P13

2장

생성형 AI의 출현

(전략).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언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생성형AI‘ 라는 두 번째 혁신이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언어 문제가 해결되니까 나머지 문제들도 덩달아 해결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 P58

 바로 엔비디아NVIDIA 입니다. 엔비디아는 병렬 처리를 아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반도체구조, GPU를 제안했습니다.  - P58

덕분에 이런 기술을 가속기 accelerator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이게 신의 한 수였습니다. - P59

언어는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별별 방법을 다 생각했습니다. 개중에는 RNN, LSTM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풀고 싶었던 건 이것입니다.  - P60

기존에 시간축 데이터를 분석할 때는 러시아 수학자 마르코프 Andrey Markov가 제안한 마르코프 가설을 많이 썼습니다. 어떤 가설이냐면 지금 이 순간, 어느 특정 시점의 데이터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직전의 데이터라는 가설입니다. - P62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언어를 예로 들어볼까요? 단어 30개로 구성된 긴 문장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30번째 단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게 정말 29번째 단어일까요?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 P62

이 말은 뭐냐하면, 언어는 시간축 데이터인데, 인과관계가선형이 아니라 뒤죽박죽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보니 마르코프 가설로는 도저히 분석이 안 됐던 것이지요. - P63

결국 문제는 이것입니다. 긴 문장의 맨 마지막 단어가 무엇으로부터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 그게 뒤죽박죽이라는 것이지요. - P64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했지요. 그래서 인공지능으로 인간의 언어 문제를 풀고자 했던 과학자들이 오래된 언어학논문들을 찾아봤습니다. 1957년에 퍼스John Rupert Firth라는 영국 언어학자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도대체 의미라는게뭘까?" 그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단어의 의미가 근처에 있는 단어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 P65

예를 들어 귀여운 고양이‘ 같은 조합은 자주 발견할 수 있지만, ‘공부 잘하는 고양이‘는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교수‘라는 단어를 보면 어떨까요? 저는 평생 ‘귀여운 교수‘라는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확률이 거의 0에 수렴할 겁니다. - P66

그럼 우리가 하는 건 뭘까요? 단어의 문맥을 보자는 겁니다. 이게 새로운 접근 방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단어라고 했지만, 사실 인간 언어의 단위는 단어가 아니라 더 잘게 쪼갤 수 있습니다. 토큰token이라는 단위로 쪼갤 수 있지요. - P66

이런식으로 모든 단어를 임베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에는 뭘 했을까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언어에서 문장은 여러 단어로 이루어져 길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문장 내에서는 단어들이 서로 뒤죽박죽으로 영향을 줍니다. - P68

 이제 단어의 순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어가 등장하는 주변 단어들, 그러니까 ‘문맥‘이라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 P69

이 방법을 집중 스코어 attention score라고 부릅니다. 문장이 있으면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그걸 계산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계산 방법이 있고, 이를 제대로 표현하기 시작한 게 트랜스포머 알고리즘Transformer Algorithm 입니다. - P69

문제는 데이터가 많으면
해결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렇게 언어를학습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예제, 데이터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작가의 문장만 학습시키면 그 작가의 스타일만 배우게 되니까 보편적인 언어 사용 패턴을 학습하지 못하겠지요. - P70

(전략). 이걸 컨텍스트길이 context length라고 하는데, 이게 가장 중요한 파라미터 중 하나입니다. 컨텍스트 길이가 길수록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기 챗GPT는 앞뒤 100~200개 단어를 봤지만, 최신 모델들은 앞뒤 1,000만개 단어를 보고 이해합니다. - P71

이런 집중 스코어 관계를 학습한 걸 우리는 거대 언어 모델 Large Language Model(LIM)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P71

참고로 말하자면 지금 AI 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된 엔비디아에는 큰 리스크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 AI 연구에서엄청난 양의 고성능 GPU가 필요한 이유는 트랜스포머 알고리즘이 너무 비효율적이라 계산량이 천문학적이기 때문입니다. - P72

하지만 일단 지금은 엔비디아가 거의 독점하고 있습니다. 2등은 AMD, 3등은 인텔인데, 인텔은 기술력이 없고 AMD는 하드웨어 기술력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엔비디아가 GPU를 만들면서 CUDA라는 소프트웨어 환경을 같이 만들어 놨다는 사실입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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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가는 료스케의 모습을 백미러로 보았는지 택시뒷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고난 출구에서 나카스로 가려면 구 해안도로를 가로질러 미타테바시(御楯橋)를 지나야 한다. - P53

역 앞에는 아직 항만 관계자들로 북적거리던 시절의 자취가 밴 선술집이 늘어서 있고, 좁다란골목에는 언제부터인가 부쩍 늘어난 한국 뷰티숍들이 넘쳐난다. - P53

료스케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런 가게에 가본 적이 없다. 한 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P53

뒤돌아보며 묻는 료스케에게 마리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도빼지 않은 채 "저거, 옥(玉) 녹차!"라며 턱으로 가리켰다.
"어떤 거??
"거기 그거."
코트 주머니 안에 따끈한 캔 하나만 넣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온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있잖아, 전부터 궁금했는데……… 료스케는 아직 못 잊는 사람이 있지? - P55

료스케는 시선을 피하며 주머니에서 캔커피를 꺼냈다.
"으음, 료스케는 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사귀는 거야?" - P55

"료스케는 왜 자기 얘길 안 해? 설마 할 얘기가 하나도 없는건 아니겠지? 25년이나 살았으면서…………. 혹시 어제 태어나서 추억할게 아예 없는 거야?" - P56

료스케는 얼굴을 들여다보는 마리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물론 아무 생각도 없는 건 아니다. (중략). 특별히 대단한 걸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마음에 품고있거나 생각한 일들을 적확하게 표현할 일본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렇다고 영어나 프랑스어를 할 수도 없으니, 자신은 과연 무엇으로 사고해야 하는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 P57

료스케는 미소 짓던 뺨 근육을 무리하게 원상태로 되돌리며말했다.
"료스케는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과 사귀었다면서"
"어?
"미안, 유코한테 들었어. 아마도 유코는 오스기에게 들었겠지만." - P58

"유코 커플은 서로 뭐든 숨김없이 얘기하잖아."
변명처럼 들리는 마리의 말에 료스케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얘기였어?"
"아니, 뭐 특별히…" - P59

"어떤 여자였는데? 같이 살았다면서"
"뭐, 그냥 평범했어. 평범한 여자."
"평범하다니?"
"……평범한 게 평범한 거지."
"료스케, 그분 좋아했어?" - P59

료스케는 오전에 마닐라에서 온 화물을 정리하는 작업에 쫓겨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창고로 돌아온 시각은 오후 2시 30분이 지나서였다. - P60

자기에게 맞는 다른 일을 알지 못하는 료스케는 다카하시 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마닐라에서 대만에서, 멀리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보낸 화물들이 매일같이 이곳 시나가와 부두 창고로 밀려들어온다. 스트래들캐리어로 또는 컨테이너째 화물을 육지로 들어 옮기고난 후에는 포크리프트로 분류한다. - P61

짧은 복도를 지나 사무실로 들어서자 한층 더 따뜻한 공기가온몸을 휘감았다.
"오호, 니기타! 때마침 잘 왔네."
노다(野田) 주임이 형식뿐인 접수창고 테이블 너머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풍선껌을 입에 물고 서 있었다.
"이분들이 여기를 좀 견학하고 싶어하시거든." - P62

료스케가 조금 곤란한 듯 중얼거리자 "정말로 부두 주변을 잠깐 동안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라고 이번에는 키가 크고 볼이 홀쭉한 여성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분들, 소설가래."
노다 주임은 그렇게 말하며 혀로 풍선껌을 쭉 내밀었다.
"소설가?"
"아니, 이쪽이 소설가고, 난 담당을 맡은 편집자예요." - P63

다시 사무실 계단을 내려와 맞은편으로 오다이바가 건너다 보이는 부두 끝에 서자, 도쿄만을 거쳐 온 차가운 바람이 뺨이 아플 정도로 세차게 휘몰아쳤다. 입을 벌릴 수 없을 정도로 차디찬 바람이 얼어붙은 귀를 두드리며 작은 마찰음을 일으켰다.
"거 봐, 내 말이 맞았죠?"
"거봐,
"정말 얇은 코트로는 걸어 다닐 수도 없었겠네요." - P64

두 사람 뒤쪽에서 줄곧 등을 웅크리고 서 있던 료스케는 타이밍을 살피다 "저어 대충 이 주변이 국내화물을 취급하는 창고이고, 건너편이 해외에서 들어오는 화물 전용입니다만……………." - P65

료스케는 자기 뒤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사무실에서 걸어 나올 때부터 줄곧 ‘레인보우브리지‘ 쪽만 바라보았던 두 사람은 해외화물 전용 창고 안벽에 정박해 있는 필리핀 화물선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 P65

"저어, 어떤 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인가요?"
(중략).
"연애소설이에요."
입술을 떨며 그렇게 대답한 사람은 소설가였다.
"연애소설" - P65

"여기가 소설의 무대가 되는 건가요?"
작은 목소리로 묻는 료스케의 말은 곧바로 강풍에 밀려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무대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여기서 일하는 남자가 나오니까."
아오야마가 여전히 입술을 떨어대며 대답했다. - P66

"우와, 저건 또 뭐야?"
료스케가 대답을 하자마자 아오야마가 갑자기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의 손가락이 컨테이너 집적장을 가리켰다.
"정말, 저건 뭐지? 어머나, 움직인다 움직여…………. 밑에 차바퀴가 붙어 있네."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치이도 료스케의 몸 뒤로 바람을 피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 P67

료스케 역시 가끔 시시한 질문을 두 사람에게 던졌다. "언제쯤 그 소설이 완성되죠?" "소설가는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지내나요?"라는 등의 질문이었다.
그럭저럭 부두 견학을 끝내고, 료스케는 컨테이너용 트레일러 출구인 바깥문까지 두 사람을 배웅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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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공항 카페를 나온 료스케와 ‘로코‘는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모노레일 탑승장으로 향했다. 료스케는 하마마쓰초까지 가는 티켓 2장을 사서 그중 1장을 ‘로코‘에게 건넸다. - P26

문이 닫히면서 아주 짧은 순간 차체가 위로 붕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P26

"정말 이대로 갈 거예요"
료스케가 유리창에 비친 ‘료코‘를 보며 물었다.
"미안, 내일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해서……………."
그 순간, 유리창 너머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지만 ‘로코‘는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그렇게 말했다.
"내가 맘에 드는 스타일이 아닌 거죠?" - P27

"아무튼 좀 이상하잖아요. 이대로 하마마쓰초에서 바이바이할 거면 뭣 때문에......."
"그럼 뭐? 료스케는 단지 그것 때문에 나온 거란 얘기예요?
"어?
"지금,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건 그쪽도 똑같을 것 아닙니까?" - P28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캄캄한 터널을 통과하는 모노레일 차창에 희미하게 비쳤다.
(중략).
그때 갑자기 시야가 밝아졌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모노레일 차창 밖으로 조명이 환하게 밝혀진 아름다운 공항 풍경이 펼쳐졌다. (중략).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 광경 쪽으로 시선을 빼앗긴 료스케의눈길을 좇아 ‘로코‘ 도 등 뒤를 돌아다봤다. - P29

"그건 그렇고 처음 모노레일을 타본 감상은 어때요? 물론 올 때도 탔겠죠?"
한참 동안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 P30

"이미 올 때 탔었죠"
대답이 없는 ‘료코‘ 에게 료스케는 재차 그렇게 물었다. - P30

료스케는 그녀의 뜻밖의 대답에 매우 당황했다.
"난 올 때 탔는 줄 알았는데 왜 안 탔어요?"
"그냥・・・・・・ 돌아갈 땐 같이 탈 수 있으니까."
‘료코‘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 양 그렇게 대답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 P31

"그러니까, 지금 처음 타보는 거라든가 뭐 그런......."
"말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뭐가 달라진다기보다・・・・・・ 보통 그런 경우 얘길 하지 않나요? 예를 들면 표를 살 때 ‘와아, 난생처음이야‘ 라는 식의…………….
흔히들 그런 말을 하는 건데."
"그런 말을 누가 해요. 료스케는 세이부이케부쿠로(西武池袋)선을 처음 탄다고 표사는 곳에서 ‘우와‘라고 기뻐하나요?" - P31

"그래도・・・・・・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모노레일을 타보고 싶어서 약속장소를 하네다공항으로 정했던 거 아닌가요?"
(중략).
"그러니까, 이게 처음이라고 말하면 나도 뭐랄까 조금은 더 즐겁게 해주려고 할 거 아니냔 말이죠."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 P32

모노레일이 아파트에 가장 근접했다고 생각한 순간, 그 불빛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저건 오기 그림자예요."
"네?"
"오스기, 내 옆방에 사는 동료."
불빛 아래서 움직이는 오스기의 그림자는 창가에 널어둔 빨래를 걷는 듯했다. - P36

이별을 아쉬워하듯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다보며
‘로코‘ 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거기 살아요. 벌써 5년째죠."
"좋겠다!"
"뭐가요?"
"으음, 자기가 어디 사는지 그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도 있으니까. 그건 행복한 일이잖아요." - P37

시나가와 부두

네 귀퉁이에 수증기가 어린 유리창 너머로 첫눈이 흩날렸다. 쌓일 정도의 눈은 아니었지만 거리의 소음을 빨아들이기에는충분한 하얀 눈이었다. 가게 안의 난방 탓인지, 아니면 김치찌개를 먹어서 그런지 후끈 달아오른 몸 구석구석이 아까부터 견딜 수 없을 만큼 가려웠다. - P41

예전에 ‘차이를 아는 남자‘ 라는 카피가 붙은 인스턴트커피 광고가 텔레비전에 나왔다. 그 광고를 보며 "어떻게 하면 차이를 아는 남자가 될 수 있을까?"라고, 아리미 선생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은 교복 차림으로 소파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앉아 있는 료스케에게 과일주스 팩을 휙 던져주며 "하나가 아니라 둘을 알면 되겠지." 라고 말하며 웃었다. - P42

아리미 선생님은 영어담당 교사였다. 료스케는 고등학교를졸업하자마자 그녀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빨리 돈을 모아 누군가와 같이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부모님에게 불만이 있었던 건 아니다. - P43

양말도 벗지 않고 침대로 들어가려는 료스케에게 아리미 선생님은 늘 답답해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럴 때 료스케가 뭐라고 대꾸를 하면 반드시 말다툼이 되곤 했다.
"잠깐만 자고 일어날 거야. 조금만 자고 나서 제대로 목욕할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 매일 아침까지 그냥 자버리잖아." - P44

"둘이서 같이 약속했으면서..
선생님은 애처롭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료스케는 침대 위에서 거칠게 몸을 뒤척이고는 줄곧 선 채 자기를 내려다보는 그녀로부터 등을 돌려버렸다. - P45

료스케는 오스기의 여자친구인 유코의 소개로 처음 마리를 만났고, 어느새 2개월가량이 지났다. 물론 둘이서만 데이트를 한 적도 있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오스기나 유코와 함께 넷이서 만나는 쪽이 료스케에게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 P47

평상시처럼 또다시 유코와 오스기의 입씨름이 시작될 것 같았는지, 기다리다 지쳤다는 듯 마리가 "자, 밖에 내리는 눈을 위하여 건배!"라고 말하며 서둘러 잔을 부딪쳤다. - P48

료스케는 분명 자신이 마리라는 여자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를 싫어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쪽이 쉬울 것 같은 어딘가 뒤틀린 감정이었다. - P49

(전략).
"아그네스 창(일본 연예인)처럼 일본식 영어로 불러줄 거야?"
"뭐야, 일본식 영어라는 게."
"그 왜, 료스케의 형편없는 영어 말이야."
유코를 끌고 가는 오스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리가 "어떡해, 갈까?"라며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 내버려둬."라고 대답한 료스케는 "자그럼, 먼저 가 있을게!"라고, 멀어져가는 두 사람 등을 향해 외쳤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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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MIT의 컴퓨터 과학자 요제프 바이첸바움Joseph Weizenbaum, 1923~2008은 세계 최초의 챗봇 일라이자 ELIZA를 개발합니다. 일라이자는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의 희곡 <피그말리온>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입니다. - P290

이 소녀의 이름을 딴 일라이자 챗봇은 심심이보다 수십 년 전에등장한 세계 최초의 챗봇이었고, 규칙 기반으로 구현되었습니다. 규칙 또한 매우 단순했습니다. (중략).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¹

(후략). - P290

7. 챗봇: 챗GPT, 1분 안에 보고서 작성해줘


1 https://en.wikipedia.org/wiki/ELIZA_effect - P462

여기서 일라이자는 정신과 의사 역할이고, 사람은 환자 역할입니다. 얼핏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단순한 규칙에 따라 의사는 환자가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의사 역할을 한 일라이자의 대화 규칙 중 일부입니다.² - P291

2 유신, 《인공지능은 뇌를 닮아가는가》, 컬처룩, 2014, 176쪽. - P462

전형적인 if-then 규칙입니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대답을 하는 거죠. 여기에 더해 일라이자는 상대방이 사용한 문장에서 핵심 어구를 추출하여 내부적으로 미리 정한 문장에 끼워넣어 되묻습니다. - P292

하지만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컴퓨터와 대화한다는 발상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심지어 일라이자에게 애착을 느낀 사람도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 P293

(전략).
이처럼 자연스러운 대화를 위해 실제로 수많은 사람이 나눈 카카오톡 데이터를 두고 학습했습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무려 100억건 이상의 한국어 데이터를 활용했다고 합니다. 데이터의 출처가 문제가 되었는데, 이루다의 개발사는 자사의 연애 서비스에 이용자들이 남긴 개인적 대화까지 학습에 동원했습니다. - P294

딥러닝을 기반으로 한 이루다가 규칙 기반의 심심이와 가장 달랐던 점은 어떤 말을 할지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 P294

이는 이미 수년 전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챗봇 테이가 일으킨문제와 유사합니다. (중략). 테이가 스스로 학습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테이에게 차별과 혐오, 욕설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 P295

이처럼 진정한 인공지능을 탑재한 챗봇은 아직 요원합니다. 무엇보다 챗봇 같은 ‘생성‘ 모델에게는 사소한 실수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 P296

컴파일러, 컴퓨터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다

기계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개념은 가장 먼저 컴파일러Compiler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P296

컴파일러의 역사는 여성 해군 제독 그레이스 호퍼 Grace Hopper. 1906~92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중략). 당시만 해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란 컴퓨터에 기계어를 직접 입력하는 작업을 의미했습니다. - P294

코볼COBOL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가 탄생하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코볼의 어머니로 불리기도 합니다. - P298

컴파일러의 등장은 일종의 혁신이었습니다. 프로그램을 작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일주일에서 5분으로 줄었죠. 하지만 호퍼가 처음이 아이디어를 상관에게 보고하자, 미친 생각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 P298

챗봇이 인간이 내뱉는 모든 질문에 마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답변할 수 있다면 그건 곧 범용 인공지능(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지적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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