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위에 파일이 펼쳐져 있었다. 앉아 있어서 그게 무엇인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선준의 심장은 쿵 하고 떨어졌다. 순식간에 그의 뇌를 점령하는 좋지 않은 예감 때문이었다. - P108
예원의 앞으로 가입되어 있는 보험증서였다. 펼쳐진 곳에 있는 ‘상해 고도후유장애 진단금‘이라는 글자가 그의 눈에 박혔다. 진단금은 3천만 원이었다. - P108
병실로 간 선준이 문을 열었을 때 예원은 침대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한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선준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였다. - P108
병실로 들어간 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소파에 가 앉았다. 병실은 넓었다. 그게 어쩌면 다행이었다. 다인실이었다면 지금처럼 멀리 떨어져 앉을 수 없었을 것이다. - P109
병실로 들어간 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소파에 가 앉았다. 병실은 넓었다. 그게 어쩌면 다행이었다. 다인실이었다면 지금처럼 멀리 떨어져 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줌마가 갑자기 없어져서 놀라지 않았어?" "배고프지 않아?" - P109
아무렇지도 않은 예원의 목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설마설마했었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그 돈을 기도원에 가져다주고 들어갈 생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것이다. 물론 자신 역시 선우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 P109
보험금은 후유 장애가 80퍼센트 이상일 경우에만 지급되는 것이었다. - P110
그녀는 비굴한 웃음을 흘리지도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인정한 뒤 법정에선 피의자 같은 얼굴이었다. 어떤 처분이든 받아들이겠다는 듯한 눈이었다. - P110
"이혼하자." 예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내젓지도 않았다. - P110
"더는 널 버틸 자신이 없어." 선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 P111
선준은 속도를 높였다. 평소 옆에 앉은 사람이 답답하다고 할정도로 규정 속도를 지키던 선준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은 계속해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댔다. 차가 평소에 내지 않던 소리를 냈지만 선준은 멈추지 않았다.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 P112
다시 한번 섬광이 눈앞을 갈랐다. 그의 머릿속이 그 빛을 따라 하얗게 변해버렸다. 선준은 온 힘을 다해 핸들을 꺾었다. 크게 차머리가 돌았다. 중앙선을 넘어 온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P113
"안돼, 선우야." 신음과도 같은 말이 예원의 입에서 흘렀다. 천둥과 함께 찾아온 악몽이 그녀를 괴롭혔다. 번쩍, 또 한 번 번개가 쳤다. 쉑 소리를 내며 밝은 빛이 하늘을 향해 쏘아 올랐다. - P113
"선우야!" 외치고 싶은데 가슴속 응어리져만 갈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을 밀쳤다. 여기저기서 불평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 P114
그때 움켜쥔 그녀의 주먹을 가만히 잡는 손이 있었다. ‘선우야?" 예원은 자신의 손을 잡은 작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P114
비에 흠뻑 젖은 채 선준은 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로운의 손에 진정되어가는 예원의 존재가 애처로웠다. - P115
선준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리카락 끝에서 빗물이 뚝 떨어졌다. 그는 그녀를 버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버릴 자신도 없었다. - P115
희망 정신요양원의 간판이 보이자 선준은 속도를 늦췄다. 경비실의 문이 열리며 그의 차량을 확인한 경비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은 심명훈의 근무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 P116
요양원에 온 것은 불과 이틀만이었지만 차에서 내려 건물을 올려다보는 선준에게는 생경하게 느껴졌다. 한때는 그의 짐을 덜어주는 존재였지만, 오늘은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 P116
지금부터 요양원으로 들어가 벌이려는 말도 안 되는 일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선준은 곧장 원장실로 향했다. - P116
"이선준 씨!" 선준을 발견한 민서진이 반색했다.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기운과 함께 화색이 돌았다. 반면 선준을 훑어보는 총무의 눈에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 P117
"도와주세요, 원장님. 제발 한번만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에요, 선준 씨? 혹시 로운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예요?" - P117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일어나서 차분히 말해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가잖아요." 그녀는 설득하듯 말하며 선준을 일으켰다. 선준은 두 손을 모으고 죄인 같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 P118
"로운이가.....… 우리 선우를 봤대요." "네?" 상상치도 못한 것을 들었다는 듯 민서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총무를 돌아보았다. - P118
민서진은 거의 아무 말도 못 한 채 터질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선준을 쳐다보기만 했다. 몇 번이고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었지만 그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 선준이 말을 마쳤을 때 그녀는 믿을수 없다는 듯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기막힌 한숨을 터뜨릴 뿐이었다. - P119
"근데 로운이가 마지막 희망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오늘왜 로운이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거예요?" 선준이 얼굴을 들었다. 민서진의 이마가 구겨져 있었다. "로운이를 데리고 기도원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한 순간 민서진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앉아서는치솟는 화를 감당하는 게 버거운 듯했다. - P119
"일주일만 아니 5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절대 로운이를 다치게 하거나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병원에 피해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책임질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책임지겠습니다. ・・・・・・ 선우의 이름을 들은 이상, 이전처럼 살 수는 없어요." - P120
민서진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3년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예원이 다니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와도 친분이 있다. 예원이 얼마나 무너졌는지를 누구보다도더 잘 알았다. 선준의 고민도 고통도 자주 전해 들었다. - P121
예원이 다쳐 사정이 안 된다면 자신이 직접 차를 끌고 가 로운을 데려올 생각까지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말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 P121
이번에는 선준이 돌아섰다. 민서진이 잡을 수 없을 만큼 단호했다. 선준은 주저 없이 원장실을 나갔다. 민서진은 한 손을 이마에 얹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 P122
"일부러 애도 안 데리고 온 사람이야. 지금 막아 세운다고 애가 어디 있는지 순순히 말할 것 같아?" "그래서 신고를... ..: "정부 지원 평가가 코앞이야." 민서진의 말문이 막혔다. - P122
. 이미 선준이 하려는 말이 무언지를 안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아파?" 예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퇴원할까?" 그제야 예원의 고개가 들렸다. - P123
"어쩌면 로운이가 잘못 본 걸 수도 있고, 그냥 비슷한 아이일 수도 있어. 우리는 그 기도원을 찾아내지 못할지도 몰라." 예원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는 말없이 선준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선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가보자." - P124
깡마르고 윤기 하나 없는 팔의 살갗이 그의 목에 닿았다. 그에게 안긴 예원의 무게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말라버리고 가벼워져버린 몸이 버틸 세상의 무게를, 그는 함께 지기로 결심했다. - P124
퇴원 수속 및 수납이라고 적힌 푯말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기계적으로 플라스틱 바구니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선준을 향해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 P124
"퇴원 수속이시고요. 68만 3200원입니다. 다음 예약까지 수납하실 건가요?" 간호사실에서 알려준 내원일은 일주일 뒤였다. 꿰맨 부위에 염증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 P125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밀치며 달려 나갔다. 그의 눈이빠르게 예원과 로운을 찾아 헤맸다. 예원은 병원 로비에서 로운의 손을 잡고 벽에 붙어 있는 게시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P125
오랜 시간 보안 회사에 근무하면서 보안 회사의 긴급 출동 차량, 구급 차량, 경찰 차량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데도 그것조차 잊을 정도로 긴장했던 모양이다. - P126
창구로 다시 갔을 때 선준이 서 있던 창구에는 다른 사람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멀뚱히 보자니, 창구 직원이 선준을 발견하고는 귀찮은 내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 P126
그녀는 출력된 종이를 한 번 확인하고는 카드와 함께 내밀었다. "수고하세요." 카드를 주머니에 넣다가 선준은 문득 현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P126
그런 생각이 들자 선준은 마음이 급해졌다. 예원은 아직도 게시판 앞에 있었는데 무엇을 보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게시판에는 선우의 실종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예원이 붙였을 터였다. - P127
예원을 향해 그가 내지르는 소리가 선준의 귀를 파고들었다. "여기에 아무거나 함부로 붙이면 안 돼요! 사무실에서 허가받은 것만 붙일 수 있다고요!" 그는 예원의 변명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 P127
선준이 주저 없이 예원을 향해 뛰었다. 그 순간 로운이 예원의 부들거리는 손을 잡았다. 당장에라도 집어삼킬 듯 경비원을 노려보던 예원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로운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 P128
선준은 로운을 보았다. 요양원을 나올 때 예원의 손을 잡았던 로운은 이번에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선우를 본 적이 있고, 기도원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아이. 그리고 예원을 안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 - P128
아내가 물건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뭔 기도원인가 뭐라든가." "이상한 여자네." 평소 성격대로라면 손님 흉은 보는 게 아니라며 한 마디를 할거라 생각했는데, (후략) - P134
여자가 지낸다는 기도원이 어떤곳인지, 여자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같은 것들이었다. 그때 생각났다는 듯 아내가 허벅지를 탁 치며 말했다. "기억났어. 울림 기도원이야. 저 여자 사는 곳." - P134
"20분 정도 됐죠? 다시 전화해볼까요?" "아뇨. 재촉하다가 괜한 소리 들을지도 몰라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그렇게 말하는 최두연도 답답한 내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발끝을 들어 안쪽을 흘깃거렸다. 안에서 누가 나오지 않을까 했다. "근데 여기가 맞긴 맞는 거죠?" - P135
두 사람은 교육청 전수조사 때문에 이곳에 서 있었다. 몇 년 전아동 학대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학교 장기 미출석 학생에 대한 전수조사 방침이 교육부에서 내려왔다. - P135
신미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석희는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어야 할 나이지만 종교적 문제로 홈스쿨링을 하겠다고 신고된 어린이였다. 그러나 홈스쿨링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도점검해봐야 했고, 혹시 모를 가정 내 폭력이 이루어지지는 않는지 확인하는 것도 필수였다. - P136
"이곳은 신의 영역입니다. 함부로 들어올 수 없어요." 신미현은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종교적 문제를들고 나오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인터폰을 받은 사람은 아이의 엄마인 김실자가 돌아올 때까지 바깥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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