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위에 파일이 펼쳐져 있었다. 앉아 있어서 그게 무엇인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선준의 심장은 쿵 하고 떨어졌다. 순식간에 그의 뇌를 점령하는 좋지 않은 예감 때문이었다. - P108

예원의 앞으로 가입되어 있는 보험증서였다. 펼쳐진 곳에 있는
‘상해 고도후유장애 진단금‘이라는 글자가 그의 눈에 박혔다. 진단금은 3천만 원이었다. - P108

병실로 간 선준이 문을 열었을 때 예원은 침대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한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선준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였다. - P108

병실로 들어간 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소파에 가 앉았다. 병실은 넓었다. 그게 어쩌면 다행이었다. 다인실이었다면 지금처럼 멀리 떨어져 앉을 수 없었을 것이다. - P109

병실로 들어간 선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소파에 가 앉았다. 병실은 넓었다. 그게 어쩌면 다행이었다. 다인실이었다면 지금처럼 멀리 떨어져 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줌마가 갑자기 없어져서 놀라지 않았어?"
"배고프지 않아?" - P109

아무렇지도 않은 예원의 목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설마설마했었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그 돈을 기도원에 가져다주고 들어갈 생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것이다. 물론 자신 역시 선우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 P109

보험금은 후유 장애가 80퍼센트 이상일 경우에만 지급되는 것이었다. - P110

그녀는 비굴한 웃음을 흘리지도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인정한 뒤 법정에선 피의자 같은 얼굴이었다. 어떤 처분이든 받아들이겠다는 듯한 눈이었다. - P110

"이혼하자."
예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내젓지도 않았다. - P110

"더는 널 버틸 자신이 없어."
선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 P111

선준은 속도를 높였다. 평소 옆에 앉은 사람이 답답하다고 할정도로 규정 속도를 지키던 선준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은 계속해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댔다. 차가 평소에 내지 않던 소리를 냈지만 선준은 멈추지 않았다. 가슴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 P112

다시 한번 섬광이 눈앞을 갈랐다. 그의 머릿속이 그 빛을 따라 하얗게 변해버렸다. 선준은 온 힘을 다해 핸들을 꺾었다. 크게 차머리가 돌았다. 중앙선을 넘어 온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P113

"안돼, 선우야."
신음과도 같은 말이 예원의 입에서 흘렀다. 천둥과 함께 찾아온 악몽이 그녀를 괴롭혔다.
번쩍, 또 한 번 번개가 쳤다.
쉑 소리를 내며 밝은 빛이 하늘을 향해 쏘아 올랐다. - P113

"선우야!"
외치고 싶은데 가슴속 응어리져만 갈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을 밀쳤다. 여기저기서 불평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 P114

그때 움켜쥔 그녀의 주먹을 가만히 잡는 손이 있었다.
‘선우야?"
예원은 자신의 손을 잡은 작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P114

비에 흠뻑 젖은 채 선준은 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로운의 손에 진정되어가는 예원의 존재가 애처로웠다. - P115

선준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리카락 끝에서 빗물이 뚝 떨어졌다.
그는 그녀를 버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버릴 자신도 없었다. - P115

희망 정신요양원의 간판이 보이자 선준은 속도를 늦췄다. 경비실의 문이 열리며 그의 차량을 확인한 경비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은 심명훈의 근무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 P116

요양원에 온 것은 불과 이틀만이었지만 차에서 내려 건물을 올려다보는 선준에게는 생경하게 느껴졌다. 한때는 그의 짐을 덜어주는 존재였지만, 오늘은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 P116

지금부터 요양원으로 들어가 벌이려는 말도 안 되는 일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선준은 곧장 원장실로 향했다. - P116

"이선준 씨!"
선준을 발견한 민서진이 반색했다.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기운과 함께 화색이 돌았다. 반면 선준을 훑어보는 총무의 눈에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 P117

"도와주세요, 원장님. 제발 한번만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에요, 선준 씨? 혹시 로운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예요?" - P117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일어나서 차분히 말해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가잖아요."
그녀는 설득하듯 말하며 선준을 일으켰다. 선준은 두 손을 모으고 죄인 같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 P118

"로운이가.....… 우리 선우를 봤대요."
"네?"
상상치도 못한 것을 들었다는 듯 민서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총무를 돌아보았다. - P118

민서진은 거의 아무 말도 못 한 채 터질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선준을 쳐다보기만 했다. 몇 번이고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었지만 그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 선준이 말을 마쳤을 때 그녀는 믿을수 없다는 듯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기막힌 한숨을 터뜨릴 뿐이었다. - P119

"근데 로운이가 마지막 희망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오늘왜 로운이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거예요?"
선준이 얼굴을 들었다. 민서진의 이마가 구겨져 있었다.
"로운이를 데리고 기도원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한 순간 민서진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앉아서는치솟는 화를 감당하는 게 버거운 듯했다. - P119

"일주일만 아니 5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절대 로운이를 다치게 하거나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병원에 피해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책임질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책임지겠습니다. ・・・・・・ 선우의 이름을 들은 이상, 이전처럼 살 수는 없어요." - P120

민서진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3년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예원이 다니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와도 친분이 있다. 예원이 얼마나 무너졌는지를 누구보다도더 잘 알았다. 선준의 고민도 고통도 자주 전해 들었다. - P121

예원이 다쳐 사정이 안 된다면 자신이 직접 차를 끌고 가 로운을 데려올 생각까지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말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 P121

이번에는 선준이 돌아섰다. 민서진이 잡을 수 없을 만큼 단호했다. 선준은 주저 없이 원장실을 나갔다. 민서진은 한 손을 이마에 얹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 P122

"일부러 애도 안 데리고 온 사람이야. 지금 막아 세운다고 애가 어디 있는지 순순히 말할 것 같아?"
"그래서 신고를... ..:
"정부 지원 평가가 코앞이야."
민서진의 말문이 막혔다. - P122

. 이미 선준이 하려는 말이 무언지를 안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아파?"
예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퇴원할까?"
그제야 예원의 고개가 들렸다. - P123

"어쩌면 로운이가 잘못 본 걸 수도 있고, 그냥 비슷한 아이일 수도 있어. 우리는 그 기도원을 찾아내지 못할지도 몰라."
예원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는 말없이 선준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선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가보자." - P124

깡마르고 윤기 하나 없는 팔의 살갗이 그의 목에 닿았다. 그에게 안긴 예원의 무게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말라버리고 가벼워져버린 몸이 버틸 세상의 무게를, 그는 함께 지기로 결심했다. - P124

퇴원 수속 및 수납이라고 적힌 푯말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기계적으로 플라스틱 바구니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선준을 향해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 P124

"퇴원 수속이시고요. 68만 3200원입니다. 다음 예약까지 수납하실 건가요?"
간호사실에서 알려준 내원일은 일주일 뒤였다. 꿰맨 부위에 염증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 P125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밀치며 달려 나갔다. 그의 눈이빠르게 예원과 로운을 찾아 헤맸다. 예원은 병원 로비에서 로운의 손을 잡고 벽에 붙어 있는 게시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P125

오랜 시간 보안 회사에 근무하면서 보안 회사의 긴급 출동 차량, 구급 차량, 경찰 차량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데도 그것조차 잊을 정도로 긴장했던 모양이다. - P126

창구로 다시 갔을 때 선준이 서 있던 창구에는 다른 사람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멀뚱히 보자니, 창구 직원이 선준을 발견하고는 귀찮은 내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 P126

그녀는 출력된 종이를 한 번 확인하고는 카드와 함께 내밀었다.
"수고하세요."
카드를 주머니에 넣다가 선준은 문득 현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P126

그런 생각이 들자 선준은 마음이 급해졌다. 예원은 아직도 게시판 앞에 있었는데 무엇을 보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게시판에는 선우의 실종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예원이 붙였을 터였다. - P127

예원을 향해 그가 내지르는 소리가 선준의 귀를 파고들었다.
"여기에 아무거나 함부로 붙이면 안 돼요! 사무실에서 허가받은 것만 붙일 수 있다고요!"
그는 예원의 변명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 P127

선준이 주저 없이 예원을 향해 뛰었다. 그 순간 로운이 예원의 부들거리는 손을 잡았다. 당장에라도 집어삼킬 듯 경비원을 노려보던 예원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로운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 P128

선준은 로운을 보았다. 요양원을 나올 때 예원의 손을 잡았던 로운은 이번에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선우를 본 적이 있고, 기도원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아이. 그리고 예원을 안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 - P128

아내가 물건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뭔 기도원인가 뭐라든가."
"이상한 여자네."
평소 성격대로라면 손님 흉은 보는 게 아니라며 한 마디를 할거라 생각했는데, (후략) - P134

 여자가 지낸다는 기도원이 어떤곳인지, 여자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같은 것들이었다. 그때 생각났다는 듯 아내가 허벅지를 탁 치며 말했다.
"기억났어. 울림 기도원이야. 저 여자 사는 곳." - P134

"20분 정도 됐죠? 다시 전화해볼까요?"
"아뇨. 재촉하다가 괜한 소리 들을지도 몰라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그렇게 말하는 최두연도 답답한 내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발끝을 들어 안쪽을 흘깃거렸다. 안에서 누가 나오지 않을까 했다.
"근데 여기가 맞긴 맞는 거죠?" - P135

두 사람은 교육청 전수조사 때문에 이곳에 서 있었다. 몇 년 전아동 학대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학교 장기 미출석 학생에 대한 전수조사 방침이 교육부에서 내려왔다. - P135

신미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석희는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어야 할 나이지만 종교적 문제로 홈스쿨링을 하겠다고 신고된 어린이였다. 그러나 홈스쿨링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도점검해봐야 했고, 혹시 모를 가정 내 폭력이 이루어지지는 않는지 확인하는 것도 필수였다.  - P136

"이곳은 신의 영역입니다. 함부로 들어올 수 없어요."
신미현은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종교적 문제를들고 나오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인터폰을 받은 사람은 아이의 엄마인 김실자가 돌아올 때까지 바깥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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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뭐 했지?




그가 선택한 부지 -인파로 북적이는 칩사이드 위의 언덕 한쪽을따라 펼쳐진 백 가 중에서 새단장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지역 -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입지였고, 저택도 그런 장소에 걸맞게 세워졌다. - P35

이듬해 4월 아이들 사이에 병이 돌았고, 그 달이 가기 전에 애비게일과 루스가 숨을 거두었다. 다른 의사들이 소모성 질환이라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아이브스 박사는 유아 열병으로 진단했다. 게다가 그 병은 전염성인 것으로 보였다. - P35

남편을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미망인 로비 해리스는 그로부터 2년 뒤에 장남 엘카나마저 세상을 떠나자 최후의 일격을 받게 된다. 1768년에 그녀는 가벼운 정신질환에 걸렸고, 그 후로 저택의 2층에따로 격리되었다. - P36

결혼을 하지 않은 그녀의 언니 머시 덱스터가 살림을맡기 위해 저택으로 이주해 왔다. 평범한 외모에 비쩍 말랐어도 기운이넘쳤던 머시는 그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눈에 띄게 쇠약해져 갔다. - P36

5년동안에 일곱 명이 죽거나 정신병에 걸린 비극은 난롯가에서 오가는 소문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아주 기괴하게 바뀌었는데, 머시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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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집은 의붓아버지가 취직한 목장의 한쪽 끄트머리에있는 손님용 숙소였다. 목장 주인인 미국인 부부는 플로르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은 그를 ‘시시(애기)‘라고 불렀고, 학교에 다니고 영어를 공부하게도 도와주었다. 의붓아버지는 그들만큼 마음이 넓지 않았다. - P273

 의붓아버지가 정말로 자신에게 손댄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 P274

이 일로 플로르는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을 거라는 의붓아버지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접근을 받아들일 순 없었다. 플로르는 그가 또 잠자리에 기어들 때를 대비해 베개와 시트 사이에 칼을 숨겨두었다.  - P274

플로르는 그 집에 1년 가까이 머물렀다. 그사이에 어머니에게 연락하여 자신이 머무는 곳을 알렸고, 따로 연락하고 싶었던 사람의 연락처를 물어보았다. 바로 친아버지였다. - P275

이 시골 마을에는 텍사스농업기술대학교가 있었고, 관목과 농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으며, 상업 및 산업 시설이 몇 군데 있었다. 그중 하나는 샌더슨 팜스Sanderson Farms의 닭고기 정육공장이었다. - P275

텍사스주 토박이 저널리스트 로런스 라이트 Lawren Wright는 그의 2018년 저서 《주여 텍사스를 구하소서 God Save Texas》에서 텍사스의 160만 미등록 이주민을 묘사하는 새로운 표현을 제시했다. - P275

(・・・) 그림자 인간들이 제공하는 값싼 노동력이 이 나라를, 특히 국경 주들을 떠받치고 있다. 이들은 노예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유민도 아니다.¹ - P276

 아버지를 따라 브라조스 카운티에 오고 몇 년 후 플로도 그 공장에 지원했다. 지원서에는 본명이 아니라 그가 구한가짜 영주권에 적힌 ‘마리아 가르시아‘라는 이름을 썼다(플로르 마르티네스‘도 본명은 아니다). 회사는 서류를 문제 삼지 않고 즉시 그를 채용했다. 이 공장에는 미등록 이주민이 많았다.  - P276

일을 시작하고 몇 달 후, 회사에서 관리자를 늘릴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관심이 있을 만한 사람, 즉 몇 년 전에 만나 얼마 전에 남편이 된 마누엘에게 알렸다. - P277

혹시라도 이민국에서 나와 서류를 확인하면 문제가 복잡해질 것 같았다. 플로르는 마누엘과 상의한 끝에 공장을 그만두기로 했다. - P277

플로르가 하던 일은 컨베이어벨트, 이른바 ‘해체 라인‘에 걸린 채 회전하는 죽은 닭들에서 분비샘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목 잘린 닭의 행진은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 P277

어느 날 그가 성실하고 쾌활하게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본 한 손님이 그에게 다른 일자리를 제안했다. 그는 칙필에이 Chick-fil-A 체인점 점주였고, 플로르는 그곳 카운터에서 영어로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던 플로르는 급하게 영어를 배웠고 그 와중에도 팀장으로, 교대조 조장으로, 지점 매니저로 쭉쭉 승진했다. 유일한 문제는 지점 매니저가 받는 돈이 최저임금보다 약간더 많은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 P278

닭고기 정육공장 해체 라인의 시급은 11~13달러다. 다른 일반 공장보다는 적은 편이었지만, 플로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그곳이 제일 나았다. - P278

 그러나 그 이후에는 본인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닭을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생닭걸기 라인에서는 한 사람이 1분에 65마리를 벨트에 걸어야 했다.
이 광폭한 속도를 따라가려면 한 손에 한 마리씩, 한 번에 두 마리를 꺼내 벨트에 거는 즉시 몸을 굽히고 다음 두 마리를 꺼내야 했다. - P279

도저히 참지 못한 플로르는 관리자에게 다른 일을 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이번에는 컨베이어벨트 맨 끝에 위치한 포장 라인에서 닭고기를 비닐백에 넣는 일이 주어졌다. - P279

플로르는 늘 통증에 시달렸지만, 몸의 아픔보다도 더욱 고약한 아픔이 있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통증에 뒤따라오는 언어적, 감정적 홀대였다. 그 어떤 관리자도 그에게 상태가 어떤지묻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꾸짖었다. "일하기가 싫은 모양이지"하고 쏘아붙이는 사람도 있었다. - P280

 관리자를 무서워하는 일부 여성 노동자는 작업복 안에 바지를 한 겹 더 입고 정 급할 땐 선 채로 오줌을 쌌다. 그보다 더한 괴롭힘도 경험하고 이겨낸 플로르는 아무도 무섭지 않았기에 정 급할 땐 허락 없이 화장실에 갔다. - P280

2018년 내가 플로르 마르티네스를 처음 만난 곳은 벽돌로 지어진 교회를 마주 보는 ‘과달루페 성모회관‘이라는 브라이언의주민 시설이었다. 이날 이곳에서는 가금류 도축 노동자의 권리를 교육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 P281

사람들은 쉬는 시간이면 바깥에 옹기종기 모여서 세미나 주최 측이 준비한 가정식 플라우타와 타말레를 먹으며 스페인어로 담소를 나누었다. - P281

남편 마누엘이 관리자라는 사실도 얄궂게 작용했다. - P280

 관리자가 그 윗사람들에게 받는 압박에 비하면 플로르가 느끼는 압박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회의에 들어가면 왜 일선 인력을 더 세게 압박하지 못하느냐고 추궁당한다고 했다. - P281

미국에서는 1990년대 닭고기가 콜레스테롤이 적다는 장점을 내세워 소고기 대용 식품으로 자리매김한 이후 닭고기 정육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상했다. 닭고기 소비량이 급증하면서 앨버트빌 같은 지역에 새 일자리가 생겨났는데 그 자리는 주로 멕시코계와 과테말라 이주민이 차지했다. - P282

앨라배마주의 유력 정치가 중에도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인 연방 상원의원 제프 세션스는 이주민에대해 강경한 입장을 내세웠고, 특히 앨라배마주 가금류 산업의 노동자 구성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세션스의 친한 친구이자 반이주민 단체 넘버스유에스에이 Mumber5U34의 창립자인 로이 벡Roy Beck은 <디스 아메리칸 라이프>에서 세션스가 "이주민 문제를 자신의 간판 사안으로 만든 데는 앨라배마주 가금류 공장 관련 경험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 P282

 다만 어느 정도는 이주민 때문에 본토인에겐 매력이 떨어지는 일자리가 된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앨버트빌에서든 다른 어디에서든 닭고기 공장 일은 ‘이주민 노동‘
이 되었고, 그 결과 이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의 임금과 협상력에 이주노동자가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여 일의 위상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 P283

다만 어느 정도는 이주민 때문에 본토인에겐 매력이 떨어지는 일자리가 된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앨버트빌에서든 다른 어디에서든 닭고기 공장 일은 ‘이주민 노동‘
이 되었고, 그 결과 이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사의 임금과 협상력에 이주노동자가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여 일의 위상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 P283

 <디스 아메리칸 라이프>의 해당 회차가 방송된 2017년에 그의 시급은 11.95달러로, 인플레이션이 제대로 반영되었다면 받았을 금액의 거의 절반 수준이었다. 2002년가금류 도축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제조업 전체 평균 임금보다24퍼센트 적었다. 2020년에는 그 차이가 40퍼센트로 벌어졌다.  - P283

 그러나 실제로는 적은 임금에도 일하고 싶어하는 이주민의 공급 증가가 업계의 부담을 덜어주었다(회사 측이 노조에 가입하지 않고 불평도 거의 하지 않는 절박한 이주노동자를 선호한다는 사실은 팻 같은 본토인도 감지하고 있었다). - P284

 "이주자를 고용할 수 있는 한고용주는 더러운 일을 개선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리하여 미국인은 더러운 일에 점점 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³ - P284

3 Philip Martin, "The Missing Bridge: How Immigrant Networks KeepAmericans out of Dirty Jobs," Population and Environment 14, no. 6(1993): p.539. - P478

물론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주노동자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 이주노동자는 다른 모든 사람이 하지 않으려는 힘들고 보람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 P284

 일단 가축을 공장식으로 사육하고 도축하는 산업에는 동물 학대, 호르몬제 · 항생제 남용, 환경오염 등 진보주의자가 혐오하는 많은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2009)에서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Jomathan Safran Poer는 공장에서 생산한 고기를 "고문당한 살‘이라고 표현했다.⁵ - P285

5 Jonathan Safran Foer, Eating Animals (New York: Little, Brown, 2009), p.143. - P478

공장에서 생산한 고기를 먹는 것은 이 고문에 가담하는 것이라는 이 책의 메시지는 건강과 생태계에 관심을 갖고 전통적인 농가에서 생산한 유기농 고기를 소비하거나 채식을 선택하는, 점점늘고 있는 소비자층에 반향을 일으켰다. - P285

 또 KFC가 "올해의 우수 공급업체"로 선정한 어느 시설에서는 "닭을 걷어차고 짓밟고 벽에 내던지고 눈에 씹는담배를 뱉었다."⁶ 이런 글에는 사람이 동물을 죽이는 일을 하면 사악한 고문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 P286

6 위의 책, p.182.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송은주 옮김 (민음사, 2011)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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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의 힘이 한순간에 빠져나갔다. 무릎에 팔을 대고 이마를 묻었다. 눈을 깊게 감자 예원이 떨어지던 순간이 선연히 감은 눈 안에서 재생되었다. - P99

아파트에서 이불을 털다가 떨어지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라며 이송되어 오는 동안 구급대원이 말했다. 검사 결과, 팔의 찢긴 부위는 꿰매야 할 정도로 상처가 깊었지만 걱정했던 골절은 없었다.  - P99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
선준은 머릿속에 밀려 들어오는 생각을 멈추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불안증과 충동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예원이라 하더라도 그런 짓을 벌였을까. - P100

거기까지 생각한 선준의 움직임이 느닷없이 멈추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P100

‘로운이!‘
선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로운이 혼자 집에 남아 있을터였다. 아니,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어서 불길했다. - P101

"로운아?"
거실에 불을 켰다. 로운은 거실에 없었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우의 방은 닫힌 채였다. - P102

온 방 안은 아이가 접어놓은 종이 개구리로 가득했다. 로운은 그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빛에 눈이 부실 텐데도 움찔거리거나 잔뜩 구긴 얼굴을 들지도않았다.  - P103

그의 발에 종이 개구리가 밀렸다. 그제야 아이는 움직이는 종이 개구리를 따라 시선을 들었다. 그러고는 어느덧 자신의 가까이에 온 선준의 발이 무슨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 P103

그러고도 돌아오지않는 예원을 기다리며 꼼짝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요양원에서 엄마가 오길 기다리던 때처럼 선준은 로운의 앞에 주저앉았다. 그의 무릎에 노란색 개구리가 깔렸다. 로운의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 P104

선준은 떨리는 두 손으로 로운의 뺨을 감쌌다. 데려온 것도 예원이었고, 아이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고 했던 것도 예원이었지만, 자신 역시 그것에 동조했다.  - P104

내 아이가 중요해 다른 아이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던 거야.
선준은 로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로운이 큰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보았다. - P104

"이젠 제가 필요 없어요?"
돌연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런 거 아니야, 로운아."
선준이 로운의 손을 잡았다. 로운의 손은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 P105

"로운아, 아저씨가 미안해 널 이렇게 혼자 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줌마." - P105

"아줌마한테 갈래! 아줌마 아줌마!"
로운이 벌떡 일어서려 했다. 반사적으로 선준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 힘이 강했는지 몰라도 로운의 작은 발이 미끄러지면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아니면 스스로 넘어진 걸지도 모른다.
왜 그랬는지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 P106

그때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 로운의 몸이 움직임을 멈췄다. 동시에 로운이 손목을 입으로 가져갔다. 작은 입이 어두운 공간을 드러내며 벌어졌다. 자해였다.
"안돼!" - P106

이렇게 되기까지 아이가 겪은 외로움은 그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외로움을 두사람이 이용하려 했다.
"미안하다 미안해."
"아줌마한테 갈래."
무슨 말을 해도 로운은 같은 말을 반복할 터였다. - P107

일단은 예원의 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지금쯤이면 처치가 끝났을 것이다. 아이를 예원과 만나게 해준 다음 내일 아침 일찍 요양원으로 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선준은 아이를 안고 일어나려 했다. 그것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도.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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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보는 책.


플로르 마르티네스는 어린 시절 멕시코 중북부 산루이포토시주에서 전기도, 물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벽돌집에서 조부모와 함께살았다. 집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있었지만 그들은 가난했다. - P271

그때까지 할머니가 자기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던 플로르는 깜짝 놀랐다. "아니, 아니야." 할머니가 설명하기를, 플로르의 임마는 출산 후 곧바로 다른 소도시에 있는 부잣집에 입주 가정부로 들어가는 바람에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잠깐도 돌보지 못했다고 했다. - P272

험한 삶이었지만 플로르는 낙담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행운이 찾아올 거라고 믿었다. 이러한 낙천적인 성격은 삶의 다음 단계에서 검증되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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