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만났고 한국인처럼 생겼으니까 신선이거나 도깨비인가 보다 한 거지, 정체는 몰라요. 그리고 예전에는 다른 나라에 있었다니까." "그러니까 유럽에서 온 게 도깨비 맞아? 혹시 예수 같은거 아니야? 사람도 부활시키는데." 우혁은 내심 놀랐으나 태연한 척 대꾸했다. "예수가 동양인이면 이상하죠. 그리고 형도 알겠지만 예수는 셈족이라서 희랍어랑 히브리어만 하고 라틴어는 못 했어요. 그 신약성경도 희랍어로 적혀 있잖아요." - P82
"일단 나도 돈에 목매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못 박아두고...... 우혁아, 나는 너 덕분에 무척이나 보수적인 사람이됐어. 이건 백운산 계곡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시작된 생각이야" - P83
"너는 의견이 다를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네가 어떻게든 해결을 봐서 평범한 인간이 됐으면 한다. 난 그게 제일 좋다고, 온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믿는다. 필요한 거 있으면 빨리 챙겨서 다녀와라. 내가 생각하기엔 날 밝고 보는 눈 많을 때가 그나마 안전할 것 같다. 지금바로 집에 가서 차 끌고 와." - P84
김형이 사는 세상이 로마라면 그곳의 카이사르는 돈이다. 사람은 무릇 돈을 벌고 모으고 써야 한다. 카지노의 고삐풀린 흐름에 휘말리는 게 아니라, 격률과 질서를 따르는 방식으로 그것이 바로 인간이 맘몬과 나눈 계약이다. 인의와 인정을 소박하고 아늑한 일상을 누릴 방법이다. 돈을 허투루써버리는 사람은 친지를 실망시키고 만다. 달리 말하면 그 격률과 질서로부터 어긋난 행위는 무엇이든 도박만큼이나 허무맹랑하고 무익하며 해로운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 바깥으로부터 온 믿음일지라도,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 P85
익숙한 것들로부터 멀어진 사람은 피안을 마주 보게 된다. 내일 당장 종말이 온다고 하면 대형 교회의 목사들은 그소식을 반길까? 대치동 학원에 아이를 보내는 부모들은? 김형은? 우혁은 심판이든 구원이든 기꺼이 반길 수 있었다. 묵상은 <교주를 죽여라>의 내용으로 귀결되었다. - P86
서른두 명의 숭배자들은 넘쳐흐르는 은혜 속에 죽음을 택했으며 열두 명의 아이들만 살아남았다. 사건은 여러 이유로 이례적이었다. - P86
소년은 자신이 재림 예수가 아니라 주장했지만 우혁은 절반만 믿었다그는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휴대전화로 대치사거리부터 설악산까지의 경로를 검색했다. 정체 구간이 없다 가정하더라도 두 시간은 잡아야 할 거리였다. - P87
곧바로 차를 끌고 돌아가려다가 철물점 위치를 검색했다. 집 근처에 세 곳이 있었다. 우혁은 가장 가까운 철물점에서 접이식 낫과 도끼를 하나씩 사서 뒷좌석에 던져놓았다. - P87
우혁은 등받이에 팔꿈치를 얹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은 자리에 앉자마자 도끼날을 감싼 방수포 천을 끄르고 있었다. "필요할 것 같아서 사왔어. 챙겨둬." "고맙다" - P88
재림 예수 노릇을 다시 해볼 생각이 없는지도. 이렇게 도망 다닐 바에는 종말을 불러오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도. (우혁은 정말로, 진심으로, 절실히도, 논술학원 보조강사의 현실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심리는 특별해지고자 하는 욕망이라기보다는 불가해한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하지만 막상 말을 꺼내려니 적당한 첫마디가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우혁은 미사대교에 접어들도록 침묵을 지켰다. - P89
그는 평생토록 도망쳐왔던 세계의 총체가 바로 여기 모였음에 몸서리쳤다. 개념을 물질에 앞세움으로써만 파악될 수있는 도시의 결절들. 만질 수 없거니와 상상의 대상조차 아니므로 실체와 정신을 동시에 압도하고 마는, 추상화된 객체들. 강남과 남양주의 차이를 궁금해하는 사람에게는 도시의풍경이 아니라 어차피 죄다 철근콘크리트로 뒤덮인 데다가도로 위에는 자동차가 굴러다니지 않는가?-부동산 시세가병기된 지도를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다. - P90
표정 없는 괴물이 무지막지한 열과 충격을 집어삼킨 뒤 무감한 숫자를 게워내는 장면이 우혁의 머릿속에 번뜩였다. 조약돌 하나가 쏜살같이 날아가서, 미사대교의 흰 난간과 숫자를 동시에 꿰뚫는 순간도 그 조약돌에는 서른네 살의 보조강사와 구원을 불러올 소년이 타고 있다……………바로 이런 상상을 멈춰야 한다. 이건 기질적인 문제인가, 기적의 후유증인가? 혹은 지금에야말로 결단할 때이기 때문인가? - P91
그는 실제로 종말이 닥쳐오는 미래와 부모님 속만 터지고끝나는 미래 중 무엇이 더 심각한지 고민해봤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친구인 최우혁이 아니라 공명정대하고 객관적인 재판관으로서. - P92
바로 지금! "생각대로 될 일은 절대 없으니 헛짓거리 말아라. 한국서야산 생활하며 죽었다 살아난 게 다섯 번도 넘어. 그 전엔훨씬 많고." 소년의 핀잔이 결단을 가로막았다. 우혁은 멋쩍게 웃으며가속페달에서 발을 떼었다. 한 덩어리로 뭉쳤던 열기가 온몸으로 흩어지며 나른한 아쉬움을 남겼다. "설마 속마음도 읽는 거야?" - P93
교주 1인이 유일한 상징으로 기능하며 권력을 독점하는 통상적인 사이비 종교와 달리, 새천년파에는 핵심 인물이 없었다. 노골적으로 금전을 요구하는 사업 모델도 존재하지 않았다. 체계와 직분들이 명징한 규율 아래 맞물릴 뿐이었다. - P94
열심당원이란 본래 로마에 저항했던 유대인 급진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단검 한 자루로 제국의 관료들과 장군들을 암살하고 다녔는데, 새천년과 열심당원들이 하는 일이 정확히 그랬다. 그들은 이도유와 접점이 있는 사람들을찾아냈다. 회유했고, 정보를 얻으려 했고, 협박했으며, 종종 납치해 죽였다. - P96
소년은 예티나 네시 같은 크립티드로 간주되어 10대 청소년들의 놀잇감으로 전락했다. 조강현이 돈깨나 버는 기업인이라는 사실마저 그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소년 교주를 소재삼은 아마추어 만화와 소설이 수천 개씩 쏟아져 나온 덕분에 검색 결과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 P99
여기까지 생각해보니 이 방송을 기획한 게 누구였을지, 조강현은 무슨 생각으로 카메라 앞에 섰을지가 의아스러웠다. 실제로 소년과 함께했다면 그 신성을 의심하기란 불가능할터였다. 애당초 기적을 목격했으니 신학도의 길을 저버린 게 아니겠는가. - P100
"그러니까 어제 멈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보자. 솔직해지는 거야. 어차피 두 시간만 지나면 피차 볼 일 없을 테고, 저인간들이랑도 모르는 사이가 될 테니까." "너, 돈벌이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정보를 팔아먹을 거였더라면 새천년파한테 진작 연락했을걸. 봐서 알겠지만, 난 심각한 사회부적응자야. - P101
"평범한 인간인 게 뻔해도, 원하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다면 덜컥 믿어버리는 게 사람 심리야. 기적을 부릴 수 있다면 말할 것도 없지. 나한테 이런저런 재주가 있는 것, 사람들이 날 예수라 믿고 싶어 했던 것, 내가 거기 잠깐 어울려줬던 것, 그래서 한바탕 시끄러웠던 것과 별개로 나는 그냥 나야!" "그렇다면 넌 누구야?" "방송 봤으면 이름쯤은 알아야지." - P102
자동차는 어느덧 미사대교를 빠져나와 남양주의 끝자락에진입했다. 허공에 얹힌 길은 이음매도 없이 육로가 되었고, 굳은 듯한 수면 위로 희부연 막을 이루던 햇빛은 이제 나뭇잎과 전속력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 P102
"서른두 명이 자살한 것도 껄끄러운 주제인가?" "내가 죽으라고 시킨 적 없어. 일이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아서" "하지만 제멋대로 죽었다 쳐도 되살릴 수 있잖아." - P103
"방송에서는 네가 지시했다던데." "죽은 건 죄 어른들이고, 산 건 모두 애들이다. 지금 새천년파랍시고 난리 치는 놈들은 그때 열두어 살 하던 애들이란말이야. 그런 녀석들이 상황을 똑바로 기억할 턱이 없지. 조강현 한 놈만 스물네 살이었고, 열일곱 살짜리가 하나 있었던가......." - P103
인망을 쌓지 못한 삶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바카라라면 어떨까? 그는 내비게이션으로 지금 위치에서 정선 카지노까지 가는 길을 알아보았다. 정확히 200킬로미터 거리였고, 거기에서 다시 설악산으로 가려면 비슷한 거리를 추가로 달려야만했다. 당일치기로 다녀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도주 경로에 끼워 넣기에는 과했다. - P106
"악령 같은 거구나. 그러면 원래 이도유는 어디로 간 거야?" "여기에 너랑 대화하는 사람은 여전히 나다. 물론 나는 이도유인 동시에 바르 코크바 장군이고, 정신 나간 페레그리노스고, 이름 없는 게르만 병사고, 사바타이츠비고, 태평천국의 홍수전이고.... 나, 바로 여기 있는 나지. 그 마흔네 개의기억에 네가 악령이라 부른 걸 합하면 내가 된다." - P107
"나한테 있는 재주는 크게 둘이다. 하나는 병들고 죽은 이를 되돌리는 것. 다른 하나는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는 것. 그런데 이것은 내 능력이라기보다는 악령을 따른 결과야 너한테 익숙할 예를 빌리자면, 심술궂은 형이 동생의 게임을 지켜보며 여기로 가라, 저걸 골라라 훈수를 두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할 일을 읊으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아. 결국 객관적으로는 훌륭하지만 나는 원치 않았던상황에 놓이고 말지." - P108
"왜, 백두대간을 타고 중국으로 간다면서 새천년파가 거기까지 따라가지 못할 텐데." "악령이 슬슬 몸을 갈아치우고 싶어 하는 게 느껴지거든. 주어진 본분을 다하라고, 실패하더라도 도망치지는 말라고, 도망치면 이도유의 삶은 끝이라고 계속 속삭이는 거다. 사실지금도 불안불안해." "그렇구나." - P109
"지금까지 마흔다섯 번이나 살았다고 했지. 가장 처음에는누구였어?" "제사장의 아들이었지. 어머니는 왕실의 피를 물려받은 여인이었고, 소년 시절, 광야에서 3년간 수행하다가 악령에 붙들렸다. 어찌할 줄 모르는 상태로 고향에 돌아왔더니 분위기가 심상찮지 뭐냐 독립이니 뭐니 떠들던 놈들이 기어코 일을낸 거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덕분에 떠밀리듯이 지휘관이됐다가 포로로 전락했고, 거기에서 황제가 될 자의 눈에 들었다. 글이나 쓰면서 역사가로 여생을 보냈지. 황제는 나보다스무 해 일찍 죽었고, 나는 예순이 넘어서야 겨우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Vae, puto deus fio......." - P110
요세푸스는 자신이 최후의 1인이 되리라 확신했고, 정말로그렇게 되었다. 포로가 된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황제가 될것임을 예언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제국은 네 명의 황제를 갈아치웠다. 가장먼저 네로가 실각했다. - P111
질문들이 우혁을 또 다른 이름으로 이끌었다. 소년은 자신이 한때 바르 코크바 장군이었다고 말했다. 요세푸스와 바르 코크바 장군의 삶은 한 바퀴 돌아 대칭을 이뤘다. 요세푸스는 1차 유대 반란의 지휘관 중 하나였지만 열의가 부족했고, 기적과 예언에 기대어 목숨을 부지했다. 반면 바르 코크바는 기적과 예언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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