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디옙스키가 귀국하고 한 달 뒤 그의 아버지가 여든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화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나이 많은 KGB 요원 몇 명만이 참석했다. - P161
고르디옙스키는 이혼할 때처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재혼을 단행했다. 레일라는 1979년 1월에 모스크바로 돌아와 겨우 몇 주 뒤등기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곧 부모가 사는 아파트에서 가족끼리 식사를 했다. 올가는 아들이 행복한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 옐레나는 KGB에서 성공하려고 눈만 반짝이는 것 같아서 처음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 P162
고르디옙스키는 제3부의 역사를 집필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소련의 과거 첩보 활동에 대해서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지만 현재 진행 중인 작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한직이었다. 딱 한번 그는 노르웨이 담당자인 동료의 책상에서 OLT로 끝나는 제목의파일을 본 적이 있었다. 트레홀트의 이름 앞부분이 다른 서류에 가려져 있었다. 아르네 트레홀트가 KGB 첩자로 활동 중임을 암시하는 또 하나의 단서였다. - P163
킴 필비는 이제 고독하게 늙어 가며 자주 술을 마셔 대는 처지였지만, 머리는 옛날처럼 예리했다. 오랫동안 스파이의 이중생활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들키지 않는 법과 첩자를 잡는 법을 필비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KGB 내에서 여전히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 P163
고르디옙스키가 귀국한 직후 필비는 군보르 호비크 사건을 분석해서 잘못된 점을 평가해 달라는 중앙의 요청을 받았다. 그 베테랑노르웨이인 스파이가 왜 체포되었을까? 필비는 몇 주 동안 호비크파일을 열심히 들여다본 끝에, 스파이로 일한 오랜 세월 동안 자주그랬던 것처럼 올바른 결론을 내렸다. <그 첩자의 존재를 알린 정보는 KGB 내부에서 샜음이 틀림없다.> 빅토르 그루시코는 고르디옙스키를 포함한 고위 요원들을 자기방으로 불렀다. KGB에서 정보가 새고 있다는 징후가 있다.> - P164
스티그 베릴링은 비밀 요원의 삶을 <회색, 검은색, 흰색, 그리고안개와 갈색 석탄 연기로 탁한 색>⁸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스웨덴 경찰관, 정보 요원, 소련 첩자로 살아온 그의 삶 또한 칙칙한 색이었다. 베릴링은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SÄPO라고 불리는 스웨덴 정보기관의 감시 팀 일원이 되었다. (중략). 베릴링이 스파이가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가 무척 좋아하던 돈, 다른 하나는 상사들의 거만한 태도, 4년 동안 그는 소련에 1만4천7백 건의 문서를 넘겼다.
8 AFP, 1995년 6월 28일자 보도에서 재인용. - P165
스웨덴 조사관들이 수사망을 조여 왔다. 1979년 3월 12일, 그는텔아비브 공항에서 스웨덴의 부탁을 받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베트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SÄPO의 예전 동료들 손에 넘겨졌다. 그리고 9개월 뒤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베릴링은 소련의 주인들에게서 상당한 돈을 받았다. 그가 스웨덴의 국방에 끼친 피해를 복구하는 데에는 2천9백만 파운드가 들 것으로 추정되었다. - P166
고르디옙스키가 지목한 소련 첩자들이 한 명씩 차례로 제거되었다. 그 결과 서방은 십중팔구 더 안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고르디옙스키는 아니었다. - P166
KGB 동료들이 면밀히 주의를 기울였다면 고르디옙스키가 경제적 이득도 없는데 왜 그리 서둘러 새로운 외국어를 익히려고 하는지, 왜 갑자기 영국에 커다란 흥미를 보이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고르디옙스키는 두 권짜리 러시아어-영어 사전을 샀다. 영국 문화에도 흠뻑 빠졌다. 어쨌든 소련 국민에게 허용된 한도 내에서 최대한 그렇게 했다. - P167
코펜하겐에서 돌아와 제1주요부의 싱크 탱크 수장이라는 대단한 자리에 앉은 미하일 류비모프는 그가 <자주 들러 가벼운 잡담을 나누다가 영국에 대한 현명한 조언을 구했다>고 회상했다. (중략). 류비모프의 제안으로 고르디옙스키는 서머싯 몸의 소설들을 읽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의 정보 요원이었던 몸은 첩보 활동 중에 겪게 되는 도덕적 모호함을 작품에서 훌륭하게 묘사한다. - P164
제3부에서 영국-스칸디나비아과는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고르디옙스키는 자신이 영국 쪽으로 발령받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면 누구든 친분을 쌓아 두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 P168
(전략). 빅토르 그루시코는 제1주요부의 차장으로 승진했고, 제3부의 부장자리는 겐나디 티토프가 이어받았다. 전(前) 오슬로 레지덴트로 아르네 트레홀트 담당관이던 그의 별명은 <악어>였다. 영국-스칸디나비아과의 새로운 팀장은 니콜라이 그리빈이었다. 매력적인 인물인 그는 1976년 코펜하겐에서 고르디옙스키의 부하 직원으로 근무했으나, 그 뒤로 그를 앞질러 승진했다. - P169
한편 센추리 하우스의 선빔 팀도 정확히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있었다. 고르디옙스키에게서 귓속말조차 날아오지 않은 세월이 벌써 3년이었다. 쿠투좁스키 대로의 신호 장소 점검은 계속 조심스럽게 이어졌고, 탈출 계획인 핌리코 작전은 상시 대기 상태를 유지했다. 실전 같은 연습이 실시되어, 지부장 부부가 탈출 경로를 따라 헬싱키까지 차를 몰고 간 적도 있었다. - P170
(전략). 그런데 그 덴마크 외교관이 모스크바에서 파티에 참석했다가자신감 있고 건강해 보이는 고르디옙스키를 보았다. 외교관은 고르디옙스키가 재혼해서 두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PET에 보고했다. M16에도 이 내용이 신속히 전달되었다. 그러나 PET 보고서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요소이자 선빔 팀을 들뜨게 한 요소는 고르디옙스키가 칵테일과 카나페를 먹으며 던진 한마디에 들어 있었다. 그는 미리 연습한 무심한 표정으로 덴마크 외교관을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영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 P171
6
첩자 붓
겐나디 티토프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제1주요부 제3부의 부장인그는 런던 주재 소련 대사관에 KGB 요원을 한 명 파견해야 했지만 보낼 사람이 없었다. 적어도 겐나디 티토프에게 반드시 납작 엎드릴 거라고 믿고 보낼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그 자리에 필요한 첫 번째 자격 요건인데. - P173
티토프는 야비하고 교활했으며, 상사에게는 간이라도 빼줄것처럼 굴고 아랫사람에게는 이죽거렸다. 고르디옙스키가 <KGB전체를 통틀어 가장 불쾌하고 가장 인기 없는 요원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한 그는 그러나 가장 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 P173
중앙은 풋 사건으로 100명이 넘는 KGB 요원들이 추방된 1971년이후 줄곧 런던 지부를 재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영어가 가능하고 유능한 요원들이 빈자리를 다 채울 수 있을 만큼 많지않았다. - P174
1981년 가을, KGB의 영국 PR 라인 부팀장이 런던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위장해 활동하다가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의 후임으로 가장 먼저 고려된 후보는 은밀한 활동을 한다는 MI5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외무부에서 거부당했다. - P174
고르디옙스키는 오로지 자신만이 그 기준을 충족할 수 있다는 암시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 P174
(전략).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쪽에서 바로 거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일단 시도는 해봅시다.」고르디옙스키는 고마움을 넘치도록 표현했다. 하지만 속으로는곧 악어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했다. 승진을 앞둔 KGB요원의 아내로서 레일라도 기뻐 어쩔 줄 몰랐다. - P175
두 사람 모두에게 런던 발령은 꿈의 실현이었으나, 서로 같은 꿈을 꾸지는 않았다. 고르디옙스키에게 외교관 여권이 새로 발급되었다. 모스크바 주재 영국 대사관에 비자 신청서도 발송되었다. 대사관은 그 신청서를 런던으로 보냈다. - P176
이틀 뒤 MI6의 소련 팀장인 제임스 스푸너가 센추리 하우스의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데, 하급 요원 한 명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와 선언했다. 엄청난 소식이 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서류 한 장을건넸다. 방금 모스크바에서 들어온 비자 신청서입니다. 그 문서에 동봉된 편지에는 올레크 안토니예비치 고르디옙스키 동무가 소련대사관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영국 정부에 신속한 외교관 비자 발급을 요청했다고 적혀 있었다. - P177
완전히 양극단에 있었다. 티토프와 달리 스푸너는 사내 정치에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아부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혹독할 정도로 일에만 집중했다. 그가 팀을 맡은 뒤 가장 먼저 책상에 올라온 서류 중에 선빔 파일이 있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고르디옙스키가 조용하고 그와 연락할 길도 없는 탓에 고르디옙스키 작전은 어중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어떻게 봐도 연락하지 않는 편이 옳았다. >스푸너는 이렇게 말했다. - P178
고르디옙스키에게 비자를 발급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KGB요원으로 의심받는 인물은 누구든 자동으로 영국 입국이 금지되는것이 원칙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외무부가 먼저 예비 조사를 실시하다가 올레크가 코펜하겐에서 두 번 근무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P179
하지만 지금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MI6 입장에서는 고르디옙스키의 영국입국이 지체 없이 무조건 허락되어야 했다. 이민국에 그냥 비자를발급해 주라고 지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의심을 살 우려가 있었다. - P179
소식을 들은 PET는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다. 외무부가 곧 고르디옙스키에 관해 문의할 것이라고 MI6가 알려 주자, 덴마크 측은<기록을 마사지>해서 그가 의심받은 적은 있지만 KGB 요원이라는증거는 없다는 답변을 보냈다. <우리가 적당히 의심스러운 구석을 남겨 둔 덕분에 비자가 정상적인 과정으로 발급되었다. 우리는 《그래요, 덴마크 측이 그를 점찍은 적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 P179
모스크바의 한 관리는 비자가 너무 빨리 나온 것에 의심을 품었다. 「당신에게 비자가 이렇게 빨리 나오다니 몹시 이상합니다.」고르디옙스키가 여권을 찾으러 갔을 때 소련 외무부의 한 관리가 음침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 P180
KGB의 관료적 업무 처리 속도는 영국보다 훨씬 느렸다. 3개월뒤에도 고르디옙스키는 소련을 떠나도 좋다는 공식 허가를 여전히기다리는 중이었다. KGB에서 내부 감찰을 담당하는 K부의 제5부가 고르디옙스키의 과거를 느긋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혹시 문제가 생긴건가 하는 생각이 차츰 들 정도였다. - P180
고르디옙스키의 자리는 영국 팀에서 정치를 담당하는 635호실에 있었다. 그 방의 커다란 금속 선반 세 개에는 영국 내의 인물 중KGB가 첩자, 잠재적인 첩자, 비밀 접촉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파일이 있었다. 635호실에 있는 서류들은 모두 현재 진행 중인 작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중복된 자료들은 중앙 문서고로 옮겨졌다. - P181
고르디옙스키는 이 파일들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KGB가 현재 영국에서 어떤 정치적 작전을 펼치고 있는지 차츰 감을 잡았다. 부팀장인 드미트리 스베탄코는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거냐며 그를 놀렸다. 「문서를 읽는 데 너무 시간을 낭비하지 마. 영국에 도착하면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될 테니.」 그래도 고르디옙스키는 성실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의심을 상쇄해 주기를 바라며 조사를 계속했다. - P181
매일 부서장의 서명을 받아 파일 하나를 꺼내 봉인을 깨고 KGB가현재 낚으려 하거나 이미 낡은 영국인의 신원을 새로이 알아냈다. 그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의 스파이는 아니었다. PR 라인이 주로추구하는 것은 정치적 영향력과 비밀 정보였으므로, 여론을 선도하는 사람, 정치가, 기자 등 힘이 있는 사람들을 겨냥했다. - P182
잭 존스는 가장 존경받는 노조 운동가 중 한 명이며, 고든 브라운영국 총리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노조 지도자 중 한 명>¹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그도 KGB 첩자였다.
1 『가디언』, 2009년 4월 24일자에 실린 잭 존스의 부고에서 재인용 - P182
그가 살펴본 두 번째 파일의 주인공은 노동당의 좌파 의원인밥 에드워즈였다. 전직 부두 노동자, 스페인 내전 참전, 노조 지도자, 장기적인 KGB 첩자라는 점이 모두 존스와 똑같은 에드워즈는1926년 청년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했을 때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만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치가로 활동하면서 고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고, 기꺼이 정보를 넘겨주는 정보원임을 증명했다. - P184
이런 거물들 외에 여러 조무래기의 기록도 파일에 들어 있었다. 예를 들어 베테랑 평화 운동가이자 전직 의원이며 노동당 사무총장인 페너 브록웨이 경이 그런 경우였다. 이 <비밀 접촉자>는 KGB와 오랫동안 거래하면서 소련 정보기관으로부터 많은 호의를 받았으나 그 보답으로 그다지 가치 있는 결과를 생산하지 못한 듯했다. - P184
모든 정보기관이 그렇듯이 KGB도 현실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희망 사항만 좋으며 없는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파일에 수록된 인물 중에는 첩자가 아니라 잠재적인 친(親)소련성향으로 보이는 좌파 인사에 불과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 P185
하지만 모든 자료 중에 단연코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문제의 마분지 상자에는 300쪽 분량의 폴더와 절반쯤 되는 분량의 폴더가 들어 있었다. - P185
첩자 붓은 저명한 작가 겸 웅변가, 베테랑 좌파 의원, 노동당 지도자이며 만약 다음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한다면 영국의 총리가 될 마이클 풋이었다. 이 나라 영국에서 여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야당을 이끄는 지도자가 KGB에 매수된 첩자였다는 뜻이다. - P186
대처는 인기가 없었다. 여론 조사에서 노동당의 지지도는 보수당을 10퍼센트 포인트 이상 앞섰다. 1984년 5월로 예정된 차기 총선에서 마이클 풋이 승리해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붓 파일이 공개된다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끝날터였다. 페트로프 소령은 확실히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암호명을 고를 때 뜻과 붓으로 말장난하고 싶다는 유혹에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만 제외하면 서류의 내용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 P187
그 뒤로 계속 마이클 풋에게 지불된 돈이 목록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날짜, 금액, 돈을 건넨 요원의 이름이 적힌 표준 양식의 서류였다. 고르디옙스키는 이 목록을 죽 훑으면서 대략 계산을 해보았다. 1960년대에 10~14회 돈이 지불되었고, 한 번에 지불된 액수는 100~150파운드였다. 따라서 총액을 어림잡으면 1천5백 파운드, 현재 가치로 3만 7천 파운드(4만 9천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그 돈이어디에 쓰였는지는 불분명하다. - P188
풋과 KGB 담당관의 만남은 대략 한 달에 한 번씩 있었다. 소호의게이 후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만날 때가 많았다. 모든 만남은 사전에 세심하게 계획되었다. 만남에서 나눌 이야기의 윤곽을 사흘전 모스크바에서 보내 주었다. 만남의 결과를 기록한 보고서는 먼저런던의 PR 라인 책임자와 레지덴트가 차례로 읽은 다음 모스크바 중앙으로 보내졌다. - P188
풋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노동당 내부의 투쟁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물론, 베트남 전쟁, 케네디 암살이 낳은 군사적 결과와 정치적 결과, 디에고 가르시아섬을 미군 기지로 개발하는 문제, 한국 전쟁의 미해결 이슈들을 협의한 1954년의 제네바회의 등 뜨거운 주제들에 관한 노동당의 태도에 대해서도 정보를제공했다. 풋은 소련에 정치적 통찰력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독특한위치에 있었으며, 소련의 주장을 잘 받아들였다. - P190
붓은 독특한 종류의 첩자였다. KGB가 생각하는 첩자의 정의에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소련 관리들과의 만남을 숨기지 않았다(그렇다고 널리 광고하지도 않았다). 대중에게알려진 공인인 만큼 어차피 은밀한 만남이 불가능하기도 했다. 그는 <여론의 창조자>였으므로, 단순한 첩자라기보다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에 더 가까웠다. - P190
(전략). 자신에게 정보를 주는 한편 다신이 제공한 정보를모스크바로 전달하는 일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 이 짐작이 옳다면 그는 말문이 막힐 만큼 순진한 사람이었다. 1968년에 붓 작전의 기조가 바뀌었다. 프라하의 봄 이후 풋은 소련을 강렬히 비판했다.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항의 시위에서 그는이렇게 선언했다. 「소련의 행동은 사회주의에 대한 최악의 위협이 바로 크렘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⁹ - P191
풋은 법을 어기지 않았다. 소련 스파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조국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KGB의 지시를 받았고, 그들의 돈도 비밀리에 받았다. 그리고 적국이자 전체주의 독재 국가인 소련에 정보를 제공했다 - P191
마이클 풋은 KGB에 쓸모가 있었고, 완전히 바보스러웠다. 고르디옙스키가 붓 파일을 읽은 때는 1981년 12월이었다. 그다음 달에 그는 그 파일을 다시 읽으면서 그 내용을 최대한 암기했다. - P192
영국이 전쟁 중일 때, 고르디옙스키는 KGB 내에서 혼자 영국 편을 들었다. 자신이 비밀리에 충성을 맹세한 그 나라에 과연 발을 디딜 날이 오기는 할지 걱정스러웠다. - P193
KGB의 제5부가 마침내 고르디옙스키에게 영국에 가도 좋다는허가를 내주었다. 1982년 6월 28일, 그는 런던행 아에로플로트 항공기에 올랐다. 아내 레일라와 이제 각각 두 살과 9개월이 된 두 딸도 함께였다. - P193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고르디옙스키의 마음속에는 지난 4개월동안 KGB 문서고에서 긴장 속에 비밀스레 읽은 문서들의 내용이 무겁게 쌓여 있었다. (중략) 그래서 영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PR 라인 요원의 이름, 런던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모든 KGB 요원의 이름이 그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었다. <제5의 사나이>¹⁰의 신원을 알려 주는 증거, 소련으로 망명한 킴 필비의 활동, 노르웨이의아르네 트레홀트가 소련의 스파이라는 추가 증거도 머릿속에 있었다.
10 킴 필비를 포함해서 소련 간첩으로 활동했던 케임브리지 5인방 중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사람 옮긴이주 - P193
참조
붓 파일의 상세한 내용은 1995년 2월 고르디옙스키와의 회고록 인터뷰에 들어 있다. 『선데이 타임스』 문서 보관실 소장.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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