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 타임 아이스
야마다 에이미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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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야마다 에이미의 책은 이걸로 세 번째인데, 볼 때마다 세심하고 감정적인 표현에 경탄한다. 굳이 인용해둬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이곳에 옮겨 둔다. 등장인물의 이름 일부는 인칭대명사로 대체했다.


썩은 냄새에 가까운, 그러나 결코 불쾌하지 않은, 아니 불쾌하지 않은 게 아니라 더러운 것에 침범당함으로써 나 자신이 맑은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는 그런 냄새. 그의 냄새는 나에게 우월감을 주었다.(p.11)


그의 욕설은 아주 음악적으로 들린다. 욕이 안 든 우등생 영어는 지금의 나에겐 불능의 남자가 마시는 김빠진 맥주나 다름없다. 그가 나를 bitch라고 부를 때, 나는 사랑스러운 동지를 보는 기분이다. 그가 bitch 같은 남자라는 것을 전제로.(p.27)


마리아 언니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참으로 멋진 취향을 가졌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편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했던 질투라는 감정을 강렬하게 맛보았다. 최후의 한 방울까지 나를 마셔 버리기 전에 컵을 놓아 버리다니. 행실이 나쁜 그를 경멸하려 해 보았다. 그렇지만 그를 경멸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경멸하는 일이었다.(p.59)


마리아 언니는 입을 쩍 벌린 채 멍하니 서 있는 나를 곁눈으로 살피면서 옆에 있던 가운을 걸쳤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만일 그 말에 주가 달려 있었다면 나는 서둘러 다음 페이지를 펼쳤을 것이다.
"킴, 네 탓이야."
그래도 모르겠느냐는 듯 마리아 언니는 그 말로 나를 찔렀다.
"무슨 말이야? 모르겠어, 난."
말라 버린 입술을 억지로 적시며 나는 말을 이었다.
"난 우연히 언니에게 그를 만나게 한 것뿐이야.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남자를 슬쩍한 건 당신이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그녀를 "당신"이라고 불렀다.
"슬쩍하지 않았어."
"슬쩍했어! 그는 내 거야!"
그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자기만족이 사실은 그를 소유하고 있다는 만족감이었다는 사실을,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넌 그의 것이고."
"그럼."
"……그러니까 내 것이기도 한 거 아냐?"
"?"
당신은 늘 나에게 어려운 문제를 던져.
나는 마리아 언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100년간 창고에 잠들어 있던 황금색 숱같이 아득하니 젖은 눈을 하고 있다. 나는 늘 이 눈에 취해 나 자신의 추함을 자각하고, 내가 관계했던 남자를 그녀에게 맡겨 확인하고, 스스로를 열등생처럼 느끼면서 안식을 얻었다. 그녀는 버림받고 가련한 나에게 절대적 존재였다.(pp.61-63)


사랑하고 있다는 말의 의미를 나는 떠올릴 수 없다. 나는 마리아 언니에게 그 생각을 전했다.
"그건 네가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사람은. 한가운데 있는 건 그가 아닌가.(p.64)


"네가 한가운데 있는 거야." 하고 마리아 언니는 다시 말했다.
"둘이서 나를 괴롭히지 말아 줘."
나는 울었다.
"울면 안 돼, 베이비."
"울지 마, 나의 킴."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쳤다.
"사랑해, 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오랫동안 동경해 왔던 여자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내가 그녀에 대한 동경을 그만둔 후에.(p.65)


"사랑해?"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늘 당연하다고 그냥 흘려 버리는, 우리 사이에서 가장 가볍고도 의미 없는 말. 그 말이 가볍게 내뱉을 수 없는, 농도 짙은 어떤 것으로 바뀌어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p.71)


그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징그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쯧, 내 모든 것이 너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 이 피부를 좀 봐. 손가락으로 누르면 들어가잖아. 손가락을 떼면 같은 속도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p.73)


특히 가장 처음 인용한 부분인 "썩은 냄새에 가까운, 그러나 결코 불쾌하지 않은, 아니 불쾌하지 않은 게 아니라 더러운 것에 침범당함으로써 나 자신이 맑은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는 그런 냄새. 그의 냄새는 나에게 우월감을 주었다."는 이야기 초반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데, 아주 훌륭하게 요약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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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그래픽 세계사 - 그림과 도표로 보는 세상의 모든 지식
제임스 볼 외 지음, 왕수민 옮김 / 민음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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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그래픽인데 가독성이 몹시 나쁜 놀라운 책. 기획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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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피아노 Play It Again - 아마추어, 쇼팽에 도전하다
앨런 러스브리저 지음, 이석호 옮김 / 포노(PHONO)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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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1세계 백인 남성’의 표상을 본다면 정신병이거나 굉장히 멍청한 것, 둘 중 하나다. 다만 피아노가 주제인 것마냥 번역판 제목을 이렇게 잡은 편집자는 책임이 있다. 특출난 음악적 가치는 없지만, 월 3천만 원을 벌던 스타급 리버럴 저널리스트의 삶 전반이 잘 드러나는 괜찮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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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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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했다 오늘 받고 정신없이 지금 덮었네요. 세 시간만 투자해 이 소설을 읽으면 여러분에게 그 어렵던 클래식이 포근하게 느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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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리터의 눈물 - 눈꽃처럼 살다 간 소녀, 아야의 일기, 개정판
키토 아야 지음, 정원민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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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키토우 아야 (木藤亜也)는 폴 모리아의 토카타를 좋아한다고 한다. 자신의 문학적 소양과 예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오히려 어릴 때 적은 일기에 더 드러나고 있는 게 뚜렷하여 '아쉽다'. 나는 리스트 (Franz Liszt)의 나단조 곡들을 들으며 그의 삶을 곱씹었다.


지금까지는 여동생이 심술궂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실은 다정한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학교 갈 때 남동생은 나를 두고 척척 앞으로 가 버리는데, 여동생은 더딘 나랑 보폭을 맞춰서 걷는다. 그리고 육교를 건널 때는 가방을 들어주고, "언니는 손잡이를 잡아."라고 말해 준다.(p.23)


엄마가 의사 선생님께 내 상태를 설명했다. 넘어질 때는 보통 팔을 앞으로 뻗어 몸을 보호하는데, 그러지 않고 얼굴을 그대로 땅에 부딪쳐서 턱을 다친 것, 무릎이 잘 굽혀지지 않아서 걸음걸이가 불안한 것, 살이 빠진 것, 동작이 둔하고 민첩하지 못한 것 등. 엄마가 설명하는 내용을 듣다 보니 덜컥 겁이 났다.

늘 바쁘게 지내는 엄마가 이렇게나 자세히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니……. 엄마는 내 모든 걸 꿰뚫어 보고 계셨구나.(pp.26-27)


내가 죽을 둥 살 둥 공부하는 건 이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나한테서 공부를 빼면 불편한 몸만 남을 뿐. 생각하고 싶지 않아. 외로워도 힘들어도, 이게 현실인걸. 머리는 나빠도 좋으니 제발이지 몸이 건강했으면…….(pp.49-50)


학생수첩 외에 신체장애인수첩을 받았다. 척수소뇌변성증.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운동신경을 지배하는 소뇌의 세포 움직임이 약해지는 병이라고 한다. 한 100년쯤 전에 처음 발견한 병이란다. 이 병은 왜 나를 택했을까? 운명이라는 한마디 말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p.53)


"절대로 무리하지 마. 택시 회사에는 엄마가 설명해 두었으니까 너는 택시비를 내지 않아도 돼."

엄마, 난 꼭 돈 먹는 벌레 같아요. 언제까지나 부담만 주는 아이 같아요. 엄마, 미안.(p.55)


장애인도 건강한 사람과 똑같은 마음을 지녔다.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은 불행이 아니다. 불편할 뿐이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행복해지려면, 건강한 사람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무언가를 익혀야 한다.(p.69)


특별활동 시간에 임원과 각각의 학급 일을 맡아서 할 담당자 선거가 있었다. 반 학생 수는 마흔다섯 명. 담당자로 선출된 건 마흔네 명. 나 혼자만 아무 일도 맡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괴로우니까, 난 천사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하자. 떨어진 휴지를 주울 수도 있고, 창을 닫을 수도 있어. 하려고만 하면 할 일이 얼마든지 있거든.(p.69)


히가시 고등학교로 돌아가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정신 바짝 차리고 고등학교 2학년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희망을 남겨 놓는 게 필요했다.(p.102)


자연히 나아질까? 17살이 되었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싸워야 하나님은 나를 용서해 주실까? 나는 엄마의 지금 나이인 42살이 된 나를 상상할 수 없다. 히가시 고등학교를 2학년 때 그만두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듯이 42살까지 산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다. 불안하다. 하지만 살고 싶다.(p.127)


초등학교 때는 크면 의사가 되고 싶었고, 중학교 때는 대학에서 복지를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히가시 고등학교 때는 문학 계동으로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꿈은 바뀌어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만은 한결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목표를 정할 수가 없다. 그래도 졸업한 후에 몸이 불편한 아이들의 식사를 도와주는 정도의 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손을 잡아 사람의 따스함을 전해 주고 싶다.(p.139)


눈물을 참고, '엄마, 다시는 걸을 수 없어요. 붙잡고 서려 해도 설 수가 없어요.'라고 종이에 써서 문을 열고 내밀었다. 내 얼굴을 보여 주는 것도,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것도 괴로워서 얼른 문을 닫았다.(p.219)


화장실까지 3미터를 기어서 간다. 복도가 싸늘하다. 내 발바닥은 부드러워서 손바닥 같다. 반대로 손바닥과 무릎은 발바닥처럼 딱딱하다. 보기 흉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유일한 이동수단이니까.

뒤에 인기척이 났다. 기어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니 엄마가 기어오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바닥에 눈물을 뚝뚝 떨으뜨리면서…….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단번에 터져 나와 목 놓아 엉엉 울었다. 엄마는 나를 꼭 끌어안고 울고 싶은 만큼 실컷 울게 내버려 두었다. 엄마의 무릎이 내 눈물로 흠뻑 젖고, 엄마의 눈물이 내 머리카락을 적셨다.(p.219)


어떤 말을 해야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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