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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천년의 질문 1~3 세트 - 전3권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9년 6월
평점 :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가 있은 이후 수천 년에 걸쳐서 되풀이되어온 질문.
그 탐험의 길을 나서야 하는 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책 첫 페이지 작가의 말에서 조정래 작가는 위와 같이 이야기한다.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수천 년 동안 되풀이되었지만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은 온갖 비리와 권력 유착이 난무하고 이미 곪을 대로 곪고 부폐할 대로 부폐한 국가 시스템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그래서 조정래 작가는 마지막 문장에서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천년의 질문> 3권에서 장우진 기자의 입을 빌려 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리와 사건들이 모아지고 모아져 우리나라는 이제 난파의 위기에 몰려 있는 것입니다. 그 위기를 조장한 것은 다섯 개의 권력 집단입니다. 입법·사법·행정의 국가권력과 재벌·언론의 사회 권력입니다."
조정래 작가는 장우진이라는 기자를 통하여 이 다섯 개의 권력 집단이 어떻게 얽히고설켜 있는지 풀어낸다. 인터뷰에서 장우진 기자는 주진우 기자를 모티브로 했다고 밝히기도 한다.
국회의원, 검사, 판사, 변호사, 사무관, 재벌, 기자들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과 가지고 있는 권력이 얼마나 큰 지는 실제로 경험하지 않으면 가늠하기 힘들다. <천년의 질문>에서는 사실일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일들이 벌어진다. 조정래 작가가 소설 집필을 위해 각계각층 인사들을 만나 심층 취재하고 130여권의 취재 노트를 작성했다고 하니 소설 내용에 신뢰를 더한다. 책을 읽고 나면 다섯 개의 권력 집단이 가진 힘과 영향력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알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의외로 많이 똑똑하다. 상대방이 약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고 무엇에 약한지를 제대로 간파한다. 시간 강사인 고석민에게 국회의원 윤현기는 몇 번이나 대학교수 자리를 제안할까 고민한다. 고석민이 써 준 글로 윤현기는 자기 이름으로 신문에 칼럼을 내고 책도 낸다. 그래서 꼼짝 못 하는 것이다. 이것만 아니면 국회의원이 시간 강사와 연락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이처럼 어쩔 수 없이 공생의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시간 강사라 수입이 넉넉지 못한 고석민은 이렇게 글을 써주며 돈을 받는 것이다. 국회의원인 윤현기는 칼럼과 책을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며 국회의원 자리를 공고히 한다. 이 연결 고리를 끊으려면 시간 강사의 처우가 개선되거나 국회의원이 직접 글을 쓰고 책을 내면 된다. 그러나 둘 중 하나도 결코 쉽지 않다. 전자는 시스템과 구조의 개혁이 필요하고 후자는 인간이 변해야 한다. 어느 것이 더 쉬울까?
비자금을 파헤치기 위하여 조사하는 기자를 막기 위한 재벌의 공세는 가히 경악할만하다. 기자의 아내의 친구를 통하여 접촉을 시도하기도 한다. 10억, 20억 등 거액의 돈으로 회유할 때도 있고 미행하며 총으로 협박하기도 한다. 회유와 협박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비리가 폭로되는 것을 덮으려고 하는 것이다. 비자금이 몇 천억 원에서 몇 조에 이르기 때문에 몇 십억, 몇 백억을 쓰더라도 덮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재벌의 탈세와 비자금 빼돌리기, 일감 몰아주기는 오랜 기간의 병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이름 모를 단체에서 계속해서 소송을 건다. 장우진 기자도 고소 고발이 백여 건이나 된다. 이 모든 소송을 대응하려면 변호사를 고용해야 된다. 기자 월급으로 이 모든 소송에 대한 변호사 비용을 당연히 감당할 수 없다. 다행히, 민변(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변호를 맡아준다. 민변은 처음 50명으로 시작했는데 30여 년 활동해 오면서 회원들이 1천1백 명이 넘게 늘어났고 후원자들도 1만 5천 명이 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어두움과 비리로 가득한 암울한 세상이라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지만 장우진 기자나 민변, 그리고 여러 시민단체가 아무런 금전적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로지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그래도 희망을 걸 수 있다.
재벌은 국회의원에게까지 손을 뻗친다. 국회의원의 인맥과 권력을 동원하여 기자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것이다. 물론 국회의원도 선거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돈에 매우 약하다. 재벌은 이 사실 또한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재벌은 기자, 국회의원, 검사 등 가리지 않고 자신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평소에 이런저런 구실로 선물 등을 보내며 물질 공세를 펴며 관리를 한다.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흐물거리지 않고, 허물어지지 않는 권력이 있었던가. 모든 국가권력은 돈 앞에서 하나같이 물컵 속의 각설탕이고, 용광로 속의 쇠붙이고, 끓는 물속의 얼음덩이였다. 국회의원이고, 판검사고, 공무원이고, 모두 마음먹은 대로 주무르는 쾌락은 마치 내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돈의 위력이란 그다지도 막강하고 무한대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국회의원들도 무서워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참여연대와 녹색연합 같은 시민단체이다. 문제가 있는 국회의원들을 지적하고 낙선 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가장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낙선이다. 자신들의 자리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민단체의 수가 유럽 선진국에 비하여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그만큼 저조하고 결국 국회의원과 정치인들을 관찰하고 감시할만한 힘이 없다는 반증이다.
무엇보다 시민단체가 조직화되지 않으면 대규모의 집회와 시위라도 일회성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책에서는 국민이 실체로 존재하려면 전 국민적 조직을 갖춘 조직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실질적으로 모든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심판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반대로 권력 입장에서는 조직화되지 않은 국민은 무서울 것이 없다.
스웨덴 국회의원과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비교하는 내용도 나오는데 이 역시 충격적이다. 스웨덴 국회의원은 일단 차가 없다. 모두 자전거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보좌관도 따로 없다. 국가에서 두 의원 당 한 명씩 국회 입법 조사관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모든 의원이 연간 수십 건식 법안을 발의한다. 모든 회의 전원 참석이 원칙이다. 휴일 없이 24시간 일하고 점심도 도시락을 싸온다. 비행기나 열차 앞 좌석 배정 예우 같은 것도 없다. 국회의원이 온전히 봉사하고 희생하는 자리인 것이다. 이런 나라가 정말 있나 싶을 정도로 이상적인 모습이다.
무엇보다 시민단체가 2십3만2천여 개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프랑스는 시민단체가 100만 개고 영국은 87만 개라는 점이다. 이에 반해 대한민국은 만 개 조금 넘지만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곳은 겨우 몇 십 곳에 불과하다. 결국 국민들의 감시 감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뽑고 나서 그저 믿고 방심하면 안 된다. 책에서 스웨덴 국회의원은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자기 인생에 무책임한 것입니다."라고까지 말한다.
책을 읽으며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돈이 모든 것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소설에서 배상일은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거금을 받게 된다. 그리고는 아내와 아이들, 심지어 부모와도 전부 연락을 끊고 흥청망청 돈을 쓰며 돌아다닌다. 배상일을 보면 갑자기 굴러 들어온 돈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가족을 파괴하는지 잘 보여준다. 마치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 중에서 마약에 빠지거나 재산을 다 탕진하고 피폐한 인생을 살거나 불우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책에는 돈에 대한 인간의 심리를 일찌감치 꿰뚫어 본 2,100여 년 전 중국의 역사학자 사마천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소개한다.
"자기보다 10배 부자면 헐뜯고
자기보다 100배 부자면 두려워하고
자기보다 1,000배 부자면 고용당하고
자기보다 10,000배 부자면 노예가 된다."
국회의원이 되어 지역구를 오래 지키려면 국교위(국토교통위원회) 소속을 고수해야 한다. 이것도 돈, 즉 예산과 관련되어 있다. 국토교통부는 교통망뿐만 아니라 국민 주거 문제 전반도 포괄한다. 공기업 실무자를 공략하여 고급 정보를 빼내어 믿을 수 있는 건설업자에게 넘겨주며 선거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다. 공기업 실무자는 그 덕에 승진을 확보하게 된다.
시민단체서 고발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지 이야기하는 대목도 놀랍다. 일단 경찰이 수사해서 검찰에 넘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경찰 수사 단계에서 손을 쓰면 시민단체에서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검찰에 넘겨지고 재판까지는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재판에 넘겨진 다음에 시민단체에서 '이제 끝났다'라고 생각할 때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법이 정의로운 심판을 내릴 것이라 믿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조정래 작가는 <천년의 질문>에서 전관예우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민사든 형사든 안 통하는데가 없다는 것이다. 전관예우가 못 이기는 재판은 없다고 말한다. 전관 출신 변호사는 한 건으로 수십억을 챙긴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한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도 괜히 어렵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돈을 요구하는 것이다.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서야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전관예우는 명백한 사법 범죄인데 이를 처벌할 만한 법이 없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공문원들의 유관기관 재취업은 행정 범죄이다. 책에는 교육부에서 다섯 대학을 담당하고 난 다음 은퇴하고 대학교 실장으로 재취업하고 그의 두 자녀는 다른 두 대학의 교직원으로 취업한 사례를 소개한다. 이처럼 <천년의 질문>은 관행이라고 하는 것들 중에 범죄라 불릴만한 것들이 꽤 존재한다는 사실을 꼬집는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5대 거품 빼기 운동'을 시작한다. 기름값, 통신비, 카드 수수료, 약값, 은행 이자 다섯 가지를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책정하는 범국민운동이었다. 특히 석유 4사(SK, GS칼텍스, S-OIL, 현대오일)의 시장 완전 독점을 비판하며 국민석유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실제로 주유소도 운영한다. 이 국민석유 주식회사는 현재 국민 에너지 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꾸었다. 물론 이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방해하는 권력이 여기저기 존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로 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몸 바치고 헌신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조정래 작가는 강조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황원준 검사가 글을 잘 쓰고 싶은데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는데 장우진 기자는 세 권의 책을 추천한다. 글쓰기와 관련하여 조정래 작가의 추천 책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바로 피천득의 <인연>, 법정의 <텅빈 충만>, 그리고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