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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허풍담 1 - 차가운 처녀
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행복한 세상의 북극탐험
사냥꾼 크롱은 매일같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점사 대상을 향해 징표를 찍었고 레이드가 끝나면 혼자서 잠깐의 독서를 즐기며 그것이 인생의 낙이라 여겼다. 그런 그에게 『북극 허풍담』이란 책이 그의 손에 쥐어졌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행복한 세상을 향한 계단의 첫 번째 디딤석에 올라와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은 북극을 향한 입장권이었다.
『북극 허풍담』에서 작은 에피소드가 시작할 때마다 나오는 도입부의 독백을 흉내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이 소설은 행복한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입장권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요른 릴이라는 타고난 이야기꾼이 자신의 북극 생활을 근거로 해서 지어낸 짧은 이야기.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너무나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매일같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뭐 좀 재미난 일 없을까 하고 있던 저를 웃게 만들었습니다. 너무 웃겨서 그래서 무어라 말을 이어가질 못하겠습니다. 뭐 이런 세상이 다 있답니까. 하하, 하하하.
소설은 그린란드 북동쪽 북극지역의 사냥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길고 추운 겨울을 견뎌내며 생존과 사냥에만 집중하고 있을 것만 같은 투박한 그들에게도 나름의 생각과 고민, 생활, 위기 등등 아무튼 뭐가 되었든 여러가지 작고 사소한 이야깃거리가 마구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전혀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전개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에도 바로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도통 감잡을 수 없게 합니다. 흘러가는 이야기만으로도 자유로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선과 반전을 넘나들며 뒤집고 흔들고 던졌다 받으며 절대로 틀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각오로 이야기는 자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고려해서 말이지요.
『북극 허풍담』은 휴가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잊고 이야기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휴가 여행때 함께 하고 싶은 책을 이야기할 때, 상처를 치유해주고 위안을 준다는 자기계발서와 더위를 싹 다 잊게 해준다는 공포소설따위는 이 이야기꾼이 들려준 북극 허풍담과 게임이 안됩니다. 세상을 완전히 잊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풍덩 빠져들어서 이야기와 하나가 된다는 느낌입니다. 남동풍이 부는 어느날밤 문을 열고 나가 바지를 벗고서 한참을 뛰었습니다. 왜냐하면 사과맛 도넛을 닮은 엠마가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지금 엠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약간의 슬픔을 느끼고 있지만, 입고 있는 이 옷가지 모두를 내놓고서라도 엠마를 사랑할 권리를 갖고 싶었습니다. 비록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선 며칠밤을 눈보라를 뚫고고서 혹독한 추위와 맞서싸워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남자라면, 그리고 사나이라면, 또 사랑을 위해서라면, 한낱 스웨터 한 장쯤이야. 그런데 문제는 이 북극 동네에는 단 한명의 여자도 없다는 데 있습니다.
제가 방금했던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도대체 이게 뭔가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이야기의 존재를 알았다는 것,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낍니다. 우쭐해지는 기분까지 생깁니다. 이야기가 담겨진 꾸러미를 소유했다는 느낌, 그래서 행복해하고 웃을 수 있다는 권리를 얻은 느낌입니다. 7월 23일부터 3일간은 여름휴가 기간이니 아무도 나의 휴식을 방해할 수 없다는 기분, 혹은 7시 23분부터는 매일 찾아오는 내 쾌변의 시간이니 아무도 나의 공간에, 즉 신성한 변소에 침입할 수 없다는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얻은 기분이 듭니다. 나 하나만을 위한 이글루를 찾은 것입니다. 드디어. 마침내. 만세!
그들은 수탉의 철학에 관한 생각들을 주고받았으며, 그럼으로써 자연스레 자신들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렇게 그들은 여러 까다로운 문제들을 깊이 파고들어 토론하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서로를 아주 흥미롭게 생각했다. (47쪽)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을 거야. 왜냐하면 그때가 되면 저 아랫동네에서는 역사가 끝날 테니까. 그 사람들은 다들 너무 똑같아져서 여담을 적는 부분에 한 줄이면 다 담을 수 있을 거야. 그 사람들한테는 역사가 없을 거야.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잘 새겨들어. 이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이니까. 그 사람들은 현재까지 써온 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여백 메우기요 수다일 뿐이며 우리에게 가르침을 줄 만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눈길을 북쪽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지. 곤경에 처하면 늘 그래 해왔으니까. 장담하지만 여기에 좋은 본보기가 있거든. 너와 나와 낯짝과 다른 사람들, 우리는 세계사의 본보기들이지. (69쪽)
북극에서는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된다. 하나의 생각을 미리부터 배척하는 법이 없다. 첫째, 그 생각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생각으로 밝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고, 둘째, 사냥꾼들 사이에 긴 대화와 토론으로 이해를 증진시킬 기회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한센 중위의 계획을 대뜸 물리치지 않았고, 이어지는 며칠 동안 그가 자기 계획을 펼치도록 내버려 둔 채, 찬반 양론을 비교 검토하는 데 몰두했다. (105쪽)
이 대목에서 매스 맨슨은 빌리암이 이 주제에 적응할 수 있도록 계산된 침묵을 끼워 넣었다. 그가 방금 건드린 주제는 그린란드의 북동쪽 세계에서 접근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희귀한 폭탄 같은 것이어서 조심스레 다루어야 했기 때문이다. 북극에서 여자란 먼 상상의 실체이기에 이곳 사람들은 모호하고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암시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곳에서 이 피조물에 대해 천박하거나 외설적으로 말하는 것을 듣는 일은 극히 드물다. 모든 사냥꾼은 아름답고 고결한 자기만의 연애 사건을 혼자 간직하고 싶어한다. 사실 매스 매슨도 그저 여성에 대해 일반적인 차원의 생각, 작은 구체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데서 멈출 생각이었다. 경험하는 것도 감미롭지만 거기서 벗어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감미로웠던 모험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엠마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녀는 그의 상상에서 곧장 튀어나와, 그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준비를 갖추고 전면에 나섰다. (126쪽)
그건 정말이지 감동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화상실은 시워츠에게 화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더 이상 화장실 없이 지낼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레우즈의 집이라 열쇠를 받으려면 매번 간청해야 했고, 그러자니 성가시기도 하고 굴욕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변소에 자리를 잡고 작은 창문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면 그 모든 불편이 싹 잊혔다. 그 순간 시워츠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된 느낌이 들었고, 북극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그의 뿌리가 저 아래 문명 세계의 어딘가로 뻗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날씨가 어떻건 아직도 바깥에서 볼일을 보고 있을 주변의 사냥꾼들을 연민 어린 마음으로 생각하며 자신이 남들과 다르며 우월하다고 느꼈다. 그는 변기에 올라앉은 사람이었다. 이 황홀한 순간만큼은 그가 그린란드 북동쪽에서 화장실에 앉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172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