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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ㅣ 레전드 시리즈 1
마리 루 지음, 이지수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개 눈엔 똥만 보인다고. 비슷한 판타지풍의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린 소설이라 할지라도 현재의 처지나 고민, 머릿속을 가득 매운 생각들이 무엇인가에 따라 소설을 보며 집중하는 부분이 달라질 수 있구나를 느낍니다. 최근들어서 조금 달달하고 나긋나긋하며 어렴풋한 설레임같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느껴지는 풋풋한 소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수확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틴에이지 판타지소설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마리 루의『레전드』가 그리고 있는 미래 세상은 여느 판타지소설이 보여주는 미래의 모습과 달리 뚜렷한 주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래의 모습이 틀어진 세상을 어설프게 드러내려한 헛된 노력이 아니어서 오히려 좋았습니다. 감정이 배제된 세상이라던지, 젊음이나 시간이 거래되는 세상이라던지, 하는 식의 모습이 아니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정부의 독재와 억압 아래 계층간의 빈부 격차가 큰 사회이고, 아이들은 수능과 비슷한 시험을 치룬 뒤 점수에 따라 각각의 계층에 배속되는 세상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꽤 어려운 시험인듯 해 보입니다. 만점을 받은 사람이 지금까지 딱 두 명있다고 하니까요. 여자 한 명, 남자 한 명.
그런데 운명의 장난으로, 이 머리좋은 두 아이는 서로 각기 다른 계층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데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는『레 미제라블』, 혹은 『로빈 후드』의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악명 높은 현상수배범이 된 빈민가의 아이이고, '준'이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며 최연소로 임관한 충직한 정부의 조직원이 된 아이입니다. 그런데 데이는 준의 오빠를 죽이고, 준은 데이의 엄마를 죽이게 됩니다. 나중에 어떻게 매듭짓든 일단은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 둘이 서로 사랑에 빠져버린다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함정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집안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을 하는 것이라지만, 이 소설의 두 남녀 주인공은 서로가 철천지원수 1세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소설은 이 두 남녀 주인공의 시점을 교차로 보여주며 시간을 따라서 순서대로 보여줍니다. 소년과 소녀가 갖는 미묘한 감정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설정이었습니다. 연애소설로 치자면 이보다 더 좋은 설정은 없었을 것입니다. 십대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보니 오래되어 깊이있고 묵직한 포도주맛 사랑이 아닌, 시원하게 불꽃튀기고 치고 박고 싸우고 배신에 속삭임으로 이어지는 톡쏘는 맥주맛 사랑을 보여줍니다. 어쨌든 어떤 술이든 간에 취하는 건 마찬가지이니 서로가 서로에게 강하게 취해서 끌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흥미로워 보이면서 또 당연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둘은 외모도 물론 보통 이상의 외모였겠습니다만, 뛰어난 관찰력, 그러니까 마치 홈즈가 왓슨하게 트릭을 설명해주는 식의 화려한 두뇌 액션에 서로 끌렸던 것 같습니다. 참 별게 다 끌린다 싶겠지만, 아무래도 역시 외모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겠지요.
최근에 나오는 판타지소설처럼 이 이야기 역시 단 권의 이야기로 끝날 듯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남아있는 많은 악당들이 존재하며, 또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지역과 만나보지 못한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전드』는 '두 개의 심장 하나의 불꽃'이라는 소제목처럼 두 개의 심장이 만나서 하나의 불꽃을 이룬 서막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준과 데이, 그들의 모험을 응원합니다. 너희 둘은 이 암울한 세상을 밝게 비출 한줄기 빛이 되어 아름다운 사랑을 오랫동안 영원토록 해야 된 데이-.
스키즈 경기장에서도 그랬지만 내 마음을 잠시 뒤흔들 만큼 예쁘장하다. 아니, 예쁘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아름답다. 그런데 아름다운 것뿐만이 아니라 소녀를 보면 자꾸 누군가가 떠오른다. 눈에 서린 표정 때문일지도 모른다. 냉정하고 논리적인 동시에 격렬하게 반항적인…… 뺨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 같아서 내리깔리는 어둠에 감사하며 얼굴을 홱 돌린다. 애초에 도와주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너무 흔들린다. 지금 당장 머릿속에 나는 생각이라고는 소녀에게 키스할 수만 있다면, 혹은 저 짙은 색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도록 허락해 준다면 내가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저기 말인데." (135쪽)
소년은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내가 자기를 빤히 살펴보고 있음을 깨닫고는 잠깐 멈칫한다. 뭔가 은밀한 감정이 순간 소년의 두 눈에 스친다. 아름다운 수수께끼. 내가 무슨 수로 소년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점들을 추측만으로 알아낼 수 있었는지, 소년 역시 내게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음이 확실하다. 어쩌면 다음번에는 내가 소년에 관해서 또 어떤 점을 유추해 낼지 궁금해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년이 내 얼굴에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어서 뺨에 와닿는 숨결까지도 느낄 수 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다. 소년이 조금 더 다가든다.
순간적인 찰나, 소년이 키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54쪽)
내 입에서 말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소년이 상체를 내밀어 내 뺨에 손을 댄다. 여태까지 훈련을 받아온 나인 만큼 소년의 손을 막고 땅바닥으로 내리눌렀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못한 채 조금의 미동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다. 소년이 나를 끌어당긴다. 숨을 들이마신다음 순간, 소년이 입술로 내 입술을 어루만진다. (162쪽)
"너와 난 공동의 적을 가졌을지도 몰라. 그 적들이 우리를 서로 반목하게 만든 거지." (272쪽)
"하루가 지난다는 건 새로운 24시간이 온다는 의미잖아. 그리고 또 뭐든지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난다는 뜻이기도 해. 사람은 순간에 살고 순간에 죽지. 그날그날을 열심히 즐기며 사는 거야." (3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