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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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죽이는 방법, 알려줄까? 

    어느 여름 날, 한가하게 거실에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저에게 친구가 불쑥 이상한 소리를 꺼냈습니다. 평소에 이렇게 이상하고 잔인한 소리를 스스럼없이 하던 친구라 갑작스런 친구의 그 말에 처음에는 대꾸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 했던 제 표정을 읽은 겐지, 친구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지더니 다시 한번 같은 소리를 되풀이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의 입을 통해 나올 다음 이야기를 조심스레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언젠가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일이 생길지 모르니 방법 정도는 알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홉 살이었던 저는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로 크게 울어대고 있던 말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이어들릴 친구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박 향기』는 일정한 간격으로 이루어진 열한 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제목만 언뜻 봐선 달달한 여름날의 추억을 담고 있을 법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수박 향기』는 꽤 잔인한 짓을 하고서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스터리한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매 단편마다 여름이라는 배경과 여름과 관련된 소재들이 등장하고, 또 어린 소녀의 시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편들을 하나의 제목으로 묶어 두는 데 크게 무리가 없단 생각을 합니다. 한결같이 꾸준한 느낌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내년 여름에 『수박 향기』가 생각나서 또 꺼내어 읽어본다 하더라도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은 강도로 미리 기대하고 예상하고 있던 이상야릇한 느낌이 제게 똑같이 다가올 것 같습니다.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불쑥 나타나서 천천히 제 쪽으로 오다가 돌연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깔끔한 꿈같은 느낌으로 말입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꽤 흥분할만한 극적인 이야기를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일정한 간격으로 뱉어내고 있습니다. 약간의 어두운 색을 보태어 놓고서 말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크게 소리내어 말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녀의 입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지 모릅니다. 이야기가 어둡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어둡다고 말할 수 없고, 잔인해 보이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잔인하다고 할만한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미스터리한 이야기이지만, 이런 이야기가 그렇게 대단한 미스터리라고 할만한 것인가, 하는 등등의 의문으로 사람을 무척 헷갈리게 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아직 어려서 세상을 잘 모를 듯해 보이지만 이야기속의 소녀 자신은 무언가를 굉장히 많이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스터리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고 유치한 느낌의 것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쉽게 느낄 수 없는 기괴한 현상에 잘 노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과 악의 구분없이 순수함에서 우러난 잔인함이 아이들에게선 잘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덮어두고 숨기려해도 자연스레 스며드는 향기, 혹은 소리처럼,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나타나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주거주거주거주거. 주거는 말매미 울음소리입니다. 아마도 죽어, 라는 소리를 표현하려 했던 것이겠죠. 『수박 향기』에서 잠시 나왔던 이 소리가 아직도 제 귓가에서 죽어라고 울어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가 하려던 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해 옆에 쌓아두었던 책을 천천히 펼쳐 보았습니다. 그리고 읽었습니다. 저는 책 안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이 굉장히 잔인한 모습으로 죽임을 당하더라도 저는 아무 말없이 조용히 눈으로 훑어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그들의 죽음을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그들이 무슨 말을 제게 건내려 했지만 저는 일부러 못본 채하며 무시했습니다. 그러다 잠깐 책읽기를 멈추고 거실의 하얀 천장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생각이 없는 듯한 멍한 표정으로 누워서 선풍기가 만들어내는 바람소리를 들어 보았습니다. 그러다 눈을 감으면 또 다시 친구가 제 옆에서 속삭입니다. 

    있잖아, 사람 죽여봤어?







    가장 서글픈 것은 저녁때였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몸속에서 꾸물꾸물 기어올라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작은 몸집조차 길들지 않은 고양이마냥 어쩌지 못했다. 체념한 심정으로 이불 속에서 울 때가 오히려 더 편했다. (11쪽)



    머리를 올려놓으면 공기를 빵빵하게 불어넣은 비닐이 약간 아래로 휘었고, 그 때문에 자신의 무게를 인식하게 되어 슬펐다. 자신의 무게. 정말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일곱살이고 언니는 아홉 살이었지만, 우리는 각자의 혼돈의 무게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죽을 만큼 나른하고, 실제로도 아직은 모두가 죽음과 매우 가까운 장소에 있었다.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생리적으로 알고 있었다. (42쪽)



    불가사의한 여름이었다. 사소한 일을 유독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64쪽)



    "매일 재미나게 지내고 있어?"

    불쑥 그렇게 묻기도 했다. (124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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