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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ㅣ 밀란 쿤데라 전집 10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평점 :
고향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한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고향 곁 엄마 품을 떠나서 객지 생활을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물론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고 생각할 만한 거리의 장소라 크게 멀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들어선 그렇다고 해서 고향이란 곳이 쉽게 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구나를 느낍니다.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심적인 거리가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멀지만 가깝고, 가깝지만 먼 느낌으로.
가끔 고향에 가면 오래 전 친구를 만나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항상 우리는 정체되어 전혀 자라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끊임없이 과거에 얽메이고 '그땐 그랬지'하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주 보지 못한 친구들과 함께 한 그 시간만큼은 잠시 옛시절로 돌아가 즐거웠던 날을 되새겨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선 매번 공허한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연결되지 않은 느낌. 정강이를 잘라내어 발목을 허벅지에 붙여 놓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것은 향수라는 단어가 제게 주는 조금 특별하고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그런데 그 느낌마저 최근엔 조금씩 쪼그라들고 있는 듯합니다. 어렸을 땐 어제가 그립고 지난 주가 그립고 지난 학년이 그립고 그랬는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단위가 점점 커져버리는 것 같습니다. 일 년 전의 일에 대해 그다지 그립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며, 곧 있으면 10년 단위를 훌쩍 뛰어넘은 시간에 대한 향수도 거의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어쩌다 어렵게 피어난 향수마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점점 묽어지는 향수를 느끼고 있으니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를 잡고 싶고, 이대로는 안 될 것만 같고, 그래서 당장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다는 조바심을 만들어 냅니다.
밀란 쿤데라의 『향수』는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향수의 느낌 외에 다른 이야기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쿤데라만의 고정된 스타일대로 4명의 남녀가 등장해서 각자가 갖는 생각을 들려주는 형태의 이야기입니다. 소련의 체코 침공과 맞물려 망명을 택했던 인물들이 고향인 체코에 잠시 돌아오면서 보며 느낀 것들을 꽤 어려운 말로 풀어놓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체제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 당시 개인이 느꼈을 감정을 저로서는 완벽하게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무언가를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계속해서 가슴속에 자리잡게 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한 각각의 인물들에게서 괜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굉장히 어려워 보이고 재미없을 것 같은 쿤데라의 소설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재미는 역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글에서 튀어나온 그, 혹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 맞춰가며 퍼즐을 맞춰보는 것부터가 소설이 갖는 대단한 재미입니다. 쿤데라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가 모두 다 듣길 원하기에 그는 독자들에게 끈기를 갖게 할 장치를 마련하는데 그게 바로 이 사랑이야기인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사랑이 어떻게 끝나는가, 그것이 궁금해서라도 우리는 끈기를 갖고서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나노 단위로 해체해 놓아서 꽁꽁 숨겨둔 비밀을 들킨 듯한 기분이 들게끔 하기도 하고, 또 무한히 깊게 공감하여 함께 울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런 그의 글은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쿤데라의 소설은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해내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각 장면들에 대해 언급하며 여러 문장으로 요약하려 하면 더 힘들어 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단 한 문장으로 짧게 요약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게 오히려 쉽기도 하겠고, 또 함축적으로 여러가지 의미를 담은 듯해 보일 수도 있으니 어쩌면 더 멋있어 보일 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자면 '향수는 상대적인 시간에 따른 착각의 감정이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가요. 조금 쿤데라틱한 문장이 되었나요.
낮이 되면 그녀에게 고향의 편린들을 마치 행복의 이미지처럼 보내 주었던 바로 그 무의식이라는 영화 감독은 밤만되면 그곳으로의 끔찍한 귀환을 만들어 냈다. 낮은 버림받은 조국의 아름다움으로 빛났으며 밤은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두려움으로 빛났다. 낮은 그녀에게 자신이 잃어버렸던 낙원을 보여 주었으며 밤은 자신이 도망쳐 나온 지옥을 보여 주었다. (21쪽)
그녀는 또다시 깊은 슬픔에 사로잡혔으나 그에게는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이란 서로에게 모든 것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 근본적인 단어. 모든 것, 그러므로 그녀가 그에게 기약한 육체적 사랑뿐만 아니라 용기, 즉 중대한 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필요한 용기, 다시 말해서 학교의 우스꽝스러운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아주 사소한 용기. 헌신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부끄럽게도 이러한 용기를 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얼마나 기이한가, 이 얼마나 눈물이 날 정도로 기이한가. 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순결뿐만 아니라 그가 원한다면 자신의 건강이나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떠한 희생까지도.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보잘것없는 교장 선생님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사소함에 굴복했어야 하는가? 그녀는 자신에 대해 느끼는 불만은 견디기 힘들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째째함 따위는 삼켜 버릴 위대함에 다가가고 싶었다. 그가 결국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위대함. 그녀는 죽고 싶었다. (108쪽)
사랑이라는 개념(위대한 사랑,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도 아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좁은 한계에서 생겨난 것 같다. 이러한 시간이 무한하다면 조제프는 죽은 그의 아내에게 그토록 집착했겠는가? 그토록 일찍 죽어야 하는 우리로서는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126쪽)
"소비에트 제국은 주권을 갖고자 하는 나라들을 더 이상 굴복시킬 수 없어서 무너졌어. 그러나 이 나라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주권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도, 외교도, 심지어는 광고 문안까지도 선택할 수 없지." (157쪽)
그들의 합의는 완전하다. 왜냐하면 그녀 또한 오래전부터 말하지도 듣지도 못했던 말들로 흥분했기 때문이다. 비속한 말들의 폭발 속에 이루어진 완전한 합의! 아, 그녀의 삶은 얼마나 불쌍했던가! 놓쳐 버린 모든 죄악들과 실현되지 않은 모든 부정(不貞), 이 모든 것을 그녀는 탐욕스럽게 겪어 내고 싶었다. 그녀는 결코 체험하지 못한 채 상상하기만 했던 모든 것을 겪어 보고 싶었다. 관음증, 노출증, 타인들의 외설적 모습, 터무니없는 말실수들을. 지금 그녀가 실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녀는 해 보려고 노력하며 실현할 수 없는 것은 그와 함께 높은 목소리로 상상한다. (181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