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병원에서 뜻밖의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입에서 튀어나온 첫 마디 말은 한탄의 소리도 아니었고 체념의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부정하려는 단계를 그대로 뛰어 넘어 버린 것인지, 입에선 분노의 말이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암입니다'라는 말에 답할 수 있었던 유일한 소리는 의외로 '아이 썅'하는 욕이었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지랄맞게도 이런 병에 걸려버렸으니 개똥같은 이 세상과 우주가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차차 주위 사람들을 정리해야만 했고, 갑자기 좁아진 나의 세상과 공간에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대단한 꿈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 안에 암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 안에 있던 다른 가능성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 꿈들은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고 듣도 보도 못한 가능성들이었지만, 앞으로 그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결이, '당신은 암이요'라는 말과 함께 정해지자 아직도 남아있을 다른 가능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주워 모아보기로 했습니다. 평소에 감명깊게 읽었던 소설에 대한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바다 건너에 있는 작가를 직접 찾아가 작가만 알고 있을 뒷이야기를 미리 들으려 하는 마지막 여행처럼 말입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조급한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길지 않은 인생동안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대단한 업적은, 암과 대항해 죽는 날까지 싸우다, 싸우다 결국에 죽었다는 암적인 영웅의 일대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남아 있는 시간들이 더욱 부족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병과 싸우다 허무하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기념이 될 만한 상처를 남겨 놓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함이 생겼습니다. 의미있는 상징을 담아서 꽤 멋진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지만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음으로서 죽음에게 힘을 주지 않았다는 상징과 같이, 비록 암에 걸려 몸이 병들었지만 아직 내 이야기는 암으로 인해 주제가 바뀌거나 주인공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며 소설 마지막 장의 'To Be Continued'를 박아 놓은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의 죽음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에게 슬픔이 전이되고 그래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싫기도 합니다. 그래서 관계를 정산하고 자신의 죽음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협상을 시작합니다. 멀리하고 더욱 멀리하고, 정리하고 또 정리하고. 거대한 우주를 바라보고 약간의 체념을 보태어 단순한 것을 느끼려 했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류하고, 기억이 스며있는 추억의 장소를 팔아 버렸습니다.



    존 그린『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암에 걸린 두 어린 남녀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조금 우울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유쾌한 이야기를 하며 병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또 아니었습니다. 도도하고 깔끔하고 발랄한데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암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소설의 말처럼, 소설은 암에 관한 이야기보다 병과 죽음에 대처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의미있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작은 움직임,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울고 있으면서 동시에 미소지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잔디밭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별들을 이어서 나만의 별자리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17에서 18. 이 두 숫자 사이에는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작은 무한대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무런 생각도 않고서 그저 시간을 소비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문득 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건 뭐랄까, 동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감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보다 더 클 수 있다고 인정하고, 그대로 내려 놓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무한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죽든 이제는 그냥 그걸로 괜찮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암 이야기는 아니다. 암 이야기는 재미대가리 없기 때문이다. 암 이야기에서는 암에 걸린 사람이 암과 싸우기 위해 돈을 모으는 자선단체를 설립한다. 안 그런가? 그리고 이런 헌신적인 자선단체 활동은 암에 걸린 주인공의 내면에 있던 인간의 선량함을 일깨우고, 그 사람은 암 치료라는 유산을 남겼다는 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격려를 받게 된다. 하지만(…). (54쪽)



    "모든 구원이란 일시적인 거야. 난 그 애들에게 일 분쯤 시간을 벌어줬어. 그 일 분으로 한 시간을 더 벌 수도 있고, 그 한 시간으로 일 년을 벌 수도 있지. 아무도 그들에게 영원한 시간을 줄 순 없어, 헤이즐 그레이스. 하지만 내 인생이 그 애들에게 일 분을 벌어 줬어. 그건 무가치한 게 아니야." (65쪽)



    "전 말이죠. 그런거예요. 그러니까 수류탄 같은 거라고요, 엄마. 전 수류탄이고 언젠가 터져 버릴 테니까 사상자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다고요, 아시겠어요?" (108쪽)



    "죽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의 문제는."

    그가 말을 하다가 문득 멈추었다.

    "문제는 그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 나쁜 놈이 되는 것 같단 말이지. 하지만 사실은…… 매우 복잡한 것 같아. 그러니까, 초인적인 힘으로 영웅적으로 암과 싸우고 절대로 불평하거나 마지막 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기타 등등 어쩌고저쩌고 하는, 성실하고 단호한 암환자에 대한 말들 너도 알지?" (183쪽)



    "하지만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소설의 저자가 소설 속 캐릭터들에 대해 특별한 통찰력을 갖고 있을 거라는 이 어린애 같은 생각은…… 참으로 우스꽝스럽구나. 그 소설은 종이에 몇 글자 끄적거린 걸로 만들어진 거야. 그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그런 끄적거림의 바깥에서는 아무 생명력도 없어. 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소설이 끝나는 순간 존재하기를 멈춰 버렸지." (203쪽)



    세상은 소원을 들어주는 공장이 아니야. (227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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