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의 뒷면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4월
평점 :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온통 회색으로 흐린 하늘. 선득한 느낌으로 팔과 목덜미에 축축하게 엉겨붙는 습기. 소설을 읽다보니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되살아납니다. 진즉에 그럴 생각은 없는 데다 골치 아픈 일은 제발 사양하고 싶었건만 소설을 읽다보니 어느새 이야기의 중심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그러다 결국에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어디선가에서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끝났으면 끝났다, 옳다면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런 식으로 단정지어 확신하듯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조금 이상한 소재의 소설이고 결말도 정리되지 않아 더욱 이상해 보이고, 그래서 결국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어서 아리송한 느낌뿐이라 한번 더 주목해서 확실히 따져볼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진정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단정지어 확신한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가 모두 이미 '하나'가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파헤치며 조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일지 모릅니다. 이미 다수의 무리에 포함되었으니 소수였을 때 가졌던 자극적인 생각들이 무의미하고 싱겁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어짜피 소설은 가상의 이야기일 뿐이라 우리는 소설에서 현실을 찾아야만 할 궁극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개 우리는 소설에서 우연을 가장한 뜻밖의 현실을 발견했을 때 대단히 열광합니다. 더 그럴싸하게 지어내면 지어낼수록 우리는 더욱 생생한 현실을 만났다고 합니다. 가짜인 줄 알면서도 진짜의 증거가 나타나면, 가짜였던 기억은 새까맣게 잊고서 진짜인 내용만 더욱 크게 자라나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이야기에 대해 경이롭다며 감탄합니다. 그리고 소설의 내용에 대한 '도둑맞은' 기억들과 소설을 읽고 있던 '도둑맞은' 시간을 뒤로 하고 현재의 기분과 감정만 기억한 채 현실을 말하며 현실에서 삽니다.
온다 리쿠의 『달의 뒷면』은 경험해보지 않아서 모를 수밖에 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바꿔 말하자면, 아직 경험해보지 않아 잘 모를 뿐 어쩌면 현실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상야릇한 느낌의 실종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변두리에서부터 차근차근 보이고 있는데, 이런 느낌은 한여름의 소나기를 연상케 합니다.
저 멀리 들판너머에 옆 마을 옆에 있는 마을까지도 훤히 보이는 언덕에 올라 앉으면 시야가 닿을 수 있는 한 가장 먼 변두리에서부터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소나기가 보일 때가 있습니다. 소나기의 묵직한 물줄기는 땅을 뒤흔드는 물소리가 함께 다가옵니다. 누가 처음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선형으로 표현했는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멀리서 그 장관을 보고 있으면 하늘도화지에 수없이 많은 선을 누군가가 자를 대고 수직으로 그어놓은 듯합니다. 그런데 그런 선이 막상 지면에 닿으려는 부분에선 끝까지 자를 사용하여 그어놓지 않습니다. 분무의 형태. 그래서 비를 그려놓은 그림에서 빗물이 땅에 닿아 부서지는 장면까지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아무튼 『달의 뒷면』은 우리의 양 발이 닿아있는 현실의 땅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허공에 붕 떠있는 소나기처럼 이쪽을 향해 스멀스멀 다가옵니다.
그래서 소설은 마치 장마철 구름같은 묵직한 이야기를 꽤 어렵고 어둡게 표현하고 있는 듯해 보입니다만, 완전히 그런 느낌만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비온 뒤 이슬을 머금은 강아지풀처럼 살살 간지럽히는 느낌의 귀여운 맛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중한 느낌의 클래식 음악에서도 때론 스타카토로 표시해둬야 할 부분이 있듯이 소설은 때론 경쾌하고 가벼운 느낌으로 꽉 붙잡아야 할 것들을 그대로 흘려 보냅니다. 모든 것을 다 잡을 필요가 없으며 일일이 따져가며 확실히 해둘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물컹물컹하고 붕 떠있는 느낌이 좋습니다. 그런데 정말 자세히 관찰하려 한다면 강아지풀의 털 아래에 송글송글 박혀있는 작은 씨알이 갖는 규칙성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때론 그 모습이 조금은 징그럽고, 어쩌면 잔인한 형상으로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아직 가보지 않은 일본의 한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니, 아직 저는 무엇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본다 한들 그 어떠한 것도 증명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의지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어느 순간 갑자기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려 모두와 동화되어 버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엄청나게 두렵거나 도망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달의 뒷면은 아직 우리가 잘 모르는 장소라 뭐라고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아주아주 오래 전부터 앞면을 보아왔기 때문에 뒷면에서도 마찬가지의 큰 공포는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미지근한 느낌으로. 어쨌든 우리는 이대로 끝난 게 아니고, 계속해서 대를 이어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끔은 소설이 말하기 힘든 느낌을 표현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소설이 생명력을 얻고 행위하는 예술가가 되어 무언가를 직접 몸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입니다. 괴로워서 몸부림치고 답답해서 가슴치고 있는 듯한 알 수 없는 내용의 소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설이 보이고 있던 실험적인 행위가 가끔은 소설이 품은 줄거리와 하나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너무 격양된 표정을 짓지 않고 자신이 있어야할 위치에서 차분하게 할 이야기를 다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저는 그렇게 신기한 모양을 하고 있는 소설이 좋습니다.
그저 그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구경하거나 남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 자연스러울 뿐이다. 그 때문인지 혼자 있어도 괴롭지 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남들과 같이 있는 편을 선호한다. 그래서 막연히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슬금슬금 갔다가 어느새 말썽에 말려들곤 한다. 말려든 뒤에 호된 꼴을 당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남과 같이 있는 쪽이 더 좋다. (15쪽)
그런 자연스러움은 여자에게만 있다. 남자는 그런 말을 못 한다. 진실은 남자의 것이지만, 진리는 여자 안에만 있다. 남자는 진리를 찾아 우왕좌왕할 뿐이다. (74쪽)
하늘은 우유부단한 남자의 어조처럼 무거웠다.
그리고 무거운 하늘 여기저기에 우유부단한 남자 때문에 속 썩는 여자의 불만 같은, 짜증어린 시커먼 구름이 번져 있었다.
인적이 한산한 제방은 상류에서 흘러온 점토질 흙으로 계속해서 메워졌다. 허연 갈대가 그 위에 빽빽이 증식해간다.
장마철이다보니, 시내를 흐르는 수로의 완만하고 인공적인 흐름과는 대조적으로, 도시를 에워싸듯 흐르는 진짜 강은 콸콸 힘찬 소리를 내고 있다.
갈라진 콘크리트 기슭막이 위로 날씬한 고양이 한 마리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온다. (85쪽)
남자는 말이지, 가끔 따로 노는 녀석도 있지만 대개는 화살표가 같은 방향으로 잔뜩 매달려 있거든. 하지만 여자는 방향이 다른 화살표가 잔뜩 매달려 있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자기 화살표하고 여자 화살표의 방향을 맞추려고 하는데, 여자 화살표는 방향이 전부 같은 게 아니니까 어느새 다른 화살표하고 정면충돌한다든지 입체적으로 교차하고 그래. (146쪽)
나는 늘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농담을 해본 적이 없다고 기억한다. 지극히 진지한 성격에 더해 나름대로 복 받은 환경 덕에, 내가 속한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느낀 이유 없는 절망을 설명하기 위해, 또는 해소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했다. 철학이며 종교를 연구한 적도 있고, 연애 상대에게 그것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내 절망을 달래주지 못했다. 내가 가장 절망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절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그들은 이렇게도 부조리하고 공포로 가득 찬 세상에 절망하지 않는 걸까? (206쪽)
우리 자신이 유전자의 탈 것이잖아. (254쪽)
세계는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는다. 생명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는다. 끈덕지고 강인하게, 온갖 수를 동원해서, 쓸데없고 무모해 보이는 막대한 행위를 되풀이해 아득한 시간을 쌓아올리며 인생은 계속된다. (356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