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다

 

 

어떤 사랑은 작별인사도 없이 떠난다. 헤어짐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상대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사랑한 시간과 자신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그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행위는 마음에 깊게 베인 상처를 남긴다. 나는 지나간 사랑을 가만히 내버려 둔다.’ 흘러간 사랑은 아프다기보다 먹먹하다. 가끔 둔한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제 날카롭지는 않다. 아픔의 모서리가 닳아 둥글게 되었나 보다.

 

한동안 집착한 작가가 있다. 17년 전에 만난 아멜리 노통브. 그녀의 초기 글은 30도 소주처럼 독하다. 행간마다 독버섯이 숨어 있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신간을 검색하지 않는다. 중독성 강한 그녀의 책을 내려놓은 이유는,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까칠한 문장을 좋아했던 입맛을 세월이 변하게 만든 것이다. 피라칸사스(불의 가시)같던 나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었다.

 

예전 직장에서 내 별명은 갱까도리(싸움닭)’였다. 상사에게 대들었기 때문이다. 상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았을 때, 생각할 틈도 없이 그냥 들이받았다. 인생 참 고단하게 살았다. 동료나 후배에게 시비를 건 적은 없다. 친구들이 가끔 나를 주먹 쥐고 일어서라고 부른다.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나온 등장인물의 인디언식 이름이다. 내 피부가 유독 까무잡잡하고 긴 머리를 땋고 다녀서 내가 봐도 인디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인디언 주술사가 되고 싶었다. 주술사가 되면 별들의 대화를 엿듣고 바람의 말을 이해하고 특별한 약초를 찾아내서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인디언 주술사는 마법사와 비슷하다. 이 세상 너머 다른 어딘가를 여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지금도 내가 태어난 별이라고 우기는 안드로메다같은 곳 말이다.

 

나는 멀고 먼 별에서 태어나 우연히 지구에 불시착했다고 생각했다. 사춘기 시절, 내 안식처는 책상 아래 좁은 공간이었다. 그 속에 들어가 책상 앞을 의자로 막고 숨어서 책을 읽곤 했다. 식사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나에게 언니는 밥 먹을래? 책 읽을래?’ 하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책이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밥 대신 책을 먹고 살았던 시간도 지나갔다. 외로움이 가장 친한 친구였던 나를 위로해준 문장들도 이제 기억이 희미하다. 그래도 사랑했던 마음은 시들지 않는다. 피라칸사스꽃은 눈처럼 하얗다. 꽃 진 자리에 붉은색 열매가 송이송이 열린다. 마치 순수함이 핏빛 구슬로 단단해진 것 같다. 사람, 책과 공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누군가는 마음에 옹이로 남았다.

 

한때는 소중하던 것들이 어느 순간 지나간다. 나는 나를 미워했다. 그 이유를 태어나면서부터 환영받지 못한 존재라고 핑계를 댔다. 오래 우려먹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이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내일이면 오늘의 나도 지나갈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나하고 사이좋게 지내야겠지? 우선 쓰기 울렁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이니 칭찬해주자. 잘하고 있다, 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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