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와의 대화
송두율 지음 / 한겨레출판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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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을 위한 20가지 테마'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21세기를 맞는 한반도에 초점을 두고 진보, 정보사회, 지구화, 민주주의, 여성문제, 생태문제 등, 거대담론들을 다룬 송두율 교수의 글 20편으로 구성되어있다. 7~10페이지 정도의 칼럼 형식 글들의 묶음인데다 송교수의 문장이 정갈한 편이라 큰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책이 나온지 십수년이 넘었기에, '영미식 자본주의가 효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대목이라든지 영국 노동당의 집권 기간을 거치면서 이미 신자유주의의 동의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명난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이 가치판단 없이 인용되고 있는 등 지엽적인 부분에서는 현재의 상황과 다소 동떨어진 부분들이 있다.

게다가 송교수가 말하는 내용들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조금이나마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으며, 그가 제시하는 나아가야할 방향들도 대부분 절충적이서 원론적일 수 밖에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 책이 21세기를 전망하는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송교수가 제기하고 있는 각 테마들에 대한 담론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면 비록 피상적으로나마 한 번씩 고민해봐야할 것들이며, 평균적 한국인들의 기존 인식체계를 고려했을 때는 이 책에 충분히 '발상의 전환'을 유도할 수 있을 법한 아이디어들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또한 송교수는 자기 논리를 펼 때 학자적 성실성을 바탕으로 늘 세계적인 석학들의 연구성과를 인용하고 있고, 그 출처가 매우 방대한 편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얄팍하게나마 유명한 학자들의 핵심 주장과 이론들을 맛볼 수 있으며, 이 책은 그들의 저서를 따로 찾아서 심도있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지침서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이 책의 특징은 저자가 대부분의 테마를 '분단된 우리 민족' 및 '통일'과 연결지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송두율 교수의 민족관은 한국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낭만적이고 혈통적인 그것과는 분명 다른 합리적 사고를 토대로 하고 있지만, 그는 통일은 당위라 여기는 것 같다. 또 '한국'이라는 객관적인 표현 대신 굳이 '우리 나라'라는 표현을 내내 고수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외의 측면에서 송교수는 중도적 입장에서 줄곧 비판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별히 강력한 주의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를 가리켜 '빨갱이',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 등으로 명명하던 우리사회의 천박한 붉은색 호들갑과는 달리, 송교수는 '천상 학자'이자 특정 진영이나 이데올로기에 일방적으로 매몰되지 않는 '경계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굳이 딱지를 붙이자면 '한반도 통일주의자' 정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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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속물들
오현종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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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정도의 시점이 지나야 몰입이 되는 소설이 있는 반면에 초반부터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내게 이 책은 후자에 속했다. 빈곤을 비둘기에 비유한 도입부분은 단박에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이후로도 주욱, 조금은 가벼운 듯한 내용을 간결한 문체로 재치있게 담아내고 있어서 마지막까지 지루하지 않았다. 

전작인『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에서도 느낀 거지만 오현종 작가의 큰 장점은 위트있는 표현과 잘 읽히는 문장에 있는 것 같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인터넷에서 연재되던 것이라 그런지 더욱 가독성에 신경을 쓴 듯 하다. 덕분에 마지막까지 시원시원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친구인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칙릿'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다만 칙릿의 주인공들이 주로 커리어 우먼인 반면에, 여기서는 여대생들이라는 게 특징이랄까. 그래서 정이현의『달콤한 나의 도시』같은 책이 주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여성들에게 '다들 그렇게 산다'며 공감을 이끌어내고 위로를 건넨다면, 이 소설은 20대 초중반의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부류 소설들의 두드러진 공통점 중 하나는, 동질적이면서도 다양한 맥락에 놓인 인간 군상들을 보여주고는 그 어떤 삶이든 나름의 고충이 있음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 책 역시 등장인물들을 속물이라는 범주로 한데 묶어놓긴 했지만, 그 안에서 또 '돈이 많아 속물, 돈이 없어 속물, 그리고 원래부터 속물'인 인물들로 제각기 차별화 시켜놓는다. 그리고는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속물성 이면의 고민과 아픔들을 함께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인 '거룩한 속물들'은 단지 역설적이지만은 않은, 애정이 담긴 표현인 것이다. 

형식과 관련해서 눈 여겨 볼만한 건, 나머지 인물들의 이야기는 3인칭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는 반면에 기린의 부분은 1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다는 거다. 기린이 주인공이라서 라든가 어떤 기술적인 문제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만이 '속물'의 세상에서 탈피하여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는 적극성을 띠는 주체적 인물이기에 그렇게 설정해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든 삶의 경로를 밟을수록 성장하기 마련일 것이다. 하지만 성장의 방향을 어디로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큰 차이를 낳으며, 더욱이 적극적으로 커가는 사람과 구조를 고스란히 수용하며 수동적으로 자라는 사람은 분명 다르다. 기린이 어린시절부터 사랑해마지 않았지만 속물에게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며 멀리하게됐던 세계, 그것과 이전보다 오히려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길 결정한 순간부터 그녀는, 다른 속물 친구인 명이나 지은과는 달리 긍정적인 방향으로 훌쩍 자랐을 것이다.

이 사회는 속물들만을 체제의 중심으로 포섭하거나 최소한 배제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자꾸만 속물이 되길 강권한다. 그리하여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많은 20대들은, 자의인지 타의인지 반성할 틈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속물이 되어간다. 

『거룩한 속물들』은 '천민자본주의사회'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속물'이라는 획일화된 상품으로 대량생산되고 있는 우리 세대의 이야기이다. 우리에겐 이 거대한 흐름을 거역할 힘이 딱히 없어 보인다. 하지만 모든 혐의를 구조에만 돌리는 건 너무 못났다. 개개인의 각성된 삶이 모여 시스템을 바꾸는 유쾌한 상상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이 책에서 그려지는 우리네 모습들에 공감하고 그로부터 위로받는 데 그치면서 여전히 객체적 속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자기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면서 더 이상 남을 부러워하거나 자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주체적 자아로 거듭날 것인가. 개인적으론 공장제 기계공업형 소품종대량생산품보다는 가내 수공업형 다품종소량생산품이 좋아보인다. 약간 엉성하고 삐걱대더라도 치열한 자기 투쟁의 산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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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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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공부는 하기 싫은데 마냥 놀 수는 없고 해서, 억지 공부가 아니라 교양 쌓는다는 기분으로 한국 현대사 책을 봤다. 이 책『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는 예전에 학부 수업 청강하려고 샀던 건데, 마침 임용학원에서 교재로 사용하기도 한다. 

무슨 책이든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역사 분야의 책은 저자의 이력과 행적 및 사상을 꼼꼼히 잘 따져봐야한다. 역사는 '사실'이 아니라 '해석'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고로 어떤 사람에 의해 쓰여지느냐가 그 책에 담긴 내용을 크게 좌우한다. 

이 책을 쓰신 서중석 교수는 한국 현대사 관련 개론서를 집필할 수 있을 만한 역량을 갖추신 몇 안 되는 권위자이시기도 하고, 중도적 성향을 지니신 분이기에 어느 극단에 치우침이 없으신 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충분히 믿고 읽어도 될 거라고 생각한다.

우선 이 책의 장점은 1945년 이후의 한국 현대사를 핵심 내용들만 잘 간추려서 설명해놓았다는 것이다. 딱히 어려운 표현이나 용어가 없어서 술술 잘 읽히고, 각종 사진과 그림 및 도표들이 삽입되어 있어 문자로 인한 피로감을 덜어준다. 게다가 3장과 6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치사에만 치우치지 않고 경제와 사회 문화 부분도 함께 조명하고 있으며, 한국 현대사 속의 여성에 대해 따로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반대로 단점을 꼽자면 너무 핵심 사건들 만을 추려놓은 탓에 가지치기 당한 부분들이 제법 많다는 거다. 한국 현대사 입문서로는 좋을 수 있으나, 나 같은 임고 준비생처럼 더 깊이 알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책들로 따로 보충해주어야겠다. 또 아무리 균형을 잘 지키신다고 해도 예순을 훌쩍 넘기신 저자 본인께서 살아낸 격정의 시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까닭에, 불필요한 감정적 표현들이 다소 섞여있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책을 읽을 때는 사실과 의견을 구분해서 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늘 그렇지만 한국 현대사는 접할 때 마다 빡쳐서 건강에 별로 이롭지 않다. 어차피 '과거는 먼 외국'이기에 고조선,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정도까지만해도 그냥 객관적 학문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사를 접할 때는 그게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들이 결정된 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사를 알면 우리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왜 좁은 땅덩어리에서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동서로도 나뉘어 있는 건지, 왜 정부와 의회는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시민들이 사사건건 촛불들고 거리로 나갈 수 밖에 없는 건지, 등등. 이 책은 그러한 궁금증을 당장 해결하기엔 좋은 현대사 대중교양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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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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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김연수의 책을 사 읽은 적이 있다. 그의 단편소설들을 모은『세계의 끝 여자친구』였다. 한때 '요즘 영화감독 지망생들은 박찬욱을 따라하고, 소설가 지망생들은 김연수를 필사한다'는 말이 떠돌았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그의 글이 궁금했고, 예쁜 디자인의 표지가 잠자고 있던 충동구매욕구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걸 다 보고나서 다짐했다. 다시는 김연수의 책을 읽지 않겠다고. 그와 나는 대충 비슷한 고향 출신에, 나름 같은 학교도 나왔고, 얼핏 비슷한 외모를 갖고 있지만 그러한 공통분모들과 그의 글에 대한 나의 선호라든가 취향의 문제는 확실히(당연히) 별개였다. 
 
  그런데 이전의 그 결심을 깜빡하고서 다시 충동적으로 그의 소설을 집어들고 말았다.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두께와 '김연수가 독자들을 위해 쓴 단 하나의 연애소설'이라는 말에 혹해서. 이 책을 읽고나서 든 생각을 거칠게 나열해보자면 이렇다. 재밌다. 슬슬 읽었는데도 구조적으로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걸 쓴 작가는 이성과 감성이 고루 발달한, 여러모로 부지런히 공부하는 사람이구나. 예전에 읽었던 어떤 소설들은 '나도 좀만 노력하면 소설 하나 쓸 수 있겠는데?'라는 희망을 준 적이 있다. 그런데 김연수가 스스로 "잠깐 쉬어가는 기분으로" 쉽게 썼다고 밝힌 이 책 한 권을 읽고서 역시 소설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절감했다.

  가장 마지막에 든 생각, 이라기보다 느낌은 '외롭다'는 거였다. 왜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사실 그 느낌을 외로움이라고 칭하는 게 적확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사랑 따위' 믿지 않지만 결국 가장 사랑이 필요한 듯 보이는 남자주인공 진우에게 감정이입이 되었거나, 아니면 한 작가가 잠시 쉬어가는 셈 치고 끄적인 이런 글조차도 난 평생에 한 번 못 쓰리라는 잔인한 현실인식으로부터 비롯된 박탈감이었거나, 무언가가 끝난 뒤 으레 찾아오는 공허함이었거나. 전부 다 이거나. 이 책을 읽고난 직후, 습관처럼 오른 뒷산에서 야경을 바라보다, 스무일곱해만에 문득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었다. 여름이 이다지도 서늘한 계절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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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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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신이 한 몸이었던 인간을 남녀 둘로 나누어, 각자가 자신과 꼭 맞는 나머지 반쪽을 찾아 본래의 완전한 모습이 되도록 했다고 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월하노인이 그 사람의 운명적 상대와 서로 붉은 실로 묶어놓는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가끔 이런 이야기들을 믿고 싶어질 때가 있다. 바로 이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사랑이야기를 접했을 때가 그러하다. 

이 책은 유럽의 지식인 앙드레 고르가 60여년의 세월을 함께한 부인 도린에게 보낸 마지막 연애편지이다. 이 글을 쓴 이후 고르 부부는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먼저 떠날 수 없고, 또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내린 결론이었다.

둘의 만남은 지극히 운명적이었다. 고르는 언젠가 술집에서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매력적인 도린을 보고, '무일푼의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인 자기 같은 사람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이후 어느 날 밤, 길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 그때 소심한 고르가 용기내어 함께 춤추러 가자고 말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도린이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첫 만남부터 마지막까지는 영화나 소설화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완벽하게 상호보완적인 관계였던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 책이 고르의 입장에서 쓰였기에 그럴지는 몰라도 그가 도린에게 좀 더 많이 의존했다는 느낌이 들긴하지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남성들에게 있어, '여성들의 신데렐라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여러 매체들'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 백마탄 왕자가 나타나 자신의 비루한 인생을 단숨에 역전시켜 줄 거라는 환상만큼이나, 내가 가는 길이 험난할지라도 언젠가 내 모든 것을 껴안아줄 이쁘고 성격좋고 강인하면서 영리한 '도린'같은 여성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역시 가련하긴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남성이라면 고르에게 쉽게 자신을 대입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어린시절 부모가 돈 때문에 불화를 겪는 걸 보면 누구나 '역시 돈이 중요하구나'라고 생각하지, 도린이 7살 때 그랬던 것 처럼 '진정한 사랑은 돈이 개입되지 않아야 하는구나'라고 결론 내리면서 평생 물질에 대해 초연할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어쨌든 소설가 김훈이 이 책을 읽고서, 자신이 유부남임에도 '아, 나는 언제 이런 사랑 한번 해보나'라는 뻔뻔스럽고 아내 배반적인 추천사를 썼듯이, 둘의 사랑이 부러움을 불러 일으키는 측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해서 그게 곧 이상이고 전형은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겐 각자 나름의 사랑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을 정의하는 데 있어 지나친 상대주의적 태도를 경계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진부한 얘기지만 상대에 대한 헌신과 배려가 결여되어 있다면 자신의 것을 아무리 사랑이라 우겨도 그럴 수 없을 테니까.

고르와 도린의 사랑은 여러모로 운명적이었지만, 그들 앞에 닥칠 고난을 이길 단단한 마음가짐과 서로에 대한 희생이 없었다면 지속불가능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사랑은 말보다는 오롯이 내어주는 행위이며, 일시적 설레임이나 충동이 아닌 삶 전체를 유유히 관통해야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들의 러브스토리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두 사람이 증명하듯, 앞에서 언급한 고대 그리스 신화나 중국의 설화는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남의 사랑을 부러워하면서 '나는 언제 이런 사랑 해보냐'며 마냥 푸념할 일은 아니라는 거다. 나와 어울리는 짝은 분명히 존재하기에.

다만 우리가 잃어버린 반쪽을 못 찾고 누군가와 이어진 실을 못 보는 것은, 쪼개진 자신의 단면이나 자기 손끝에 묶인 실조차 제대로 인지하려 들지 않는 불성실함과, 다른 사람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어떤 조건들에 자꾸 대입해 보려는 관성 탓일 수 있다. 그러니까 즉, 운명의 상대를 알아보는 원초적 능력을 우리 스스로 퇴화시켰기 때문은 아닐까.

역시 고르와 도린이 입증하는 것처럼, 보다 중요한 건 서로를 발견하고 함께하게 된 그 이후겠지만. 뭐,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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