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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평점 :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신이 한 몸이었던 인간을 남녀 둘로 나누어, 각자가 자신과 꼭 맞는 나머지 반쪽을 찾아 본래의 완전한 모습이 되도록 했다고 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월하노인이 그 사람의 운명적 상대와 서로 붉은 실로 묶어놓는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가끔 이런 이야기들을 믿고 싶어질 때가 있다. 바로 이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사랑이야기를 접했을 때가 그러하다.
이 책은 유럽의 지식인 앙드레 고르가 60여년의 세월을 함께한 부인 도린에게 보낸 마지막 연애편지이다. 이 글을 쓴 이후 고르 부부는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먼저 떠날 수 없고, 또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내린 결론이었다.
둘의 만남은 지극히 운명적이었다. 고르는 언젠가 술집에서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매력적인 도린을 보고, '무일푼의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인 자기 같은 사람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이후 어느 날 밤, 길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 그때 소심한 고르가 용기내어 함께 춤추러 가자고 말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도린이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첫 만남부터 마지막까지는 영화나 소설화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완벽하게 상호보완적인 관계였던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 책이 고르의 입장에서 쓰였기에 그럴지는 몰라도 그가 도린에게 좀 더 많이 의존했다는 느낌이 들긴하지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남성들에게 있어, '여성들의 신데렐라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여러 매체들'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 백마탄 왕자가 나타나 자신의 비루한 인생을 단숨에 역전시켜 줄 거라는 환상만큼이나, 내가 가는 길이 험난할지라도 언젠가 내 모든 것을 껴안아줄 이쁘고 성격좋고 강인하면서 영리한 '도린'같은 여성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역시 가련하긴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남성이라면 고르에게 쉽게 자신을 대입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어린시절 부모가 돈 때문에 불화를 겪는 걸 보면 누구나 '역시 돈이 중요하구나'라고 생각하지, 도린이 7살 때 그랬던 것 처럼 '진정한 사랑은 돈이 개입되지 않아야 하는구나'라고 결론 내리면서 평생 물질에 대해 초연할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어쨌든 소설가 김훈이 이 책을 읽고서, 자신이 유부남임에도 '아, 나는 언제 이런 사랑 한번 해보나'라는 뻔뻔스럽고 아내 배반적인 추천사를 썼듯이, 둘의 사랑이 부러움을 불러 일으키는 측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해서 그게 곧 이상이고 전형은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겐 각자 나름의 사랑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을 정의하는 데 있어 지나친 상대주의적 태도를 경계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진부한 얘기지만 상대에 대한 헌신과 배려가 결여되어 있다면 자신의 것을 아무리 사랑이라 우겨도 그럴 수 없을 테니까.
고르와 도린의 사랑은 여러모로 운명적이었지만, 그들 앞에 닥칠 고난을 이길 단단한 마음가짐과 서로에 대한 희생이 없었다면 지속불가능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사랑은 말보다는 오롯이 내어주는 행위이며, 일시적 설레임이나 충동이 아닌 삶 전체를 유유히 관통해야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들의 러브스토리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두 사람이 증명하듯, 앞에서 언급한 고대 그리스 신화나 중국의 설화는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남의 사랑을 부러워하면서 '나는 언제 이런 사랑 해보냐'며 마냥 푸념할 일은 아니라는 거다. 나와 어울리는 짝은 분명히 존재하기에.
다만 우리가 잃어버린 반쪽을 못 찾고 누군가와 이어진 실을 못 보는 것은, 쪼개진 자신의 단면이나 자기 손끝에 묶인 실조차 제대로 인지하려 들지 않는 불성실함과, 다른 사람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어떤 조건들에 자꾸 대입해 보려는 관성 탓일 수 있다. 그러니까 즉, 운명의 상대를 알아보는 원초적 능력을 우리 스스로 퇴화시켰기 때문은 아닐까.
역시 고르와 도린이 입증하는 것처럼, 보다 중요한 건 서로를 발견하고 함께하게 된 그 이후겠지만. 뭐, 어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