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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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세상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 관심은 인문사회과학서적이나 시사 잡지와 신문을 찾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지는 않는다. 소설 읽기는 왠지 모르게 전적으로 유희의 영역이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명확한 주장과 그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근거가 등장하고 통계 수치 및 그래프 등으로 그것들이 더욱 설득력을 얻으며, 읽을 때마다 즉각적으로 지식이 되는 책들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랬다.


책『시적 정의』는 꼭 나 같은 사람이 가진 소설에 대한 편견을 깨주려고 나온 것만 같다. 저자는 우리가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역설하고 있다. 문학 작품은 다른 세계를 그려볼 수 있게 하는 상상력이나 공감과 연민 같은 능력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그런 능력은 합리적 추론 능력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근본 토대가 되며, 법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실 이 책을 읽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 능력이 점점 퇴화되어 가는 삭막한 스스로에 대한 자기 성찰이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내게 사회적 약자들은 구체적 인간이 아닌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차상위계층 따위로 통계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시절 철학수업에서 접했던, 감성적 요소와 동정 등에 초점을 두는 모든 견해에 반대하면서 선의지를 강조하는 칸트를 인용하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것에도 한계를 느꼈다. 인류는 사랑해도 내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기는 어렵다는 제법 공감 가는 우스갯소리를 들었지만, 나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이들의 삶을 고려하고 배려할 수 있는 능력이 빠진 인류애 같은 건 허약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나도 나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 하는 대표적인 이들은 법적 정의를 가장 직접적으로 실현한다는 법관들일 것이다. 불행히도 한 심리학자에 따르면 싸이코패스가 많을 확률이 높은 직업 중 두 번째가 법조인이라고 한다. 법조인들에게 이 책과 소설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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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지음, 김기협 옮김 / 민들레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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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 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교사생활을 해온 존 테일러 개토라는 사람이 쓴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지금의 공교육제도가 아이들을 바보로 만드는 주범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공교육은 근본적으로 각 개개인의 자유로운 생각과 판단을 제거하고 창의력을 억제하는 대신 획일화된 사상을 주입한다. 그리하여 학교는 '근대에 발명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기제'로 작동한다. 그 '체제'라는 것은 작게는 국가의 교육 독점하에서 생계를 꾸려가거나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진 현실을 뜻하며, 크게는 민족국가와 무제한적 생산과 소비를 통해 유지되는 자본주의체제를 가리킨다. 

  개토는 미국 학교 교육이 프러시아의 교육제도를 차용했음을 이야기한다. 프러시아가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주의적 목표 아래 중앙집권적 교육제도를 도입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인간을 길러내고 그들을 자원으로 투입해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이권다툼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는 사고로부터 의무교육은 탄생했다. 해방 후 한국은 미국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이식받았으니 결국 프러시아의 것을 모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프러시아 식 교육방식에 대해 살펴보자면, 우선 과목들을 쪼개고 수업시간을 토막 내어 종소리가 울리면 수업을 마치도록 만든다. 그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를 받아 스스로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또한 학생들은 교사가 던져주는 추상적인 지식의 편린들만 배우다보니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약화되어 졸업할 때는 고분고분한 '소시민'이 되어있다. 이런 '소시민'은 정책결정자에게 대들 수도 없으며, 설령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오롯이 지켜나가거나 그 문제의식을 깊고 넓게 확장시킬 줄 모른다.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은 아이들은 비판적인 생각을 할 줄 모르고 올바르게 토론하는 능력도 없다. 

  게다가 지난 150년간 제도교육은 경제적 성공을 위한 준비를 주된 목적으로 내걸어 왔다. 좋은 교육이란 좋은 일자리를 얻어 돈을 잘 벌고 남들보다 더 좋은 물건을 많이 갖게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 교육에서 낙오되는 이들은 물질적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된다. 이 주장은, 주장 자체가 내포한 도덕적 진실성이나 현실적 효능은 전혀 의심되지 않은 채로, 학생과 학부모들을 겁주고 통제하기 쉽게 만들어왔다. 결국 지구 환경을 위협하는 무절제한 소비를 더더욱 부추기는 길로 교육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개토는 이러한 문제들을 타개하기 위한 영감을 각 가정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사회'로부터 얻는다. 그는 끈끈한 공동체적 연대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는 의무교육'조직'을 정서적 만족을 주는 '사회'로 전환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교사자격증 제도의 폐지를 시작으로 하여 교육의 국가 독점을 혁파하고 자유시장의 논리를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가족학교들, 소규모 기업학교들, 종교계 학교들, 기술학교들, 농장학교들이 다양하게 병립해서 정부교육과 경쟁해야한다는 것이다. 독학까지 포함해서 자기에게 맞는다고 생각되는 교육의 종류와 스승을 학생들이 직접 선택한다. 

  존 테일러 개토의 문제의식과 그로부터 비롯된 공교육 비판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의 해결방법은 혁명적 상황이 도래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유럽국가들과 같이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다면 또 모를까, 입시를 통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의 목표로 설정되어 있는 한국적 상황 하에서 우선 선택지는 소위 '인문계' 고등학교이다. 다른 종류의 학교를 가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탈락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진학하게 된다. 또한 어떤 형태의 학교에 진학한다고 하더라도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기에 어느정도 한계가 있다. '그래도 간판이 중요한 것 같다며' 서울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던 한 대표적 대안학교 출신 여학생의 TV 인터뷰가 씁쓸하게 다가왔던 이유이다.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관점과 진단, 해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현재의 공교육이 위기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 대안으로 많은 이들이 대안학교나 홈스쿨링과 같이 체제 내부에서 체제를 거부하고 '낙오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이때의 낙오는 무능력의 표현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가리킨다. 철학자이자 교육운동가인 김상봉은 이것을 '내부로의 망명'이라고 칭하며 교육의 새판을 짜기 위한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본인은 교사가 되어 공교육제도 안에 포섭될지도 모르는 입장으로서, 현재의 교육제도에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체제 내에서 점진적으로 바람직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쪽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고민으로 얻어진 결과물들은 당장 내 교실과 학교에서부터 시작하여 차츰 관철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평교사들의 주도하에 몇몇 공립학교들이 '공교육 내의 대안학교'를 표방하면서 철저하게 '학생 중심'으로 나름의 새로운 실험들을 시행하거나 준비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다른 방법들이 존재할 것이다. 물론 이런 노력들은 상대적으로 편한 직업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교사를 더 힘든 직업으로 만들고 승진과도 거리를 멀게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금의 용기를 내어 내가 가르치는, 혹은 가르칠 아이들이 단지 '내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추구해야할 목적' 그 자체로 여긴다면 마냥 힘들기만 한 일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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