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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속물들
오현종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일정 정도의 시점이 지나야 몰입이 되는 소설이 있는 반면에 초반부터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내게 이 책은 후자에 속했다. 빈곤을 비둘기에 비유한 도입부분은 단박에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이후로도 주욱, 조금은 가벼운 듯한 내용을 간결한 문체로 재치있게 담아내고 있어서 마지막까지 지루하지 않았다.
전작인『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에서도 느낀 거지만 오현종 작가의 큰 장점은 위트있는 표현과 잘 읽히는 문장에 있는 것 같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인터넷에서 연재되던 것이라 그런지 더욱 가독성에 신경을 쓴 듯 하다. 덕분에 마지막까지 시원시원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친구인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칙릿'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다만 칙릿의 주인공들이 주로 커리어 우먼인 반면에, 여기서는 여대생들이라는 게 특징이랄까. 그래서 정이현의『달콤한 나의 도시』같은 책이 주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여성들에게 '다들 그렇게 산다'며 공감을 이끌어내고 위로를 건넨다면, 이 소설은 20대 초중반의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부류 소설들의 두드러진 공통점 중 하나는, 동질적이면서도 다양한 맥락에 놓인 인간 군상들을 보여주고는 그 어떤 삶이든 나름의 고충이 있음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 책 역시 등장인물들을 속물이라는 범주로 한데 묶어놓긴 했지만, 그 안에서 또 '돈이 많아 속물, 돈이 없어 속물, 그리고 원래부터 속물'인 인물들로 제각기 차별화 시켜놓는다. 그리고는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속물성 이면의 고민과 아픔들을 함께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인 '거룩한 속물들'은 단지 역설적이지만은 않은, 애정이 담긴 표현인 것이다.
형식과 관련해서 눈 여겨 볼만한 건, 나머지 인물들의 이야기는 3인칭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는 반면에 기린의 부분은 1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다는 거다. 기린이 주인공이라서 라든가 어떤 기술적인 문제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만이 '속물'의 세상에서 탈피하여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는 적극성을 띠는 주체적 인물이기에 그렇게 설정해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든 삶의 경로를 밟을수록 성장하기 마련일 것이다. 하지만 성장의 방향을 어디로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큰 차이를 낳으며, 더욱이 적극적으로 커가는 사람과 구조를 고스란히 수용하며 수동적으로 자라는 사람은 분명 다르다. 기린이 어린시절부터 사랑해마지 않았지만 속물에게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며 멀리하게됐던 세계, 그것과 이전보다 오히려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길 결정한 순간부터 그녀는, 다른 속물 친구인 명이나 지은과는 달리 긍정적인 방향으로 훌쩍 자랐을 것이다.
이 사회는 속물들만을 체제의 중심으로 포섭하거나 최소한 배제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자꾸만 속물이 되길 강권한다. 그리하여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많은 20대들은, 자의인지 타의인지 반성할 틈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속물이 되어간다.
『거룩한 속물들』은 '천민자본주의사회'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속물'이라는 획일화된 상품으로 대량생산되고 있는 우리 세대의 이야기이다. 우리에겐 이 거대한 흐름을 거역할 힘이 딱히 없어 보인다. 하지만 모든 혐의를 구조에만 돌리는 건 너무 못났다. 개개인의 각성된 삶이 모여 시스템을 바꾸는 유쾌한 상상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이 책에서 그려지는 우리네 모습들에 공감하고 그로부터 위로받는 데 그치면서 여전히 객체적 속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자기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면서 더 이상 남을 부러워하거나 자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주체적 자아로 거듭날 것인가. 개인적으론 공장제 기계공업형 소품종대량생산품보다는 가내 수공업형 다품종소량생산품이 좋아보인다. 약간 엉성하고 삐걱대더라도 치열한 자기 투쟁의 산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