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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한국사 (20만 부 기념 광복에디션) - 5천 년 역사가 단숨에 이해되는
최태성 지음 / 프런트페이지 / 2023년 6월
평점 :
2025년 8월 15일 광복절. 어느새 우리나라가 광복이 된지 80주년이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육아로 인해 답사를 못했지만, 과거에는 이 기간 전후로 독립운동 유적지 또는 독립운동 답사를 다니곤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답사는 어렵기에, 광복절에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한다.
오늘 리뷰하는 역사책은 큰별쌤이 쓴 『최소한의 한국사』.
제목에서도 보이듯 이 역사책은 한국사 전체를 아우르는 ‘통사’다.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한국사 개념잡기에 딱 좋은 역사책이다. 하지만 광복절 주간인 만큼! 오늘 리뷰는 우리나라 근현대사, 그 중에서도 광복절을 왜 기념해야하는 지를 알수 있는 ‘개항기~ 일제강점기’에 대한 부분만 써보려 한다.
한국사 책을 읽을 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바로 역사적 사건 또는 인물 평가에 대한 변화다. 과거 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칠 때는 한국사의 ‘빛과 영광’에 중점을 두어 교육을 했다. 공과 과가 있을 때는 공에 대한 치적은 높이 평가하는 반면에 과오에 대한 부분은 축소하여 가르치거나 혹은 생략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1대 황제 고종이다.
내가 공교육을 받았던 시대만해도 고종은 ‘개혁군주’ 였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인물로 가르치기도 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건줄 알았고, 그렇게 믿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 스스로 여러 사료와 역사책을 읽고, 많은 유적지를 다니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고종이 상상이상으로 못난 리더였고, 그로 인해 나라가 망국행 급행열차에 탑승했다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생각보다 오랜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지금 교양서로 나온 역사책들은 조금 다르다. 고종의 과오를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립협회 강제 해산을 시킨 주체가 바로 고종이라는 점과, 자기의 안위를 위해 서양 여러나라에 많은 이권을 팔아먹은 것, 무당 진령군에 국고에 있는 모든 재원을 털어 바친 일 등을 말이다.
나는 공교육을 벗어난 이후에야 깨우친 사실을, 이제는 공교육에서도 가르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시대가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더불어 이제는 역사의 과오를 숨기지 않고, 명백하게 밝힌다는 점에서 어쩌면 서애 류성룡이 애타게 부르짓던 ‘징비’를 이제야 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게 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렇게 역사의 과오를 밝히기 시작하니,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는 매국노들이 들끓게 되었다는 사실!
안으로는 왕권 강화와 민생안정을 도모하고, 밖으로는 통상 수교 거부를 밀고나간 것이 10년간 이어진 흥선대원군의 개혁 내용입니다. 공과 과가 분명히 있지요. 흥선대원군은 개혁에 최선을 다했지만, 미래지향적인 국가를 바라기보다는 과거 왕조의 영광을 꿈꿨습니다. 이것이 흥선대원군의 한계였습니다. p 265
독립협회의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고종은 불편해졌지요. 급진적인 개혁 방안을 황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결국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백성들의 집회를 금지했습니다. 독립협회는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고종은 마지막 남은 카드조차 불태워버린거에요. 나라보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일이 먼저였기 때문에요. p 281
손발이 묶인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결국 국권을 상실했어요. 우리는 8월 15일 광복절만 기억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의 시작이었던 8월 29일도 함께 기억해야 하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날 대한제국은 한국강제병합조약으로 일본 제국에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일병합’ 등의 표현을 사용했으나 우리는 무력에 의해 강제로 당한 일이기 때문에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래서 경술국치라고 합니다.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이라는 뜻이에요. p 283
8월 15일 광복절. 공휴일이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날이다. 광복절이 무슨날 인지 모르는 국민은 없다고 생각한다(부디 없기를). 헌데, 우리가 광복을 애타게 부르짖게 된 그 날, 광복을 부르짖게 만들었던, 나라가 사라졌던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바로 이 날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대한/조선/한국/한 등 우리를 지칭하던 그 모든 이름을 잃어버렸다.
한일병탄이 성공했던 이유는, 일제가 차근차근 국권 침탈을 진행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제가 강압으로 빼앗아간 권리도 있었고, 고종이 자신의 안위를 유지하기 위해 넘긴 권리도 있었으며, 일제에 아부하기 위해 친일파가 넘긴 권리들도 있었다.
20세기 초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한 항일의병들의 모습을 담은 드라마가 <미스터 션샤인> 입니다. 드라마를 보면 영국인 종군기자가 의병들을 인터뷰하는 모습이 나와요. 기자는 의병들에게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습니다. 의병들은 이렇게 답해요. 우리는 용감하지만 무기가 너무 부족하다고, 이렇게 싸우다 죽을 것을 알고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노예가 되어서 사느니 자유민으로 싸우다 죽겠다고 하지요. 실제로도 나이도 직업도 모두 다른 의병들이 목숨을 내놓고 일본에 맞서 끝까지 싸웠습니다. p 286
왕을 비롯하여 돈과 권력을 가진 위정자들이 일제에 아부하던 그 때, 한 쪽에선 일제에 맞서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돈과 권력을 가졌고, 일제에 아부하면 더 큰 부를 가질 수도 있었던 사람들과 나라가 해준 게 하나 없지만, 조국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목숨을 받쳤던 백성들이.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역사는 그들을 ‘항일의병’이라 불렀다.
큰별쌤이 말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에 나왔던 영국인 종군기자와 의병들은, 경기도 양평에서 있었던 지평의병을 차용한 장면이다. 당시 영국인 종군기자 맥캔지는 지평리에 주둔하던 의병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이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무이한 항일의병 사진이다. 이 사진들은 『지평의병 지평리전투 기념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지평리 의병을 인터뷰했던 맥캔지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고.
항일 의병에 대해 좀더 첨언하자면, 전기 의병인 ‘을미의병’과 후기 의병인 ‘정미의병’으로 나뉜다. ‘을미의병’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으로 인해 창의되었으며, 항일의병보다는 척사의병에 가까운 성격을 띈다. 정미의병은 1907년 정미7늑약으로 인해 창의된 의병으로, 본격적인 항일의병의 시작이다.
전라도 지역에는 임병찬이 이끌던 독립의군부가 있었고, 경상도 지역에는 박상진이 이끌던 대한광복회가 있었어요. 박상진이라는 인물은 이력이 특이한데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입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의 엘리트를 앞세워 나라를 통치하려 했어요. 그러니 직업이 판사라면 분명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그런 길을 택한 사람도 많았고요. 하지만 박상진은 미련 없이 사표를 낸 뒤 “내가 앉을 자리는 판사의 자리가 아니라 이제 피고의 자리다” 라는 믿음 아래 독립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뒤에 자신이 했던 말처럼 일본인 판사의 앞에 서서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지요. p 290
엄밀히 따지면 최재형은 조국으로 부터 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항상 배고품에 떨어야 했어요. 그럼에도 조국을 위해 자신이 번 돈을 전부 써버렸습니다. 한국인 마을에 회사를 차려 사람들을 고용하고, 학교를 수십 개 세웠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들은 최재형 덕분에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어요. 안중근을 후원한 사람도 최재형이에요. 우리는 안중근 의사만 기억하지만, 그 활동 자금이 다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누군가는 총을 사주고, 체류 비용을 내주고, 변호사 비용을 지불해야 했지요. 그 ‘누군가’가 바로 최재형인 겁니다. 그러니 일본이 가만두지 않았겠지요. 그때 최재형도 살해당하고 말았어요. 그곳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은 훗날 스탈인에 의해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되지요. p 292
연해주 지역에 최재형이 있었다면 북간도 지역에는 김약연이 있었어요. 김약연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1910년대까지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면서 특히 교육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김약연이 세운 학교의 이름이 명동학교인데, 밝을 명, 동녘 동 자를 써서 ‘동쪽을 밝히다’라는 뜻이지요. 즉, 명동학교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어두워진 우리나라를 밝힐 인재들을 양성하는 곳이었지요. 명동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말하기와 글쓰기를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글을 쓸 때는 문장에 반드시 ‘독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했어요. 독립이라는 교육 목표가 확실하다 보니까 일제가 이 학교를 굉장히 괴롭혔어요. p 293
서간도 지역에서 활약한 인물은 이회영 집안의 여섯 형제입니다. 이들은 모두 엄청난 부자였어요. 그중에서도 둘째인 이석영의 재산은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섯 형제는 자신들의 가진 땅을 전부 팔고, 가보로 내려오는 책까지 싹 처분한 다음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렇게 서간도에 와서 신흥강습소를 세웠지요.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군을 배출하기 위한 교육기관이었던 신흥강습소는 나중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합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고 재정도 열악해지면서 결국 폐교되지만,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대 항일 무장투쟁의 서곡을 울리게 되었지요. p 294
당신이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의 이름은 몇이나 되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안중근, 김구, 유관순, 안창호 같은 매우 친숙한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말한다. 물론 이 분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후손들만큼은 독립된 국가에서 살 수 있도록, 독립을 위해 목숨바쳐 싸운 이들이 한둘이 아닐 진데, 그 많은 이들의 이름을 유명한 몇몇 독립운동가의 이름 안에 가둬둔다는 사실이.
그렇기에 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독립운동 역사를 공부하고, 우리가 아는 이름보다 더 많은 이름들이 후손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란다.
한동안 나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의 남긴 어록과 과거에 올렸던 독립운동가 서평을 끝으로 포스팅을 마무리한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이는데
살은 깍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그러나 이미 내 전택을 빼앗고
또 다시 나의 처자를 해치려 하니
내 머리는 자를 수 있겠지만
무릎 꿇어 종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석주 이상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