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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마지막 항해 - 폭침된 '부산행 귀국선' 우키시마호
시나다 시게루 지음, 김영식 옮김 / 어문학사 / 2023년 12월
평점 :
본투비 역사더쿠, 그 중에서도 한일관계사를 주로 공부하는 나다. 한일관계사에 있어서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등 시대에 따라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가 극명하게 갈린다. 특히 중세에서 근대로 갈수록 관계는 극악으로 치닫는다. 그 종점이 바로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이 조선을 식민지화 시켰던 암흑의 시대다. 그 과정에 있어서 조선의 위정자들이 어떤 멍텅구리 짓을 했는지는 생략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은 한반도를 침탈했다.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정치, 사회, 경제, 외교 등 모든 분야가 일제 손아귀에 떨어졌다. 유형/ 무형 가리지 않는 자원들 역시 일제 침탈의 대표적 산물이었다. 그렇게 일제가 침탈한 자원 문제는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않았다.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인력자원 침탈문제, 한마디로 조선인 #강제징용 문제다.
일제 강제징용은 크게 세분화하면 일본군 성노예, 근로정신대, 탄광/토목공사 등 강제노역, 포로 감시하는 포로관리원(B,C급 전범) 등이 있다. 그 중 오늘 눈여겨 볼 것이 바로 강제노역이다. 강제노역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대게 노예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그나마 고국으로 살아 돌아왔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 역사책 『1945, 마지막 항해』는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탑승했던 우키시마호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과 일본, 양국이 모두 알고 있어야 할, 하지만 양 국가 사람들 대게가 잘 모르는 그 이야기다. 가해국가인 일본정부는 당연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피해국가인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서 진상규명을 요청하는 등의 행동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사건을 가르치기는 커녕 숨기느라 급급했다. 아니지. 숨겼다라기보단, 애초에 알려고하지 않았다는게 맞는 말이겠다.
그렇게 양 국가 정부의 무관심에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잊혀질뻔한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은, 놀랍게도 일본 마이즈루에 살던 지역민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들은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매해 추모제를 열고, 추모비도 세우며, 일본 정부의 무책임을 규탄했다. 그 과정에 있어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의 피해자가 조선인이었기에 일본에 있는 조총련과 민단에 협조를 구하였지만, 놀랍게도 민단은 협조를 하지 않았다. ‘조선’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그놈의 색깔논쟁!!
민단은 대한민국이 공인한 일본에 있는 재일한국인 한국인 단체다. 그 민단이 협조하지 않았음을 보아,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우키시마 침몰사건을 크게 알리고자 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최소 자국민 6천명이 죽은, 침몰사건인데 말이다.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을 아시나요?
첫번째, 1945년, 태평양 전쟁 막바지. 일본 아오모리 지역 비행장, 철도 건설현장에 수많은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있었다. 일제는 이들을 고향 조선에 돌려보내준다며, 수 천명의 조선인을 당시 아오모리 오미나토항에 정박해있던 화물선 우키시마호에 태웠다. 오미나토 현지에 터를 잡은 일부 조선인이 귀국을 망설이자, 일제는 이렇게 말했다. “우키시마호 이후 (조선으로) 떠날 배는 없다”, “일본에 남더라도 앞으로는 식량 등의 배급이 없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수많은 조선인이 그렇게 우키시마호에 올라탔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말했다. 우키시마호의 목적지는 ‘부산항’이라고.
두번째, 우키시마호가 아오모리 오미나타항에 정박했을 당시, 승선했던 승무원들은 한사코 출항에 반대했다. 항해에 필요한 해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다를 운행하는 선박은 지도, 즉 해도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면서, 군의 기밀서류를 모두 소각하라는 명에 따라 해도 역시 소각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부산항에 도착한다 한들, 본인들은 미군정에 붙잡혀 즉각 처형될 거라고 믿었고 그런 소문이 돌았다.
세번째,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 여기저기에 기뢰를 뿌렸다. 상공에서 뿌려진 기뢰는 일본 산간을 포함해 바다 전역에 떨어졌다. 일제가 소각한 해도는, 이 기뢰 위치가 기록되어있었다. 해도 없이 항해를 한다는건, 무장해제한 민간인이 DZM 지뢰밭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우키시마호 승무원들은 출항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자 아오모리에 있던 경비부가 나서서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군법에 붙이겠다고 윽박질다. 그렇게 우키시마호는 1945년 8월 22일 오후 10시에 수천명의 조선인을 태우고 아오모리 오미나타항을 떠나게 되었다.
네번째, 이틀이 지난 8월 24일 오후. 우키시마호는 부산으로 가던 항로를 갑자기 바꾸어 교토 마이즈루만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안가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며, 우키시마호 배 중앙부가 안쪽으로 꺾인 ‘∧자’ 모양으로 솟아오르며, 수많은 사람들이 배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그 시각 마이즈루 해변에서 여자들이 소금을 굽고 있었는데, 이 상황을 목격하고 급히 배를 타고 바다로 향했다. 바다로 떨어진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당시 마이즈루 남성들은 태평양 전쟁으로 강제징집되었기에, 마이즈루에는 여성과 아이, 노약자들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다섯번째, 우키시마 폭침 이후 해안가에 하루가 멀다하고 시신이 밀려들어왔다.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곳 수심이 낮았기에, 가라앉은 우키시마호 돛대가 수면위에 보인채 였다. 침몰한지 5년이 지난 1950년 3월에서야 절반이 인양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1954년 1월에 인양되었다. 일본정부는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을 지금까지 진상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여기까지가 우키시마호 침몰과정에 대한 전개다. 우키시마호에는 최소 6천 ~ 8천여명의 조선인이 탑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침몰사건 이후 꽤 오랫동안 시신들이 해안가로 밀려들어왔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마이즈루에 살던 지역민들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의 책임자는 일본 정부라는 것을. 그들은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에 대해 알리고자 했다. 하여 ‘우키시마호 희생자를 추도하는 모임’을 창설하고, 매 주기마다 추모제를 지내고, 마이즈루 해안가에 추모비를 세우고, 영화와 연극 제작에 참여하는 등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을 세상에 널리알리고자 했다. 이 책 『1945, 마지막 항해』는 그 일환이다.
희생자 유가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선인들도 아닌 일본인들이 나서서, ‘우키시마 침몰사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일본정부 책임을 묻는 것. 흔치 않은 일이다. 특히 요즘 시대에는 더더욱. 이들이 이렇게 나설 수 있었던 건, 그들 스스로가 태평양 전쟁 당시 강제 징집된 대상자들이었고, 일본정부가 전쟁을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보았으며, 전쟁의 참상과 피해를 몸소 겪었던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을 공부하여 여러 의문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첫번째, 왜 서둘러 조선인을 귀국시켜야 했나? 당시 아오모리현에 강제징집된 노동자들은 조선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있었다. 강제 징용된 중국인들은 노예 대우를 못이겨 폭동을 일으켰다(하나오카 사건). 일제는 조선인도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급하게 조선인을 귀국시키고자 했다.
두번째, 우키시마호의 목적지는 어디였나? 조선인들은 목적지를 ‘한국 부산항’으로 알고 있었지만, 당시 함장과 승무원, 전 일본통운 노무계 직원들은 ‘마이즈루항’으로 명령받았다고 진술했다.
세번째, 승선자는 몇 명이었나? 1945년 12월 7일에 우키시마호 사건에 관한 신청서가 GHQ(연합국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에 제출되었는데, 해당 신청서에 따르면 “승객 7,500명 ~ 8,000명 중 2,000명 정도밖에 생존하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그 외 다른 증언들에서도 (최소)6천여명이라는 증언들이 줄을 이었다.
네번째, 사망자는 몇 명이었나? 일본 정부는 조선인 승개 3,735명 중 사망자 524명, 일본인 승무원 255명 중 사망자 25명, 총 사망자 549명이라고 했다. 이렇게 사망자 수가 보고된 문서는 침몰사건이 있은 후 8일만에 제출되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연이어 해안가에 시신들이 밀려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수를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확정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당시 일본 해병단은 매일 시체를 건져올려 모아서 태웠다는 증언, 나중에 문제될 수 있으니 후에 매장했다는 증언, 지금의 해상 자위대 교육대가 있는 위치에 묻었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다섯번째, 폭발 원인은 무엇인가? 기뢰인가 자폭인가. 생존자 및 유가족들은 승무원 본인의 자폭이라고 보고있다. 그 증거로 간사이에서 발행되는 『코리아뉴스(2001.08.31자)』에는 「폭침은 계획적 만행이다」라는 표제로 “우키시마호 사건은 일제에 의해 자행된 계획적인 범행이다”라는 생존자 증언이 실려있다. 또한 우키시마호 출항 전부터 이미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에는 ‘배의 자폭’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 오미나토 주민에 따르면 “우키시마호는 니가타까지 가면 폭침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딸들이 조선 친구들에게 폭발에 대한 소문이 있으니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들은 어쨌든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쁘게 ‘만세!만세!’를 외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가지 말라는 경고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부산에 도착하면 총살된다. 우키시마호는 빼앗겨버릴거야, 그래서 부산에 도착하기 전에 자폭시키는 거지” 라는 해군 하사관의 증언, “우키시마호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조선인을 태울 배의 이름을 공작부의 기관구에서 칠해서 지우고, 자폭하는 장치를 설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라며 폭발장치를 달았다는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우키시마호 침몰 원인이 기뢰인지 자폭인지는 아직까지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진상규명은 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키시마호 침몰 원인이 기뢰이냐, 승무원 자폭이냐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왜? 기뢰여도 일본정부의 책임이고, 승무원의 자폭이어도 일본정부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우키시마호는 일본 해군의 배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우키시마호에 탑승한 것 역시 일본 경비부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기뢰가 위치가 적혀있는 해도를 소각한 것 역시 일본정부였고, 이 침몰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지 않고 나몰라라 하는 것 역시 일본정부다. 침몰의 원인이 어느쪽이든간에, 단연코 그 모든 책임은 일본정부에 있다.
그리고 일본정부에 끊임없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사과와 배상을 얻어내는 것. 그 책임은 오롯이 국민을 지키지 못했던 대한민국 정부에 있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게,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성립되기 이전의 국민을 지키지 못했다는 책임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과도한 책망일 수는 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명백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였으며, 우키시마호 침몰사고는 임시정부가 있었던 시기에 발생한 사고였다(미군정이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다만 당시 정황상 임정이든, 제헌국회든, 이승만정부든 힘이 없어서 또는 피폐해진 나라 재건에 있어서, 우키시마호를 비롯한 강제징용 피해 문제까지 주의깊게 따질 수 없었던 점은 참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먹고 사는 걱정이 사라진 지금! K 컨텐츠를 전 세계에 뿌리며 강대한 문화국가로 성장한 지금!! 적어도 일본정부를 향해 진상규명을 비롯해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조상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이 모든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