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 마지막 항해 - 폭침된 '부산행 귀국선' 우키시마호
시나다 시게루 지음, 김영식 옮김 / 어문학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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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투비 역사더쿠, 그 중에서도 한일관계사를 주로 공부하는 나다. 한일관계사에 있어서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등 시대에 따라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가 극명하게 갈린다. 특히 중세에서 근대로 갈수록 관계는 극악으로 치닫는다. 그 종점이 바로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이 조선을 식민지화 시켰던 암흑의 시대다. 그 과정에 있어서 조선의 위정자들이 어떤 멍텅구리 짓을 했는지는 생략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은 한반도를 침탈했다.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정치, 사회, 경제, 외교 등 모든 분야가 일제 손아귀에 떨어졌다. 유형/ 무형 가리지 않는 자원들 역시 일제 침탈의 대표적 산물이었다. 그렇게 일제가 침탈한 자원 문제는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않았다.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인력자원 침탈문제, 한마디로 조선인 #강제징용 문제다.


일제 강제징용은 크게 세분화하면 일본군 성노예, 근로정신대, 탄광/토목공사 등 강제노역, 포로 감시하는 포로관리원(B,C급 전범) 등이 있다. 그 중 오늘 눈여겨 볼 것이 바로 강제노역이다. 강제노역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대게 노예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그나마 고국으로 살아 돌아왔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 역사책 『1945, 마지막 항해』는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탑승했던 우키시마호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과 일본, 양국이 모두 알고 있어야 할, 하지만 양 국가 사람들 대게가 잘 모르는 그 이야기다. 가해국가인 일본정부는 당연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피해국가인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서 진상규명을 요청하는 등의 행동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사건을 가르치기는 커녕 숨기느라 급급했다. 아니지. 숨겼다라기보단, 애초에 알려고하지 않았다는게 맞는 말이겠다.



그렇게 양 국가 정부의 무관심에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잊혀질뻔한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은, 놀랍게도 일본 마이즈루에 살던 지역민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들은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매해 추모제를 열고, 추모비도 세우며, 일본 정부의 무책임을 규탄했다. 그 과정에 있어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의 피해자가 조선인이었기에 일본에 있는 조총련과 민단에 협조를 구하였지만, 놀랍게도 민단은 협조를 하지 않았다. ‘조선’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그놈의 색깔논쟁!! 


민단은 대한민국이 공인한 일본에 있는 재일한국인 한국인 단체다. 그 민단이 협조하지 않았음을 보아,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우키시마 침몰사건을 크게 알리고자 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최소 자국민 6천명이 죽은, 침몰사건인데 말이다.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을 아시나요?


첫번째, 1945년, 태평양 전쟁 막바지. 일본 아오모리 지역 비행장, 철도 건설현장에 수많은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있었다. 일제는 이들을 고향 조선에 돌려보내준다며, 수 천명의 조선인을 당시 아오모리 오미나토항에 정박해있던 화물선 우키시마호에 태웠다. 오미나토 현지에 터를 잡은 일부 조선인이 귀국을 망설이자, 일제는 이렇게 말했다. “우키시마호 이후 (조선으로) 떠날 배는 없다”,  “일본에 남더라도 앞으로는 식량 등의 배급이 없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수많은 조선인이 그렇게 우키시마호에 올라탔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말했다. 우키시마호의 목적지는 ‘부산항’이라고.


두번째, 우키시마호가 아오모리 오미나타항에 정박했을 당시, 승선했던 승무원들은 한사코 출항에 반대했다. 항해에 필요한 해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다를 운행하는 선박은 지도, 즉 해도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면서, 군의 기밀서류를 모두 소각하라는 명에 따라 해도 역시 소각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부산항에 도착한다 한들, 본인들은 미군정에 붙잡혀 즉각 처형될 거라고 믿었고 그런 소문이 돌았다.


세번째,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 여기저기에 기뢰를 뿌렸다. 상공에서 뿌려진 기뢰는 일본 산간을 포함해 바다 전역에 떨어졌다. 일제가 소각한 해도는, 이 기뢰 위치가 기록되어있었다. 해도 없이 항해를 한다는건, 무장해제한 민간인이 DZM 지뢰밭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우키시마호 승무원들은 출항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자 아오모리에 있던 경비부가 나서서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군법에 붙이겠다고 윽박질다. 그렇게 우키시마호는 1945년 8월 22일 오후 10시에 수천명의 조선인을 태우고 아오모리 오미나타항을 떠나게 되었다.


네번째, 이틀이 지난 8월 24일 오후. 우키시마호는 부산으로 가던 항로를 갑자기 바꾸어 교토 마이즈루만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안가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며, 우키시마호 배 중앙부가 안쪽으로 꺾인 ‘∧자’ 모양으로 솟아오르며, 수많은 사람들이 배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그 시각 마이즈루 해변에서 여자들이 소금을 굽고 있었는데, 이 상황을 목격하고 급히 배를 타고 바다로 향했다. 바다로 떨어진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당시 마이즈루 남성들은 태평양 전쟁으로 강제징집되었기에, 마이즈루에는 여성과 아이, 노약자들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다섯번째, 우키시마 폭침 이후 해안가에 하루가 멀다하고 시신이 밀려들어왔다.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곳 수심이 낮았기에, 가라앉은 우키시마호 돛대가 수면위에 보인채 였다. 침몰한지 5년이 지난 1950년 3월에서야 절반이 인양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1954년 1월에 인양되었다. 일본정부는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을 지금까지 진상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여기까지가 우키시마호 침몰과정에 대한 전개다. 우키시마호에는 최소 6천 ~ 8천여명의 조선인이 탑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침몰사건 이후 꽤 오랫동안 시신들이 해안가로 밀려들어왔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마이즈루에 살던 지역민들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의 책임자는 일본 정부라는 것을. 그들은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에 대해 알리고자 했다. 하여 ‘우키시마호 희생자를 추도하는 모임’을 창설하고, 매 주기마다 추모제를 지내고, 마이즈루 해안가에 추모비를 세우고, 영화와 연극 제작에 참여하는 등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을 세상에 널리알리고자 했다. 이 책 『1945, 마지막 항해』는 그 일환이다. 


희생자 유가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선인들도 아닌 일본인들이 나서서, ‘우키시마 침몰사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일본정부 책임을 묻는 것. 흔치 않은 일이다. 특히 요즘 시대에는 더더욱. 이들이 이렇게 나설 수 있었던 건, 그들 스스로가 태평양 전쟁 당시 강제 징집된 대상자들이었고, 일본정부가 전쟁을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보았으며, 전쟁의 참상과 피해를 몸소 겪었던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을 공부하여 여러 의문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첫번째, 왜 서둘러 조선인을 귀국시켜야 했나?  당시 아오모리현에 강제징집된 노동자들은 조선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있었다. 강제 징용된 중국인들은 노예 대우를 못이겨 폭동을 일으켰다(하나오카 사건). 일제는 조선인도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급하게 조선인을 귀국시키고자 했다. 


두번째, 우키시마호의 목적지는 어디였나? 조선인들은 목적지를 ‘한국 부산항’으로 알고 있었지만, 당시 함장과 승무원, 전 일본통운 노무계 직원들은 ‘마이즈루항’으로 명령받았다고 진술했다. 


세번째, 승선자는 몇 명이었나? 1945년 12월 7일에 우키시마호 사건에 관한 신청서가 GHQ(연합국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에 제출되었는데, 해당 신청서에 따르면 “승객 7,500명 ~ 8,000명 중 2,000명 정도밖에 생존하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그 외 다른 증언들에서도 (최소)6천여명이라는 증언들이 줄을 이었다.


네번째, 사망자는 몇 명이었나? 일본 정부는 조선인 승개 3,735명 중 사망자 524명, 일본인 승무원 255명 중 사망자 25명, 총 사망자 549명이라고 했다. 이렇게 사망자 수가 보고된 문서는 침몰사건이 있은 후 8일만에 제출되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연이어 해안가에 시신들이 밀려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수를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확정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당시 일본 해병단은 매일 시체를 건져올려 모아서 태웠다는 증언, 나중에 문제될 수 있으니 후에 매장했다는 증언, 지금의 해상 자위대 교육대가 있는 위치에 묻었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다섯번째, 폭발 원인은 무엇인가? 기뢰인가 자폭인가. 생존자 및 유가족들은 승무원 본인의 자폭이라고 보고있다. 그 증거로 간사이에서 발행되는 『코리아뉴스(2001.08.31자)』에는 「폭침은 계획적 만행이다」라는 표제로 “우키시마호 사건은 일제에 의해 자행된 계획적인 범행이다”라는 생존자 증언이 실려있다. 또한 우키시마호 출항 전부터 이미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에는 ‘배의 자폭’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 오미나토 주민에 따르면 “우키시마호는 니가타까지 가면 폭침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딸들이 조선 친구들에게 폭발에 대한 소문이 있으니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들은 어쨌든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쁘게 ‘만세!만세!’를 외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가지 말라는 경고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부산에 도착하면 총살된다. 우키시마호는 빼앗겨버릴거야, 그래서 부산에 도착하기 전에 자폭시키는 거지” 라는 해군 하사관의 증언, “우키시마호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조선인을 태울 배의 이름을 공작부의 기관구에서 칠해서 지우고, 자폭하는 장치를 설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라며 폭발장치를 달았다는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우키시마호 침몰 원인이 기뢰인지 자폭인지는 아직까지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진상규명은 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키시마호 침몰 원인이 기뢰이냐, 승무원 자폭이냐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왜? 기뢰여도 일본정부의 책임이고, 승무원의 자폭이어도 일본정부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우키시마호는 일본 해군의 배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우키시마호에 탑승한 것 역시 일본 경비부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기뢰가 위치가 적혀있는 해도를 소각한 것 역시 일본정부였고, 이 침몰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지 않고 나몰라라 하는 것 역시 일본정부다. 침몰의 원인이 어느쪽이든간에, 단연코 그 모든 책임은 일본정부에 있다.


그리고 일본정부에 끊임없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사과와 배상을 얻어내는 것. 그 책임은 오롯이 국민을 지키지 못했던 대한민국 정부에 있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게,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성립되기 이전의 국민을 지키지 못했다는 책임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과도한 책망일 수는 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명백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였으며, 우키시마호 침몰사고는 임시정부가 있었던 시기에 발생한 사고였다(미군정이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다만 당시 정황상 임정이든, 제헌국회든, 이승만정부든 힘이 없어서 또는 피폐해진 나라 재건에 있어서, 우키시마호를 비롯한 강제징용 피해 문제까지 주의깊게 따질 수 없었던 점은 참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먹고 사는 걱정이 사라진 지금! K 컨텐츠를 전 세계에 뿌리며 강대한 문화국가로 성장한 지금!! 적어도 일본정부를 향해  진상규명을 비롯해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조상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이 모든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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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약사의 혈당 블로킹 - 혈당 스파이크를 막는 4가지 방패 탐탐 11
오징어약사(김선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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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젊을 줄만 알았던 나. 밤에 잠을 조금자도 멀쩡했고, 과하게 무거운 음식을 먹어도 멀쩡했던 20대를 지나고 나니, 세상에! 조금만 자도 죽을 것 같고, 과하게 무거운 음식을 먹으면 하루종일 온 몸이 아프다. 그 뿐인가? 음식을 몇일만 조절해도 혈당이 쉽게 내려갔던 20대와 달리 지금은 공복혈당 검사하면 왜이렇게 높은 수치가 나오는지!! 임신했을 때 조차도 혈당이 매우 안정권에 있었던 나였는데 말이다. 이 모든게 젊음 하나 믿고 안일했던 20대를 보낸 나의 업보일까?


아?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다. 20대의 피로는 젊음 하나만 믿지 않았다. 집에 있는 혈당측정기로 공복 혈당과 식후 혈당을 주기적으로 확인했다. 딱히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매 주말마다 여행을 핑계로 산성을 비롯한 여러 유적지 답사를 다녔기에 하루에 2만보 이상은 꾸준히 걸었었다. 주말이 아닌 평일에는 게임(포켓몬고ㅋㅋ)를 한다는 핑계로 못해도 5천보 이상은 걸었다. 영양제도 꾸준히 챙겨먹었다(놀랍게도 이 책에서 오징어 약사가 말한 영양제를 골라서 먹고있었다는 건 안 비밀. 진짜 소오름). 물론 음식조절 따위는 하지않았다. 먹는 낙으로 사는 사람이니까. 


이 책 『오징어약사의 혈당 블로킹』 읽고 나서보니 확실히 알았다. 내 20대는 오징어박사가 『오징어약사의 혈당 블로킹』에서 말하는 ‘혈당 블로킹 3+1’ 중 일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 물론 식단관리 빼고(다시 말하지만 먹는 낙으로 사는 사람22).  확실한 건 그 덕분에 20대의 난 자연스럽게 혈당관리가 되고 있었고, 오죽하면 임신했을 때 별다른 조치를 한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임산부 대다수가 걸리리는 임당에서 자유로웠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뿐!!! 30대 피로의 몸은 쓰레기다. 올해 건강검진에서 나온 공복혈당 수치는 물론이오, 혈압도 높게나왔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본적 없는 숫자들이 나온 것이다. 일단 30대의 피로는 20대 피로와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다보니 더 그런것도 있다. 임신, 출산과 함께 답사는 중지! 휴일에 집 밖에 나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특히 식단이 휴. 특히 출산 직후부터는 밥보다는 간편식, 예컨데 전자레인지를 돌려 빠르게 먹을 수 있는 냉동식품을 정말 자주 먹었다. 20대에도 이렇게 냉동식품을 먹지는 않았는데!!!!! 너무 피곤하다보니 영양제 먹고 자는 것도 자주 놓쳤다. 당연히 30대 피로의 건강은 쓰레기가 되었다. 이쯤되니 당뇨, 고혈압이 코 앞에 다가온 것 같고, 슬슬 불안해진다.



나는 아직 살아갈 날이 많고!! 무엇보다 매일매일 가열차게 놀아줘야할 날다람쥐 같은 딸이있는데...!!!!!!!



오징어 약사는 이 건강관리책 『오징어약사의 혈당 블로킹』을 통해 혈당을 관리하여, 당뇨를 비롯하여 고혈압, 고지혈증 같은 성인병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앞서 말한 ‘혈당 블로킹 3+1’을 통해서.


자, 그렇다면 당뇨를 비롯한 각종 성인병이 코 앞에 다가왔는지를 알고 싶은 사람은 아래 항목을 통해 자가진단을 해보자. 


1. 40세 이상이다.

2. 가족 중 당뇨 환자가 있다.

3. 비만(특히 복부 비만) 이다.

4. 혈앞이 높다(고혈압 진단을 받았거나 약을 복용 중이다).

5. 평소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6. 최근 건강검진에서 공복혈당이 100~125mg/dL로 나왔다.

7. 최근 건강검진에서 당화혈색소(HbA1c)가 5.7~6.4%로 나왔다.

8. 밤에 소변을 자주 본다.

9. 평소에 유난히 갈증이 많다.

10. 체중이 별 이유 없이 줄고 있다.



이 자가진단 항목은 내 몸 속에서 혈당 스파이크가 발생하고 있는지를 진단하는 방법이다. 질병관리청과 대한당뇨학회 등에서 말하는 위험도 평가를 오징어 약사가 정리한 내용이기도 하다. 여기서 3개 이상 해당된다면 이미 몸 속에 혈당 스파이크가 자주 발생한다는 뜻이다. 이말은 뭐다? 당신은 당뇨를 비롯한 성인병 전 단계에 진입했다!!!!!!! 뚜둥!!!!!!!!!!!


아차차, ‘혈당 스파이크’ 가 무엇인고 하면, 식사 후 혈당이 급격히 올라갔다가 빠르게 떨어지는 현상이다. 반복되는 혈당 스파이크는 인슐린 저항성을 악화시키고, 이는 장기적으로 우리 몸에  만성 피로를 비롯해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같은 심혈관 질환등을 유발하는 아주 무서운 현상인 것이다.


※ 혈당 스파이크 원인: 음식 종류, 식사 속도, 식사 후 활동 수준 등



조금 슬픈 건 ‘40세 이상’이라는 항목. 흔히 말하는 ‘나이 이슈’에 혈당도 포함이다. 나이가 들수록 체내 인슐린 체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곧 40대가 된다거나, 이미 40대가 되었다거나, 이미 40대가 지났다거나. 당뇨를 비롯한 각종 성인병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사실을 인지하길 바란다. 아... 또 슬프네..........하.



유병장수하지 않고, 무병장수가 꿈인 사람. 곧 40대가 되는 사람, 건강한 체중감량을 하고 싶은 사람, 요즘들어 부쩍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사람, 당뇨 등 성인병에 걸렸지만 조금이라도 그 증상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사람 등등등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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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내 인생, 망해도 멋있게 - 지옥에 첫발을 내딛는 너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150가지 진심
이현석(서기채널)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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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사회에 갓 나온 20대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을 읽었다. 다만 사회에서 구르다못해 닳아 없어진 나같은 사람들에겐 ‘아! 그랬었지, 맞아맞아’ 정도의 책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사회에서 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정신 못차린 30대도 많으니까. 고로 난 이 에세이를 20대 뿐만 아니라, 아직도 정신 못차린 30대에게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왜? 이 에세이 『어차피 내 인생 망해도 멋있게』 는 그야말로 팩트폭격기다.



팩폭은 보통 친구들끼리, 혹은 선배가 후배에게 하는 경우가 많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면, 이 에세이 『어차피 내 인생 망해도 멋있게』 전반적인 분위기가 선배가 후배에게 말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경험자가 초보자에게 하는 조언이라고나 할까?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은 초년생들이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쉽게 읽을 수 있으니 괜찮다. 정신 못차린 30대가 읽기에도 아주 괜찮다(이런 사람들은 정신연령이 낮으니까). 


지금이라도 정신차리고 1인분 몫을 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누군가 나에게 정신차리게 팩폭해주었으면 한다면 이 에세이를 추천한다.


다만 저자의 말처럼 이미 ‘1인분 몫을 해내는 어른’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추천하지 않는다. 왜? 이 에세이 타겟층은 명확하게 ‘사회초년생’이다보니, 이 책 분위기가 조금 거슬릴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에세이는 전반적으로 선배가 후배에게, 멘토가 멘티에게, 경험자가 초보자에게 조언하는 글이다. 즉, 이미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가르치는 듯한 뉘앙스라고 해야하나? 그러다보니 이미 ‘1인분 몫을 하는 어른’이 별다른 이유 없이 잠시 책 읽을 여유가 생겨서, 혹은 신간 에세이가 나와서, 잠시 힐링이 필요해서 등의 이유로 이 에세이를 읽는다면 여러이유로 눈쌀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그럴때는 이렇게 대처하자. 이 에세이 『어차피 내 인상 맹해도 멋있게』를 덮은 뒤, 두변에 막 사회에 발을 내딛는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자녀, 조카, 혹은 아직도 정신 못차린 동료 또는 친구. 분명히 1명 이상은 있다. 제일 처음 떠오른 인물에게 이 책을 선물하자! 부디 그 인물이 정신차리길 바라며.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는데, 뭘 할까요?

나는 이 질문에 항상 ‘아.르.바.이.트’라고 대답해준다. 당당하게 민증을 내밀고 술집에서 술을 진탕 먹어보는 것도 좋지만 알바를 하면서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더러운 사람, 이상한 사람 다 만나보면 앞으로 내가 어떤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할지 알게 되거든. 그게 본격적인 인생의 출발점에서 첫 번째로 경험해야 할 일이야. 무엇보다 알바를 하면 놀 수 있는 돈을 주잖아? p 018


▶20대를 가장 완벽하게 보내는 법

20대를 돌아가고 싶지 않은 때로 만들어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의심의 여지 없이 20대를 치열하게 보낸 사람이거든. 누구나 할 수 있는 경험과 누구도 할 수 없는 경험을 동시에 두루 갖추려고 도력하다 보면 앞으로 다가올 30대, 40대의 삶이 더욱 아름다워진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어. p 021



▶일 잘하는 사람이 되는 법

더고 말도 덜도 말고 딱 받은 만큼만 하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 회사에서 당연히 그 이상 해내길 바란다고 생각하겠지만, 착각이야. 사회 초년생이라면 회사에서는 받는 만큼 결과를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래도 눈치 빠르고 일머리 좋다는 마을 듣고 싶으면, 다른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나서서 해. 비어 있는 A4용지 통이나 탕비실 커피 채우기처럼 사소한 것부터 빠릿하게 하면 신입은 다 예뻐 보이거든. p 023


▶의지 박약? 아니, 간절함 박약

간절함이 차오르면 의지가 없어도 뭐든 저절로 한다. MBTI 에서 J형을 계획형이라고 하잖아. 그런데 계획형보다 더 무서운 유형이 있어. 바로 D형(Desperate)형이야. 계획을 철저히 짜놓고 실행하지 못하면 좌절하는 계획형보다, 간절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정말 어마무시하거든. 의지 박약이라 못한다고? 그냥 아직 간절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할게:) p 028


▶어렸을 때 친구와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면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일에 대단히 연연하지는 말자. 인간관계에서 놓아줄 때를 아는 것도 지혜야. 물러가는 관계를 놓지 못하고 꽉 잡고 있으면 어느 순간 썩기 시작해. 그러다 보면 별것 아닌 일에 감정이 폭발해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관계가 되기도 하고 말이야. 프로 손절러가 되라는 말이냐고? 아니, 살다 보면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로, 평생 가는 관계도 있거든. p 078


▶쓰레기는 재활용이 안 된다

한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 누군가를 쉽게 판단해선 안 된다거나 그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좋은 면이 있을 수 있다는 말? 교과서는 이제 그만 덮어줄래? 다른 살마을 내 입맛대로 바꾸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아. 다른 살마에게 조언하고 설득할수록 상대방은 바뀌기는 커녕 오히려 방어적으로 나올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첫 만남의 직감을 믿고, 쎄한 사람은 피할 수 있어야 돼. 너도 ‘쎄믈리에’가 될 수 있어. p 128


▶선 넘는 사람들을 대하는 법

심플하게 뇌를 비우고 그냥 냅둬. 애매하게 선을 넘을까 말까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분명 선 넘는 말이나 행동을 하게 돼 있어. 그럴 때는 ‘왜 저러지? 불안하게?’ 하며 전전긍긍하지 말고 그냥 ‘언제 넘어오나아~?’ 하고 내버려뒀다가 선을 넘는 그 순간에 손절하면 돼. 손절하기 어려운 사람은 대놓고 무례한 사람이 아니라 기분에 따라 어떨 때는 잘해주고, 어떨 때는 선을 긋는 애매한 사람이야. 근데 난 그 애매모호함이 답답하고 기분이 나빠. 자꾸 나라는 사람을 두고 간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굳이 잘 지내려고 노력하지 말고 선 넘을 때를 기다려. p 149




◎ 건강한 어른으로 서기 위한 문장들 ◎ 

1. 어설픈 조언보다는 기프티콘 하나가 낫다

2. 1인분 몫을 제대로 해내는 어른이 되자

3. 월급 루팡은 되지 말자. 최소한 받은 만큼은 해내자

4. 열등감은 노력하지 않은 과거의 나에 대한 미움일 뿐이다

5.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시간만큼 아까운게 없다

6. 근거있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7. 누구에게나 손절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필요한 건 예의 있게 끝내는 지혜

8. 무리한 완벽주의보다는 꾸준함과 성식함이 더 큰 가치가 있다

9.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10. 자존감 높은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일에 책임지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11. 내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 노력은 반드시 보상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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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의 풀꽃 인생수업
나태주 지음 / 니들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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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님의 시집은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나지만, 나태주 시인님의 에세이는 벌써 세 번째다. 시인님의 에세이를 읽을때마다 느낀다. 각박한 세상에서 보기 힘든 참 어른이 있다면, 바로 나태주 시인님이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과거에는 흔히들 말하는 ‘참어른’이 주위에 많았다. 해서 젊은 사람들에게 고난이 닥치면 어른들이 나서서 도와주거나, 혹은 조언을 해주며 헤쳐나갈 길을 알려주고는 했다. 반면에 요즘은 어디를 둘러봐도 어른인 척 하는, 나이만 많은 사람들이 지천이다. 이제 갓 사회 나온 20대를 위해, 고단한 사회 생활에 들어선 30대를 위해, 수 많은 인생 후배들을 위해, 진실된 조언 한마디를 해줄 어른을 찾을 길이 없다. 


심지어 어떤 나이많은 사람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유독 약하다며, 젊은이들이 문제라고 치부한다. 정말 그럴까? 그들이 젊었을 땐, 위에서 말했듯 참어른이 많았기에 삶에 고난이 닥쳐도 헤쳐나갈 수 있었다. 그뿐인가? 사회문제도 그렇다. 그들이 젊었던 그 때는 없었던, 생각치 못했던 수많은 사회문제들이 현재 도시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사회문제들 역시도 젊은이들이 나약해서 그런거라며 치부한다. 이 사회문제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왜 지금와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은채.


그들은 믿고 싶지 않겠지만 젊은 세대가, 내가 살고 있는 각박한 세상. 지금 우리를 나약한 젊은이라 치부하는 그들에게 물려받은 세상이다. 


그래서 현재를 사는 젊은 세대, 나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야, 내일을 겨우 보장받을 수 있는 삶. 지금 젊은 세대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 마음 속에는 점점 더 여유가 없어지고, 나 자신을 돌보는 건 사치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런 삶을 사는 우리다. 그렇기에 더 참 어른의 한마디가 고프다. 어떻게 해야 이 삶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진실된 조언 한마디가 간절하다. 바로 그래서다. 그래서 나태주 시인님의 에세이를 읽었다. 이 세상에서 몇 안되는 참어른, 인생 후배들을 향해 진실된 한 마디를 건네주시는 나태주 시인님의 한마디는 더할나위 없이 소중하다.



지금 삶이 힘든 사람들을 위해, 이 책에 실린 나태주 시인님의 조언을 옮겨본다.

 



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오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조금쯤 모자라거나 비뚤어진 구석이 있다면

내일 다시 하거나 내일

다시 고쳐서 하면 된다

조그마한 성공도 성공이다

그만큼에서 그치거나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고

작은 성공을 슬퍼하거나

그것을 빌미 삼아 스스로를 나무라거나

힘들게 하지 말자는 말이다

나는 온들도 많은 일들과 만났고

견딜 수 없는 일들까지 견뎠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나 자신을 오히려 칭찬해주고

보듬어 껴안아줄 일이다

오늘을 믿고 기대한 것처럼

내일을 또 믿고 기대해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너, 너무도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




제가 보기에 우리 모두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고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더 잘하고 싶고, 더 높은 곳만 바라보다 보니, 어느 정도 잘하고 있는데도 부족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디 더 잘하려고, 나보다 더 앞서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을 뒤떨어진 실패자라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뭐든 그런식으로 생각하세요. 적당히 가리고, 적당히 보완하면서 살아가세요. 그런 것들은 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p 018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결핍이 저에게는 도움이 되었다는 겁니다. 부족하기 떄문에 시 쓰는 사람이 됐어요. 자신을 부족하다고 느끼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기에, 되레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거나 충분히 잘했다는 이야기도 해 줄 수 있는거에요. p 023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풀꽃1」, 나태주 -




만약 ‘나도 그렇다.’라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분명히 이 자리에 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너도 그렇다.’ 라고 했기 때문에 제 이야기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았을 겁니다. 단지, 그 두 글자 차이입니다. ‘나만’에서 ‘너도’로 갔다는 것.


요즘 이건 누구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나만 그렇다.’ 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보니, 여러 가지로 윤택하고 넉넉해지고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나서 보니 이제는 ‘너도 그렇다.’라고 말하고 싶어진 거에요. 바로 자리이타(自利利他) 입니다. 나한테도 이롭고 너한테도 이롭다. p 045



자존감이란 게 뭡니까?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남도 높일 수 있어요. 하지만 자존감이 낮으니까 자꾸 ‘나만 그렇다.’라고 하는 이기심이 생기는거예요. 자존감이란 건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 스스로가 나를 인정하고 높이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상대적으로 나를 높이는 마음이 자존심입니다. 그러니까 자존심과 자존감은 다른 것이지요. p 047




스스로 자기를 낮추지 마십시오.

그만하면 당신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오늘로 충분했어요.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 「행복」, 나태주 -




가까운 곳에 있는 행복을 찾지 아니하고, 자꾸만 먼 곳에 있다, 남에게 있다, 안 보이는 곳에 있다,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 지난하고, 불행하고, 답답하고, 속상하기만 한 것이지요. 이에 대해 카를 부세라는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산 너머 저 멀리에 행복이 있다고 말하기에,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갔는데 그곳에는 행복도 뭣도 없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울면서 후회하면서 집에 돌아왔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까치발을 딛고 더 먼 곳만 바라본다는거예요. 여전히 행복은 산 너머 언덕 너머 더 멀리 있으럭라고 말하면서요. p 090


누구나 다 힘들 때가 있어요. 사람이 힘들면 취약해지고 에너지가 바닥을 칩니다. 그럴 때 마음속으로 누굴 떠올릴까요? 가족입니다. 이 가족이란 게 참 징글징글한 겁니다. 가장 많이 싸우는 사람은 부부이고, 부모 자식간이고, 가족입니다. 남과는 싸움을 잘 안하지요. 가장 많이 부딛히는 사람은 가족이에요. 그런 가족이 애특해지는 순간이 어떤 때입니까? 바로 아플 때입니다. 내가 약해질때예요. p 101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가까운 곳, 지근거리, 바로 우리집에 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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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의 미술관
최정표 지음 / 파람북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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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개개인이 부를 쌓기 이전까지, 미술작품은 왕이나 귀족같은 전통적인 부자들의 수집품이었다. 이는 어느나라나 비슷하다.  그러다 여러 이유로 왕실이 사라지거나, 과거보다 그 힘이 줄어들면서 왕실이나 귀족들이 소유하던 미술작품들이 대거 민간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국립미술관’ 또는, 신흥 부자들이 건립한 ‘미술관’을 통해서. 


‘미술관’은 대표적인 문화시설이다. 이런 문화시설은 흔히들 말하는 선진국에 많고, 유명 미술관들 역시 우리가 말하는 선진국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미술관은 돈 많은 나라에 있는 시설이며, 미술은 돈이 많은 사람들이 수집하는 수집품이라는 인식이 꽤 널리 퍼져있다. 왜 그럴까?


‘미술’은 고고하고 독창적인 예술 분야라 생각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경제의 원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왜? 미술관 같은 문화시설은 기본적으로 방문객이 많아야 유지된다. 대내외 방문객이 많아야 그만큼 미술관 수입원이 늘어나고, 수입원이 늘어나야 더 많은 미술작품을 사들이고, 그 미술작품에 걸맞는 수준높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그 뿐인가? 외국 관람객이 많은 미술관을 보유한 나라는, 외국 관람객이 체류하며 사용하는 관광비까지 +@의 수입원이 생긴다. 이렇게 늘어난 수입원으로 다시 질 좋은 미술작품을 사고, 그에 걸맞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고로 미술관은 그 자체로 규모의 경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작품을 만드는 화가(또는 조각가 등) 역시 자신의 작품을 팔기 위해선, 작품을 사는 고객의 니즈를 맞춰야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권력을 지닌 독재자를 찬양하는 작품을 만들곤 한다. 미술을 뿐만 아니라 음악가, 건축가 등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작품을 팔아야 ‘돈’이 되고, ‘돈’이 있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물론 한평생 자기만의 길을 예술가들도 분명 있다. 워낙 가진게 많아서 남의 ‘돈’이 필요치 않은 사람, 또는 ‘돈’이 없어서 생계가 막막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내 갈길 가는 사람. 아이러니하게도 후자에 속하는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들은, 후대에 가면 엄청난 값어치가 매겨지곤 한다. 예컨데 고갱이나, 이중섭 같은..


결과적으로 ‘돈’과 미술은 뗄레야 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가? 한 경제학자가 미술관에 꽂혔다. 바로 이 책 『백야의 미술관』의 저자 최정표님이다. 이 경제학자가 미술관에 꽂혔고, 그렇게 북유럽 미술관 답사를 다녔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카를스베르 미술관 in 덴마크


카를스베르미술관은 칼스버그 맥주로 유명한 카를스베르 가문에서 만들었다. 창업자 야콥센의 아들 카를 야콥센이 미술관 설립의 주역이다. 카를 야콥센은 수집광이라고 불린 당대 최고의 미술품 수집가였다. p 040




아버지 야콥센도 미술품 수집에 조예가 깊었지만, 그의 아들 아들 카를 야콥센의 미술품 수집은 아비를 능가했다. 심지어 그의 아내 역시도 미술품에 조예가 높았다고 한다. 그렇게 2대에 걸쳐 수집한 미술품을, 돌연 국가에 기증했다. ‘좋은 장소에 미술관은 만들어야 한다’라는 조건을 내세우며. 어떠한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들의 미술품 기중은 덴마크 국민들은 물론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에게 유명 미술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카를 가문의 미술품 기증으로 시작된 ‘카를스베르 미술관’. 그 곳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 중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이 있다. 프랑스 대표 화가인 에드와르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과 <압생트 애주가>. 특히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은 전쟁이 주는 폭력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알려주는 그림이기도 하다. 마네는 스페인 화가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라는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이 그림을 그렸고, 이후 후대 화가들이 이런식의 전쟁 폭력을 고발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럽 화가들이 그린 전쟁 폭력을 고발하는 그림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아주 유명한 화가도 있다. 바로 피카소. 피카소가 전쟁 폭력을 고발한 작품의 이름은 <한국에서의 학살>. 이 그림은 6.25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미군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그린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이 그림에 대해 알고 있는 한국인이 얼마나 있을까.




오르드룹고르미술관 in 덴마크


어느 나라나 새로운 산업이 일어나면 큰 재벌이 생겨난다. 미국은 석유가 나오면서 록펠러 재벌이, 자동차가 나오면서 포드 재벌이 만들어졌다. 한센 재벌은 덴마크에 보험업이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재벌이다. 덴마크 보험업계에서는 그의 족적이 매우 크다. 보험회사 두 개를 일구어 덴마크의 대표적 보험회사로 키워냈다. p 89


 보험업은 현금 유동성이 가장 높은 사업이다. 보험료는 계속 들어오는 데 보험금은 미래에 지급하기 때문에 돈이 계속 쌓여간다. 그래서인지 보험업으로 성공하면 재벌로 등극하고, 다른사업으로 재벌이 되어도 보험업을 시작한다. 우리나라도 삼성그룹이 ‘삼성생명보험’과 ‘삼성화재보험’을 가지고 있다. p 90


 

한센은 선구안을 가진 사업가였다. 무엇보다 그는 어려서부터 친구의 영향으로 그림을 좋아했다. 그의 아내역시 그림을 좋아헀다. 한센 부부는 한평생 미술 작품을 사모았고, 그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지은 대 저택이 바로 ‘오르드룹고르미술관’의 시작이다. 그렇게 보험업으로 재벌에 등극하며, 멋진 작품들을 사모으던 한센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그때 한센은 자신이 모은 프랑스 작품 82점을 팔아야만 했다. 그가 판 작품에는 지금도 유명한 세잔, 마네, 고갱 등의 작품이 포함되어있었다.


한센은 눈물을 머금고 프랑스 작품 82점을 팔았는데, 이 작품들을 산 사람은 놀랍게도 일본인 사업가였다.1922년에 일본엔 이미 훌륭한 미술작품을 사모으는 컬렉터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동시대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우리나라 미술사는 어땠나. 매우 뼈아픈 대목이다. 한센이 판 이 작품들은 현재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노르웨이국립미술관 in 노르웨이


복지가 넘사벽이라는 노르웨이. 사회안전망이 워낙 탄탄하며, 국민들의 행복지수도 높다는건 유명하다. 하지만 그런 노르웨이도 약점은 있다. 독립 역사가 짧다보니,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할때 미술계가 약한게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있는 유명한 화가들은 대게 프랑스를 필두로 그 주변 유럽국가들이 주를 이룬다. 당연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들도 해당 국가들이다. 그렇기에 노르웨이 정부는 더욱 문화시설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노르웨이 정부는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을 개관하며 문화 인프라 사업에 열중했다.



문화시설은 인구가 많아야 만들어질 수도 있고 유지될 수도 있다. 규모의 경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소장품을 보유하면서 높은 수준의 미술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방문객이 많아야 한다. 따라서 기본적인 내수가 확보되면 훌륭한 미술관을 키워나가는 데 유리하다. 노르웨이는 수도 오슬로의 메트로폴리탄 지역인구가 170만 명으로 노르웨이 전체 인구의 1/3이나 된다. 이런 인구 밀집에도 국가 자체의 인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오슬로는 파리나 런던 같은 대도시가 될 수 업사. 그런 약점에도 정부는 문화 인프라를 서유럽의 대도시에 뒤지지 않게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p 131



다행스럽게도 19세기 말 즈음, 노르웨이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배출된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 화가, 바로 에드바르 뭉크다. 에드바르 뭉크의 탄생은 후대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많은 문화적 자산을 물려주었다. 실제로 노르웨이에 있는 노르웨이국립미술관을 찾는 사람들 대다수가 뭉크의 그림을 보기 위함이다. 


또한 노르웨이에는 뭉크미술관이 따로 있을 정도로, 뭉크는 노르웨이 미술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한 사실 하나. 사실 노르웨이에는 뭉크 이전에 크리스티안 달 이라는 걸출한 화가가 있었다. 뭉크가 나타나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크리스티안 달 역시 걸출한 화가임에는 틀림없다. 무엇보다 크리스티안 달은 노르웨이국립미술관 창립멤버이자, 자신의 작품을 전부 이 미술관에 기증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보통 유럽 미술관의 시초는 왕가 또는 귀족들의 소장품에서 시작이 기본이다. 하지만 노르웨이 미술관은 조금 달랐다. 노르웨이 정부가 세워진 뒤 정부에서 나서서 미술관을 세우고, 정부에서 미술품을 수집하거나 민간의 기부에 의존했다. 실제로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 있는 뭉크 작품 80%는 민간의 기증이라고 한다. 왜그럴까 생각해봤는데, 노르웨이 역사를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답은 간단했다. 


노르웨이는 꽤 오랜기간 덴마크와 한 몸이었다. 연합이라고 해야하나? 지배국이라고 해야하나 뭐 여튼 그러다가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노르웨이가 독립을 한다. 즉 노르웨이가 독립을 하기 전까지, 노르웨이를 지배한건 덴마크 왕실. 덴마크 왕실에서 수집한 미술품은 당연히 덴마크 미술관에 기증할테니, 당연하게도 노르웨이 몫 왕실 미술품이 없는 것이다. 


문득 일제강점기 때가 떠오른다. 일제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수집한 많은 미술작품들을 일본으로 무단반출을 했다. 실제로 일본 내 있는 박물관, 미술관에는 우리나라에서 약탈한 작품들이 많다. 물론! 덴마크 - 노르웨이와는 다른 환경이긴하다. 어찌되었든 덴마크 - 노르웨이는 연합이었으니까. 그리고 덴마크 왕실이든 귀족 부자들이든 지들 돈으로 수집품을 사모은거니, 무분별한 약탈을 일삼은 일제와 비교하면 안된다. 아 괜시리 덴마크에 미안해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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