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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 일본의 근대를 이끌다 ㅣ 살림지식총서 583
방광석 지음 / 살림 / 2019년 8월
평점 :
8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절대 잊어서 안되는 날이 있다. 날짜로 말할 것 같으면 8월 15일과 8월 29일. 15일 광복절은 국경일이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반면에 29일은 생소한 사람이 많다. 그것도 아주 많이. 왜그럴까? 대략 백년하고도 15년 전 8월 29일, 그 날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제일 치욕스런 날이었다. 그렇기에 공교육에서도 굳이 날짜를 부각시키지 않았고, 정부 차원에서도 29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1910년 8월 29일과 1945년 8월 15일은 일제강점기 시작과 끝이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 한일병합 조약이 성립되며 대한제국이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고종을 비롯한 조선왕실, 친일고관대작들은 나라를 건네주는 대가로, 자신들의 안위와 재산을 보장받았다. 대한제국 백성들이 어떻게되든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대한제국에 속했던 모든 사람들은 일본제국 사람이 되었다. 지도에서 대한제국(또는 조선)은 지워졌다.
그렇게 지난한 시간이 지났다. 35년의 시간동안 후손들에게만큼은 우리나라, 우리말, 우리문화를 전해주고자 했던 조상들은 자신의 생명을 받쳐 독립을 이루어냈다. 그렇게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일궈낸 독립이다. 문득 몇 일전 독립기념관장의 개똥같은 광복절 연설이 떠오른다. 저런 인간이 독립기념관장이라니. 정말 윤석열 정부 때 임명된 인간들은 제대로된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1도 없다.
자, 이제 생각해보자. 앞으로도 지금처럼 8월 29일에 의미부여를 하지않고, 아무날도 아닌 것처럼 가는게 맞을까? 그저 8월 15일 광복절만 가르치고 8월 29일은 그저 달력에 있는 어느날 처럼 취급하는게 맞을까? 지금까지 8월 29일의 중요성을 감춰왔기에, 앞서 말한 독립기념관장 같은 왜곡된 역사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아닐까?
물론 8월 29일이 우리 역사상 제일 치욕적인 날이기에 숨기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오죽하면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이라고 하여 ‘경술국치’라 부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아야한다. 언제, 어떻게, 왜 나라를 빼앗겨야만 했는지를. 그래야 나라를 되찾기위해 모든 것을 바친 조상들을 제대로 기릴 수 있다. 그 뿐인가. 왜 빼앗겼는지 알아야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다. 지난 날의 잘못을 반성하여, 동일한 잘못을 하지 않게 경계하는 것. 바로 ‘징비’다. 여담이지만, 서애 선생이 ‘징비록’을 쓴 이유를 이 땅의 후손들은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보여서 슬프기 그지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리뷰하는 역사책은 『이토 히로부미』는 경술국치가 어떻게, 왜 발생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책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식민통치하기 위한 기구인 ‘통감부’의 초대 통감이자, 경술국치를 설계한 자이며, 안중근 의사가 의거 당시 사살한 조선 침략의 원흉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농민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가 조슈번 무사집안의 양자로 들어가며 무사 신분을 얻는다. 조슈번 무사가 된 이토는, 조슈번에서 유명한 학당을 찾아간다. 요시다 쇼인이 운영하는 쇼카손주쿠다. 그렇게 이토는 요시다 쇼인 제자가 되었다. 덧붙이자면 쇼카손주쿠에서 요시다쇼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훗날 일본의 근대화혁명인 메이지유신을 주도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요시다 쇼인이 이토에 대해 남긴 평가다. 요시다는 이토를 보며 ‘평범한 학생’라고 평가했다. 이토가 훗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고, 메이지 정부의 초대 총리가 되며, 한국을 침략하기 위한 수많은 정책에 깊숙히 관여하고, 결국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를 이끌어내는 구심점에 있었다는 점을 보았을 때 매우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왕정보고’ 이후 이토가 견지해온 ‘천황친정’은 대외적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정치이념일 뿐 실제 정치주체로서 천황의 ‘친정’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천황의 능동적인 정치관여를 제도화하려 했던 천황친정운동도 이토 등 정부 수퇴에 의해 결국 좌절되었다. 입헌체가 수립되기 이전의 근대 태정관제는 전제군주제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천황은 권위의 원천으로만 기능하고 실제의 정치운영은 법치주의적 원칙 아래 번벌 관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p 020
1876년 9월 ‘점차입헌정체 조직’의 취지에 따라 원로원에 ‘국헌’ 초안의 기초를 명하는 칙어가 내려져 10월부터 1880년 7월에 걸쳐 세 차례의 초안이 작성되었다. 유럽 각국의 헌법을 참고로 장기간에 걸친 조사 끝에 「국헌안」이 제출되었지만 내각에서 채택되지는 못했다. 원로원 「국헌안」은 영국식 입헌정체 구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p 021
원로원의 「국헌안」은 여러차례 부침의 결과 결국 채택되지는 않았았지만, 이토를 비롯한 여러 관료들은 ‘입헌제’ 필요성 자체는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메이지 정부의 향후 방침은 ‘입헌제 수립’ 이라는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다. 그렇다면 이토가 「국헌안」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헌안」 속 정치 주체가 내각이 아닌 의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는 군주와 의회 권한을 제한하고, 내각 즉 관료 중심인 입헌제를 고수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기위해, 직접 유럽 여러국가를 시찰하며 각국의 입헌제를 조사 및 연구했다.
이후 이토는 확신한다. 일본이 유럽 강국의 입헌제를 표방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대신 천황제를 중심으로 기존의 국가기구를 입헌적으로 바꾸면 입헌체제 수립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이 과정에서 이토 리더쉽이 부각되었고, 그렇게 정권의 지도자로써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토는 입헌정치의 상대화에 의해 헌법에서 행정으로 관심을 옮겨 “설령 아무리 좋은 헌법을 제정하고 좋은 의회를 개설하더라도 행정이 좋지 못하면 성과를 거둘수 없다”고 말하며, 행정조직 정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행정’의 강조는 이토의 일관된 국가기구개혁론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생각이었다. p 046
이후 이토는 궁중개혁을 비롯해 국가기구개혁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토가 헌법제정에 앞서 먼저 기구개혁에 나선 것은 유럽 체류 중에 슈타인의 가르침을 받아 헌법제정과 국회개설 전에 “제가(帝家)의 법, 정부의 조직 및 입법주 조직”을 확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먼저 재상의 직권과 책임, 관청의 구성과 관리의 규칙, 시험 방법 등 ‘행정’의 조직과 규칙을 확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토가 궁중개혁, 내각제도의 개혁을 단행하는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이 입헌제 시행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p 048
이토는 유럽 시찰에서 귀족의 정치적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하지만 기존 일본 전통 귀족들로는 입헌제 속 역할을 부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여 “오늘날 사족과 평민 공로자를 무식한 화족 및에 두면 안된다.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면 아직 공로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라고 말하며, 새로운 작위제도를 만들었다. 그렇게 일본에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5단계 작위체계가 생겼고, 개인의 공로에 따라 작위가 부여되었다.
또한 천황제 시절의 3대신(태정,좌,우)체제를 철폐하고 관제개혁을 통하여, 책임 내각제도를 수립했다. 이러한 이토의 개혁은 매우 급진적이어서 구체제 관료들과 귀족들에게 강한 반발을 불러왔으나, 이토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설득하며 밀어부쳤다. 시대가 이미 바뀌었기에, 일본도 흐름에 따라 바뀌지 않으면 결국엔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토가 자국을 위해 입헌제를 고심하고, 헌법을 연구하며, 입헌제를 실시하는 유럽 여러나라를 시찰하며 공부하는 동안 우리나라는 무엇을 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일본과 조선이 극하게 대비된다.
조선의 임금 고종은 전제군주인 ‘황제’가 되고자 했다. 세계사적 흐름을 완벽하게 역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종은 근대국가이자 전제군주국가인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물론 일본도 ‘일왕’이라는 군주가 있었으니 비슷하다고 우길 지도 모르지만, 놀랍게도 단 1도 같은게 없었다.
군주가 있을 지언정 실질적 정치적 주체는 관료이며, 수많은 연구와 시행착오 끝에 제정된 헌법 아래 정치를 한 일본제국과 오로지 고종의 입맛에 따라 졸속 제정된 헌법과 고종의 입맛에 따라 널뛰는 정치를 한 대한제국. 이 확연한 차이야말로 한반도와 일본을 피지배국과 지배국으로 갈라놓는 제일 큰 원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고종이 근대국가인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유은 오로지 황제 자신을 위함이었다. 자신의 부와 명예, 안위를 유지하기위해서.

헌법은 매우 중대한 것으로 황실의 흥망과 큰 관계가 있으며 이를 잘못해 백년의 우환을 초래해서는 안된다. 자신은 적어도 사심을 개입하지 않고 제실과 국가를 위한 것만을 생각하며 헌법을 기초했다. p 068
동양에 있어 일본이 처므으로 입헌정치를 채용하게 되었는데, 유럽 각국에서 1,000여 년간의 전통이 있어 인민히 입헌정치에 익숙한 것과는 달리 전혀 새롭게 만드는 것으로 국가에 대해 이익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헌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서는 먼저 일본의 기축을 구해야만 한다. 기축이 없이 정치를 인민의 망의에 맡겨 국가를 폐망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유럽에 있어서는 입헌정치의 전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가 깊이 사람들 마음에 침투하여 국가의 기축을 이루고 있는데 일본에 있어서는 종교의 힘이 미약하여 쓸모가 없다. 일본에 있어 기축이라고 말 만한 것은 오직 황실 뿐이다. 따라서 이 헌법초안에 있어서는 군권을 존중하고 이것을 기축으로 삼아 훼손돼지 않도록 매우 주의했다. p 069
메이지헌법은 이토 등 관료가 주도해 기존 번벌 지배구조를 보장하기 위해 군주제와 입헌제를 교묘하게 결합한 것이다. 위와 같은 강대한 천황대권이 헌법상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 정치과정에서 천황대권을 행사한 것은 이토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메이지유신 이래 정권을 잡아온 원로들이었다. p 076
위에서처럼 이토는 ‘황실’을 중심축으로 삼되 입헌제의 원칙을 지켰고, 실제로 예산에 부여하는 입법권 등은 순수한 입헌제 원칙을 적용했다. 그렇게 1889년 2월 11일 대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되었다. 공포된 제국헌법은 위에서 아래로의 개혁 연장선이었으며, 기존의 군주주권을 유지하는 형태였기에 혼란을 잠재우며 국내 안정을 꾀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여기까지가 일본에서 바라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다. 나라를 근대화시키고, 헌법을 제정하며, 일본 양원제 확립에 기여한 사람. 일본인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위인이다. 어디까지나 일본인에게만.
우리는 알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이토는 일본 내부적으로 훌륭한 정치가였다. 이렇게 훌륭한 정치가들은 하나같이 내부에 문제가 생겼을 땐, 외부로 눈을 돌리게 한다. 정치가 이토도 이 이치를 명확하게 꿰뚫고 있었고, 실제로 내부 정치 위기 탈피를 위해 외부에 있는 ‘조선’을 이용했다.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게 해준 것은 대외문제였다. 조선에서 발발한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해 청일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제2차 이토 내각은 국내의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 청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고 하였으나 요동반도를 중국에게 돌려주라는 독일,프랑스,러시아 3국 간섭을 수용하고 일본인이 민왕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으로 인해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것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 확장을 꾀해온 일본의 조선정책이 일시적으로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p 085
이토가 한국침략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은 러일전쟁(1904~1905년) 이후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2월 21일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해 한국에 대한 ‘보호통치’를 시작했다.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는 구미 열강의 승인이 그 배경에 있었다. 미국은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영국은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조인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p 091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이토는 이를 계기로 한국지배 체제를 더욱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토 통감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킴과 아울러 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고 통감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정미7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정부는 순차적으로 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고 병합을 위한 기반을 닦는 정책을 취했으며, 그러한 과정을 거쳐 정부의 방침으로 한국병합을 결정한 것은 1909년에 들어서였다. p 092
정미7조약, 군대해산 등은 조선 내에서 경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그로 인해 전국적으로 항일의병 활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에 이토는 통감직을 사임하고, 극동문제 논의를 위해 러시아로 가던 중 하얼빈에서 독립운동가 안중근에게 사살된다. 이토가 안중근에게 사살된지 10개월 만에 일본은 한국을 직접 식민지로 삼았으니, 그 날이 바로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이다.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이라 하여 #경술국치 라고도 한다.
문제는 이 이후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병합에 소극적이었는데, 이토라는 큰 장애물이 사라지자 급하게 병합이 된게 아니라는 의견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토가 오히려 조선을 보호하였고, 오히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하였기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들어갔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궤변이다.
이토는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한 정책을 차근차근 펼쳐나갔고, 이토가 통감직을 사임했을 직후에는 이미 병합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무엇보다 이토는 정한론(정확히는 해외팽창 정책)을 주창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다. 이토 히로부미 뿐만 아니라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등 메이지 정부 요인들 대다수가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기에, 그들이 자국 내 정치 안정화를 끝난 뒤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는 건 사실상 정해진 수순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여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절대 된 게 아니다. 이토는 처음부터 한반도를 식민지 삼기 위해 설계했던 사람이었고, 설계에 따라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가 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진행하였으며, 준비가 완료된 뒤 실제 식민지배 도장을 찍는 날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