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 - 한 법의학자가 수천의 인생을 마주하며 깨달은 삶의 철학
이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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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그알 시청경력 1n년차라 왠만한 사건사고는 그 어떤 타격감 없이 ‘그렇구나’하고 넘어갔던 나다.  그알 시청경력이 몇 년 차인데! 이런거에 놀라고 호들갑떨어? 라고 생각했다. 하, 근데 아침 댓바람부터 눈물을 몽창 흘렸다. 그것도 회사에서! 날 오열하게 한 사건들은 ‘아이’였다. 정말로 오로지 성인들만 관련된 사건들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피해자, 가해자 또는 그 사이에 있는 또 다른 구성원이 중 하나가 성인이 아닌 ‘아이’가 들어가니까 와. 정신적 타격감이 너무 거셌다. 아이를 낳기 전엔 몰랐는데, 아이를 낳고 나니 이게 참 와닿는게 너무 달랐다.



내가 그 아이들을 후원한 것은 가장 먼저 그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지원만으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두 번째 사람, 세 번째 사람이 함꼐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 주면 좋겠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그저 엄청난 슬픔과 파괴 속에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가장 먼저 본 우리 모두가 그 아이들을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p 084




우리가 감히 유가족의 마음이 되어볼 수는 없다. 황망하게 떠난 가족이 얼마나 그리울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뜨거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무언가 몸을 움직여 행할 필요도 없고, 나의 시간이나 돈을 쏟을 필요도 없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것.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가장 마지막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다. p 188




하교한 아이가 집에 오자 엄마가 죽어있었다. 아빠에게 전화했고, 아빠는 경찰에 신고했다. 아이는 그 날 자신이 보았던 상황을 경찰에 진술했다. 진술 속에서 아빠가 범인이라는 정황증거가 나왔다. 실제로 엄마를 죽인건 아빠였다. 이 아이는 엄마가 죽었는데, 엄마를 죽인 사람이 자신이 아빠고, 그 아빠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결정적인 증거가 자신의 진술이었다. 또 다른 가정에선 엄마가 아빠에게 맞아 죽고, 아빠는 자살해서 아이만 혼자 남았다. 다문화가정이라 국내에 친인척이라곤 고모 뿐이었다. 




이 아이들은 법에서 말한 피해자도 아니고 가해자도 아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아니라고 하기엔, 이 아이들에게 남겨진 고통은 뭐라 말할 수 있을까? 갑자기 자신을 사랑해주던 부모가 모두 사라졌을때, 엄마를 죽인 사람이 아빠였을때, 이 모든 진실을 감당하기엔 이 아이들이 너무나 어렸다. 무엇보다 아직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인데, 그 부모가 사라졌다. 이 아이들은 험한 세상을 부모라는 보호막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대다수는 나라에서 어련히 잘 돌봐주겠지- 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예상외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호 교수님은 남은 아이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후원자가 자신의 부모를 부검했던 사람이라는 걸 알면, 아이들은 다시금 슬픈 과거를 떠올릴지도 모르기에, 그렇게 되면 아이들에게 또다른 상처를 줄 지도 모르기에, 익명으로 후원을 시작했다고 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선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게 많지 않지만, ‘개인’은 가능하다. 이호 교수님처럼 개인적으로 후원할 수도 있고, 단체를 통해 후원할 수도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이런 아이들을 발견하게거든, 손을 내밀어주자. 그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부모는 아닐지언정, 그래도 자기를 걱정하고 지지해주는 어른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아이야


여섯 살이잖니


두 손으로 셈하기에도


네 개나 남은 나이인데


엄마와 3더하기 3은 6


아직 읽곱 여덟


셈하는 놀이도 끝나지 않았는데


하룻밤만 잔다더니 여직 그곳에서 놀고 있니


너의 향긋한 냄새는


너의 침대 배갯잎에도


너의 꼬꼬마 인형의 때묻은 뺨에도


그리고 지난번 소풍에 찍었던


사진 속의 네 미소에도 남아 있는데


너의 보송보송한 얼굴과


너의 고운 음성은


어디에 두었니


왜 그리 꼭꼭 숨었니


아이야, 천사의 나갯짓을 하고


오늘 밤 또 내일 밤


잠 못들어 뒤척이는 엄마 곁에


향긋한 너의 향기 뿌리며 오지 않겠니


내 그때라도 너의 보들보들한 뺨에 내 얼굴을 비비고


너의 은행잎 같은 손을 내 눈에 대어


흐르는 눈물을 막아보련만


오늘도 이 엄마는


너를 안았던 가슴이 너무 허전해


너를 부르며 피를 토한다


보고 싶은 내 아이야


귀여운 우리 아기야 


_ 박경란 「아이야, 너는 어디에」 中





「아이야, 너는 어디에」 이 시는 씨랜드 화재 후 아이를 잃은 부모를 보며 한 시인이 쓴 시다. 씨랜드 화재 이후 이렇게 아이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 이후로도 수많은 아이들이 세상을 떠나는 크고작은 일이 되풀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을 태운 배가 침몰했다. 배가 침몰할 당시만 해도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왜? 배가 가라앉는데 꽤나 시간이 흘렀고, 침몰하는 배 주변에 해경을 비롯해 많은 배들이 와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299명이 사망했다. 그중 대다수는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이었다. 이 학생들이 사망한 이유는 단순했다. 어른들이 곧 구해줄거라는 믿음과 ‘가만히있으라’던 선내방송을 따랐을 뿐이다. 이 방송을 따르지 않고 자발적으로 뛰쳐나온 소수의 사람들(대다수가 성인)만 이 참사에서 살아남았다.




세월호 참사, 씨랜드 화재의 공통점. 바로 인재다. 관련자들의 사리사욕으로 시스템에 결함이 생겼고, 그 결함들이 쌓이고 쌓이다 발생한 인재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아낀다는 이유로 건축물을 지을 때 자재를 빼먹는 등 부실공사를 일삼거나, 적재용량의 몇 배를 더 실어서 운반하는 등 불법행위를 자행한다. 이런 불법적인 행태에 대해선 숨기거나 허위로 관청에 신고하고, 허위 신고를 잡아낼 기관들은 탁상머리에 앉아서 현황조사는 하지도 않은 채 허가를 내준다. 이런 시스템적 결함들이 쌓이고 쌓여 대형 참사라는 참담한 결과를 불러온다. 만약 저 시스템 안에서 단 한명이라도 올바른 사고로 악순환을 끊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참사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시스템 결함으로 인한 인재는 매년 지속되고 있다. 오송지하차도 참사가 그랬고, 이태원 참사가 그랬으며, 각종 건설현장에서 일어나는 산재사망사건들이 그렇다.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발생된다는 건, 아직 이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정말 이런 시스템 결함으로 인한 죽음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우리는 사실 얼마나 위험에 가까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든 우리를 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세네카가 말했다.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무엇이 위험하고 무엇을 고쳐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는 사인 없이 죽어간 2만 8천 명 속에 있다. 우리 옆에서 조용히 사라져간 사람들, 죽어간 사람들 속에 우리 사회의 불완전함이 있다. p 047



부검을 하면서 언제나 결과에 대한 처벌과 책임에만 몰두하는 게 답답했다. ‘그 전에 원인을 먼저 파악하고 제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나’. ‘어디선가는 여전히 삐걱대는 시스템 속에서 누군가가 또 죽음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예방법의학을 만들자고 주장헀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길목에 작은 걸림돌 하나라도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p 103



도덕적 선택의 아이러니에 놓였을 때 우리는 칸트의 정언명력을 떠올려야 한다. 칸트는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를 통하여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행동하라”라고 말했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서 과연 모든 사람이 선의의 거짓말을 허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사회의 신뢰가 붕괴되고 말 것이다.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이 반드시 선한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p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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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을 딛고 일어선 거장들의 실패학 수업
발검무적 지음 / 파람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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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은 으레 성공담을 읽는다. 하지만 그래선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성공하기 위해선 성공담이 아닌, 실패담을 읽어야 한다. 


사실 성공한 사람들의 일면을 보면 성공하기 직전까지 수두룩한 실패를 맞보았다. 수두룩한 실패를 겪고, 좌절과 고난을 겪으며 그들은 무언가를 얻고 또 깨우쳤다. 그리하여 결국엔 성공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성공하고자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면은 보지 못하고, 그저 ‘무엇을’ 해서 성공했는지만을 쫓는다. 그런 행동이야말로 실패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늘 소개하는 인문학책 『좌절을 딛고 일어선 거장들의 실패학 수업』은 말그대로 유명 인사들의 실패담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명인사는 어떠한 분야에서 뚜렷한 획을 그은 사람들을 말한다. 예컨대 당대에는 이해받지 못했으나 사후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축가가 된 ‘가우디’라던가, 남아공의 흑백갈등을 봉합하고 모든 인종의 존경을 받는 ‘넬슨 만델라’같은 사람들 말이다.


1. 차별의 세상을 울려버린 영혼의 목소리, 빌리 홀리데이



1915년 미국 슬럼가에서 태어난 한 흑인 소녀. 아버지는 유랑악단, 어머니는 창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딸을 버리고 떠났다. 외가에 맡겨진 어린 소녀는 돈 벌이에 나서야 했다. 열 살 때 일하러 간 집에서 40대 백인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는데, 경찰은 오히려 소녀를 불량 소녀라며 감호소에 집어넣었다. 흑인이었기 때문에. 감호소에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흑인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 누구도 어린 흑인 소녀를 지켜주지 않았다. 



이후 그녀의 삶은 다른 흑인 여성들과 비슷했다. 백인의 집에서 하녀로 살다가, 대공황 속에서 슬럼가 속 창녀로 살아가는 것. 흑인 소녀 일리노어 페이건은 그런 가혹한 삶을 살았다.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건 댄서로 취직하고자 찾았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면서였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애 전율을 느꼈고, 그녀의 노래에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그녀는 ‘빌리 홀리데이’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누구나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듣고 열광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대 위에 한정되었다. 그녀가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은 언제나 돈을 목적으로, 흑심이 가득한 사람들 뿐이었다. 빌리는 그런 사람들을 가려낼 수 없었다. 살면서 제대로 사랑받아온 적이 없고, 앞서 말했듯 가혹하고 각박한 현실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 세계 재즈 역사에서 ‘빌리 홀리데이’라는 그 이름을 빛냈지만, 정작 그 속에 그녀 자신은 없었다.



그녀가 살아오며 배운 선택의 범위는 그녀가 보고 듣고 배운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어려서부터 사창가에서 자라며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고민할 겨를조차 없이 치이며 살아온 흑인 소녀에게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다르지 않은가? 시대는 변했고, 당신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도 아니고, 시대가 당신의 인종을 차별하며 당신이 무언가를 할 수 없게 가로막고 있지도 않지 않은가? 그럼에도 세상의 불행을 혼자서 짊어진 듯 좌절하고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 빛이 쏟아지는 곳으로 나오길 꺼린다면, 그것은 결국 스스로가 자초한 파멸이고 인생이 고작 그것밖에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p 089






2. 비관 속에서 피어난 희망의 판타지, 미야자키 하야오


태평양전쟁 시기에 태어난 미야자키 하야오. 그의 집안은 군용기 부품 생산 공장을 운영했다. 태평양 전쟁당시 카미카게 작전에 이용된 전투기 ‘제로센’ 부품도 미야자기 공장에서 생산했다. 이런 환경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매우 부유하게 자랐다. 군용기를 생산하기에 자연스레 그의 집안에는 일본제국 군인들이 자주 다녀가곤 했다. 이러한 유년시절는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복합적인 삶의 가치관으로 남는다.



집안이 군용기 부품 생산공장을 운영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비행과 비행기의 날개 및 밀리터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반해 군용기 부품 생산 때문에 수많은 제국주의 군인들을 보고,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꼈으며, 이는 그를 뼛속까지 반전주의자로 살게했다. 서로 모순되는 가치관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지금의 미야자키 하야오를 만든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그가 설립한 ‘지브리 애니메이션’ 작품 속에서 자주 나타난다.


이토록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낸 미야자키 였지만, 성인이 된 후 애니메이션 제작자의 길로 들어서면서 늘 재정난에 시달렸다. 3억엔의 제작비를 들였던 <칼리오스트로의 성>이 흥행에 참패하고, <리틀네모> 제작 준비를 하던 와중에 회사와 이견차이로 퇴하하였으며, 미야자키의 명작으로 알려진  <바람의계곡 나우시카>는 인력난, 기간압박, 계획된 엔딩 변경 등 여러 문제를 안고 태어난 작품이었다. 이후 미야자키는 <천공의 성 라퓨타>를 기획하며 ‘지브리 스튜디오’라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창립했다. 미야자키&지브리 신화의 시작이었다.


그는 생긴 그대로, 소심하고 소극적이며, 작품을 끝낼 때마다 은퇴하겠다고 징징거리는 성격으로 유명하다. 가난이 매일반이었던 전후 일본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만화가를 꿈꾼 소심한 그가, 실패를 거듭하며 밀리고 밀려 돈을 마련할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든 영화가 그를 지금의 대가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회사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지브리 스튜디오가 되었다. 그림체만 보더라도 그의 작품임을 알 수 있을 만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작업을 거의 혼자서 다 한다고 할 정도로 독특한 작업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은 그의 성격이 빚어낸 자업자득의 결과였다. p 189



성공하기 전 미야자키의 삶은 실패로 얼룩졌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아니, 좌절했지만 꾸준히 다시 일어섰다. 실패 속에서도 끊임없이 조그마한 성과를 달성해나가며 경험치를 쌓았다. 실패를 통해 쌓인 경험치는 그의 자산이 되어, 그가 설립한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빛을 발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설 미야자키 하야오&지브리 스튜디오의 성공은 수많은 실패가 거름이되어 탄생했다. 






저자는 유명인사들의 실패담을 핑계삼아 말한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당신은 최소한 배는 곯지 않고, 학교에서 기본교육도 받았으며, 총알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마냥 죽음을 눈 앞에 둔건 아니지 않느냐고. 책 속에 있는 인물들은 하루벌어 하루 먹을 수 있었고, 기본교육은 언감생심이었으며, 죽음을 넘나드는 전쟁터에서도 살아왔다고. 이들처럼 생존의 기로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벌써부터 좌절하고 모든 의지를 내려느냐고. 너는 충분히 할수 있는데 왜 벌써 포기하느냐고. 


지금 당장 현실의 벽에 부딪혀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그 모든 것이 인생의 자양분이 될지니. 모두가 조금 덜 아파하고, 딛고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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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 일본의 근대를 이끌다 살림지식총서 583
방광석 지음 / 살림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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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절대 잊어서 안되는 날이 있다. 날짜로 말할 것 같으면 8월 15일과 8월 29일. 15일 광복절은 국경일이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반면에 29일은 생소한 사람이 많다. 그것도 아주 많이. 왜그럴까? 대략 백년하고도 15년 전 8월 29일, 그 날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제일 치욕스런 날이었다. 그렇기에 공교육에서도 굳이 날짜를 부각시키지 않았고, 정부 차원에서도 29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1910년 8월 29일과 1945년 8월 15일은 일제강점기 시작과 끝이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 한일병합 조약이 성립되며 대한제국이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고종을 비롯한 조선왕실, 친일고관대작들은 나라를 건네주는 대가로, 자신들의 안위와 재산을 보장받았다. 대한제국 백성들이 어떻게되든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대한제국에 속했던 모든 사람들은 일본제국 사람이 되었다. 지도에서 대한제국(또는 조선)은 지워졌다. 


그렇게 지난한 시간이 지났다. 35년의 시간동안 후손들에게만큼은 우리나라, 우리말, 우리문화를 전해주고자 했던 조상들은 자신의 생명을 받쳐 독립을 이루어냈다. 그렇게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일궈낸 독립이다. 문득 몇 일전 독립기념관장의 개똥같은 광복절 연설이 떠오른다. 저런 인간이 독립기념관장이라니. 정말 윤석열 정부 때 임명된 인간들은 제대로된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1도 없다.


자, 이제 생각해보자. 앞으로도 지금처럼 8월 29일에 의미부여를 하지않고, 아무날도 아닌 것처럼 가는게 맞을까? 그저 8월 15일 광복절만 가르치고 8월 29일은 그저 달력에 있는 어느날 처럼 취급하는게 맞을까? 지금까지 8월 29일의 중요성을 감춰왔기에, 앞서 말한 독립기념관장 같은 왜곡된 역사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아닐까?


​물론 8월 29일이 우리 역사상 제일 치욕적인 날이기에 숨기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오죽하면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이라고 하여 ‘경술국치’라 부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아야한다. 언제, 어떻게, 왜 나라를 빼앗겨야만 했는지를. 그래야 나라를 되찾기위해 모든 것을 바친 조상들을 제대로 기릴 수 있다. 그 뿐인가. 왜 빼앗겼는지 알아야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다. 지난 날의 잘못을 반성하여, 동일한 잘못을 하지 않게 경계하는 것. 바로 ‘징비’다. 여담이지만, 서애 선생이 ‘징비록’을 쓴 이유를 이 땅의 후손들은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보여서 슬프기 그지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리뷰하는 역사책은 『이토 히로부미』는 경술국치가 어떻게, 왜 발생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책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식민통치하기 위한 기구인 ‘통감부’의 초대 통감이자, 경술국치를 설계한 자이며, 안중근 의사가 의거 당시 사살한 조선 침략의 원흉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농민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가 조슈번 무사집안의 양자로 들어가며 무사 신분을 얻는다. 조슈번 무사가 된 이토는, 조슈번에서 유명한 학당을 찾아간다. 요시다 쇼인이 운영하는 쇼카손주쿠다. 그렇게 이토는 요시다 쇼인 제자가 되었다. 덧붙이자면 쇼카손주쿠에서 요시다쇼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훗날 일본의 근대화혁명인 메이지유신을 주도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요시다 쇼인이 이토에 대해 남긴 평가다. 요시다는 이토를 보며 ‘평범한 학생’라고 평가했다. 이토가 훗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고, 메이지 정부의 초대 총리가 되며, 한국을 침략하기 위한 수많은 정책에 깊숙히 관여하고, 결국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를 이끌어내는 구심점에 있었다는 점을 보았을 때 매우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왕정보고’ 이후 이토가 견지해온 ‘천황친정’은 대외적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정치이념일 뿐 실제 정치주체로서 천황의 ‘친정’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천황의 능동적인 정치관여를 제도화하려 했던 천황친정운동도 이토 등 정부 수퇴에 의해 결국 좌절되었다. 입헌체가 수립되기 이전의 근대 태정관제는 전제군주제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천황은 권위의 원천으로만 기능하고 실제의 정치운영은 법치주의적 원칙 아래 번벌 관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p 020


1876년 9월 ‘점차입헌정체 조직’의 취지에 따라 원로원에 ‘국헌’ 초안의 기초를 명하는 칙어가 내려져 10월부터 1880년 7월에 걸쳐 세 차례의 초안이 작성되었다. 유럽 각국의 헌법을 참고로 장기간에 걸친 조사 끝에 「국헌안」이 제출되었지만 내각에서 채택되지는 못했다. 원로원 「국헌안」은 영국식 입헌정체 구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p 021



원로원의 「국헌안」은 여러차례 부침의 결과 결국 채택되지는 않았았지만, 이토를 비롯한 여러 관료들은 ‘입헌제’ 필요성 자체는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메이지 정부의 향후 방침은 ‘입헌제 수립’ 이라는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다. 그렇다면 이토가 「국헌안」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헌안」 속 정치 주체가 내각이 아닌 의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는 군주와 의회 권한을 제한하고, 내각 즉 관료 중심인 입헌제를 고수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기위해, 직접 유럽 여러국가를 시찰하며 각국의 입헌제를 조사 및 연구했다.


이후 이토는 확신한다. 일본이 유럽 강국의 입헌제를 표방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대신 천황제를 중심으로 기존의 국가기구를 입헌적으로 바꾸면 입헌체제 수립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이 과정에서 이토 리더쉽이 부각되었고, 그렇게 정권의 지도자로써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토는 입헌정치의 상대화에 의해 헌법에서 행정으로 관심을 옮겨 “설령 아무리 좋은 헌법을 제정하고 좋은 의회를 개설하더라도 행정이 좋지 못하면 성과를 거둘수 없다”고 말하며, 행정조직 정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행정’의 강조는 이토의 일관된 국가기구개혁론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생각이었다. p 046



이후 이토는 궁중개혁을 비롯해 국가기구개혁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토가 헌법제정에 앞서 먼저 기구개혁에 나선 것은 유럽 체류 중에 슈타인의 가르침을 받아 헌법제정과 국회개설 전에 “제가(帝家)의 법, 정부의 조직 및 입법주 조직”을 확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먼저 재상의 직권과 책임, 관청의 구성과 관리의 규칙, 시험 방법 등 ‘행정’의 조직과 규칙을 확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토가 궁중개혁, 내각제도의 개혁을 단행하는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이 입헌제 시행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p 048




이토는 유럽 시찰에서 귀족의 정치적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하지만 기존 일본 전통 귀족들로는 입헌제 속 역할을 부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여 “오늘날 사족과 평민 공로자를 무식한 화족 및에 두면 안된다.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면 아직 공로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라고 말하며, 새로운 작위제도를 만들었다. 그렇게 일본에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5단계 작위체계가 생겼고, 개인의 공로에 따라 작위가 부여되었다. 



또한 천황제 시절의 3대신(태정,좌,우)체제를 철폐하고 관제개혁을 통하여, 책임 내각제도를 수립했다. 이러한 이토의 개혁은 매우 급진적이어서 구체제 관료들과 귀족들에게 강한 반발을 불러왔으나, 이토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설득하며 밀어부쳤다. 시대가 이미 바뀌었기에, 일본도 흐름에 따라 바뀌지 않으면 결국엔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토가 자국을 위해 입헌제를 고심하고, 헌법을 연구하며, 입헌제를 실시하는 유럽 여러나라를 시찰하며 공부하는 동안 우리나라는 무엇을 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일본과 조선이 극하게 대비된다.



조선의 임금 고종은 전제군주인 ‘황제’가 되고자 했다. 세계사적 흐름을 완벽하게 역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종은 근대국가이자 전제군주국가인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물론 일본도 ‘일왕’이라는 군주가 있었으니 비슷하다고 우길 지도 모르지만, 놀랍게도 단 1도 같은게 없었다. 



군주가 있을 지언정 실질적 정치적 주체는 관료이며, 수많은 연구와 시행착오 끝에 제정된 헌법 아래 정치를 한 일본제국과 오로지 고종의 입맛에 따라 졸속 제정된 헌법과 고종의 입맛에 따라 널뛰는 정치를 한 대한제국. 이 확연한 차이야말로 한반도와 일본을 피지배국과 지배국으로 갈라놓는 제일 큰 원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고종이 근대국가인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유은 오로지 황제 자신을 위함이었다. 자신의 부와 명예, 안위를 유지하기위해서. 




헌법은 매우 중대한 것으로 황실의 흥망과 큰 관계가 있으며 이를 잘못해 백년의 우환을 초래해서는 안된다. 자신은 적어도 사심을 개입하지 않고 제실과 국가를 위한 것만을 생각하며 헌법을 기초했다. p 068



동양에 있어 일본이 처므으로 입헌정치를 채용하게 되었는데, 유럽 각국에서 1,000여 년간의 전통이 있어 인민히 입헌정치에 익숙한 것과는 달리 전혀 새롭게 만드는 것으로 국가에 대해 이익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헌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서는 먼저 일본의 기축을 구해야만 한다. 기축이 없이 정치를 인민의 망의에 맡겨 국가를 폐망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유럽에 있어서는 입헌정치의 전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가 깊이 사람들 마음에 침투하여 국가의 기축을 이루고 있는데 일본에 있어서는 종교의 힘이 미약하여 쓸모가 없다. 일본에 있어 기축이라고 말 만한 것은 오직 황실 뿐이다. 따라서 이 헌법초안에 있어서는 군권을 존중하고 이것을 기축으로 삼아 훼손돼지 않도록 매우 주의했다. p 069



메이지헌법은 이토 등 관료가 주도해 기존 번벌 지배구조를 보장하기 위해 군주제와 입헌제를 교묘하게 결합한 것이다. 위와 같은 강대한 천황대권이 헌법상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 정치과정에서 천황대권을 행사한 것은 이토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메이지유신 이래 정권을 잡아온 원로들이었다. p 076



위에서처럼 이토는 ‘황실’을 중심축으로 삼되 입헌제의 원칙을 지켰고, 실제로 예산에 부여하는 입법권 등은 순수한 입헌제 원칙을 적용했다. 그렇게 1889년 2월 11일 대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되었다. 공포된 제국헌법은 위에서 아래로의 개혁 연장선이었으며, 기존의 군주주권을 유지하는 형태였기에 혼란을 잠재우며 국내 안정을 꾀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여기까지가 일본에서 바라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다. 나라를 근대화시키고, 헌법을 제정하며, 일본 양원제 확립에 기여한 사람. 일본인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위인이다. 어디까지나 일본인에게만.






우리는 알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이토는 일본 내부적으로 훌륭한 정치가였다. 이렇게 훌륭한 정치가들은 하나같이 내부에 문제가 생겼을 땐, 외부로 눈을 돌리게 한다. 정치가 이토도 이 이치를 명확하게 꿰뚫고 있었고, 실제로 내부 정치 위기 탈피를 위해 외부에 있는 ‘조선’을 이용했다.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게 해준 것은 대외문제였다. 조선에서 발발한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해 청일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제2차 이토 내각은 국내의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 청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고 하였으나 요동반도를 중국에게 돌려주라는 독일,프랑스,러시아 3국 간섭을 수용하고 일본인이 민왕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으로 인해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것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 확장을 꾀해온 일본의 조선정책이 일시적으로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p 085



이토가 한국침략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은 러일전쟁(1904~1905년) 이후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2월 21일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해 한국에 대한 ‘보호통치’를 시작했다.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는 구미 열강의 승인이 그 배경에 있었다. 미국은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영국은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조인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p 091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이토는 이를 계기로 한국지배 체제를 더욱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토 통감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킴과 아울러 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고 통감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정미7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정부는 순차적으로 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고 병합을 위한 기반을 닦는 정책을 취했으며, 그러한 과정을 거쳐 정부의 방침으로 한국병합을 결정한 것은 1909년에 들어서였다. p 092



정미7조약, 군대해산 등은 조선 내에서 경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그로 인해 전국적으로 항일의병 활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에 이토는 통감직을 사임하고, 극동문제 논의를 위해 러시아로 가던 중 하얼빈에서 독립운동가 안중근에게 사살된다. 이토가 안중근에게 사살된지 10개월 만에 일본은 한국을 직접 식민지로 삼았으니, 그 날이 바로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이다.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적 치욕이라 하여 #경술국치 라고도 한다.



문제는 이 이후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병합에 소극적이었는데, 이토라는 큰 장애물이 사라지자 급하게 병합이 된게 아니라는 의견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토가 오히려 조선을 보호하였고, 오히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하였기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들어갔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궤변이다. 



이토는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한 정책을 차근차근 펼쳐나갔고, 이토가 통감직을 사임했을 직후에는 이미 병합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무엇보다 이토는 정한론(정확히는 해외팽창 정책)을 주창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다. 이토 히로부미 뿐만 아니라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등 메이지 정부 요인들 대다수가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기에, 그들이 자국 내 정치 안정화를 끝난 뒤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는 건 사실상 정해진 수순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여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절대 된 게 아니다. 이토는 처음부터 한반도를 식민지 삼기 위해 설계했던 사람이었고, 설계에 따라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가 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진행하였으며, 준비가 완료된 뒤 실제 식민지배 도장을 찍는 날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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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여우사냥
권영석 지음 / 파람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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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하는 역사소설 『작전명 여우사냥』은 일제가 민비를 암살한 사건, 을미사변에 대한 소설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쓰신 임진택 연출가님 말씀처럼 읽는 내내, 꼭 2025년이 1895년의 옷을 입은 채 이야기가 진행되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님은 이런 시대상황을 고려하여, ‘을미사변’이라는 주제를 채택하고 이렇게 소설을 쓴게 아닐까?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면, 이렇게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인 을미사변을 주제로한 소설이기에 당연히 실존인물들이 대거 나온다. 하지만 소설을 끌고 가는건, 민비 호위대장을 맡은 가상인물 ‘이명재 ’다. 이 인물은 동시간대에 살고 있는 개화파 성향을 다분히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덕분에 가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실존 인물이었던 것마냥 현실성이 돋보이는 캐릭터다. 또한 실제 사건의 흐름 속에 비어있는 공간을 이명재를 끼워넣음으로서, 소설로나마 비어있는 퍼즐을 맞추며 완벽하게 만들었다.




이명재는 사실 ‘친일’, ‘친러’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외교란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수단 아닌가. 어느 나라든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유길준과 중전 민씨가 말하는 ‘친일’과 ‘친러’는 그런 외교가 아니었다. 자주성을 결여한 사대주의에 가까웠다. 그는 믿었다. 나라를 구하고 바꿔나가고자 한다면 백성과 함께 자주적인 힘으로 이뤄내야 한다고. p 084



제목인 『작전명 여우사냥』은 일제가 민비를 암살할 때 사용한 실제 작전명이다. 




을미사변에 대한 내 생각을 잠시 말해보면, 1895년 을미사변은 일본이 민비에게 준 ‘면죄부’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하고, 우리 조상들이 ‘조국’을 잃게한 일제. 그런 극악무도한 일제가 민비를 암살했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민비가 아닌 극악무도한 ‘일제’만 보일 수 밖에 없다. 고종과 민비에게는 이만한 면죄부가 또 어디있을까?



소설은 얼핏 보면 고종과 민비, 그 수족들의 부정부패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근데 조금 다르다. 읽으면서 미묘한 균열이 느껴졌다. 저자는 모든 탐욕과 죄악을 민비에게 부여하고, 고종은 그저 민비의 말을 거스를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만 그렸기 때문이다. 민비가 쎈 여성이었다한들, 고종의 탐욕 역시 민비에 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죄를 ‘민비’에 떠넘기고, 고종은 그저 ‘무능’이라는 단어 하나로 포장된 느낌이 참 별로였달까. 분명 고종과 민비는 공동정범인데, 소설 속 이미지는 민비가 주범이고 고종이 종범인 느낌이다.



굳이 추측하자면 고종과 민비를 통해, 2025년 내란을 주도한 윤석열과 그 뒤에 있었던 김건희를 떠올리게끔 하고자 의도한 소설적 장치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굳이 이미 폐기된 ‘무능한 고종’같은 이미지를 다시 가져올 필요가 있었을까. 비슷한 예로 고종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얼토당토한 이미지도 한때 유명했었다. 그나마 요즘은 고종의 탐욕과 망상으로 어떤 행보를 보여왔는지, 널리 알려져있어서 다행이랄까.



늘 강조해도 부족하지만, 고종과 민비 그리고 민씨척족들의 부정부패는 정말 끊임없었다. 이 소설 시작부터 언급되는 ‘진령군’도 그렇다. 고종과 민비가 무당 진령군에게 가져다 바친 국고가 얼마이며,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서양, 일본에 철도부설권 및 산림채굴권 등 각종 이권을 헐값에 팔아넘긴건 또 얼마인가. 동학군을 토벌하라고 지시한건 대체 누구란말인가. 



동학군을 몰아내기위해 창고에 있던 개틀링건을 꺼내어 사용하게 한 것도 고종이고, 동학군을 몰아내겠다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한것도 고종이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면, 청과 맺은 조약에 따라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는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동학군을 몰아내기 위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한 사람도 고종이다. 고종에게 동학군은 자신이 지켜야할 백성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역도 그이상 그 이하도 아니였다. 단연코 고종은 동학군을 토벌하려고 했지, 살리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중에선 고종이 동학군을 살리고자 묘사한 장면이 있다보니 어디까지를 소설적 허용으로 봐야할지 애매하다.



단연코 고종과 민비는 조선 백성 손으로 끌어냈어야 했고, 당연히 조선 백성 손에 처결되었어야 할 망국의 원흉이었다. 



‘어찌 일국의 왕비를 이토록 잔인하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분노가 치밀었다. 위쪽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마냥 슬퍼하고 있을 수많은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중전 민씨의 시신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중전의 머리가 지하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살리기 위해 팠던 지하통로가, 이제 시신을 옮기는 통로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p 273



그래서 더 화가 난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처단해야만 했던 부패한 민비를 일제가 암살했다는 사실이. 우리는 암살당한 왕비를 동정하는게 아니라, 부패한 왕비를 몰아낼 정당한 권리를 빼앗아 간 일제에 분노해아한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부패한 왕비라는 사실을 떠나서 타국의 왕비를 잔혹하게 죽인 일제에 분노하는 것까지, 딱 거기까지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은 을미사변에 대해, 오랜시간동안 앞서 말한 분노가 아니라, ‘암살당안 가련한 왕비’에 대한 동정 여론을 호소했다. 왜? 정당한 분노를 가질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민비의 악행은 숨기고 ‘일제’와 ‘잔인함’에 초첨을 맞춰, 민비를 그저 가련한 피해자로 만든 역대 정부의 영향이 컸다. 



그렇게 정당한 분노가 사라진 자리를 채운, 어줍잖은 동정심은 많은 부작용을 불러왔다. 대표적인게 바로 역사왜곡이다. ‘명성황후’ 하면 떠오르는 드라마 및 뮤지컬에서 만들어진 “내가! 조선에 국모다!!” 라고 말하는 그 이미지 말이다. 지금이야 여러 역사학자들을 통해 고종과 민비의 탐욕과 욕심에 찌든 행보가 많이 밝혀졌고, 공교육에서도 일면 다루고 있다는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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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하는 『일본어 명카피 필사노트』는 지식을 탐구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문장을 쓰기 위한 노트다. 여기서 함정 하나! 우리말을 쓰기 위한 필사노트가 아니다. ‘일본어’다. 일본 TV광고, 지면광고 등에서 흘러나왔던 카피문구다. 


아이 낳기 전만해도 나에게 있어서 일본어는 제 2의 모국어...비스무리한 언어였다. 꽤 오랫동안 일본성우 덕질로 인해 자연스럽게(?) 일본어 능력이 생겼으며, 역시나 아주 자연스럽게 일본어 공인 어학시험도 고득점! 여기에 기세를 더해 관광통역사 자격증까지 취득! 일본성우 덕질 자체는 학교 졸업과 함께 끝났지만, 일본어는 능력은 남았다보니 그 능력을 여기저기 써먹기도 솔찬히 써먹었다. 


본투비 역사더쿠라 한일고대사 관련 일본 원서도 쉽게 읽을 수 있었고(개꿀), 답사를 위한 일본 여행다닐 때도 편했다. 그뿐인가? 회사에서 일본 논문 번역도 몇 년을 했다(강제 재능기부, 육아휴직하며 해방!!). 맘먹고 일본어 공부를 한건 아니었지만, 늘상 집에서 TV를 틀면 우리나라 뉴스를 보거나, 또는 NHK 방송만 틀어놓다보니 진짜 나에게 있어서 일본어는 제 2의...모국어 비스므리한 뭐 그런 언어였다. 


근데 뭐 이것도 옛날이야기. 아이낳고 화면매체를 안보고, 일본 라디오를 안듣고, 일본을 안가고, 원서도 못읽고...그렇게 n년의 시간이 지나니, 내가 일본어를 할줄 아는건 맞나 싶은 생각이 막 들기 시작했다. 바로 이 타밍에 『일본어 명카피 필사노트』를 손에 쥐었다. 



보통 카피문구는 쉬운 문장으로 구성되어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리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건 당연지사.


어머 세상에! 놀랍게도 이정도 수준은 읽는데 하등 문제가 없었다. 세상에!! 폼 안죽었어!!!!!!!!!!!!!! 라고 하기엔 꽤 쉬운 일본어기긴 하지만...하하하. 읽다보니 기세도 오르고! 이참에 진짜 필사도 해보자 싶어서 수첩을 꺼내들었다. 


책 제목에 『필사노트』가 들어가는데 필사를 위한 수첩을 꺼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맞는 지적이다. 이 책에는 필사를 할 수 있는 지면이 매 페이지마다 있다. 하지만 난.... 책에 메모, 낙서, 끄적이기 기타등등을 절대 하지 않는 사람! 그렇기에 수첩을 꺼내어 필사했다.


일본어 읽기나 번역이 아닌, 일본어를 직접 써본적이 언제인가 생각해보니 세상에나! 7년전이다. 2018년에 관통사 실기 준비를 위해 모범답안 외우기 위해 미친듯이 쓰면서 외웠던 그 때! 그 때 이후로 처음써보는 일본어다. 뭐 그때나 지금이나 내 글씨체는 악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어 쓰는 것 자체에는 어색함이 없는거보니 아직 폼 안죽었나보다.




이렇게 된거 슬슬 일본어 기세좀 올려서 JPT나 다시봐볼까...싶은 생각이 드는건 내 욕심인가...으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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