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류성룡의 「징비록」. 이렇게 얇은 책인데, 이 책을 읽기까지 참으로 오래도 걸렸다. 누가 썼는지도 알고 그 내용도 잘 알고, 동명의 드라마도 본방사수 할 정도로 봤던 나였다. 하지만 책 만큼은 못읽겠다 싶었다. 아니, 동명의 드라마를 보기 전 까지는 읽어볼까 싶기도 했는데, 동명의 드라마를 보고 나서 더욱 읽을 자신이 없었다. 화면으로 봐도 그렇게 답답하고 울분이 터지는데, 문자로, 책으로 읽으면 정말 더욱 답답할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이 책을 한 장, 한 장 읽는 내내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고, 왜 이럴 수 밖에 없었는지 참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읽는 내내 도망가고, 또 도망가고, 또 도망가고. 저 밑 말단 병사부터 시작해서 중간 장수들, 하다 못해 왕까지 도망간다. 전쟁 시작 전부터 정세파악 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전쟁 시작 후에도 그랬고, 끝날 때 까지도 그랬다. 정말 진짜로... 이순신 장군님 아니었으면 분노해서 책을 집어던질 뻔.




징비록은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끝으로 그 내용이 끝난다. 그리고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다. 일본이나 청나라와는 달리, 조선에서 책이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기에. 징비를 하기 위해 집필한 책이었으나, 징비를 해야할 사람들은 이 책을 서가에 꽁꽁 숨겨두었던 거다.



개인적으로 임진왜란에 관련된 장소를 많이 찾아다녔다. 이순신 장군의 묘소나 사당, 원균의 묘, 신립장군의 묘, 탄금대, 문경새재, 진주성, 행주산성, 남원성, 의병장 김덕령 장군 묘소 등등 정말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도 찾아다녔다. 그 때마다 느낀거라곤 이 두 가지다. 못난 리더 한 명이 나라를 얼마나 망칠 수 있는지. 그리고 반복되는 아픈 역 사속에서 우리는 징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게 맞는지.



우리는 정말 징비를 하고 있는걸까?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 일을 기록한 것이다. 난이 발생하기 전의 일 또한 조금씩 기록했으니 이는 난의 처음부터 근본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오호라, 임진년의 화는 참담했으니, 수십 일 만에 한양·개성·평양의 세 도읍을 잃었고 온 국토는 무너져 내릴 정도였으니 임금께서 도읍을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나라를 얻었으니 이야말로 하늘의 뜻이요, 조종의 어짊이 깊은 덕분이었다. 백성들의 굳은 결의 또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그치지 않았고, 임금께서 사대하는 충성심이 천자를 감동시켜 여러 차례 출사했기 때문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해서 후에 환란이 없도록 조심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야말로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1586년,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자기 나라 임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다.

일설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본래 중국인이라고 한다. 일본까지 흘러 들어간 그는 나무장수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중략) 큰 공을 세워 대관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권력을 잡은 그가 결국 겐지 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중략) 겐지 왕국이 망한 지 10년, 그동안 여러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드나들었지만 통제를 워낙 엄격히 한 까닭에 그들 사정은 전해지지 않았고, 당연히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의 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야스히로를 죽인 히데요시는 다시 소 요시토시를 사신으로 보내고 우리에게도 사신을 보낼 것을 요청했다.

1590년 3월, 드디어 우리 사신 일행이 요시토시와 함께 일본을 향해 떠났다. 요시토시는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공작 두 마리와 조총, 창, 칼 등을 임금께 바쳤다. 임금께서는 공작새는 날려보내라 하시고, 조총은 군기시에 보관토록 하셨다. 우리나라에 조총이 들어오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1591년 봄, 일본에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 일행이 야나가와 시게노부, 겐소 등과 함께 돌아왔다.

그때부터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국경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남부 지방 삼도와 방어를 맡도록 했는데 (중략) 무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를 축조하도록 했다. 그 가운데서도 경상도에는 특히 많은 성을 쌓고 영천·청도·삼가·대구·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상주 등지에는 병영까지 신축하거나 고치도록 했다.

당시 나라는 평화로웠다. 조정과 백성 모두가 편안하던 까닭에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와 동년배인 전 전적 이로도 내게 글을 보내왔다.

‘이 태평한 시대에 성을 쌓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이오? 삼가 지방만 보더라도 앞에 정진 나루터가 가로막고 이소. 어떻게 왜적이 그곳을 뛰어넘는단 말이오. 그런데도 무조건 성을 쌓는다고 백성을 괴롭히니 참으로 답답하오’

-상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순변사 이일은 충주로 도망갔다.

이일은 상주에 하루를 머무르면서 창고의 곡식을 꺼내 백성들을 위로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수백 명으로 불어났따. 순식간에 대오를 갖춘 군대가 조직되었다. 그렇지만 모두 전투 경험이 없는 초보자에 불과했다. 그때 적군은 이미 선산에 이르렀다. 저녁 무렵 개령 사람 하나가 와서 적들이 코 앞에 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지 못한 이일이 그를 목 베려 했다. 민심을 현혹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잠시 동안만 나를 가둬 두고 기다려 보십시오. 내일 아침에도 적이 이곳에 오지 않으면 그때 죽이십시오."



당시 적들은 장천에 머무르고 있엇는데, 그곳은 상주에서 겨우 20리 떨어진 곳이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이일이 개령 사람을 옥에서 끌어내 목을 베고 말았다.

(중략) 잠시 후 몇 사람이 숲속에서 나와 서성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 모습을 본 병사들은 적이 엿보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으나 아침 일이 머리에 떠올라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중략) 곧이어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따. 10여자루 조총에서 탄환이 불을 뿜는데 맞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미 늦었다고 깨달은 이일은 말머리를 급히 돌려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4월 30일 새벽,

임금께서 서쪽을 향해 출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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