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니스 - 잠재력을 깨우는 단 하나의 열쇠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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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스틸니스」는 무려 자기계발서다. 독서편식을 고치려 여러 장르의 책을 읽었던 나지만, 그럼에도 유일하게 손을 대지 않았던 장르가 바로 자기계발서다. 내가 생각하던 자기계발서는 도덕책에 나오는, 언제나 입바른 말만했다. 적어도 시중에 나온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들은 그랬다. 그런 책들만 보면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들만 있어야 하는데, 현실을 보면 타인의 눈에 ‘루저’로 비치는 사람들이 정말 많지않나? 그래서 더욱 자기계발서는 읽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스틸니스」를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이 자기계발서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철학, 고전 해설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지리상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나 성격이 얼마나 다른지와 무관하게 거의 모든 고대 철학은 완벽하게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기원전 500년에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든, 그로부터 100년뒤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든,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흐른 뒤 에피쿠로스의 정원에 앉아 있던 제자든지 간에 하나같이 침착함과 차분함, 평온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가르침을 듣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우뻬카(upekkha)라고 하고 이슬람교에서는 아슬라마(aslama)라고 부른다. 히브리서에서는 히쉬타부트(hishtavut)라고 한다. 힌두교 3대 경전으로 꼽히는 《바가바드 기타》의 2장은 전사 아르주나에 관한 서사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로 사마트밤(samatvam), 즉 ‘마음의 평정 또는 한결같은 평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스에서는 에우티미아(euthtmia), 헤시키아(hesychia)라고 하고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일컫는다. 기독교에서는 아이콰니미타스(aequanimitas)라고 한다. 그리고 영어로는 스틸니스(stillness). P 017




혼자 있는 시간, 집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다. 혹은 침대에 누워본다. 분명 나 혼자 있고 TV가 켜있지도 않으며, 라디오를 틀지도 않았다. 분명 내가 있는 우리집은 조용해야하는데, 이상하게 조용하지가 않다. 창 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의 빵빵거리는 소음이 주기적으로 들려오고, 저 멀리서 아파트 공사장 소리도 들려온다. 분명 나는 조용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나와는 상관없이 외부 소음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온다. 정말 조용하게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도, 주변의 생활소음이 이를 가만두지 않는다. 현대를 살고 있는 이상, 우리는 소음에 휘둘리며, 소음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렇게 자의든 타의든 나를 괴롭히는 모든 상황에서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상황은 현대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시작되어왔다. 우리나라 문화로 치면 고대부터 우리가 잘 아는 가까운 역사까지, 많은 조상들이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수련을 했다. 제일 쉬운 예가 바로 ‘선비’들이다. 공맹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군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 선비들이, 심지어 조선의 왕까지도 되고자 한 ‘군자’란, 유교에서 도덕적으로 완성된 성인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말로 하면, 옳고 그름을 정확히 알고, 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군자’가 되고자 한 사람은 유교에만 있었던게 아니라, 불교에도 있었고, 기독교에도 있었으며, 힌두교에도 있었다. 그를 칭하는 말은 각기 달랐지만,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군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그 대표적인 방법이 내 마음에 평화를 가지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즉 고요한 마음가짐에서 얻어지는 마음의 평정이랄까?


그게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고요, 즉 스틸니스 이다.



 이 책은 동/서양의 역사, 철학, 고전을 망라하며 스틸니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과거를 살았던 수 많은 인물중, 스틸니스를 끌어냄으로 나 자신을 찾고, 그들이 스틸니스를 끌어냄으로써 어떠한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이야기한다. 





고요는 외부의 방해에 취약하므로 세상의 소란함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소음에, 우리 영혼과 육체의 소음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찰나의 고요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가장 힘든 상황에서조차 일관성 있게 끌어어낼 수 있는 집중과 지혜다. P 113



일상에서 마주치는 갖가지 스트레스와 곤경은 우리를 쓰러뜨릴 수 있다.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 보면 우리는 하나를 닫으면 또 하나 열리는 온갖 정보 속에 사로 잡힌다. 거기에 앉아 그 모든 것을 흡수해야 할까? P243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수 많은 소음과, 수 많은 정보의 범람 속에 있다. 조용히 있어도 어딘가에서 소음이 들려오고, 정보를 취하고 싶지 않아도 tv만 틀면, 핸드폰만 보면 원하든 원치않든 수 많은 정보를 접한다. 심지어 그 정보들 중에는 가짜뉴스도 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나폴레옹의 사례를 보자.​




나폴레옹은 우편물이 밀리는 상황을 즐겼다. 그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화나게 할 수도 있고 중요한 가십거리를 놓치는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다. 사소한 문제들은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실시간으로 뉴스를 받아들일 게 아니라 나폴레옹처럼 여유를 갖는 태도, 유행에 한두 계절 쯤 뒤쳐지는 태도, 내 삶을 받은편지함의 노예로 만들지 않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P 056  




나폴레옹은 밀려오는 편지들을 곧이 곧대로 읽지 않았다. 물론 정말 위급한 편지는, 특히 한 밤중에 자기가 자고 있을 때 도착한 위급한 편지는 자고 있더라도 본인을 꼭 깨우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편지를 선별했다. 요즘말로 하면 정보를 선별한 것이다. 밀려오는 편지들은 몇일 뒤에 열어보면, 대게 상황 종료된 후이니 굳이 본인이 볼 필요가 없는게 대부분이라 했다. 나폴레옹은 범람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본인 나름대로의 선별장치를 두고 있었다. 수 많은 정보에 휘둘리는 현대인이 한번 쯤은 곱씹어 볼 일화다. 



그렇다고 나폴레옹 처럼 극단적으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나름대로의 선별장치를 마련한다면, 내 자신이 그러한 정보 속에서 휘둘릴 일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 뿐만인가? 수 많은 정보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내면의 목소리는 듣기는 커녕 피곤함뿐인 현대인의 삶이었다. 하지만 정보를 선별하게 되면, 그 만큼 에너지가 비축되고, 비축된 에너지를 내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나를 위해, 진정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자. 그리하면 알게 될 것이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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