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 역사를 따라서 한국을 찾아 걷다
김홍수 지음 / 북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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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인터넷 서점에서 역사분야 신간 도서를 확인할 때가 있다. 그러다 제목이 끌리면 바로 구입! 30%는 선택 실패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높은 확율로 맘에 드는 책을 구입한다. 이 책 역시 알라딘에서 신간 목록을 보던 중 한일관계사 관련 분야라서 고민 없이 바로 구매를 한 책이다.

 

그리도 다행히도 선택 성공 !!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은 양의 내용이 있었다. 저자가 정말 많은 곳을 다니며 발품 팔아서 찾아낸 수 많은 도래인의 흔적들은 나를 규슈로 오라고 손짓 하고 있었다. 규슈 지역은 얼마 전 후쿠오카를 갔던 게 처음이라, 아직 내가 가본 곳은 많지 않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이 책이 차후에 있을 규슈여행의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이 책의 분야가 워낙... 공부를 해야하는 느낌의 책이 다 보니, 읽으면서도 중간 중간 메모를 하고, 내 생각을 적어서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다 읽고 다니 책에 붙인 포스트잇이 대체 몇개인가.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교토/오사카 지역에 대해서도 책을 내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난 그래도 나름대로 교토지역의 도래인 흔적 찾기는 나름 열씸히 해왔으니까!

 

 

1- 일본 신화의 땅, 규슈

규슈는 신화의 땅이다.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의 건국신화는 규슈에서 시작된다. 특히 천손강림신화와 히무카 3대 신화는 규슈 땅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는 고사기요약본이 있어서 그나마 일본 신화 쪽은 익숙한데, 일본서기는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서.. .. 일본 가면 서점에 들러서 꼭 사와야지 하면서, 맨날 까먹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온다 ㅜㅜ.

 

히무카 3대 신화의 경우 올 초에 대마도 와타즈미 신사를 방문하면서 확실히 머릿속에 각인을 시켰다. 특히 히무카 3대 중 남자쪽은 두, 세가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어서 엄청나게 혼동이 왔었는데, 이번에 진짜 완벽하게 머릿속에 정리됬다.

 

신찬성씨록815년에 편찬한 고대 씨족의 계보서이다. 출신 별로 황별 335씨족, 신별 404씨족, 제번 326씨족, 그 외 117씨족으로 분류해 그들의 조상과 씨족명의 유래 등으로 1,182씨족을 기록하고 있으며, 황별 씨족, 신별 씨족도 한반도와 많은 관련을 찾아볼 수 있으나, 도래인의 자손인 제번씨족 중 백제계가 104씨족, 고구려가 41씨족, 신라에 9씨족, 가야에 9씨족이 한반도를 뿌리로 하면서 일본 역사에 크게 기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P24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고사기의 저자 오노 야스마로는 도래계 씨족인 오노 호무치의 아들이라 한다. 1975년 전 까지만해도 오노야스마로 라는 사람이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도 확신이 없었으나, 1975년에 오노야스마로의 묘가 발견되면서 그가 실존인물 인 것이 밝혀졌다. 무엇보다 그 묘에는 41자의 글이 새겨진 동판도 발견되었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오노 호무치는 백제가 멸망하던 그 때, 백촌강 전투(백강전투) 대패 후 일본으로 후퇴하는 선박을 타고 넘어 왔다고 한다. 백촌강 전투는 나당연합군과 백제 부흥군 + 일본 지원군이 대 격돌했던 전투로,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무엇보다 일본은 백촌강 전투 패배로 인해 나당연합군이 바다 건너 넘어올 것을 대비해, 규슈 곳곳에 성벽까지 올렸을 정도니 뭐.

 

​「일본서기에는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스사노오가 맨 처음 다다른 곳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국에 내려와 소시모리 라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은 내가 있고 싶지 않다" 라고 하며,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가 이즈모의 도리죠미네로 갔다. 스사노오가 다카아마노하라로부터 내려왔다는 신라국의 소시모리는 우리말로 '소머리', 한자로는 '우두'라고 적는데 경남 합천에 가야산의 최고봉이 우두봉으로 이 곳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소시모리라고 추측되고 있다. 또 하나의 우두봉이 춘천 시내에 있는데 일제 시대 때 이 곳에 거대한 신사를 계획한 적도 있고 해서 이곳을 일본 역사의 근거지로 추정하는 연구도 있다. P24

 

교토 도래인 흔적을 찾으면서 알게된 우두봉. 그 때는 고구려 사신 이리지가 교토에서 야사카 신사를 창건할 때 고국에 있는 우두천왕을 모셨다는 이야기만 알았다. 고구려 사신인에 대체 왜 신라의 신 우두천왕을 모셔온 걸까 싶었는 데, 위에 내용을 읽고보니 뭔가 조금은 알 것 같다.

 

하늘의 최고신 자손인 니니기노미코토가 내려온 곳인 구리후루타케는 가야 신화에서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봉우리 이름, 구지촌봉을 일본어로 읽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니니기노미코토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자마자 처음 하는 말로 가라쿠니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가야의 건국신화와 일본의 건국신화는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P29

 

나도 콕 집고 싶었던 부분이다. 일본에는 생각보다 가야계 도래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고, 무엇보다 가야를 뜻하는 '가라'와 관련된 지명이 너무나 많다. 심지어 일본 정부의 주도로 만든 책 고사기, 일본서기에 저런식으로 적혀있다는 건, 당시 정부를 주도하던 세력이 한반도 도래인 세력이라고 밖에 생각할 길이 없으니.. ! 순간 잊었지만, 고사기를 쓴 사람은 백제계 도래인이었다..

 

이 외에도 일본 신사가 무엇인지, 섭사와 말사라던가 신사, 신궁, 대사 의 차이 등 여러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내가 일본 여행기를 쓰면서 종종 거론했던 부분이니 패쓰 !

 

2- 고대 일본 규슈로 가는 길에서 찾은 곳

삼국사기에 백제 무령왕에 대해 이름은 융 또는 사마로 되어있으나,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반면에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의 출생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백제의 개로왕은 왜나라로 가는 곤지에게 임신 중인 부인을 함께 동행시키면서 "나의 임신한 부인이 이미 산월이 됐으니 만일 도중에 출산하면 같은 배에 태워서 조속히 백제로 돌려보내시오"라고 하였다. 하지만 임신한 부인은 일본으로 가는 중에, 앞에서 살펴본 항로 안에 있는 이키섬을 지나 가라쯔로 들어가기 전 가카라시마에서 출산한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도군(島君) 이라 했다. 그러자 곤지는 배 한척을 마련해 도군을 그 어머니와 같이 백제로 돌려보냈다.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의 발굴품 중 지석에 기록된 이와 같은 내용 중 일부가 일본서기의 기로고가 일치해서 큰 반향을 부르기도 했다. P66

 

이 전 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무령왕이라는 인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는 채로 있었다. 반면 일본 가카라시마에서는 사마왕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계속 구전되어 왔다. 그러다 국내 세기의 발굴이자, 국내 최악의 발굴이라 손 꼽히는 무령왕릉 발굴 때 나온 지석으로 인해, 일본의 한 섬에서 구전되오던 전설이 실제였고, 우리가 등한시 하던 일본서기에 있던 기록이 사실이라는 게 밝혀졌다. 이 사실을 보고 깨달은 점이 있다. 일본서기는 분명 정부 주도로 기록한 사서이기 때문에 과장된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과장된 부분을 잘 덜어 내기만 하면 그 속에 있는 역사적 사실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장된 부분을 덜어내는 과정이 매우 험난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 외에도 천일창으로 일컬어지는 신라계 도래인 아메노 히보코 이야기도 있다. 천일창의 이야기 역시도 텐만궁, 즉 스가와라 미치자네 관련 이야기를 하면서 몇번 언급했던 적도 있고 해서 역시 패스. 대략적으로 교토 키타노 텐만궁, 후쿠오카 다자이후 텐만궁 등의 제신인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겨면 천일창이 나온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이래저라 스가와라 미치자네가 도래계 후손이라는 것 만은 명확하다는 점!

 

3-한반도와 대륙의 외교 통로 후쿠오카 다자이후 주변 지역을 가다.

불과 3주 전? 후쿠오카를 갔다 왔었다. 후쿠오카에서 꼭 가고자 했던 장소가 있었는데, 그 곳이 바로 다자이후 였다. 정확히는 다자이후 미즈키 유적, 다자이후 정청유적, 다자이후 텐만궁 이 세 곳. 물론 쿠루쿠루 버스 투어를 결정하는 그 순간 이 계획은 바로 폐기 처리 되었다는게 함정이다. 그나마 쿠루쿠루 버스 투어에 다자이후 텐만궁이 있었기에 가는 길에, 버스안에서 미즈키 유적을 멀리서나마 보는 것으로 만족했더랬다.

 

6607월 신라, 당나라 연합군과 전투에서 백제는 멸망한다. 일본은 구원군을 보내기로 하고 사이메이 천황이 나라 지역에서 규슈까지 온다. 그러나 규슈에서 4개월 후 사이메이 천황은 사망한다. 그 이후 황태자인 중대형 황자(덴지천황)이 전군을 지휘한다. 9월에는 백제왕자 풍장이 백제로 돌아갈 때 5천 명의 병사를 호위해서 보내고, 663년에는 27,000여 명의 증원군이 파견된다. 그것에 대응해서 당나라도 7,000여 명의 증원군을 보낸다. 결국 8월 말 양국은 백촌강에서 충돌한다. 사서에는 4백여 척의 배가 불타고, 강은 피로 붉게 물들었으며 익사자가 너무 많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일본은 대패하고 백제 부흥은 완전히 실패했다. P102

 

664년 미즈키 유적은 백제 멸망 후 일본은 당나라와 신라의 공격에 대비해 다자이후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후쿠오카 평야와 쓰쿠시 평야에 걸쳐 가장 높은 장소에 토성을 쌓은 곳이다. 후쿠오카 시내에서 미즈키 쪽을 바라보면 왼쪽에 오노성이 있고 오른쪽에 기이성이 있다. 그 사이 가장 좁은 곳을 연결하여 흙으로 성을 쌓아 놓아 그 뒤쪽으로 침략하기에는 쉽지 않은 방어벽인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만들어져 1,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견고해 보인다. P95

 

미즈키 유적, 한자로는 수성(水城)이다. 백촌강 전투 대패 후 많은 백제 유민들이 일본 구원군과 함께 도망쳐 온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나당연합군이 너무 무서워서, 혹시라도 이 곳까지 쳐들어 올 까봐 백제식 산성을 쌓은 게 바로 수성이다. 실제로 보면 몽촌토성과도 흡사하다고 한다. 직접 가서 두 발로 밟지는 못했지만, 구글 로드맵으로 봤을 땐 흡사한 느낌도 들긴 했다.

 

다자이후 텐만궁 바로 옆에는 규슈 국립박물관이 있다. 일명 박물관 도장깨기를 하고 있는 나 로써는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인데, 쿠루쿠루 버스투어에서는 시간이 매우 부족했다. 딱 텐만궁을 슬쩍 둘러볼 정도의 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규슈 국립박물관은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이 곳에서 한일 고대사 관련한 서적을 많이 판매한다고 들어서, 정말 기대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런 서적들은 일반적인 서점에서는 많이 판매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결국 책을 사기 위해서라도 이 곳에 꼭 다시 와야만 한달까 ...하하하

 

이 책에는 위에 언급한 것 외에도 규슈 북부, 중부, 남부 전 지역에 남아 있는 여러 역사 유적지가 있다. 무타가타군 주변에는 대표적인 도래인 집단인 하타씨 집성촌이 있고, 일본 최초의 신사로 알려진 레이후 신사는 백제 성왕의 제3왕자: 임성태자와 연관이 있다. 특히 임성태자와 그 일행들이 터를 잡은 야마구치 현은 이후에 메이지 유신의 주 세력들을 탄생시켰고, 현재 일본의 총리인 아베마저 이 곳 출신이며 임성태자와 연관성이 있다는 등의 내용도 있다. 아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더 확실한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지만.... 무엇보다 진짜 그렇다고 해도, 아베 스스로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일본에서는 갓파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나 이곳 야스시로에는 시내 여기저기에 가라로 시작하는 지명이 눈에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갓파를 가랏파(加羅輩:가라배)라고도 한다. , 가라의 무리들,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들이 세월이 가면서 특징이 과장되어 상상의 동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P161

 

어쩌면 일리가 있는 추측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문구다. 워낙 가야와 관련된 지명이 일본 곳곳에 남아있기도 하고, 실제로 가야 도래인이 일본에서 많이 생활하기도 했으니. 위에서 언급은 안했지만 가야 김수로왕 탄생설화나 수로왕의 7왕자 이야기 등 일본과 연관이 있는 부분이 꽤 많으니 제발 이 부분을 누가 좀 시원하게 알려줬으면 ㅜㅜ..

 

! 또 놀라웠던 점 하나는 미야자키에서는 아직까지도 백제왕족과 관련된 마츠리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곳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백제 왕족이 반란군에 쫓기다가 히무카국이 있는 미야자키 해변이 이르렀다고 한다. 백제의 정가왕과 차남 화지왕은 미야자키 휴가시 가네가하마 해변으로 들어와 난고손에 정착했고, 정가왕의 부인과 장남 복지왕이 미야자키 가구리우라 해변으로 들어와 기죠초에 정착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란군에 의해 결국 모두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

 

물론 이 이야기는 두 마을에서 전설로 내려올 뿐이다. 일본의 사서나, 국내 사서에는 없는 이야기 인 것이다. 저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후 일본 긴키지방으로 망명한 백제 왕족이, 일본 내에서 발생한 내란으로 화를 당한 상황이 이렇게 전설로 전해진 걸로 추측한다. 이유야 어쨌든 두 마을에서는 정가왕 일행과 장남인 복지왕 일행이 일년에 한번 씩 만날 수 있도록, 두 마을에서 합동으로 마츠리를 행하고 있었다. 아주 오랜세월동안, 지금까지도.

 

참고로 난고손은 정가왕을 제신으로 하는 미카도 신사가, 기조쵸는 복지왕을 제신으로 하는 히키신사가 주도한다.

 

정말 여러모로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된 책이다. 새로운 지식 습득이라는 것 보다, ! 이런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달까?

 

혹시라도 저자가 일본의 다른 지역을 답사하고 책을 발간한다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사서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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