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숙의 나라
안휘 지음 / 상상마당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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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역사소설은 이미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뒤 엎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음, 뭐라고 해야할까? 역사적 사실을 나무 기둥으로 한다면, 거기에 상상력을 담은 잔가지를 치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역사소설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애숙의 나라」는 정말 내 기준에 100% 부합하는 소설이었다. 심지어 전개과정 자체도 지루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이애숙'이라는 인물의 삶은 파란만장하고, 그저 가엾은 인물이어서 당연히 신파적인 소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이애숙'의 시선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너무 담담했다. 담담해서 그런걸까? 외려 더 슬펐으며, '이애숙'이라는 인물에게 더욱 감정이입이 되었다.



작가가 주인공으로 내세워 소설로 내세운 이애숙, 그녀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조선의 공주였으며 조선에서 버림받은 의순공주 이야기다. 난 사대부의 나라에서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가엾은 공주, 의순공주에 대해 일전에 포스팅을 한 적도 있었다. 


정묘-병자호란을 겪은 뒤 못난 왕 인조가 죽었다. 청나라는 끊임없이 조선의 공주를 청나라로 보내길 강요했다. 효종은 자기 딸 숙안공주를 청나라에 보내고 싶지 않아, 끝까지 뒤로 숨켰다. 하지만 어떻게든 청나라에 조선공주를 보내야 했기에, 효종은 종친의 딸을 물색했다. 실록에서는 금림군 이개윤이 자진하여 자기의 딸을 청나라로 보냈다고 적었지만, 과연 그게 사실일지는 글쎄. 나는 믿을 수 없다.


나라가 힘이 없었고, 무능한 위정자들이 본인들 편하자고 희생양으로 선택된 이애숙, 그리고 버림 받은 이애숙. 이 책은 그녀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애숙이 평범한 종친의 여식으로 살았던 그 찰나의 시간 그 해, 아름다운 봄. 누군가에게 설레기도 했고 누군가의 애정어린 눈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의순(義順)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대의에 순종하라는 의미를 지닌 의순. 조선의 왕 효종이 이애숙에게 공주에 봉하며 내린 작호다. 의순공주가 된 애숙은 그렇게 청나라로 향했다. 흉노 오랑캐에 시집간 왕소군 처럼. 그렇게 그녀는 강요에 의해 조선 땅을 떠났다. 


먼길에 고생이 많겠구나.

나의 양녀가 되었으니, 너도 분명 나의 자식이다.

의순은 청국에 가서도 조선국 왕손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말라.


조선의 왕 효종은 그렇게 말했다. 저 한마디를 내림으로써 본인의 죄책감을 덜려고 한 것이겠지. 뿐만 아니다. 효종의 딸 숙안공주, 원래라면 그녀가 청나라에 갔어야 했다. 하지만 효종과 숙안공주는 애숙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뒤로 쏙 숨어버렸다. 숙안은 의순에게 비녀 하나 던져주고 가버렸다. 자기 대신 끌려가는 의순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 조차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일까, 의순의 신랑될 사람인 청나라의 도르곤. 그는 청나라의 제일 권력자였으며 섭정왕이기도 했다. 도르곤은 의순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고, 그녀를 대복진으로 봉했다. (청나라 왕실 부인제도 '복진'은 위 포스팅에 언급) 도르곤은 의순을 백송골 같다며 좋아했고, 그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도르곤은 조선을 짓밟은 원수이기도 했지만, 의순에게는 하나 뿐인 지아비였다. 무엇보다 둘의 금실이 좋았다는 건 여러 기록에서도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부부의 연은 짧디 짧았다. 도르곤이 비명에 가버렸다. 


만주족에는 순장 풍습이 있었기에 총애로 보나 직위로 보나 대복진이었던 의순이 순장될 확율이 높았다. 하지만 조선국 출신이라는 꼬리표 덕분에 순장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순장이 확정되면 '왕후'의 직위에 봉해야 하는데, 조선국 여인이 대청의 왕후라니! 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일테니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청나라 권력 판도가 바뀌면서 죽은 도르곤이 역적이 되어버렸다. 도르곤은 묘를 파내어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그렇게 도르곤 집안은 풍비박살이 나버렸다. 의순을 포함한 도르곤의 부인들은 다른 왕족 및 부하 장수에게 주어졌다.


의순은 도르곤의 부하장수 보로의 측복진이 되었다. 하지만 이도 오래 가지 못했다. 얼마 안가 보로가 사망했고, 의순은 보로의 동생 요로의 복진으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요로의 집에 머물던 의순은 저잣거리에 나갔다가, 청에 끌려왔다가 부랑인이 된 조선 여인들을 만난다.


애숙은 차마, 한양에서 들었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도망쳐서 돌아간 포로 중 적지 않은 여인네들이 도성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홍제천변에서 움막을 치고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오랑캐에게 몸을 버렸으니 집안에 들일 수 없다는 완고한 사대부들의 반대가 심하다는 것이었다.

쏟아지는 이혼 청원에 나랏님마저 골머리를 앓는다는 말까지 들은 적이 있다. -P158


오랜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애숙이라는 존재가 잊혀지는 듯 했다. 그렇게 흘러가던 시간 속에서 애숙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애숙의 아버지 금림군 이개윤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청의 황제에게 탄원서를 올린 것이다. 애숙은 그렇게 고국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에 온다면 어떤 생활이 펼쳐질 지 애숙은 알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생각한 것 이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애숙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애숙의 눈 앞에는 자기 자신이 묻혀 있다는 무덤, 족두리 묘가 있었다.


병자호란과 정축하성으로 인해 울분에 차 있는 뭇 백성들 사이에

'왕실에서 공주까지 오랑캐에게 바쳤다' 라는 원성이 들끓었지.

조정에서는 몇 달 동안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 임금께서 자신의 딸을 빼돌리고 종친의 자녀인 너를 대신 보낸 일 까지 소문이 나서 민심이 더욱 흉흉해질까 봐 전전긍긍하시는 형편이 됐단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바로 이 족두리 묘였어. 


네가 연경에서 오라비들을 통해 돌려보낸 족두리를 갖고 이야기를 지어낸거야.

의순공주는 끝내 국경을 넘지 않았다.

국경으로 가던 중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가 없었다면서 평안도 정주 강에 몸을 던졌고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족두리만 물에 떠 올랐다는 설화를 만들어 낸 것이지. - P174 ~ 175


그렇게 이애숙, 의순공주는 조선에서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엄연히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은 살아 돌아온 이애숙을 고깝게 보지 않았다. 임금의 허락 없이 청 황제에게 탄원서를 올렸다는 이유로 애숙의 아버지, 이개윤을 삭탈관직 했다.



"춘옥은 한양 본가로 들어가긴 했는데, 가족들이 별당에다 가둬 놓고 가축 취급을 하는 바람에 그만 정신병증을 일으켜서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내침을 당했사옵니다.

그 후 우리와 함께 지내왔는데, 평소에 멀쩡하다가도 간간이 정신이 헝클어져서

홍제천에 나가 도래를 부르며 온종일 몸에다가 물을 끼엊는 발작 증세를 보이곤 하옵니다."


가슴이 아팠다.

오랑캐에게 몸을 더렵혔다는 이유로 남편과 시댁으로부터 내침을 당한 여인네들의 피맺히 삶들이 송두리째 자신의 것인 양 다가와 애숙은 가슴속으로 흐르는 피눈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 P224


책 속에 나온 몇 줄의 문장이다. 믿고 싶지 않은, 그저 소설이라고 치부하고 싶은 내용이다. 하지만, 실제로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던 이야기다. 조선은 위부터 아래까지 청나라에서 겨우 목숨 부지하고 돌아온 여인네들을 환향녀라 부르며 쫓아냈다. 위정자들은 그저 숭명배청을 울부 짖고, 허울만 좋은 북벌론을 부르짖으며 힘없는 여인네들만 그렇게 버려졌다. 나는 조선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그리 쉽게 일본에 침략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여기서 찾는다. 그저 글께나 읽는 유학자랍시고 명나라만 쫓았던 무능한 위정자들, 백성들의 피폐해진 삶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그들 때문에. 바로 이들로 인해 조선은 무너지기 시작한거다.


정축하성(삼전도의굴욕)의 국치로 전쟁이 끝난 뒤 청국으로 끌려간

포로들에 대한 석방 교섭이 있었던 기묘년 이후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여인들만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혀 실절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내쳐지고 시집에서 문전박대를 받았다.

어쩌다가 도성으로 들어간 여인들도 다른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고

별당이나 뒷방에서 유폐되다시피 홀로 쓸쓸히 지내야 했다.

대들보에 명주실을 내려 목을 걸거나

은장도로 손목을 긋고 가슴을 찌른 여인들이 부지기수 였다.

집 안에 있는 샘에 거꾸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이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예 집안에 들어갈 수 조차 없는 여인들은 깊은 강을 찾아 몸을 던졌다.

대게는 오랑캐에게 끌려갈 때 자결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했고

조선의 남정네들을 원망하면서 눈을 뜬 채 이승을 떠났다.

속환한 며느리가 칠거지악을 저질렀으니

이혼을 하도록 해달라는 상소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환향한 지 한 해 만에 그렇게 한이 맺힌 채 죽어간 여성이

대략 일만 명은 넘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돈다고 했다. - P227


소설 속의 애숙은 그렇게 죽었다. 스스로 독초를 달여 먹어 죽음을 선택했다. 애숙이 죽고 나서야 궁궐에서 장례를 치루라며 물품을 내려줬다. 


"제게…나라는…조선은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나라였기에 차마 버릴 수 없었을 따름이지요."

애숙의나라 - P256


이 책은 무능하고도 무능한 조선 정부와 사대부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조선 왕실은 이애숙이라는 여인을 내세워 본인의 안위를 지켜놓고, 나중에는 본인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내쳤다. 비단 이애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당시에 청나라로 끌려간 여인들은 수십에서 수만명. 정말 무자비하게 끌려갔다. 물론 남자들도 많이 끌려갔다. 돈이 많은 양반가에서는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기 위해 몸값을 지불해서 빼내오는 경우도 빈번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너무나 차별적이었다. 간혹 자기의 여식을 빼내기 위해 몸값을 지불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게가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 스스로가 목숨을 걸고 도망쳐 고국으로 돌아오면, 조선사람들은 그녀들을 '환향녀' 라고 부르며 배척했다. 조선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환향녀'는 오랑캐에게 정조를 빼앗긴 수치스러운 여자였다.


청나라에 잡혀 갔다면 응당 자결을 했어야 했는데, 자결하지 않고 살아 돌아왔으니 너희야 말로 짐슴이고 오랑캐다. 당대 환향녀를 향한 인식이다. 조선 유학자들이, 유학을 본인들에게 이로운 부분만 받아들이고 지멋대로 해석하여 널리 퍼트린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언젠가 가봐야지 했던 족두리묘, 하지만 어느새 잊었던 족두리묘. 늦었지만, 이제라도 가봐야겠다.


애숙은 차마, 한양에서 들었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도망쳐서 돌아간 포로 중 적지 않은 여인네들이 도성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홍제천변에서 움막을 치고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오랑캐에게 몸을 버렸으니 집안에 들일 수 없다는 완고한 사대부들의 반대가 심하다는 것이었다.

쏟아지는 이혼 청원에 나랏님마저 골머리를 앓는다는 말까지 들은 적이 있다. - P158

가슴이 아팠다.

오랑캐에게 몸을 더렵혔다는 이유로 남편과 시댁으로부터 내침을 당한 여인네들의 피맺히 삶들이 송두리째 자신의 것인 양 다가와 애숙은 가슴속으로 흐르는 피눈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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