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땅의 역사 1 - 소인배와 대인들 ㅣ 땅의 역사 1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1월
평점 :
1. 너희가 팔아먹은나라, 우리가 찾으리라
1919년 3,1운동 이전의 유림들이 일으켰던 의병운동은 오로지 조선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막기위한 의병운동이었다. (일부 제외) 조선의 양반네들은 성리학의 정신이 담긴 상투와 복식을 버릴 수 없었고, 한 나라의 국모를 죽인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을미년에 의병을 일으킨다. 하지만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자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무엇보다 양반출신 모 의병장은 평민출신 모 의병장을 살해하였고, 또 다른 양반출신 모 의병장은 동학농민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려 평민출신 의병을 죽였다.
1910년 10월 총독부는 양반들에게 천황의 은사금을 지급했다. 500년간 조선의 이념을 지배한 성균관은 폐지됬다. 1911년 6월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황국 유학을 가르치는 경학원이 설립되었다. 경학원의 수장은 유림들이었다.
1919년 (기미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울려퍼진 기미독립선언서, 그곳엔 각종 종교단체의 사람들이 참여를 하였다. 하지만 그 속에 유교를 믿는, 성리학을 공부하던 유림들은 없었다. 그리고 유림 중의 유림, 선비 김창숙은 이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이후 김창숙과 그의 고향인 봉화 바래미마을 유림들을 포함하여 주변 영남지방의 유림들이 함께 들고 일어났다. 나라를 팔아먹는 줄만 알았던 조선의 양반네들이 아닌, 자국의 독립을 위해 행동을 하는 유림들이 나타난 것이다.
안동의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고성 이씨 가문을 비롯하여 김동삼과 의성김씨 가문, 영덕의 무안박씨, 울진의 평해 황씨 등등 혼맥으로 얽히고 섥킨 경상도의 유림들이 독립을 위하여 만주로 떠났다. 서울에서는 명문가 집안이었던 이회영 6형제가 만주로 떠났다. 그렇게 그들은 만주에서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었고, 이는 만주의 무장독립투쟁 역사의 시작이었다. (신흥강습소 - 신흥무관학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쳤던 그들의 죽음은 나라에서 잊혀져 갔다. 이회영 6형제 중 첫째 이건영은 병으로 죽었고 둘째 이석영은 굶어죽었다. 셋째 이철영 역시 병사했다. 넷째 이회영은 일제 감옥에서 죽었다. 여섯째 이호영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다섯째가 이시영 만 유일하게 살아남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만주에서 투쟁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등으로 넘어가서 병사 내지 굶어죽었다. 이상룡 역시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이 만큼 살수 있었던 것인데, 그 누구도 그들의 죽음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정말 슬플 따름이다.
2. 제주에서 닫혀버린 세상을 향한 문
조선에서는 조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혹은 그럴만한 개혁성향을 갖고 있덨던 왕 혹은 왕자가 있었다. 왕이 었으나 조카 인조에 의해 폐위된 광해군, 그리고 세자였으나 아버지 인조의 못난 질투심에 의해 독살당한 소현세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둘은 동일한 사람,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광해군은 망해가는 명나라, 뜨고 있는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을 지키기 위한 외교 즉, 실리외교를 택했다. 광해의 외교정책 덕분에 조선은 일본과의 7년 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데 힘쓸 수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를 배반할 수 없다고 외치던 서인세력과 조카 인조에 의해 광해는 왕위에서 쫒겨난다. 광해의 처자식은 죽었으며, 광해 혼자만이 땅 끝에 있는 유배지, 제주도까지 오게 된다. 그리고 18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제주도에서 6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명에 사대하는 정책, 친명정책을 펼쳤다. 당연히 청은 오랑캐므로 배척한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조선 땅에 또 한번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청나라에 의해 조선 땅이 유린당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이때는 나라를 지킬만한 의병과 장수들도 거의 없었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받쳤고 겨우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당대의 왕 선조에 의해 대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고 인조의 아들들은 볼모로 잡히어 청나라로 끌려간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새로운 문물을 습득한다. 성리학만이 최고라 생각했던 조선의 왕자가 새로운 문명을 두 눈으로 보고 온 것이다. 그는 조선에 돌아와서 조선을 개혁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잘난 아들에게 못난 마음을 품었던 아버지,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심지어 소현세자 뿐 아니라 그 가족이 풍비박살 난다. 인조는 자기의 며느리이자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을 죽인다. 또한 손자이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낸다. 심지어 두 아이는 제주도에서 죽었다. 막내아들만 겨우 살아남아서 효종 때 복권된다. (효종: 인조의 차남, 소현세자의 동생. 말로는 북벌북벌했으나 현실상 불가능. 결국 왕을 비롯 조선의 양반네들은 정신적인 북벌로 노선을 돌린다. 일명 정신승리)
그리고 마지막, 제주도에 굴러 온 조선이 바뀔 수 있는 마지막 기회.
1653년 네덜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던 상인, 하멜의 배가 제주도에 표류하면서 수 많은 서양의 문물이 제주도에 들어왔다. 당시 서양의 최첨단 항해술, 무기술, 신종 화약품, 그리고 기술자들이 떼거지로 조선의 품안에 떼거지로 굴러온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에 사로잡힌 조선에게 서양사람들은 그저 구경거리였고, 죄인이었다. 조선은 그들을 강진, 여수 등을 옮겨가며 막노동꾼, 일종의 관노비로써 굴렸다. 그렇게 조선에서 고된 삶을 살던 하멜은 조선관리인들이 느슨해진 틈을 타 일본 나카사키로 탈출했다. 일본은 하멜 일행에게 조선의 많은 정보를 얻는다. 조선의 군부대 배치현황, 경제, 풍습, 종교, 기타 등등.... 일본 관리인들이 하멜 일행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조선에서 13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조선에서 잡초제거, 뗄감 베어오기, 양반집 구경거리, 그리고 먹을거리를 구걸하는 것이 전부였소
어리석은 조선은 변화할 마지막 기회를 잃었고, 일본은 조선의 모든 것을 꿰뚫며 그 날을 위해 착착 준비했다. 그리고 1876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었으며, 강화도에서 최초의 불평등 조약 <조일수호조규>를 맺는다.
3. 무주 제1경 나제통문의 비밀
무주 구천동에는 아름다운산과 계곡이 있다. 구천동 33경이 그것이다. 그 곳에는 신라가 백제를 평정하기에 위해 지나갔다는 아치형 굴, 나제통문이 있다. 지자체에서는 이 스토리를 널리 널리 광고하였고, 나제통문은 관광명소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그냥 관광객 모으려고 근사하게 나제통문이라, 내가 이름 붙인거지. (중략)
그런데 역사로 기록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군청에 가서 이야기했지, 이건 잘못된거라고. 그랬더니 이러더라고 ?
-알지만 관광이에요. 여기가 경상도에서는 수학여행길이에요. 백제를 평정할때 김유신이 여기로 지나갔다고 해야지요. 여기를 1925년도에 뚫었다고 하면 안돼죠.
그렇게 무주 구천동 계곡, 이 곳을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해 그저 한 일반인이 지었던 이름 나제통문 은 신라와 백제 사이에 있던 문,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지나왔던 문이 되었다. 신라와 백제의 전쟁으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 까지 덧붙여졌다. 역사왜곡은 이렇듯 번갯불에 콩 볶듯, 손 쉽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왜곡된 역사는 아직까지도 바로 잡지 못하였다.
4. 책의 마지막은..
책의 마지막은 친절하게도 박종인 기자님이 다녔던, 각 답사지의 주소가 나와있다. 일부는 지금도 유명한 관광지이고 일부는 그 고장 사람도 겨우 내력을 알만한 그런 흔적들이 남은 땅이다. 책을 읽을 때 만해도 "여긴 또 어떻게 찾아가지 ㅠㅠ" 이랬는데, 이렇게 사적지 주소를 알려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정말 난 그 어떤 사학자, 교수님들보다 박종인 기자님의 기록들이 더 맘에 와닿는다. 그리고 나의 여행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고. 내가 원하는 역사가 담겨있는 여행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으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 대한 역사, 그 지명이 남아있는 유래, 이 땅에서 살았던 촌부들의 이야기. 겉으로 나와 있는 역사가 아닌, 속에 감춰져있는 역사를 이렇게 알려준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본 리뷰는 본인의 개인 블로그에도 등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