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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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 푸른숲

 

컴퓨터나 다른 기계가 다른 사람이 네가 맡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더 빨리, 더 정확히, 뭐 어떻게든...

아무도 너보다 더 잘할 수 없는 것은, 네가 너 자신으로 있는 일이야.

 

_ <어둠의 속도> 225p

 

 

 

얼마 전 한 TV프로그램을 보는데, 복잡한 미로 그림을 그리는 한 소년이 등장했다.

소년이 단숨에 그린 것은 간단한 미로가 아니라 아주 복잡하고 정교한 미로 그림이었고, 그림 자체에 메세지까지 담겨 있었다.

소년은 어릴 때 경계성 자페진단을 받았고 꾸준한 치료로 완치는 되었지만 외로운 날들을 보내다 우연히 보게 된 미로에 푹 빠져 미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했다.

소년의 재능과 미로 그림이 담고 있는 소년 마음 속 목소리까지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이번에 읽은 <어둠의 속도>에는 근미래의 자폐인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소설 속 자폐인들은 그들이 사는 나라에서의 마지막 자폐인 세대이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여 그들 이후의 자폐아들은 태아나 영아일 때 이미 치료를 받아 '정상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이 마지막 자폐인 세대의 한 명인 '루 애런데일'이다.

 

루는 규칙적이고 정형화된 생활을 한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을 하고, 요일별로 정해진 계획대로 장을 보거나 빨래를 하거나 센터에 간다.

정기적으로 정신과 의사의 상담도 받아야 하는데, 루는 자폐인에 대한 의사의 확신에 찬 태도에 고통을 느끼지만 의사가 원하는 대답을 하며 그 시간을 견딘다.

의사에게도 말하지 않은 루의 생활이 있다면, 그건 바로 펜싱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회사에 새로운 부장으로 '진 크렌쇼'가 부임하고, 그는 회사 내 자폐인들이 받는 대우에 불만을 제기하며 현재 연구중인 새로운 치료법에 그들이 참여하기를 원한다.

루를 포함한 A부서 직원들은 '정상인'이 되는 치료를 받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어쩌면 처음에는 루의 행동이나 사고 과정이 생소하고 어려웠다.

루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대로 생활하고, 우리가 보기에 일상적이고 평범한 상대방의 질문이나 행동에 대해서도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하지만 점점 루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오히려 루의 주변에 있는 소위 '정상인'들의 비상식적인 모습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들은 루를 그저 자신들과는 다른 '비정상인'이라고 판단하고 예의없고 무례한 행동들을 서슴없이 한다.

자폐인들을 그저 자신들보다 아래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판단하고 끼어들고 결정한다.

 

그 중에 가장 압권은 '돈'이었다.

루가 자신보다 좋은 직장을 다니고, 펜싱을 더 잘하고, 자신이 마음에 둔 여자가 그에게 더 관심을 가지자 결국은 범죄를 저지른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반성이나 후회는 하지 않고, 그저 루 때문에 자신이 펜싱 클럽에서 쫓겨났고, 허접한 일자리밖에 못 구하고 있다고 원망의 말을 쏟아낸다.

나 자신이 누구인가는 저에게 중요합니다.

나는 나 자신이기를 좋아합니다.

자폐증은 나 자신의 한 부분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_ <어둠의 속도> 394쪽

 

 

 

어쩌면 소설 속 몇몇 인물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정상인'으로 보이지만 결코 상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루가 더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을 믿기 위해 애쓴다.

뭐, 소설 속에서 찾을 것도 없다.

뉴스만 보더라도 자폐가 아닌 정상인이라는 이들이 저지르는 수많은 반인륜적 범죄 행위들이 수시로 보도되고 있으니까.

 

생각해 본다. 자폐를 치료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치료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소설에서는 시험 단계였지만, 만약 성공이 100% 확실한 치료법이 있다면, 나는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든다.

꼭 그들이 '정상인'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냥 그들 자체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그저 '다름'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사람마다 고유의 개성과 특징이 있듯이, 그들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그런 개성과 특징이 있다고 말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떠올려 볼 수 있게 하는, 그래서 나와 조금은 다른 그들에게 무심코 차갑거나 무심한 시선을 주지 않도록 한번 더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조금은 다를 수 있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많은 생각이 들 만큼 마음 속에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소설이 될 것 같다.

 

 

 

 *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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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이미 다 결론 난 것이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본질이 보이지 않는 남자다.

진심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재미로 즐기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몹시 머리가 좋은 것만은 확실하다고 모에는 판단했다.

_ 385쪽

 

모에와 친구들은 하나와 사장 일행과 저녁 식사를 하고,

식사 자리에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모에는 하나와 리키야에게 사건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를 묻고, 하나와는 자신의 가설을 이야기한다.

 

한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저 똑똑한 하나와도 마가타 시키 박사의 천재성에 완전히 빠져있다.

분명 하나와도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 역시 마가타 시키처럼 보통의 인간성을 지니지 못한, 그래서 더 그녀에게 빠져있는, 그런 사람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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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타 시키라는 인물은 키보드의 딜리트 키를 누르는 것처럼 손쉽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다.

그저 새끼손가락을 뻗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녀에게 타인의 생명 따위는 코드 한 줄, 타인의 인생 따위는 커맨드의 한 행에 불과하다.

단순한 놀이(아니, 놀이야말로 인류의 궁극적인 목적이지만)로 주면 생명의 축적에 돌발적인 이스케이프 시퀀스를 보낼 수 있다.

순간적으로 끼어들어 제어할 수 있다.

_ 289쪽

 

모든 것이 마가타 시키의 덫이었다.

하지만 빠져나가면 분명 또 다른 덫으로 사이카와와 모에를 쫓아 올 것이고, 그때마다 아마 누군가는 죽음을 맞게 되겠지...

 

모에는 자신의 기억과 다른 상황에 혼란스러워 했지만, 친구들과의 우연찮은 대화로 실마리를 찾기 시작한다.

 

마지막 이야기답게 살인 현장은 정말 불가사의하고 미스터리하다.

이야기의 반 이상이 진행되었지만, 사이카와와 모에는 제대로 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시리즈를 읽을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S&M 시리즈는 이공계 미스터리라는 외면을 가지고 있지만, 이과적 사고를 바탕으로 논리를 펴는 사이카와의 모습은 철학적인 면이 꽤 많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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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상황은 거의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의도와 목적이 뭘까요?

아마 즐기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장난감 삼아 놀고 있는 거예요. _ 185쪽

 

 

-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천재 프로그래머 마가타 시키,

이런 불가사의하고 미스터리한 일을 꾸민 건 분명 그녀의 짓인 걸로 보인다.

하지만 정말 목적이 무엇일까?

정말 모에가 생각하는 대로, 그녀는 이런 상황들을 그저 즐기고 있는 걸까?

 

그리고 또다시 발생한 살인사건, 이번 역시 의문투성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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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MIDNIGHT 세트 - 전10권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프란츠 카프카 외 지음, 김예령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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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병동

안똔 체호프 / 열린책들

 

병원의 마당에 있는 별채는 정신병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으로 '6호 병동'으로 불린다.

그 곳에는 5명의 환자가 수용되어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귀족 출신으로 법원의 집행관과 관청의 서기를 지낸 '이반 드미뜨리치 그로모프'이다.

 

의사인 '안드레이 에피미치 라긴'은 병원의 환경과 처우가 불결하고 부도덕하고 좋지 않다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무심한 태도를 취했고, 오랜 시간 일하는 동안 단조로운 생활에 권태를 느낀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지적인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에 실망하며 무료한 생활을 하던 중 6호 병동의 이반 드미뜨리치와 대화를 나누게 되고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 뒤 안드레이 에피미치는 종종 6호 병동을 찾아가 이반 드미뜨리치와 대화를 나누고,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한다.

 

-

소설의 결론은 어떻게 생각하면 조금 무섭다.

진짜 미친 것이 맞는지 확실하지 않은 안드레이 에피미치가 6호 병동에 수용되고, 급기야 폭행까지 당한다.

물론 그 전까지 6호 병동 내의 폭행은 당연시되고 있었고, 그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분명 100년도 훨씬 넘은 소설인데, 현실의 모습과 닮아있는 것은 왜일까?

현실에서도 미치지 않은 사람이 누군가의 나쁜 의도로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TV나 뉴스를 보면 여러 이유들로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원에 보내버리는 것을 종종 보았던 것 같다.

미치지 않은 사람도 그 환경에서 원치 않는 약을 먹고, "나는 미치지 않았어요"라고 주장해도 그건 누구나 하는 소리라며 전혀 귀기울여주지 않는다.

 

그냥 넘길수도 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정말 무서운 이야기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말을 들어달라고 화라도 내면 사람들의 그 의심은 확신이 되어 더욱 더 나를 그런 사람을 만들어 버린다.

 

-

함께 수록된 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불륜을 소재로 한다.

모스크바의 은행원 구로프는 휴가 중에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안나와 마주치고, 그녀를 유혹한다.

구로프는 안나와 헤어져 원래의 삶으로 돌아오지만, 이상하게 계속 안나가 생각나고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무작정 안나를 만나러 그녀가 사는 도시로 찾아가고, 안나는 자신이 그를 만나러 모스크바로 가겠다라며 그를 돌려보낸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만나는 그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다.

그들은 새롭고 멋진 생활을 꿈꾸지만, 그 끝은 멀고 멀었고 이제야 그 어려운 일의 시작점에 섰을 뿐이다.

 

이 소설은 체호프의 최고 절작으로 꼽힌다고 하는데, 사실은 잘 모르겠다. 하하하.

그들이 뒤늦게(서로 각자 결혼을 한 후이니) 만난 것은 안타깝지만, 운명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사랑을 미화하고 합리화하는 건 아닌지... 어차피 불륜은 불륜이니까 말이다.

 

-

작가에 대하여 살펴보니, 러시아가 낳은 최고의 단편 작가이자 극작가라고 한다.

실제 작가의 책을 검색해 보면, 희곡집이 많았다.

4대 희곡으로 '갈매기', '바냐 삼촌', '세 자매', '벚나무 동산'이 있다고 하니, 나중에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

 

p. 49

오늘날의 시각과 흐름이 그러한데, 6호 병동과 같은 추악함은 철도에서 2백 베르스따나 떨어진 일너 작은 도시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안드레이 에피미치는 알고 있다.

도시의 시장과 모든 시 의원들이 제대로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의사는 입을 벌리고 끓는 납을 부어야 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야 하는 사제쯤으로 생각한다.

만일 다른 곳이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대중들과 언론에서 이 작은 바스티유를 조각조각 부숴 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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