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소녀
세라 페카넨.그리어 헨드릭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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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적인 비밀을 말해주는 대가로 내가 며칠을 일해야 겨우 벌 수 있는 돈을 지불한다는 제안을 받는다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내가 버는 돈으로 뉴욕의 생활비는 물론이고 아픈 동생의 진료비도 지불해야 해서 늘 돈에 허덕이는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위와 같은 제안은 정말 내 마음을 솔깃하게 하지 않을까요?

뉴욕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는 제시카는 위와 같은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죠. 그녀의 수입은 넉넉치 못하고, 거기다 부모님 몰래 고향의 아픈 동생 치료비도 부담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인 금요일, 그녀는 출장 메이크업을 갔다가 손님의 전화 통화를 듣게 됩니다. 제시카는 설문조사 한 번에 500달러를 지급한다라는 통화를 듣게 되고, 이 손님이 친구와 설문조사에 못 갈 거 같다는 말을 하자 자신이 그 곳에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설문조사에 참여하는 제시카. 설문조사의 질문들은 은근히 날카롭게 그녀의 답변에 파고 들었고, 그녀는 긴장하며 질문들에 집중하고 또 거기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적은 보수가 아닌만큼 그녀는 그 다음 설문에도 계속 참여하게 됩니다.

대외적인 설문조사의 목적은 '21세기의 윤리와 도덕성에 관한 포괄적 연구'인데, 사실 그 숨은 저의는 알 수가 없지요.

그도 그럴 것이 설문조사의 질문은 지나치게 사적이고, 실즈 박사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실즈 박사의 말투가 참 아리송하고 미스터리하고 불길한 기운까지 풍기거든요.

소설은 잠시 언급했듯이, 실즈 박사의 시선과 제시카의 시선으로 번갈아가며 진행됩니다.

실즈 박사의 이야기 속에는 5번 피험자가 등장하는데, 5번 피험자가 또 미스터리해서 뭔가 더 불안한 마음이 생겨 납니다. 5번 피험자는 제시카 이전에 실즈 박사의 실험에 참여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P. 59

당신의 본모습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52번 피험자님, 점점 더 매력적인 당신의 그림이 그려지는군요.

전에 이 연구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 질문자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 사람은 한 명뿐이었습니다. 5번 피험자. 그녀 역시 여러모로 나머지 피험자들과는 달랐지요.

5번 피험자는... 특별해졌습니다. 그리고 실망을 안겨주었지요. 결국엔 내 가슴을 찢어놨어요.

그리고 실즈 박사가 제시카에서 연구에 깊이 참여하지 않겠냐고 제안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겉잡을 수 없이 이상해집니다.

실즈 박사가 제시카에게 시키는 일들도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이 많아졌구요.

제시카도 실즈 박사로부터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번번히 그녀에게 휘말려 들어갑니다.

- p. 79

이 연구에 더 깊이 참여해보시겠습니까? 보상이 훨씬 더 커질 겁니다. 하지만 그만큼 당신에게 요구하는 바도 훨씬 더 많아질 겁니다.

실즈 박사는 너무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고, 부유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나 현재는 뉴욕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남들이 보면 부러워할만큼 멋진 외모와 멋진 커리어를 가졌단 말이죠. 그런데 그런 그녀가 제시카를 통해 이상한 심리 실험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실즈 박사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토머스. 그러나 그는 바람을 피워 실즈를 실망시켰고, 현재 그녀와 별거중입니다.

실즈 박사는 제시카를 토머스와 의도적으로 만나도록 하고 그를 유혹하도록 지시합니다. 그리고 제시카는 이상한 점을 깨닫고 이미 그 전에 벌써 토머스와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실즈 박사에게 숨기게 되죠. 그리고 토머스로부터 자신이 실즈 박사의 남편이라는 말도 듣게 됩니다.

남편을 유혹하게 한다? 뭔가 이상하죠.

점점 제시카, 실즈 박사, 토머스가 각자를 지키기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게임이 시작됩니다.

실즈 박사와 토머스 사이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또 이들과 5번 피험자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제시카는 이 이상한 심리 실험에서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을까요?

- p. 105

사람들이 바깥세상에 내보이는 건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허울이에요. 대부분의 사교적 만남에서는 가식적 대화만이 오가죠. 자신의 본모습, 뿌리 깊은 두려움, 숨어 있는 욕망까지 드러낼 만큼 누군가를 신뢰하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친밀한 관계가 탄생한답니다.

당신은 오늘 나를 당신 안으로 맞아들였어요, 제시카.

당신의 비밀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거에요...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말이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제시카의 어린 시절 꽁꽁 숨겨둔 비밀이 드러납니다. 실즈 박사의 비밀도 그녀의 입을 통해 드러나지만, 제시카의 비밀은 실즈 박사가 그녀가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역할을 합니다.

나중에 제시카가 더 이상 실즈 박사에게 휘둘리지 않고 벗어나려고 자신의 비밀을 가족들에게 솔직히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제시카는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을 듣게 되죠.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냥 끔찍한 사고였어." (p. 476)

좀 더 빨리 가족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함께 이야기했다면 오랜 시간 덜 아팠을 텐데... 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어요.

책을 다 읽은 후 느낌은,

상대방을 더 사랑하는 쪽이 늘 약자다, 라는 것과

내 가족을 좀 더 믿고 혼자 속 끓이지 말고 터놓고 이야기하자, 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까지 제시카는 아주 똑똑했다, 라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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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고 차가운 오늘의 젊은 작가 2
오현종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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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용은 서울 시내에 있는 이름 있는 대학에 붙었지만, 그 대학은 부모님의 기준에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재수학원에 다니고 있다. 어느 날 그는 담배를 피던 옥상에서 민신혜를 보게 된다.

그렇게 지용은 신혜와 가까워지게 되고 많은 얘기들을 나눈다.

정부 고위 관료인 아버지, 영어유치원 원장인 어머니, 의대에 다니는 형, 미국 비지니스 스쿨에 다니는 누나 등 지용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대한 압박에 시달려 왔다.

신혜는 술집을 하는 엄마로 인해 열한 살부터 성매매에 던져졌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부모를 증오하고 벗어나고 싶어한다.

의붓여동생마저 자신의 전철을 밟게 될까 두려워 어머니를 아직은 떠날 수가 없다던 신혜는, 겨울 어느날 여동생이 어머니로 인해 다쳤다며 힘들어하고, 지용은 그녀를 위해 그녀의 어머니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 "악을 없앨 방법은 악밖에 없을까."

- p. 20

실수를 하면 모두 끝이다. 다음 시험이란 없다. 꿈꾸었던 다른 삶도 없다.

여자의 몸 위에 솜이불을 도로 덮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무도.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고,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깨끗했다. 더러운 일이었다면, 손을 더럽히는 일이었다면 아마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 p. 23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달라져 있을 것이다. 가장 나쁜 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삶, 아닐까.

오늘은 좋은 일만 상상하고 싶었다. 시험처럼 실패해 버리고 싶진 않았다. 붙거나 떨어지거나. 죽거나 살거나. 사랑하거나 외면하거나. 잡히거나 빠져나가거나.

인생은 매번 둘 중의 하나다. 중간은, 없다.

그렇게 신혜의 어머니를 죽인 후, 지용은 누나가 있는 뉴욕으로 떠난다. 지용과 신혜는 직접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진 않았지만 SNS를 통해 자신들의 일상을 간간히 알려주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그런데 어느날 신혜의 SNS에 더이상 새로운 소식이 올라오지 않고 전화연락마저 되지 않자, 지용은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다가 그녀를 찾아 다시 한국으로 간다.

그리고, 여기서 지용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 아니, 자신이 신혜에게 철저히 속고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

.

그것이 사랑이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이라도 되었다면 지용은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서'라며 자신의 죄를 합리화할 수는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모두 아니었다.

부모의 과잉보호 속에서 공부만을 달려오다 트랙 중간에서 이탈해 버린 지용은 트랙 밖의 세상을 몰랐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그런 세상에 내던져졌던 신혜는 부모와 공부에 대한 분노가 마음 속에 가득한 지용을 마음과 몸으로 품는 듯이 행동하며 그를 이용하고 조종했다.

신혜는 재수하기 전까지 공부만 했고 이젠 재수생일 뿐인 스무살의 지용을 살인자로 만들었다.

그렇게 지용은 진짜 지옥에 던져졌다.

- p. 60

다들 지옥에 있다고 하지. 모두 너 때문에 내가 지옥에 있다고 욕하는데, 너 역시 지옥에 있다고 아우성을 쳐. 그러면 이게 다 누구 책임일까.

지용의 누나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지용에게 부모를 원망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해도, 극단적인 그 선택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결국은 지용의 그 원망하는 마음이 넘쳐 흐른 것이 신혜에게 조종당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원망하는 마음이 너무나 넘쳐서 부모에게 휘둘리다 마음을 주었다 여긴 사랑하던 그녀에게까지 휘둘려 버렸으니 말이다.

- p. 113

그런데, 그러니까, 네 인생이니까 남에게 휘둘리진 말았으면 해.

나는 누가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싫었거든.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야. 누굴 만나러 돌아가는진 몰라도, 엄마 같은 인간을 네 인생에 또 만들어 놓는 건 그렇지 않니? 누가 내 인생을 맘대로 흔드는 거, 정말 질색이다. 지긋지긋해.

마음이 서늘하고 헛헛하다.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지용도, 그를 속인 신혜도, 지용을 그런 원망 가득한 인간으로 성장시킨 부모도 모두 약간은 안타깝고 약간은 화가 난다.

"악을 없앨 방법은 악밖에 없을까?"

정답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악을 악으로 응징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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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7
정용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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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번은 정부의 고위급 인사들과 현직 국회의원 등 12명을 살해한 남자였다. 피바다가 된 살인 현장에서 남자를 체포했지만, 그는 지문 등록도 되어 있지 않고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범죄정보센터 기록도 없는, 한 마디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였다.

그는 모든 혐의를 인정했고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 p. 13

별의별 놈 다 봤지만 이런 캐릭터는 없었어. 이상해. 묘한 태도하며 지나치게 여유로운 것도 그렇고. 너무 깔끔하잖아. 죄를 받아들이고 모두 인정하고 있어. 그런데 뉘우치고 반성하는 태도는 아니야. 달라. 뭔가 다른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리고 윤은 474번의 담당 교도관이었다.

윤은 474번의 비밀이 궁금했지만,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지켜봤다.

- p. 39

윤은 그것을 잘했다.

그것은 선한 일은 아니지만 결코 악한 일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기다리고 지켜봤다. 누군가 몰락하는 풍경을, 누군가의 비밀이 어떤 이유로 인해 탄로 나는 모습을, 후회와 절망으로 무너져 침 흘리며 우는 모습도 지켜봤다. 직접적으로 엮이지 않고, 인과에 참여하지 않고, 그러나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윤은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찾아냈고 선 앞에 서 있었다.

그러던 중 474번을 찾아오는 면회객이 윤의 눈길을 끈다. 윤은 474번에게 접견신청을 하는 여자가 있으며 그녀의 이름은 신해경이라고 슬쩍 흘린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겠다고 말하는 474번. 접견실에서 그가 그녀에게 말한다. "누나"라고.

474번은 그녀를 만난 후 교화를 위해 온 목사를 협박하면서까지 자신의 사형 집행이 빨리 처리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다시 신해경을 만난 474번은 돌연 마음을 바꾼다. 윤에게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 p. 59

어떻게 동생을 무서워할 수가 있죠?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두려움과 공포가 깃들면 나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집니다.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 p. 138

상처를 주고 싶었어.

누나에게 소중한 것을 잃게 하고 싶어.

그게 나라면... 나를 없앨 거야. 누나도 내게서 누나를 가져갔잖아.

표정도 없고 감정도 없을 것 같던 474번은 윤에게 자신의 과거를 말한다. 어린 시절 누나와 살았지만 누나는 자신을 버렸고, 그 후 자신은 본질이 이끄는 대로, 자신이 잘 하는 일, 즉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하며 살았다고 말이다.

직접적인 살인 행위는 474번이 했지만, 그가 살인을 하도록 의뢰하고 그의 손에 피를 묻히고 그를 물리적인 도구로 활용해 온 것은 마음 속에 원한이 가득찬 그런 사람들이었다.

작가는 진정한 악인은 누구인가, 를 묻고 싶은 것인가...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나라에서 부여된 이름이나 주민번호조차 없는 474번의 불우한 과거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윤과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거기다 그의 입을 통해 듣는 과거 이야기와 누나이자 엄마인 신해경의 입을 통해 듣는 이야기가 맞물리면서 어느 순간 그는 474번이 아니라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는 인간인 '신해준'이 된다.

그러나 474번과 신해경에게 그런 안타까운 일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474번은 12명을 죽인 흉악한 살인마일 뿐이다. 그의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작품해설 속에 언급한 말처럼, 악의 실체는 드러나야 하고, 연민을 품게 되더라도 악 자체에는 고개를 돌리지 말고 바라봐야 한다.

여전히 포인트를 잡는 게 힘들다.

온 마음을 집중해서 474번(신해준), 신해경, 윤을 바라보았지만 내가 제대로 이들을 이해했는지, 작가의 이 소설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계속해서 읽고 또 읽을 수 밖에... 그래서 언젠가는 온전히 소설 속의 이야기를, 그들을 이해하기를 바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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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보지 못한 숲 오늘의 젊은 작가 1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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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솔직히 어떤 이야기가 진행될 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여자는 무언가 슬픈 사정이 있어 보였고, 그녀 곁은 맴도는 소년은 왜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수호천사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특히 소년이 게임에 비유하여 이야기를 해 줄 때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게임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 p. 45

게임 창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다른 차원의 현실과 만날 수 있었다. 어떤 현실을 선택하여 어떻게 살다가 어떤 방식으로 제거되느냐 하는 문제는 그 순간의 기분에 달려 있었다.

-

소년은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는 새로운 세계를 계속해서 클릭했다. 신비롭고 마법적이며, 때로는 무자비하고 잔학한 세계들은 전생의 미션 따위 깨끗이 잊으라고 종용하는 듯했다.

그녀. 미수 또는 M.

미수는 18층 건물의 안내데스크에서 일하고 있다. 그 곳에서 만난 남자 '윤'과 5개월 가량 연애를 했으나 그와는 헤어졌다. 하지만 늘 그를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집 안의 생필품들이 티나지 않게 조금씩 채워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윤이 그녀를 위해 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소년. 무명 또는 현수.

소년은 이름이 없다. 아무데서나 쉽게 잠드는 버릇이 있다. 소년은 위조문서 배달이나 주문을 받는 등의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으며, 새벽에 중국의 보스와 업무적인 메신져를 주고 받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소년은 미수의 곁은 맴돈다. 미수가 출근하고 집에 없을 때 그녀의 집에 들어가 모자란 생필품을 티나지 않게 채운다. 예를 들면 샴푸의 양을 늘린다든지, 화장실 콘솔에 두루마리 휴지를 2개 정도 둔다든지 하는 식이다.

- p. 24

소년의 크로스 백 안에는 적어도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을 증명할 수 있는 각종 신분증과 서류, 신용카드 등이 들어 있는 것이다.

소년은 그들 중, 그 누구도 아니다.

그리고 밝혀진 미수와 소년의 관계는 남매.

거기다 소년 현수는 여섯 살때 죽은 것으로 처리된 사람이었다.

12년 전 K시 지하철역에서 가스폭발 사고가 있었고, 미수와 현수의 엄마 빚으로 사채업자들의 끊임없는 방문을 받던 삼촌은 현수를 가스폭발 사고의 희생자로 둔갑시켜 사채업자에게 보상금과 함께 팔아 버린다.

미수는 당시 학교에 가 있어 이런 사실은 모른 채, 현수가 죽었다고만 생각하고 살아왔다.

0321. 미수의 집 비밀번호. 소년의 집 비밀번호. 그리고 12년 전 사고가 있었던 바로 그 날이다.

소년 현수는 미수에게 가고 싶지만 섣불리 다가가 자신을 밝히지도 못한다. 현재의 자신의 존재가 혹여나 미수에게 해가 될 까봐 그저 조용히 그녀 곁에서 바라볼 뿐이다.

- p. 53

유저들은 끊임없이 알려 줬다. 소년은 버그라고, 소년의 생존이 밝혀진다면 전체 시스템엔 치명적인 오작동이 일어날 거라고 그들의 검은 입술들은 확신했다.

미수와 소년 현수는 12년처럼 다시 함께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들만의 숲에서 아픈 기억은 잊고 행복할 수 있을까?

- p. 131

간절하게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버그나 몬스터의 배역 따위 없는 곳, 갚아야 할 빚도 없고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하는 기억도 없는 곳, 칼이나 날카로운 유리 조각도 없는 곳, 사람이 상하지 않는 곳, 사라지거나 위장되는 자도 없는 곳, 그런 곳.

숲이라면 좋을 듯했다. 호수가 있는 숲. M 외에는 그 누구도 가 본 적 없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M만의 숲이라면 남은 인생이 긴 낮잠으로만 소모된다 해도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삼촌 내외도, 엄마도 모두 나쁜 어른들이었다. 아무리 힘들기로서니 어린 아이를 빚쟁이에게 줘 버리고, 자신의 빚 때문에 어린 아이를 모른 척하고 제 살 길을 찾아 가버린다.

그런 어른들이 아이들의 가슴에 차가운 칼을 꽂았다.

그래도 멀고 먼 길을 돌아 미수와 현수가 다시 만나고 그들만의 숲에 당도한 듯 해서 너무 다행이다 싶다.

이 책은 뭐랄까, 어떻게 글을 써야할 지 한동안 고민하게 했다.

책을 읽고 난 후, 분명 내 마음 안에 미수와 현수에게 하고픈 말이 꽉 찬 것 같았는데, 막상 글로 쓰려니 시작부터 머뭇거리게 했다. 한 마디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에게 다행이다, 잘 됐다, 라는 너무 뻔한 말이라도 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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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6
정이현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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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정말 안녕한가, 돌이킬 수 없는 큰 병을 앓고 있진 않은가, 진정 소중한 것을 상실하고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작품해설 중

그 날은 세영의 생일이었다. 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하루를 시작할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죽는 것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는 자신이 죽는 순간의 구체적인 약과 제조법까지도 생각해 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특히 남의 인생에 끼어들거나 영향을 미치는 일은 '손톱의 때'만큼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영의 생인인 그 날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가 열리는 날이었고, 그녀는 그 곳에 가고 싶지 않고 피할 방법을 모색한다.

그녀의 남편 무원은 현재 영동의 작은 호텔의 사장이자 전무이사로 가 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무원은 선친이 물려준 이 지방의 작은 호텔을 매각하지 않고 자신이 운영하겠다며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온라인 커뮤니티 '파사(파는 사람)'에 가입해서 활동하다가 자신을 오해한 한 남자(닉네임 '발새')로부터 집착에 가까운 관심과 연락을 받고 있다.

- p. 69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은 복잡하고 성가신 일이었다. 무원은 설명이나 해명을 하는 대신 침묵했다. 사람들이 그 침묵을 수긍과 순응의 의미로 해석한다는 걸 성인이 되고서 알았다.

세영이 사는 동네는 1989년 개발 계획이 발표된 1기 신도시 시범 단지이고 재건축 이슈가 있는 곳이다. 동네 분위기를 보니 아이들의 학업에 많이 치중하는 곳으로 보이고, 세영 역시 딸인 도우가 공부를 잘해 도우를 중심으로 자신의 일과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역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보니, 쓸데없는 말들이 돈다. 남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쓸데없는 말들 말이다.

세영의 약국은 마치 동네의 사랑방인 듯 이 사람 저 사람이 와서 말들을 끄집어 내거나 말들을 흘리고 간다. 그렇지만 남에게 조그마한 영향도 주고 싶지 않은 세영은 노련하게 그런 말들을 흘려보낸다.

- p. 49

어떤 말들은 그 위에 티끌 하나 날아와 앉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다.

그리고... 학폭위의 결과로 인한 파장으로 동네는 다시 술렁인다. 하지만 그 술렁임에는 그 파장에 대한 애도나 위로, 애틋함은 전혀 없었다. 그저 언론에 보도되면 큰일이라는 정도의 곤란함이 그들에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정도의 곤란함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도우만을 걱정하는 세영과 대비되는 도우와 아이들의 모습은 그래서 더 온전한 슬픔이 느껴지는 듯 하다.

- p. 161, 작품해설 중

세속 도시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자신들의 죄를 덧입고 덧칠해 이제 죄책감조차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변형되어버렸지만 새로이 태어나 아직 죄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은 다르다.

-

정이현의 소설은 우리에게 마지막 경고를 내리는 듯하다. 어른들이 저지르는 은밀한 폭력이 소중한 아이들을 떠나보낼 것이며, 투명한 거짓으로 지은 세속 도시는 머지않아 신이 지배하는 거룩한 불모의 세상이 되리라는 두려운 진실 말이다.

세영의 모습 속에 내 모습이 보여 조금 움찔했다.

빈 말이나 헛 말,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과 행동을 피하는 모습은 그것이 큰 잘못이라고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난 그들을 욕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어, 라고 항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내 인생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이지만, 실상은 앞으로 나서는 게, 그들 안으로 들어가 적극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진다는 게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내 스스로가 죄를 덧입고 덧칠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 사이에 둘러싸여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희미해지고, 굳이 그들과 다른 지점에 서 있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그래서 시간이 없다며 온전히 슬퍼하고 온전히 애도하려는 도우와 아이들의 모습이 더 아름답고, 이 세속적인 어른은 가슴 한 곳을 아프게 찔린 것 같다.

- p. 147

그 애는 진심이다. 뜻을 알 수 없는 뜨끈한 감정이 솟구친다.

세영은 주저앉고 싶다. 도우가 바라는 대로 되돌아 나가주고 싶다. 강이의 빈소에 엎드려 오래오래 울고 싶다.

세영은 움직이지 못한다. 간신히 지금은 힘을 아껴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간구하는 밤이 언젠가 올 것이다. 짐작보다 더 빨리.

등 뒤에서 적막한 저녁의 구름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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