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보지 못한 숲 오늘의 젊은 작가 1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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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솔직히 어떤 이야기가 진행될 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여자는 무언가 슬픈 사정이 있어 보였고, 그녀 곁은 맴도는 소년은 왜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수호천사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특히 소년이 게임에 비유하여 이야기를 해 줄 때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게임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 p. 45

게임 창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다른 차원의 현실과 만날 수 있었다. 어떤 현실을 선택하여 어떻게 살다가 어떤 방식으로 제거되느냐 하는 문제는 그 순간의 기분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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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는 새로운 세계를 계속해서 클릭했다. 신비롭고 마법적이며, 때로는 무자비하고 잔학한 세계들은 전생의 미션 따위 깨끗이 잊으라고 종용하는 듯했다.

그녀. 미수 또는 M.

미수는 18층 건물의 안내데스크에서 일하고 있다. 그 곳에서 만난 남자 '윤'과 5개월 가량 연애를 했으나 그와는 헤어졌다. 하지만 늘 그를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집 안의 생필품들이 티나지 않게 조금씩 채워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윤이 그녀를 위해 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소년. 무명 또는 현수.

소년은 이름이 없다. 아무데서나 쉽게 잠드는 버릇이 있다. 소년은 위조문서 배달이나 주문을 받는 등의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으며, 새벽에 중국의 보스와 업무적인 메신져를 주고 받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소년은 미수의 곁은 맴돈다. 미수가 출근하고 집에 없을 때 그녀의 집에 들어가 모자란 생필품을 티나지 않게 채운다. 예를 들면 샴푸의 양을 늘린다든지, 화장실 콘솔에 두루마리 휴지를 2개 정도 둔다든지 하는 식이다.

- p. 24

소년의 크로스 백 안에는 적어도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을 증명할 수 있는 각종 신분증과 서류, 신용카드 등이 들어 있는 것이다.

소년은 그들 중, 그 누구도 아니다.

그리고 밝혀진 미수와 소년의 관계는 남매.

거기다 소년 현수는 여섯 살때 죽은 것으로 처리된 사람이었다.

12년 전 K시 지하철역에서 가스폭발 사고가 있었고, 미수와 현수의 엄마 빚으로 사채업자들의 끊임없는 방문을 받던 삼촌은 현수를 가스폭발 사고의 희생자로 둔갑시켜 사채업자에게 보상금과 함께 팔아 버린다.

미수는 당시 학교에 가 있어 이런 사실은 모른 채, 현수가 죽었다고만 생각하고 살아왔다.

0321. 미수의 집 비밀번호. 소년의 집 비밀번호. 그리고 12년 전 사고가 있었던 바로 그 날이다.

소년 현수는 미수에게 가고 싶지만 섣불리 다가가 자신을 밝히지도 못한다. 현재의 자신의 존재가 혹여나 미수에게 해가 될 까봐 그저 조용히 그녀 곁에서 바라볼 뿐이다.

- p. 53

유저들은 끊임없이 알려 줬다. 소년은 버그라고, 소년의 생존이 밝혀진다면 전체 시스템엔 치명적인 오작동이 일어날 거라고 그들의 검은 입술들은 확신했다.

미수와 소년 현수는 12년처럼 다시 함께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들만의 숲에서 아픈 기억은 잊고 행복할 수 있을까?

- p. 131

간절하게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버그나 몬스터의 배역 따위 없는 곳, 갚아야 할 빚도 없고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하는 기억도 없는 곳, 칼이나 날카로운 유리 조각도 없는 곳, 사람이 상하지 않는 곳, 사라지거나 위장되는 자도 없는 곳, 그런 곳.

숲이라면 좋을 듯했다. 호수가 있는 숲. M 외에는 그 누구도 가 본 적 없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M만의 숲이라면 남은 인생이 긴 낮잠으로만 소모된다 해도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삼촌 내외도, 엄마도 모두 나쁜 어른들이었다. 아무리 힘들기로서니 어린 아이를 빚쟁이에게 줘 버리고, 자신의 빚 때문에 어린 아이를 모른 척하고 제 살 길을 찾아 가버린다.

그런 어른들이 아이들의 가슴에 차가운 칼을 꽂았다.

그래도 멀고 먼 길을 돌아 미수와 현수가 다시 만나고 그들만의 숲에 당도한 듯 해서 너무 다행이다 싶다.

이 책은 뭐랄까, 어떻게 글을 써야할 지 한동안 고민하게 했다.

책을 읽고 난 후, 분명 내 마음 안에 미수와 현수에게 하고픈 말이 꽉 찬 것 같았는데, 막상 글로 쓰려니 시작부터 머뭇거리게 했다. 한 마디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에게 다행이다, 잘 됐다, 라는 너무 뻔한 말이라도 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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