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차의 애프터 파이브 - 막차의 신, 두 번째 이야기
아가와 다이주 지음, 이영미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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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희망이 시작되는 시간, 《첫차의 애프터 파이브》를 읽었다.

'막차의 신 두 번째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이 책은, 전작 <막차의 신>처럼 따뜻하고 잔잔한 다섯 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차의 애프터 파이브》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오후 5시처럼,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오전 5시 이후의 잔잔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밤새도록 불빛이 꺼지지 않는 신주쿠 혹은 신주쿠 가부키초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잔잔하면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사연들이 소개된다.

 

 

젊은 시절부터 해외 지사에서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했지만 지금은 신주쿠 러브호텔에서 야간 청소일을 하는 남자(첫차의 애프터 파이브), 더 큰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싶어 고향을 떠나 도쿄로 올라왔지만 정작 도쿄의 거리에서 위축되어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방황하던 여자(스탠 바이 미), 가부키초 한복판의 식당 '정식 이치아야'에서 만난 일하던 사무실이 문을 닫아 바텐더로 일하던 여자와 동일본 대지진으로 재난을 입어 도쿄로 올라와 호스티스로 일하는 여자(초보자 환영, 경력 불문), 헤어진 여자친구를 데리러 막차가 끊긴 사루하시역으로 가는 남자(막차의 여왕), 출장 성매매 여성을 손님이 있는 곳에 데려다주는 통칭 딜리버리헬스를 하는 남자(밤의 가족)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전개된다.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중심부에서 활약하는 그런 인물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주류가 아닌 주변부 인물들로 어떤 상실의 아픔마저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말이 해외지사지, 미국이나 유럽 등의 선호 국가가 아닌 비선호 국가에서 일해야 했던 남자는 결혼조차 하지 못하고 중년의 나이에 피치못할 사정으로 회사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나온 후 신주쿠의 러브호텔에서 야간 청소일을 한다.

또 노래를 부르고 싶어 대도시인 도쿄에 왔지만 정작 위축되어 노래를 부르지 못하던 여자는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용기와 자신감, 희망이 생긴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돌아갈 고향이 사라져버린 이의 사연도 안타까웠으나, 가부키초의 의외 장소에서 이들은 희망의 끈을 잡게 된다.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꿈을 이루지 못한 남자와 여자는 다른 분야에서 다시 희망을 꿈꾸려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출장 성매매 여성을 데려다주는 일을 하는 남자, 나름의 사연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 그리고 그 밤 여자는 특별한 누군가를 성매매 장소에서 맞닥뜨리게 되지만, 시원하게 털어내려 노력한다. 

 

 

'막차'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늦은 시간까지 일하다 겨우 퇴근하는 지친 얼굴이 자연스레 생각난다.

'첫차'라는 단어에서도 이른 아침부터 출근하는 지친 얼굴이 생각나는 건 사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이런 구절이 나왔다.

막차는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의 교통수단이라는 것...

하지만 이런 구절도 나온다.

오전 5시, 첫차가 다니는 지금부터가 밤에 일한 사람에게는 애프터 파이브라는 것...

 

 

어쩌면 모든 걸 가지고 화려하게 빛나는 그런 인물들이 아니기에, 오전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자는 평범한 생활을 하는 인물들이 아니기에, 이들의 첫차 이후의 희망을 그리고 생각하는 그 시간이 더 따뜻하고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8월의 마지막 금요일 밤, 이들은 화려한 불빛들이 가득한 신주쿠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간다.

그렇게 맞이한 토요일 아침, 이들의 새로운 시작이 펼쳐진다.

물론 이들의 삶은 앞으로도 여전히 고단하고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본 따뜻한 희망의 불꽃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아 조그마한 빛을 내 줄 것이다.

그렇게 희망의 첫차, 첫차의 애프터 파이브는 계속되리라.

 

- p. 55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곤에 지친 얼굴이었지만, 그 물결에 역행하는 두 사람은 활기가 넘쳐났다.

시각은 오전 5시, 밤에 일한 사람에게는 지금부터가 애프터 파이브인 것이다.

 

 

- p. 102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모두 막차로 돌아갈 시간이야."

"막차를 타러 서둘러 가는 사람들을 볼 때가 제일 외로워."

막차는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을 위한 교통수단인 것이다.

 

 

- p. 260

1구, 1구, 그냥 곧 날아올 공만 바라보는 게 좋았어.

헛스윙해도 아무 문제 없잖아. 다시 바로 다음 공이 날아오니까.

앞의 공에서 헛스윙을 했어도 다음 공을 칠 때는 전혀 상관없어.

헛스윙을 몇 번을 해도 또다시 새 공이 나와. 실패가 꼬리를 끌지 않지. 그냥 다음에 날아올 공을 칠 생각만 하면 돼.

이런 건 인생에서는 거의 없잖아. 배팅센터 정도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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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바침 - 결코 소멸되지 않을 자명한 사물에 바치는 헌사
부르크하르트 슈피넨 지음, 리네 호벤 그림, 김인순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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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바침

- 결코 소멸되지 않을 자명한 사물에 바치는 헌사

 

책을 참 좋아한다. 어린 시절에는 이 책 저 책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골라서 읽고 느끼고 생각하는 그 과정들이 다 좋았다.

 

이 책 <책에 바침>은 정말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저자가 '책에 바치는 헌사'이다.

 

아직 자동차가 사용되지 않았을 시절, 말을 이용해 온갖 운송과 생활을 했던 그 때, 자동차가 혜성같이 등장했지만 사람들은 자동차가 말을 몰아내고 그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책, 기계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압도적으로 우리 생활에 이용되는 지금 현대의 또 다른 대단한 발명품으로 '전자책'이 생겨났다.

자동차가 말이 하던 모든 일들에 사용되는 것처럼, 전자책이 종이책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그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저자는 이 종이책이 자신의 곁을 떠나게 되면, 그래서 자신이 잃어버리게 될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 p. 21, 서문 중

그래서 책이 언젠가 내 곁을 떠나게 되면, 내가 잃어버리게 될 것들을 이 책에서 한번 열거해보려 한다. 물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열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책을 옹호하는' 새로운 논거를 발굴해낼 생각도 없다. 그보다는 기이하게도 우리 모두가 아주 당연시 여기는 책을 둘러싼 문화 현상 전반에 주목하려 한다. 너무나도 친숙한 나머지 책이 없어진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될 그 모든 것에.

 

사실 <책에 바침>이라는 제목만 보고는, 유명한 고전이나 책들을 이야기해주는 책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 <책에 바침>은 진짜 '책'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가 책이라고 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저자' 외에도,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데에는 많은 텍스트가 필요하고 편집과 인쇄, 제본의 작업까지 필요하다.

 

- p. 25

이제 완성된 작품으로서 수백만 권의 책은, 세상의 모든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들이 확고한 형태, 즉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가진다는 확신을 더욱 고양시킨다.

가령 인간의 삶이 그렇듯이.

 

이 책 <책에 바침>은 의외로 재미있다. 작가는 말 그대로 책 그 자체를 여러 분야로 나누어서 이야기해준다.

가령, 새 책, 헌 책, 큰 책과 작은 책, 아름다운 책, 훼손된 책, 불완전한 책, 주석을 붙인 책 등으로 책 몸체에 대하여도 이야기하고,

좋아하는 책, 알맞은 책, 부적절한 책, 비싼 책과 싼 책, 선물 받은 책, 빌린 책, 분실된 책, 훔친 책, 금지된 책책의 사용에 대하여도 이야기를 해 준다.  

 

책의 여러 모습과 여러 쓰임새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경험도 빠뜨리지 않는다.

'발견된 책' 부분에서 작가는, 배회하는 애서가를 위한 마지막 남은 피난처 벼룩시장에서 살까 말까 망설였던 수천 권의 책과 결국 손에 넣은 수백 권의 책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작가는 벼룩시장에서의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책 중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식사도 제대로 못한 채 예민해져서 책을 고른다. 그렇게 몸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로 인해서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책 몇 권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 p. 71

내가 실제로 이 책들을 골랐을까? 아니면 혹시 이 책들이 나를 선택한 건 아닐까? 때로는 책들이 정말로 나를 선택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그 책들은 수십 년 동안 제자리를 마련하려고 계획해왔고, 그래서 그레펠트 피쉘른 또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이 특별한 토요일 아침에 나의 길과 교차한 것이다.

이건 순전히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서로 얽힌 길을 가던 두 사람이 결국 만나서 평생 함께 지내는 것처럼 숙명 같은 건 아니었을까?

 

책이 나를 선택하다니, 이런 로맨틱한 문장이라니...

확실히 지금의 중고 서점처럼 깨끗하게 정리되고 검색 버튼 하나로 위치와 재고 사항까지 파악할 수 있는 그런 곳에서라면, 그 책과 나와의 만남이 이렇게 로맨틱하게 느껴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그 곳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는 그 무언가를 찾아낸다면, 많은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느낌이려나...

문득 아주 오래전에 일본 여행에서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중고 가게에서 cd를 고르고 골랐던 일이 기억이 났다. 가게 앞의 박스 안에 cd가 한가득 들어 있었고, 매장 안에도 가득했다. 일본어를 어설프게 아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카시마 미카' cd를 찾느라 박스를 뒤지고, 매장의 선반을 눈이 뚫어져라 탐색하고 탐색해서 결국 2~3개를 샀었다.

그 때의 그런 느낌이려나... 그 때 엄청 기분이 좋았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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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책에 바침>은 애서가들에게는 참으로 좋은 기분을 선사하는 책이 아닐까.

종이책은 전자책이나 다른 매체에 자신의 자리를 점점 내어주고 있지만, 여전히 종이책을 무한 애정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전자책이 아무리 가볍고 편리하다 해도, 종이책의 손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너무도 많다. 나 역시도 전자책을 읽지만, 여전히 1순위는 종이책이다. 

 

종이책이 사라진다? 글쎄, 미래의 이야기는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너무나도 바란다. 두근두근거리며 종이를 넘기는 그 손맛, 책 주변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종이 냄새가 너무도 그리워질테니 말이다.

 

- p. 127

나는 개인적으로 조금은 다른 이유에서 초판본을 더 좋아한다. 한편으로는 당연하게도 책 수집가의 자부심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판본에 인쇄된 페이지들을 응시할 때 우리는 작가가 인쇄소에서 갓 나온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응시했던 것과 같은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감동 이상의 것이다.

 

- p. 163

읽힌 책은 그것을 읽은 독자가 살아온 삶의 일부이다. 심지어는 아주 중요한 장의 특별한 한 단락이 삶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독자가 가장 머물러 있고 싶어 했던 부분, 가장 편안함을 느낀 부분이었다면 언제나 그렇다. 모든 텍스트는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와 동시에 독자에게는 그 세계를 여행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따금씩 그 여행을 회상하기 위해서라도 읽힌 책은 여행 기록처럼 보관될 필요가 있다. 여행기록들이 다 그렇듯이 기억을 생생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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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에게 - 김선미 장편소설
김선미 지음 / 연담L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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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살인이 시작되었다."

열일곱 살의 진웅, 그에게는 빚독촉에 시달려 일가족 동반자살을 시도하다 엄마를 죽게 만든 아버지, 저수지에서 어린 소녀를 떨어뜨려 죽게 만든 범인으로 의심받아 마을을 떠난 형이 있다.

오늘은 아버지가 출소하는 날이다. 그리고 마을을 떠난 후 서울에서 생활하던 형 진혁이 내려오는 날이기도 하다.

조용했던 시골 마을은 유등 축제로 들썩이고, 아버지와 형이 집으로 돌아온 그날, 진웅을 은근히 괴롭히던 반장이 실종된다.

그리고 셋째 날, 할아버지 성묘를 다녀오던 진웅의 가족들은 근처 양계장에서 누군가에게 둔기로 맞은 채 죽어버린 반장을 발견한다.

반장이 실종된 첫째 날에 아버지, 진혁, 진웅은 모두 늦은 밤 집을 나섰다.

진웅은 자신이 집을 나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다음날 잠에서 깨어 자신의 몸에 흙이 묻어 있다든가, 할퀸 상처가 있다든가, 형의 옷으로 옷이 갈아입혀져 있다든가 하는 이상한 정황들을 알게 된다.

진웅은 형이 자신이 잠들기 전 밖으로 나갔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도 방에 없었다는 걸 의아하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진혁 또한 그 밤에 밖을 나갔고 온 몸에 흙 따위를 묻히고 들어왔다.

진웅은 그 외에도 형이 아버지의 방에 들어갔다 나오며 뭔가를 숨기는 모습, 거짓말을 하는 모습 등을 보며 진혁이 사건의 범인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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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진웅의 시선, 아버지의 시선, 진혁의 시선 등으로 순서대로 흘러간다. 진웅과 아버지를 지나 진혁의 시선까지 나아가면서 우리는 10년 전 저수지 사건과 이번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점점 깨닫게 된다.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를 앎과 동시에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가슴이 울컥한다.

이 소설에서 10년 전 아버지는 사업이 실패하자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기로 결심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반자살'이다. 그러나 작가도 밝혔듯이 이 '동반자살'이라는 단어는 명백히 틀렸다. 아버지 외에 다른 가족들은 '스스로 죽겠다'라는, 즉 '자살'의 의지가 전혀 없었으니, 이 '자살'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틀렸다. 가족들은 아버지에게 '강제로 희생' 당했다.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던 형제 진혁과 진웅은 가까스로 살아남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가족인 아버지가 엄마를 자신들의 눈 앞에서 죽이고 자신들마저 죽이려 했다라는 끔찍한 사실은 절대 잊지 못한 채 마음 속 상흔이 되어 남는다.

범인이 누구인가, 보다 더 안타까운 이 가족들의 비극에 가슴이 아팠다.

10년 전 시작된 가족의 비극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그 비극이 언제 끝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을 듯 하다.

한 남자의 잘못된 선택이 부른 가족의 비극은, 여전히 유효하다.

 

 

 

 

- p. 18

세상의 모든 죽음은 엄마의 죽음으로 이어졌기에 내게 죽음은 그저 어둡고 끈적끈적한 무엇 같았다. 이를테면, 여름의 밤. 그래, 밤! 어쩌면 죽음은 내게 매일 오고 마는 밤일지도 모른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고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는 밤.

- p. 337

평생을 갚아도 아버지는 우리한테 죗값을 못 갚아내요. 왜냐고요? 우리는 그날 모두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죽은 삶을 살았다고요,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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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시간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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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입니다.

이 살인 사건을 판가름한 것은 '규칙'입니까?

'도덕'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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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네마치에서 경범죄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처음에는 사소한 일로 시작되었지만, 어느날부터 사건으로 발전했다. 도로 급커브 출구 쪽 지점에 놓인 골판지 상자를 운전자가 미처 보지 못하고 밟았고 그 안에는 토끼의 사체가 있었다. 그리고 상자에는 빨간색 크레파스로 '생물 시간을 시작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얼마 후에 여자아이가 공업용 접착제가 발린 철봉에 매달린 채 발견되었고, 아이의 등 뒤에 빨간색 크레파스로 '체육 시간을 시작합니다'라고 적힌 찢어진 노트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지역 유지인 야오야기 집안의 장남이자, 유명 도예가인 야오야기 후미이치(난보)가 자살한 현장인 자택에서 '도덕 시간을 시작합니다. 죽인 사람은 누구?'라고 적힌 낙서가 발견된다. 

 

현재 일을 쉬고 있는 프리랜서 영상 저널리스트인 후시미는 13년 전에 발생한 나루카와 제2초등학교 살인 사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의 촬영 제안을 받는다.

13년 전 나루카와 제2초등학교 강당에서 마사키 쇼타로가 강연 도중에 과거 제자였던 무카이 하루토의 칼에 찔려 사망한다. 그 자리에서 붙잡힌 무카이는 재판 중에도 해명이나 반성의 말조차 하지 않았고, 판결 직전 "이것은 도덕 문제입니다"라는 유일한 한 마디만을 남겼다.

 

연속 경범죄 사건과 나루카와 제2초등학교 사건이 '도덕'이라는 한 단어로 기묘하게 교차하고, 범죄의 동기 역시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자살한 도예가 난보의 집에 남겨진 낙서를 적은 건 정황상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경찰은 후시미의 아들은 도모키를 의심하는 듯 했다. 도모키가 미술부원인 점, 난보의 저택 근처에서 자주 놀던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점 등으로 말이다.

거기다 다큐멘터리 관련해서도, 후시미는 연출인 오치 후유나가 중요한 뭔가를 숨긴다고 여겼고, 그녀가 촬영 대상인 당시 목격자들을 다루는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연속 경범죄를 일으킨 범인이 난보 선생의 자살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오치 후유나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녀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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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도덕의 시간》뿐만 아니라, 책 속에서도 '도덕'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이지만, 평소에 '도덕'이라는 단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 노약자 혹은 임산부에게는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등등 일반적인 도덕에 대하여만 굳이 의식하지 않은 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던 듯 하다.

 

책의 시작, 페이지 상단에 늙은 현자와 소년의 대화가 나온다. 책을 읽기 전에는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 '소년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개를 잡아 먹으면 안 되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지금은, 그 심정이 조금 복잡해졌다.

당연하다는 것은 과연 존재할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그런 행동을 정당화할 순 없지만, 그걸 일률적으로 모든 환경의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

 

책은 시종일관 흥미롭게 진행된다.

후시미 주변에서 발생한 연속 경범죄 사건과 나루카와 초등학교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는 것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범인이 누구일까라는 생각과 함께 도덕의 의미에도 다시금 생각이 미친다. 

 

다 읽고 난 후 서평을 어떻게 써야할 지 묵혀둔 사이 시간이 너무 흘러버려서 다시 책을 읽었다.

다시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각각의 인물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지만,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추리소설 작가인 오승호 님의 다른 소설도 어서 읽어보고 싶다.

특히 작가에게 오야부 하루히코상을 안겨 주었다는, '범죄자와의 공생은 가능한가'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 <하얀 충동>이 무척 궁금하다.

 

 

 


- p. 159

무카이가 마사키를 죽였다는 판결, 그리고 무카이 하루토의 죄를 판가름한 것은 과연 법이라는 이름의 규칙일까요? 아니면 도덕일까요?

- p. 409

도덕이라...

참으로 모호하고 그럴싸한 단어. 실상은 무기력한 주제에 마치 규칙처럼 굴려는 단어죠.

대체 누가 그런 걸 정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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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자 - 합본 개정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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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학자가 쓴 범죄스릴러 소설, 거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니.. 너무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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