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도키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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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쿠미와 레이코의 아들 도키오는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병상에 누워있다.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은 레이코 집안의 유전병으로 레이코 역시 외삼촌 역시 병으로 죽었다. 결함 유전자가 x염색체에 내포되어 있어 남성의 경우 증세가 나타날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레이코는 이런 이유로 다쿠미의 청혼을 거절했지만 결국 승낙하고, 아이 역시 갖지 않기로 했지만 도키오를 임신했을 때 다쿠미와의 상의 끝에 결국 낳기로 결정한다.

건장하게 잘 자라던 도키오는 중학교 졸업 직전부터 몸에 이상이 나타났고, 곧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도키오의 생명의 불이 얼마남지 않은 어느 밤, 다쿠미는 레이코게 도키오가 스물세 살의 자신을 만나러 시간을 거슬러 왔었다라고 이야기한다. 

 

한방을 터뜨릴 거라며, 머리 쓰는 일을 할 거라며 도통 제대로 된 일도 하지 않고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제멋대로 살아가던 다쿠미는, 또다시 일을 그만둔 어느날 아사쿠사 하나야시키에서 수수께끼 같은 청년 도키오를 만난다.

다쿠미는 자신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도키오를 친모 쪽에서 보낸 사람이 아닐지 의심하면서도 왠지 그가 친숙해 내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쿠미는 도키오를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한다.

당시 다쿠미는 지즈루와 사귀고 있었는데, 지즈루가 어렵게 마련한 경비원 일자리 면접을 또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지즈루를 실망시키고, 그렇게 지즈루는 쪽지만 남긴 채 다쿠미의 곁에서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

지즈루가 떠났다는 걸 믿을 수 없는 다쿠미는 그녀가 일한 술집을 찾아가고, 그 곳에서 마주친 검은 양복의 이상한 사람들도 그녀를 찾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다쿠미와 도키오는 지즈루를 찾아 오사카로 향하고 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다쿠미는 친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세상 모든 것에 불평불만이 많고 세상탓을 하는 한심한 캐릭터다. 제대로 건실하게 일하려는 노력보다는 한방을 노리고 쉽게 흥분하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지즈루를 찾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앞뒤 고려하지 않은 채 홧김에 일을 저지르는 경우도 많다.

도키오는 그런 다쿠미를 안타까워하며 조언을 하고, 때로는 행동을 하면서 그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한다.

철딱서니 없는 아빠를 철든 아들이 나쁜 길 안 들게 계속적으로 케어하고 있는 모습이랄까.

그렇게 철없고 대책없고 꿈없고 희망없던 다쿠미는 도키오와 함께 하는 동안 점점 변화한다.

 

도키오는 끝없는 애정과 노력으로 철없는 아빠를 변화시키고,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행복했던 시간도 희생한다.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도키오는 누구 아들인지 정말로 멋지고 훌륭한 감동 그 자체였다. 

 

이렇게 따뜻한 히고시노 게이고라니,

이렇게 따뜻한 SF+스릴러+미스터리+감동을 주는 소설이라니.

나의 삶을 바꾼 미래에서 온 나의 아들 도키오.

아사쿠사 하나야시키에서 기다릴게.

 

나는...

미야모토 다쿠미 씨, 당신 아들이야. 미래에서 왔어. _ p. 322

 

 

죽음을 앞둔 인간의 마음을 알기나 해? 헛소리 좀 작작 해. 불길이 코앞까지 닥쳤다고.

그런 때에 당신은 미래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미래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이 그냥 나올 것 같으냐고.

좋아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고 확신할 수 있으면, 죽음 직전까지도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이라고. 당신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미래였어.

인간은 어떤 때라도 미래를 느낄 수 있어. 아무리 짧은 인생이어도, 설령 한순간이라 해도 살아 있다는 실감만 있으면 미래는 있어.

잘 들어.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그건 마음속에 있어.

그것만 있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 _ p.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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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소용돌이 안내소
아오야마 미치코 지음, 전화영 옮김 / 직선과곡선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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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의 어느 길에서 갑자기 주변이 달라지고, 그렇게 길을 헤매다 우연히 발견한 '가마쿠라 소용돌이 안내소'로 들어간 사람들은 나선형 계단을 돌고 돌아 지하로 내려가게 되고 그 끝에서 똑같이 생긴 쌍둥이 할아버지 두 분과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암모나이트 소장을 만나게 된다.

 

"멀어지셨습니까?"

쌍둥이 할아버지의 물음에 이들은 이상하게도 각자의 마음 속 고민거리들을 털어놓게 된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이런 게 아니야, 라며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고민하는 남자.

보통의 아이들처럼 공부해서 대학에 가기를 바랬건만 대학 대신 유튜버가 되겠다는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여자.

청혼을 받았지만 결혼 자체에 대한 고민으로 결정을 망설이고 있는 여자.

반에서 외톨이가 되기 싫어 속정을 나누는 친구가 아님에도 그들 옆에서 친구인 듯 지내는 여중생.

연극이 좋아 대학 졸업 후에 극단을 만들었지만 인기를 끌지 못한 채 어느덧 마흔이 되어버린 극단의 극작가.

가족 없이 홀로 고서점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노인.

 

이들은 우연히(어쩌면 기묘하게) 들르게 된 가마쿠라 소용돌이 안내소에서 쌍둥이 할아버지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쌍둥이 할아버지들은 그들에게 암모나이트 소장님의 말씀을 전한다.

소장님이 커다란 항아리에 풍덩 빠지며 일으키는 소용돌이 속에서 나타나는 그들을 도와줄 하나의 아이템과 '난처할 때 소용돌이 캔디' 1개도 함께 말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고민은 휘황찬란하거나 비범하거나 한 고민들은 아니었다.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일념으로 들어간 회사에서 내가 꿈꿔 온 일들은 하나도 하지 못한 채 불평만 쌓이는 일이나, 다른 아이들과 같았으면 하는 마음에 아이의 꿈에 대해서 제대로 귀기울이지 않는 일은 많은 사람들이 품어 온 고민 중의 하나일 것이다.

또 결혼을 망설이는 일이나 남들에게 외톨이로 보이기 싫어 누군가의 옆에 있는 일도 흔한 일이 아닐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잠깐의 기쁨을 가졌지만 점점 현실은 녹록치 못하고 계획하던 성과가 나오지 않을 때 현실에 점점 타협하는 일도 있을 것이고, 좋아하는 상대이지만 나의 조건이 너무 좋지 않아 상대의 마음을 거절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의 고민일 수도 있고, 나의 친한 주변 사람들의 고민 같기도 한 각자의 고민들을 가슴에 품고 이들은 조금씩 변화해 간다. 그리고 그 변화의 길에 발생한 어떤 순간에 '소용돌이 캔디'는 힘을 발휘해 그들을 도와준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들이 그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앞으로 한걸음 나아갔기에 '소용돌이 캔디'가 필요한 상황도 발생한 것 아니었을까.

그렇게 기적같이 맞게 되는 깨달음의 순간, 그들은 더 멋지고 강한 사람이 되어간다.

 

각각의 이야기는 2019년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6년씩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펼쳐지는데, 각 이야기에서 등장한 인물들은 다른 이야기에서도 등장하며 전체적인 이야기를 더 풍성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무언가 고민에 막혀 생각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 누군가 내 고민을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쌍둥이 할아버지와 암모나이트 소장님을 만나게 되면 어떨까?

두 할아버지가 양손 엄지 손가락을 쑥 내밀며 "나이스 소용돌이!"를 외치고, 먼 옛날에 멸종했을 것이 분명한 암모나이트 소장님은 항아리에 풍덩 뛰어들며 소용돌이을 일으키는 기묘한 이 곳, 하지만 기적의 순간을 선사해 주기도 한 이 곳.

언젠가는 꼭 만나고 싶은 <가마쿠라 소용돌이 안내소>에서 나도 작은 기적을 만날 수 있을까?

 

그냥 나는 흘러서 도착한 곳에서 그때그때의 최선이 일으켜 줄 기적을 믿었어.

예상치 못한 전개로 다음 문이 열리는 게 재미있거든.

그건 회사원이든 프리랜서든 마찬가지야.

그때그때의 최선의 결과,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거지. _ P.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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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사라진 밤
루이즈 젠슨 지음, 정영은 옮김 / 마카롱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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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스릴러를 읽다보면,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되다가도 가끔, 아니 자주 주인공의 행동에 의문을 품었다.

거기서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되지, 라든가 그 사람한테는 말하지마, 라든가 하는 별별 말을 주인공에게 쏟아내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얼굴이 사라진 밤>은 주인공의 행동에 딴지를 걸 수가 없었다.

앨리슨은 모르는 남자와 데이트한 다음날 안면인식장애 판정을 받게 되어 자신의 얼굴은 물론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버리니 말이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그녀의 복잡하고 불안한 그 심리에 내가 어찌 딴지를 걸 수 있으랴.

 

앨리슨은 사랑했던 남편 매트와 별거중이다. 그녀는 여전히 매트와의 관계가 개선될 거라고 믿고 있지만 친구 크리시와 줄리아는 앨리슨에게 데이트 앱에 가입해 보면 어떻겠냐고 말한다.

처음에 앨리슨은 거절했지만, 마음이 통할 듯한 남자 이완과 쪽지를 주고 받다가 만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완을 만난 다음날 집에서 깨어난 앨리슨은 자신의 몸이 상처투성이고, 전날 밤의 데이트에 대한 자세한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거울 속에는 자신이 아닌 전혀 낯선 모르는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걱정되어 방문한 남동생 벤 조차 전혀 얼굴을 모르는 낯선 남자일 뿐이다.

 

병원에서 안면인식장애 판정을 받고 돌아온 앨리슨, 그녀는 옆집에 사는 친하게 지낸 제임스나 친구 줄리아의 얼굴 역시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함께 살던 크리시는 어디에 있는지 연락도 되지 않는다.

그날밤 누군가 현관문을 열려고 하고, 창문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려 하고, 한참 창문을 두드린다. 그녀는 집에 찾아온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 남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에 엄청난 두려움을 느낀다.

잠잠해진 후 옛 사진들을 보던 앨리슨은 자신이 엄마는 알아본다는 사실을 깨닫고 희망을 갖는다.

하지만 다음날 자신의 차 사이드미러가 부서져 있고 부서진 범퍼엔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걸 보고 다시 공포에 휩싸인다.

그 뒤에도 알 수 없는 누군가는 계속 그녀를 괴롭히고 위협하고, 그녀는 자신이 잃어버린 그날밤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로부터 협박을 받으면서도 앨리슨은 과거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머뭇거린다.

과거의 그 사건이 있었을 때 경찰은 그녀의 가족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고, 그녀와 남동생 벤, 엄마는 원래 살던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꿔 살아야 했다. 그래서 경찰을 믿을 수 없었다.

또 자동차 상태나 자신의 몸 상태를 봤을 때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도 몰라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언급되는 그녀가 어린 시절 겪었던 고통은 어떤 것이었을까?

 

시간이 갈수록, 앨리슨이 그 날의 기억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앨리슨이 기억하지 못하던 수면 아래 감춰져 있던 진실들이 드러난다.

또 앨리슨이 수없이 되뇌이던 과거의 사건도.

그녀가 겪었던 그 고통스러운 과거와 현재의 이 사건이 연관이 있는 것일까?

과연 그 토요일 밤, 앨리슨에게는 무슨 일이 닥친 걸까?

 

읽는 내내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앨리슨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의심스러웠다.

사람의 얼굴을 구분할 수 없는 앨리슨은 그 사람의 특징적인 행동, 소품, 머리색이나 스타일 등으로 대략적으로 사람을 구분할 뿐인데, 그런 앨리슨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또 독자는 앨리슨의 시선에서 상대방이 누군지를 확인할 수 밖에 없는데,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 수 없으니 어디까지 믿어야 하고 어디까지 의심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사실 얼굴이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누구를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얼굴이 보여도 믿고 의지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 말이다.

 

사실 범인은 쉽게 예상이 되었다.

앨리슨에 대해 그렇게까지 알고 있다는 것에서 짐작이 되긴 했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건 범인이 왜 앨리슨에게 저런 행동을 하는가였다.

원인, 이유를 모르니 그 사람이라 확신할 순 없었지만, 가장 의심스러운 그 사람에게 앨리슨이 무방비 상태로 다가가는 순간들마다 내가 긴장되어 멈칫거렸다.

 

이 소설 너무 재미있었다.

안면인식장애와 단기기억상실을가진 주인공이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범인을 찾기 위해 단서들을 추적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 주변 사람들을 쉽게 믿을 수 없다는 점들이 긴장감을 점점 고조시켰다. 그리고 주인공의 곁을 맴돌며 그녀를 괴롭히는 범인에 대한 오싹함과 궁금증도 커져갔다.

주인공이 누구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진 속 엄마의 얼굴만을 기억해냈는데, 범인의 정체와 이유를 알게 되자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안면인식장애와 단기기억상실이라는 소재에서 오는 긴장감은 물론이고, 스토킹, 협박, 폭행, 불법 촬영 등 사회 문제까지 녹여 낸 멋진 심리스릴러 소설이었다.

현실적인 공포에 반전까지 가득한 심리스릴러 소설 한 편 찾는다면, 이 책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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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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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립고 고맙고 아련한 느낌이 든다.

예전만큼 자주 뵙지 못하는 할머니라 그립고, 어린 시절 나를 예뻐해주셨던 할머니라 고맙고, 젊은 시절 얼마나 고생하셨을까를 생각하면 아련하다.

 

나에게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나의 할머니였던 그녀였기에, 어쩌면 나의 할머니가 아닌 그녀의 삶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듯 하다.

그래서 이 책 <나의 할머니에게>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 물론 손녀를 사랑하고 애정으로 보살피는 우리가 익히 아는 할머니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한국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중인 여성 작가 6인이 각자만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이 책은 그래서 더 특별하고 따스하다. 우리는 늘 우리 곁에 존재하고 우리를 애정했던 그녀들을 제대로 응시한 적이 없었으니까.

 

제사 전날이면 늘 꿈에 찾아왔던 남편이 이번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대신 그는 어느새 관계가 소원해진 딸과 아들,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을 찾아갔다. _ 윤성희 | 어제 꾼 꿈

할머니의 네 번째 기일에 남동생은 20여년 전 프랑스에 살 때 1층에 살던 이웃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내고, 그녀는 그동안 읽지 않고 보관해 둔 할머니의 일기장을 펼친다. _ 백수린 | 흑설탕 캔디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미래, 노인들이 거주하는 유닛 A, B, C, D, F가 있고, 민아는 가장 쾌적한 최상위 유닛인 A를 거쳐 현재는 유닛 D에 거주한다. _ 손원평 | 아리아드네 정원

 

모든 이야기들이 좋았지만, 위 3가지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어제 꾼 꿈> 속 '나'는 하루하루 동네의 다른 노인들과 이것저것 배우면서 하루를 보내지만, 실상은 자녀들에게 소외되고 주변 친지들과도 평탄하지 못하다. 물론 소설 속 '나'는 친모가 아닌 계모라는 특수사정이 플러스되어 자녀들과의 관계가 더 안 좋긴 하지만.

<흑설탕 캔디>는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고 몰랐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사망 후에 남매를 돌봐주던 할머니는 아빠가 파리로 파견 근무를 가게 되자 남매를 위해 전혀 낯선 외국으로 따라가게 된다. 남매가 곧 그 곳에 적응하며 자신들의 생활에 몰두하자, 할머니는 그야말로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 덩그라니 놓여 버렸고, 그 안에 외로움과 고독이 점점 쌓여 간다. 그러다 어느날 1층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발을 멈추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그와 사전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며 조금씩 마음 속 활기를 되찾아간다.

물론 지금에 와서 할머니와 그의 관계가 연애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다. 그래도 햇살 가득한 방에서 함께 각설탕을 쌓으며 환하게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리는 그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저 마음이 따스해진다.

<아리아드네 정원>은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렸다. 노인 인구가 전체의 절반을 넘어서는 사회, 저출산 문제가 계속되자 이민자 수용 정책을 펼쳐 다양한 인종이 유입된 사회, 재정상태에 따라 유닛이 달라지고, 돈이 있다면 죽음조차 정할 수 있는 사회.

그러나 세금의 상당수가 유닛에 쓰여지고 젊은이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있었다.

"어쩌면 우린 인종이 아니라, 젊음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단결할지도 모르겠어요.(P. 226)"

우리도 나이가 들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다고 머릿 속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현재에서의 이 간극은 메우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위 문장이 틀리지 않다는 걸, 그리고 그들도 살기 위해서라는 걸 알지만 씁쓸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또, 소설 속 모습이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어 다가오는 미래가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평소에도 좋아하던 소설가들의 단편소설이라 좋았다.

그냥 흘려버렸을지도 모를 우리 할머니들의 모습이 있어 좋았다.

그리고 소설 속 할머니들이 여전히 따뜻해서 더 좋았다.

 

나를 참 많이도 업어주고 예뻐하셨던 우리 할머니가 역시나 떠오른다. 정말 할머니란 단어만 봐도 왜 이렇게 애틋해지는 걸까.

할머니 등에 업혀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나, 할머니 댁 마루에서 사촌들과 커다랗게 떠들며 웃는 어린 시절의 나, 할머니 댁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사촌 언니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반짝반짝거린다.

내게는 반짝반짝 빛나는 우리 할머니, 그런 우리 할머니가 생각나서 더 좋았던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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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향하는 물고기들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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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좋은 점은, 역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엿볼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도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과 사랑의 모습을 볼 수는 있지만, 책 속 문장으로 그런 상황을 목도할 때는 마치 머리와 마음이 모두 그 인물이 된 것만 같아 감정의 여운이 더 강하게 남는다.

 

작년에 <퍼스트 러브>를 통해 알게 된 시마모토 리오 작가의 연작소설 《바다로 향하는 물고기들》을 만났다.

홋카이도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도쿄의 하숙집 '마와타 장'에 온 야마토 요스케의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된다.

천진하고 순수하고 조금은 눈치없는 야마토는 대학에서 만난 프랑스 인형처럼 아름다운 에마 선배에게 반하지만, 성격 나쁜 그녀는 야마토를 이리저리 휘두른다.

예의바르고 배려심 많은 구지라이는 덩치가 크고 통통한 몸 떄문에 어린 시절부터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런 그녀는 생전 처음 야마토에게 칭찬을 듣게 되고 그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좋아한다는 고야 선배의 고백에 마음이 흔들린다.

어린 시절 겪은 일 때문에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쓰바키는 여고생인 야에코와 사귀고 있고, 마와타 장의 주인이자 소설가인 와타누키는 같은 층에 묵고 있는 화가 세우를 내연의 남편이라고 소개한다.

 

이들의 사랑은 무언가 순탄하지 않다.

야마토는 에마를 좋아하지만, 에마가 졸업한 선배와 불륜 관계이고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그럼에도 그는 더 그녀를 좋아하게 된 자신을 깨닫는다.

구지라이 역시 야마토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자신에게 솔직하게 아픔을 드러내며 기대오는 고야 선배에게 마음이 조금씩 움직인다.

마와타 장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과 야에코를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쓰바키는 강한 믿음과 애정을 가지고 자신 옆에 있는 야에코에게 점점 마음을 열고 용기를 내어 한발 전진하게 된다.

그리고 와타누키와 세우의 관계는 더욱 쉽지 않다.

두문불출하는 세우와 와타누키의 첫 만남은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설 속 쓰바키는 와타누키와 세우의 관계를 알게 된 후 그들을 비난한다. 아니, 쓰바키가 아닌 누구라도 그들의 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비난까지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이해한다며 등을 토닥일 수도 없으리라.

 

이처럼 마와타 장의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남들이 보기에는 어쩌면 불안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종류의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의 사랑이든, 어디 사랑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랴.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하게 되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문장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랑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들은 잘 알지 않을까.

다만 이들의 사랑은 남들과 조금 다를 뿐, 누구에게든 사랑은 어렵고 어렵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이들의 사랑이 앞으로도 순탄지 않으리라 예상은 되는데도, 어째 가슴이 따스해졌다.

아마 이들이 각자 자신이 원하는 행복의 방향으로 크게 한발짝 내딛었기 때문이리라.    

 

햇살 반짝이는 식당의 물고기 무늬 포렴 뒤로 정답게 식사를 하는 마와타 장 사람들의 모습을 괜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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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61)

거기에 기댈 수 있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간단해질까.

휴일의 데이트, 식사 후의 두서없는 대화,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포옹, 수많은 평범함.

 

(p. 280)

다들 언제나 사랑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서 타인을 소유하려고 하잖아.

사랑의 감정을 공유한 사람끼리는, 개인의 영역을 얼마든지 침범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내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면, 그걸 그대들의 언어로 바꿔보면 되겠지. 사랑이라는 말이 될 테니까.

 

(p. 303)

하고 싶은 말일수록, 두려워서 언제나 말로 하지 못한다.

한마디를 뱉는 순간, 다른 모든 말을 잃게 되니까.

-

그 사람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언제까지나 꿈꿀 수 있었다.

아아 그래. 그 사람 말이 정말 옳네.

나는 언제나 세우 씨를 알지 못해서, 그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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