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3
김이설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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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 지상주의라는 말이 우리 주변에서 끝없이 떠돌던 때가 있었다. 이는 결코 과거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은 성형국가라는 말처럼 고등학생들마저 때가 되면 성형수술을 당연시 하곤 한다. 내면이니 마음이니 하는 말은 그대로 말뿐이다. 그렇기에 얼굴에 흉터가 있다면 사람들은 혹은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스스로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양선화. 얼굴에 화염상모반이 있는 여자. 무의식중에 다른 사람의 흉터를 찾아보는 그녀. 자신의 흉터로 인해 세상과의 삶이 끊어진 듯한, 아니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의 관계조차 뒤틀려버린 그녀에게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의 위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타인의 흉터를 빤히 쳐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건 얼굴의 화염상모반 때문이었다. 누구든 상처가있다.(p.18)


언니만 싸고도는 할머니, 할머니의 말에만 전적으로 순종하는 아버지, 자신을 병신이라고 놀려대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언니, 자신을 보듬어주는 유일한 안식처였지만 선화가 언니에게 상처를 입힌 이후로 선화를 멀리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엄마. 선화는 이미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상처를 입을 만큼 입었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와 자신과 있을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언니라는 존재, 이런 언니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할머니와 아버지, 자신 때문에 생긴 언니의 상처 때문에 모든 것을 양보해야만 하는 상황은 가족을 떠나 자신만의 삶을 살도록 그녀를 계속해서 밀어내기만 했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과 관계를 맺을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선화는 결국 자신만의 세계인 꽃집에 틀어박힌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병준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살아간다. 그러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와 언니의 각박한 삶에 다시금 발을 서서히 담그기 시작하고, 자신은 몰랐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팠던 상처가 아물어가며 새살이 올라오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은 짧지만 많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와 조금 다르다고 쉽게 상처를 주고 따돌리는 행동이 얼마나 상처를 상대방에게 주는지, 혹은 그녀의 삶을 얼마나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존재가 때로는 어떻게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되는지,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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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0일생 소설NEW 1
김서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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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달력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날에 태어난 사람은 어떤 운명의 소유자인 걸까? 혹 필연적으로 숨겨져야만 하는 존재. 누구 앞에도 나설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인가? 만약 드러날 수 없는 존재라면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 삶에 어떤 사연이 있기에 그렇게 된 것일까?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의 책이었다.

 

자신의 내연녀인 혜린을 고향인 J시의 호텔 입구에서 발견한 현재는 그녀가 자신을 잊지 못해 자신의 고향에까지 쫓아왔다고 생각한다. 그 날 현재는 혜린과 술을 마신 후 필름이 끊긴 채 돌아온다. 며칠 뒤 혜린이 변사체로 발견되자 현재는 그녀의 살해 용의자로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 현재는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혜린이 이전에도 J시에 왔다는 것과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재는 살해 용의자가 검거되면서 풀려나지만 조사를 담당했던 최형사와의 만남에서 혜린이 정만리라는 여성을 찾고 있었고, 그녀가 25년 전에 혜린이 죽은 곳과 동일한 장소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혜린이 정만리라는 여성을 찾은 이유가 궁금해진 현재는 사건을 하나씩 파헤쳐 가기 시작하는데...

 

책을 중간쯤 읽었을 때 어느 정도 결론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했다. 잘못하면 상당히 막장 소설 같은 분위기로 흐를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가가 소설의 결론을 풀어가는 과정이 상당히 자연스럽고 치밀해서 우려했던 막장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욕망, 탐욕, 죄에 대한 무감각 등이 잘 그려져 있어서 더욱 재미있게 읽어 내려갔다. 특히 인간의 욕망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켜, 어느 정도까지 추악해 질 수 있는지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세밀하게 묘사한다.

 

사람이 욕망에 휩싸여 죄를 짓고, 죄에 무감각해지고, 사랑마저 쉽게 내던져 버리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사람들이 욕망에 빠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편하게 살기 위해서, 현재라는 시점에서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 오로지 현재만을 위한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는 이런 상황을 할아버지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현재를 사랑했다고 말하면서 독자에게 이를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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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 현대과학의 최전선에서 탐구한 의식의 기원과 본질
크리스토프 코흐 지음, 이정진 옮김 / 알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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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언뜻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문구에 담긴 생각한다라는 의미로 여겨지기도 하고, 세상이나 삶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정도의 정의로는 의식이라는 용어를 너무 제한적으로 설명하여 뭔가 중요한 부분이 빠진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의식에 관한 과학적 연구의 개척자 중 한 명인 크리스토프 코흐는 DNA 이중나선구조 발견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의식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하면 왠지 인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할 때 저자는 과학적 연구를 통해 이를 밝혀내고자 하였다.

 

이 책은 의식에 대한 과학적 고찰 뿐 아니라 저자의 삶과 연구 과정을 돌아본 일종의 회고록이기도 하다. 특히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다 이를 버리게 된 과정은 2장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뿐 아니라 책 전반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의식에 대한 정의는 쉽지 않다. 저자 역시 의식에 대한 정의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의식에 대한 4가지 정의(‘상식적 정의’ ‘행태론적 정의’ ‘신경 단위적 정의’ ‘철학적 정의’)를 제시하면서 이 4가지 정의가 각각 의식의 단면들을 설명해 주지만 실용적인 차원에서는 행태론적, 신경 단위적 정의가 가장 유용하다고 말한다.

 

의식은 분명히 뇌와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의식에 대한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은 아직 요원한 상태이다. 물리주의의 질적 결핍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에 마음의 기원을 설명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 이에 대해 저자는 유일하게 확실한 답은 과학에서 나온다고 말하면서 과학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저자의 생각은 진화론적 관점을 가진 과학자의 견해이다. 하지만 종교적인 관점을 바라보는 그의 생각에는 솔직히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저자는 과학과 종교는 양립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과학은 종교에서 말하는 내용들을 증명하는 한 방편이다. 저자의 말처럼 과학적으로 모든 것이 증명되지 않았듯이, 종교에서 말하는 내용들도 과학적으로 모두 증명하지 못했을 뿐이다. 또한 육식에 대해 말하며 십계명을 인용한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저자의 말처럼 인간과 다른 지각 체계지만 동물들도 자각 능력이 있기에 이를 먹지 말아야 한다면 동물 간의 먹이사슬 관계는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자각 있는 동물들이니 서로를 잡아먹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동물적 본능이라고 친다면 인간도 동물적 본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물론 저자가 말하는 열악하고 잔인한 사육방식에는 당연히 반대한다).

 

어렵지만 새롭고 다양한 생각들이 주는 즐거움에 빠져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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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에서 온 소녀 - 잃어버린 왕국
이미희 지음 / 하루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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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설움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사는 나와 같은 젊은이들은 모를 수도 있지만 일제 치하 36년이라는 세월을 감안한다면 지금도 한시적이나마 나라를 빼앗겼던 망국의 한을 되새기며 아파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일제 36년이 망국의 시절이라고는 하더라도 그 당시를 견뎌낸 분들이 살아 우리의 역사를 면면이 이어나갔기에 역사 속에서 사라진 적은 결코 없었다. 이와는 달리 역사에 그 흔적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나라의 백성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가야의 역사가 600여 년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국사 시간에 가야에 대해서 배우기는 했지만 비중이 거의 없는 나라였기에 기억에 남아있는 사건이나 인물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10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던 가야에도 당연히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았음은 분명할 텐데 사라진 패자의 역사여서인가 가야에 대한 이야기는 별달리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2007년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에서 순장된 열여섯 살 소녀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소녀의 인골은 송현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작가는 이 이름에서 착안하여 가야라는 나라를 향해 상상의 나래를 펼쳐 가야인의 삶과 망국의 설움을 보여준다.

 

비사벌국의 태자는 신라에 병합되어 사라질 운명에 처한 고국의 역사를 후세에 남기고자 자신의 정혼녀인 아라등과 함께 죽간에 가야의 역사를 새긴 후 이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긴다. 어느 날 소벌에 숨어살며 죽간을 지키던 송이와 그루의 부모는 쏟아지는 폭우 속에 죽간을 지키려다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상에 홀로 남게 된 송이에게 자신이 이모라면 찾아온 여인과 함께 소벌을 떠나는데..

 

소설은 신녀가 된 태자의 정혼녀 아라, 신라의 장수가 된 금관가야의 왕자 무력지(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 너무나 아픈 운명에 휘둘리는 송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가야인의 삶과 아픔을 이야기한다. 특히 송이를 지키지 못해 가슴 아파하는 무력지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마저 먹먹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비록 소설이기는 했지만 우리 역사 속에 분명히 존재했던 가야라는 나라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그들의 삶과 한을 상상해보는 시간이었다. 태자, 신녀가 된 아라, 제사장의 삼각관계, 어린 아이인 송이의 눈으로 본 인간 군상의 모습, 무력지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궁금증 등 아기자기한 이야깃거리들이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죽간에 가야의 역사를 심어 후세에 알리고 싶었던 태자의 마음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상상이나마 가야인의 삶이 궁금한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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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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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국정 교과서 문제로 나라 안이 시끄럽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른 이들이 부딪치다 보니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주장만 내세우며 한쪽은 국정 교과서로 통일해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그저 끝없는 평행선만 이어나간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도 있음은 우리가 직접 목도한 일이 아니기에, 또한 삶을 바라보는 주된 시각이 다르기에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나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가능한 한 문헌을 통해, 또한 고고학적 자료 등을 통해 정확한 역사적 진실을 알려야 하는 건 앞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후세를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에서 두말할 것도 없이 잘못된 사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식민사관이다. 일제에 의해 강요된 식민사관은 당연히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식민사관의 잔재를 철저하게 뿌리 뽑고 온전한 역사관으로 반드시 대체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가? 과연 우리의 역사 교육이나 인식에서 일제가 남긴 식민사관이 모두 사라진 것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조선총독부 조선편수사 출신들과 그 후학들이 학계를 꽉 움켜진 채 여전히 식민사관을 암암리에 전파하고 있다. 우리가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학계에서는 민족주의 사관은 비뚤어지고 왜곡된 사관으로 여겨지고 일본 학자들에 의한 식민사관이 은연중에 당연한 역사관으로 인정받는다.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식민사관으로 대변되는 두 가지 사안은 한사군의 위치와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다. 그 중 한사군의 위치와 관련해서 식민사관은 한사군의 위치가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료는 전혀 없다. 이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식민사관은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한 이론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에서 만들어낸 정치 이론이자 정치 선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역사관을 가진 자들이 대한민국의 주류 사학계를 좌지우지 한다는 것이다. 황당하기까지 한 사실은 중국의 동북아공정에 맞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올바르게 주장해야 할 동북아역사재단이 오히려 중국과 일본의 대변인처럼 행동한다는 점이다. 더 웃긴 사실은 올바른 역사를 후세에 알리기 위한 중고교 선생님들의 <동북아 평화를 꿈꾸다>라는 수업보조 자료를 학연과 언론을 등에 업은 채 잘못된 내용이라고 정정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역사적 진실이 한사군의 위치와 삼국사기의 오류를 말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만 아무런 사료나 증거 없이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는데 급급해 일본 제국주의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을 지지하면서 올바른 민족사관을 가진 학자들을 암암리에 학계에서 배척하는 자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또한 저자의 제안대로 공개적인 논쟁에 참여해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져야 한다. 이곳은 일제 조선총독부 치하의 대한제국이 아니다. 이곳은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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