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에 대하여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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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에 관하여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아내가 갑자기 암에 걸리면서 재정, 인간관계, 직장 등 총체적 위기를 거듭하다가 몰락 직전에 미국 사회에서 탈출하여 늘 꿈꾸어왔던 두 번째 삶을 실현하는 이야기. 주인공 셰퍼드는 지극히 모범적인 가장으로서 미국의 중산층 가정(domesticity)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인물. 50평생을 반듯하게, 늘 사회가 요구하는 각종 규범에 자신을 철저히 동화시키며 살아왔고, 아내가 중병에 걸리자 직장과 가사를 병행하면서 헌신적으로 돌본다. 게다가 철딱서니 없고 이기적인 여동생, 활동성을 거의 상실한 늙은 아버지까지도 책임지고 있다. 그는 가족 안에서는 좋은 아빠, 남편, 오빠, 아들이며, 직장에서는 좋은 선배다. 그의 세계는 온통 자신이 돌봐야하는 사람들로 이뤄져있다. 처음에는 미치지 않고서 이렇게 사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매사에 헌신적이고, 만인의 봉인 주인공의 호구 캐릭터가 답답했으나, 곧 이 캐릭터 설정에 내재된 작가의 의도를 눈치 챘음

 

작가의 전작 캐빈에 관하여에서 범생이캐릭터(캐빈의 아버지)는 그러한 기질과 무관하지 않은 무지로 인해 다가오는 비극을 끝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 책은 미국 사회에서 평생을 모범적인 시민으로 살아온 사람이 가족의 발병을 계기로 위반과 탈출을 감행하게 되는 과정을 아주 재미있게 보여준다. 주인공의 범생이기질은 그러한 극적인 전환이 주는 극적 짜릿함의 묘미를 살려주는 요소

 

라이오넬 슈라이버, 이 시니컬한 작가의 독특한 매력은 서사적 구성과 문장 스타일. 흥미롭게도 총 19개로 구성된 각 장의 시작은 주인공의 현금 보유액수다. 첫 장에서 7억이었던 그의 자산은 암에 걸린 아내의 치료가 시작된 지 1년 만에 350만원(17)으로 줄어든다. 그의 처지는 적어도 그의 친구 잭슨보다는 낫다. 희귀병에 걸린 딸을 둔 셰퍼드의 직장 동료인 잭슨은 외관상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오래 전에 빚더미에 올라앉아있다. 이 책은 200412월에서 20062, 13개월 간 불치병 환자가 있는 셰퍼드 및 잭슨 가족의 투병기에 초점을 맞추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치료 보다는 의료 시장의 돈벌이를 목적으로 설계된 미국 의료 제도가 중산층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을 읽고나면, 아직 걸리지도 않은 질병이나 위기를 걱정하며 보험 회사에 돈을 자발적으로 가져다 바치며 현재의 행복을 유예하게 되는 의료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이 각성된다. 그리고 가족이 중병에 걸리더라도 파산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나라, 국가가 국민의 자산 가치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 셰퍼드처럼 살아온 터전을 도망치듯이 버리고 제3세계로 망명하지 않고 그것이 가능할까

 

충분한 취재 자료를 바탕으로, 미국의 의료 제도를 까려고 작정하고 쓴 책인 듯. 이 성깔 있는 작가의 문장에는 냉정한 분노가 담겨있다. 어디 가져다 써보고 싶을 정도로 짜릿하고 통쾌한 문장들이 독자를 몰입시키는 힘이 있다

 

사족.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책을 아마도 RHK에서 독점 계약한 듯. 케빈에 관하여는 번역 때문에 짜증을 견디면서 정말 오기로 끝까지 읽었더랬다. 이번 책은 그나마 번역이 괜찮아서 장장 63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그럭저럭 읽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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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매뉴얼 제작소 - 열정의 파이터, UFC 해설가 김남훈의 땀 좀 빼는 인생 특훈
김남훈 지음 / 해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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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버이연합 할아버지들을 취재한 한 TV 다큐에서였다. 흥미롭게도 이 프로그램은 어버이연합의 지부 대표를 맡고 있는 한 할아버지와 진보적 활동을 하고 있는 한 젊은이의 만남을 주선했다. 나이, 정치적 입장 등에서 큰 차이가 있어 서로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이 두 사람은 만남을 거듭할수록 서로에게 무엇인가 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급기야 어버이연합 할아버지는 이 젊은이에게 깊은 우정을 느끼게 되었다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때 그 젊은이가 이 책의 저자, 김남훈이다

 

자신을 육체파 지식노동자로 소개한 이 사람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그는 흔히 통념상 몸을 쓰는 체육인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풍부하고 세련된 언어 구사력을 발휘한다. 뿐만 아니라 파이터, UFC 해설가, 카페 사장, 파워블로거, 일본어책 저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 전통적인 육체노동자와 지식노동자의 이분법으로는 도무지 파악이 안 된다. 이 사람이 풍기는 매력은 단지 이와 같은 독특한 삶의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강렬한 생기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삶을 대하는 열정적 태도, 살아있는 눈빛, 무릇 파이터에게서 흔히 감지되는 전투력 등이 그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20대에게 강탈한 미덕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파이터가 알려주는 삶의 지혜라고 할 수 있겠다. 불공평하고, 폭력적이며, 보호해줄 사람조차 찾을 수 없는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 무한경쟁 트랙에서 질주하다가도 문득 이런 큰 질문을 던지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일독할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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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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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읽기도 전에 다소 거부감이 있었다. 한국의 이십대를 괴물로 명명한 제목도 그렇거니와, 단연코 범죄자의 이미지를 풍기는 표지 때문이었다. 저 무시무시한 표지는 이 책에 대해 상당한 선입견을 갖게 했다. 표지에 실린 청년의 이미지, 떡 벌어진 어깨의 건장한 청년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나, 얼굴이 검게 처리되어 있어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게다가 검은 얼굴은 후드 티를 입고 있어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죽음의 사자 같은 인상을 준다누군가와 한판 뜨려고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테러리스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표지 그림은 현재 한국의 이십대가 반사회적 존재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한다. 그렇게 단정해도 되는 것일까. 너무 심하다 싶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불편한 마음을 안고 책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나의 결론은 걱정한 것에 비해서 책의 내용이 한국 사회에 대해 상당한 통찰력을 담고 있다는 것. 이 책을 읽으면서, 수년 전 학기말 성적 확인 기간에 강사로서 겪었던 에피소드가 기억났다. B플러스를 받은 학생으로부터 메일로 성적에 관해 항의를 받았다. 불만은 자기 성적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점수를 받은 다른 학생에 대한 것이었다. 수업 참여도 등에 있어서 자신이 노력한 것에 훨씬 못 미치는 학생이 자신과 같은 점수를 받은 것은 부당하다는 것. 이후 한동안 대학 강단에 서지 않았기에 잊고 있긴 했지만, 그때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통해 학생들이 왜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지 비로소 그들의 입장에서 헤아려볼 수 있었다.  

 

이 책은 현재 이십대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념은 능력주의이며, 무한경쟁 트랙에서 무조건 앞을 바라보고 내달리지 않으면 밖으로 밀려날 것이라는 불안이 이들로 하여금 더욱 더 자기 계발에 매달리게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기 계발 강박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십대는 거의 없으며, 이러한 삶의 조건이 이 세대의 정의 감각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십대에게 정의란 노력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시스템이며, 외모, 수능 성적, 대학 간판 등 무엇이 되었건 노력한 바에 따라 노동 시장 진입, 노동 조건 및 보상의 차등화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사회적 권리라는 것이다

 

회장님도 젊었을 때 이랬어요? 죽어라 뛰는데 계속 그 자리였어요? 얼마나 더 아프고 얼마나 더 잃어버려야 저도 어른이 될 수 있나요?” p.87 

 

책에서 인용한 단막 드라마 82년생 지훈이의 주인공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기성세대에게 절규하듯이 내 던진 말이라고 한다. “3장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의 제목은 부적절한 듯하다. 3장은 오히려 이십대를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분석에 가깝다. 저자의 분석인 즉, 고통을 감내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고, 남들처럼 달리지 못하는 이들이 구출 받을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는 현실에서, 타인의 고통은 물론 자신의 고통에 무감각해져야 한다. 그래서 자기 계발 논리에 담긴 무한 긍정의 마법이 절실하다는 것.   

 

대학 학생 상담실에 근무하는 상담전공자들을 만나보면, 상담 현장에서 본 이십대의 모습은 이렇다. 자기주도성이 심하게 결핍되어 있어 발달 단계로 치자면 거의 초등학생 수준이며, 부모, 특히 어머니에 대한 의존도가 심하다는 것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면 어떨까 싶다. 한국 사회는 과연 후속 세대에게 어른이 될 수 있는 제도적, 물질적, 문화적 조건을 제공해 왔는가? 우리 사회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야할지 질문을 던지고 탐색할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채, 오직 일제히 다른 사람들이 향하는 곳으로 질주하도록 요구받는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외에 다른 삶의 동력을 제공한 적이 있는가? 한편 과연 한국 사회에서 기성세대는 제대로 된 어른 노릇을 할 수 있는 상황일까? 안철수가 전국적으로 청춘 콘서트투어를 다니면서, 기성세대로서 청년들에게 했던 말은 미안하다였다. 그 장면에서 한국 사회에서 이십대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단지 미안한 마음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실천으로 확장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사회 구성원 전체가 추락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생존을 위해 밤늦게 까지 일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에서 말이다.  

 

저자가 이십대를 괴물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좀 더 판단을 유보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이십대의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나 현재의 이십대를 문제적존재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은 분명 논쟁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이 책은 좋은 의미에서 생산적인 테스트라고 본다. 이십대에게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훈계를 하거나, 동정적 시선을 던지거나, 이들을 비판하는 대신, 우리 모두 질주를 잠시 멈추고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지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새로운 논쟁과 사유의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고 본다

 

사족. 정작 이십대들은 이 책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책을 읽고 난 후 내내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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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aella20 2014-03-26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 봐야겠다.

micaella20 2014-03-26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그 고민의 향후 결론은? 어째야 할까?

micaella20 2014-03-26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하고 멈춰서 돌아보면 이 사회의 병리가 치유될까
 
집짓기 바이블 - 건축주, 건축가, 시공자가 털어놓는 모든 것 좋은집 시리즈
조남호 외 지음 / 마티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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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MBC 스페셜 공간혁명 작은 집을 보고 나서, 지난 이틀 간 독파한 세권의 책. 지금 살고 있는 전세 아파트 공간이 지겨워진 지 오래된 데다 땅의 기운을 접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을 그리워하던 차였다. 이 다큐를 보고 나니 답답한 아파트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커졌고, 인근의 반경 15키로 내에 매물로 나와 있는 땅들을 보러 다녔다. 그런데 나와 있는 토지는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네가 마음에 들면 택지가 마음에 안 들고, 다른 매물들은 바로 근처에 축사가 있어 주택을 짓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대안으로 가 본 타운하우스 안에 있는 단독 주택은 우리 예산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나마 싸게 나온 집이 있긴 했지만, 단독 주택에 살아본 적이 없기에 덜컥 구매할 수는 없었다.

 

...

우선 집짓기에 관한 책을 읽어나가면서 시간을 갖고 준비하기로 했다.

 

박종수. 󰡔전원주책 집짓기의 모든 것󰡕. 열린세상.

 

이 책은 집짓기에 관한 개론서라고 할 수 있겠는데, 집짓기 재료의 성격과 특성, 건축 재료에 따른 주택의 유형과 장단점, 건축주가 꼭 알아야 할 행정적, 법적 지식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정보 위주로 정리되어 있는 책인지라 조금 지루한 면이 있다.

 

김창균. 󰡔집짓기 전 꼭 알아야 할 모든 것󰡕 경향미디어.

 

건축을 전공한 저자가 오랜 집짓기 경험에 기초해 쓴 책. 이 책은 예산, 땅 구입, 계획, 집짓기, 입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칼라 사진과 함께 잘 정리해 놓았다. 이 책은 사전에 실제 지어진 가족 맞춤 주택에 직접 가보고 집 주인과 대화를 나눠볼 것을 권하고 있다. 당장 그럴만한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부엌, 난로, 서재, 현관 등에 관한 다양한 사진들이 감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칼라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어떤 서재, 부엌, 난로, 공간 배치를 원하는지 등 욕구를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부록에 저자가 설계한 가족 맞춤집 성공 사례도 집짓기 과정에서 무엇이 성공요소인지 파악할 수 있어서 좋았다.

 

조남호 외. 󰡔집짓기 바이블󰡕. 마티

 

건축주, 건축가, 시공자가 함께 모여 대담 형식으로 쓴 책. 앞의 두 책이 건축가 혹은 시공자 입장에서 쓴 책이라면, 이 책은 이 3자의 협업을 통해 집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함께 건축주의 실제 경험담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책값이 좀 비싸긴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컬러 사진들을 통해 집짓기에 대한 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외 이 책의 장점은 크게 두 가지. 첫째, 집짓기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3자간 대화인데, 생생한 경험담이 의외로 매우 재미있고, 복잡하고 어려운 건축 관련 지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둘째, 실제 집을 짓은 건축주가 들려주는 경험담. 그 중 서울 평창동 주택 사례가 제일 좋았다. 그 글은 땅을 보러 다니고 계약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기존의 집을 허물고 기반을 다지고 설계한 집을 올리는 과정, 이사하는 과정까지 글쓴이의 체험 서사. 옛것이 새것으로 교체되는 삶의 흐름이 주는 애틋함과 감동을 맛볼 수 있었다

 

이 세 권의 책을 읽고 나니, 예산부터 내가 살고 싶은 동네와 집을 결정하는 데까지만 최소 3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책을 읽는 도중 은퇴 후 제주도에 살고 있는 지인과 통화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 이 분의 제안은 우선 살고 싶은 동네에 들어가서 전세나 월세로 최소 2년 정도 살아보라는 것이었다. 이 분의 경우 정착 후 3년째 되니까 그곳에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무엇이 필요한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동네에서, 어떤 집을 짓고 살 것인가에 대해서 가족 간에 의견을 수렴하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분명한 건 더 이상 나와 맞지 않는 공간에 살면서 행복을 유예하고 싶지 않다는 것. 출퇴근이 비교적 용이하고, 나만의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 너무 비싼 땅값은 이 두 가지 조건간의 결합을 딜레마로 만든다. 서울 근교에서 그게 과연 가능할까. 원하는 게 분명하고 간절하면 소원은 이뤄지겠지. 어쨌든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면서 그 딜레마가 주는 스트레스를 유예해 보기로 했다. 먼저, 돈을 모아야 해, 돈을. 불끈, 결심하는 순간 그동안 누려왔던 소소한 사치들, 여행의 재미를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살짝 좌절하게 된다.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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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김재규 평전
문영심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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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026일 박정희가 암살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울었다. 장례 행렬을 지켜보던 노인들은 마치 왕이 죽었을 때처럼 소복을 입고 나와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 학교에서는 수업을 멈추었고 아이들은 더러 책상에 엎드린 채 울기도 했다. 나도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또렷이 기억난다. 울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자기 검열, 슬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 엎드려 울다보니 자꾸 눈물이 났다. 상실감이나 애도보다는 당혹감과 막연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눈물이었다.

 

내 평생 대통령은 오직 박정희 하나뿐일 줄 알았는데, 박정희는 내가 죽은 후에도 계속 대통령으로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영원한 대통령이 부하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게 어린 마음에도 자못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감히 우리의 왕을 살해한 김재규 일당은 천인이 공로할 악당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김재규라는 인물이 궁금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수인복을 입은 김재규의 사진을 본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뭔가 내가 생각했던 그림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어쩐지 나쁜 사람 같지 않았고, 후회나 두려움, 원망이 없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지치고 병색이 짙은 그의 얼굴에서는 범상치 않은 차분함과 품위가 흘러나왔다. 이러 저러한 연유로 한편으로는 사건 경위에 대한 세간의 상식(그가 박정희를 쏘게 된 계기는 차지철과의 권력 경쟁이라는 것)을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김재규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 하나. 김재규는 역시 모순적인 인물이라는 것. 이 책에 실린 자료들을 토대로 판단해 보건데, 분명 그는 교육자, 군인, 공무원으로서 민주주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고, 불교 신자로서 생명 존중 사상을 깊이 내면화했다. 또한 공산주의를 절대 악으로 간주하고, 미국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한국을 일체의 악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의 세계관에는 다소 어리석어 보일 만치 순진한 구석이 있다. 박정희의 고향 후배인 그는 박정희로부터 한 때 가장 신임을 받았으며, 유신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그의 세계관과 정치적 신념은 박정희와의 인간적·정치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켰을 것이고, 그의 혁명은 그러한 모순을 끝내기 위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일기, 법정 증언, 담당 변호인의 진술 등 관련 자료들은 올곧은 군인 정신의 소유자인 그가 유신 체제, 재판, 교수형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은 부침과 고뇌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박정희가 그의 손에 죽지 않았다면 부산과 마산에서 5월의 광주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홀로코스트가 있었을 것이다. 전두환이 집권하게 됨으로써 대량 학살의 시기와 장소만 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박정희의 정치적 계승자인 전두환은 새로운 버전의 유신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면 그의 혁명은 실패한 것일까 성공한 것일까?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실패한 시도가 반복됨으로써 조금씩 성장했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가능케 하는 삶의 조건은 그만큼 어렵게 얻은 결실이다. 김재규를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고자 했던 혁명가로 평가할 것인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유신 체제의 핵심부에서 그가 겪었던 치열한 고뇌, 그가 꿈꾸었던 이상과 재판 과정에서 그가 목도한 좌절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한 단상. 당시의 생생한 기록을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사건과 인물 관련 자료에 압도되어 글쓴이의 해석이 약해진 점, 김재규 연보가 실려 있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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