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김재규 평전
문영심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19791026일 박정희가 암살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울었다. 장례 행렬을 지켜보던 노인들은 마치 왕이 죽었을 때처럼 소복을 입고 나와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 학교에서는 수업을 멈추었고 아이들은 더러 책상에 엎드린 채 울기도 했다. 나도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또렷이 기억난다. 울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자기 검열, 슬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 엎드려 울다보니 자꾸 눈물이 났다. 상실감이나 애도보다는 당혹감과 막연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눈물이었다.

 

내 평생 대통령은 오직 박정희 하나뿐일 줄 알았는데, 박정희는 내가 죽은 후에도 계속 대통령으로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영원한 대통령이 부하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게 어린 마음에도 자못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감히 우리의 왕을 살해한 김재규 일당은 천인이 공로할 악당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김재규라는 인물이 궁금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수인복을 입은 김재규의 사진을 본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뭔가 내가 생각했던 그림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어쩐지 나쁜 사람 같지 않았고, 후회나 두려움, 원망이 없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지치고 병색이 짙은 그의 얼굴에서는 범상치 않은 차분함과 품위가 흘러나왔다. 이러 저러한 연유로 한편으로는 사건 경위에 대한 세간의 상식(그가 박정희를 쏘게 된 계기는 차지철과의 권력 경쟁이라는 것)을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김재규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 하나. 김재규는 역시 모순적인 인물이라는 것. 이 책에 실린 자료들을 토대로 판단해 보건데, 분명 그는 교육자, 군인, 공무원으로서 민주주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고, 불교 신자로서 생명 존중 사상을 깊이 내면화했다. 또한 공산주의를 절대 악으로 간주하고, 미국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한국을 일체의 악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의 세계관에는 다소 어리석어 보일 만치 순진한 구석이 있다. 박정희의 고향 후배인 그는 박정희로부터 한 때 가장 신임을 받았으며, 유신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그의 세계관과 정치적 신념은 박정희와의 인간적·정치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켰을 것이고, 그의 혁명은 그러한 모순을 끝내기 위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일기, 법정 증언, 담당 변호인의 진술 등 관련 자료들은 올곧은 군인 정신의 소유자인 그가 유신 체제, 재판, 교수형에 이르는 과정에서 겪은 부침과 고뇌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박정희가 그의 손에 죽지 않았다면 부산과 마산에서 5월의 광주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홀로코스트가 있었을 것이다. 전두환이 집권하게 됨으로써 대량 학살의 시기와 장소만 바뀐 것일지도 모른다. 박정희의 정치적 계승자인 전두환은 새로운 버전의 유신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면 그의 혁명은 실패한 것일까 성공한 것일까?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실패한 시도가 반복됨으로써 조금씩 성장했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가능케 하는 삶의 조건은 그만큼 어렵게 얻은 결실이다. 김재규를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고자 했던 혁명가로 평가할 것인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유신 체제의 핵심부에서 그가 겪었던 치열한 고뇌, 그가 꿈꾸었던 이상과 재판 과정에서 그가 목도한 좌절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한 단상. 당시의 생생한 기록을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사건과 인물 관련 자료에 압도되어 글쓴이의 해석이 약해진 점, 김재규 연보가 실려 있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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