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시스트 페미니스트인 해러웨이(자기 스스로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있다)의 학문적 궤적은 좀 남다르다. 생물학, 동물학, 철학을 공부했고, 글의 참고문헌도 사회과학의 계보만을 고수하지는 않는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에 씌여진 유명한 논문 "사이보그 선언문"을 보면, 여타의 사회과학적 글쓰기와는 그 형식 면에서, 인용의 실천(citational practice) 면에서 매우 독특한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이 유명한 해러웨이의 저서는 페미니즘 아카데미 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과학 아카데미에서도 자주 인용되며, 폭넓은 영향을 미친 바 있다. 이 책은 번역본으로도 나와있긴 하지만, 나의 주관적 경험에 따르면 (영어 독해 능력이 무척 딸리는 나로서도) 번역본으로 읽는 것보다 원서로 읽는 것이 훨씬 더 빨리, 쉽게 읽힌다. 왜 그런지는 구태여 설명하지는 않겠으나 어쨌거나 원서로 읽는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이 리뷰에서는 이 책의 8장 "사이보그 선언문"만을 언급하겠다. 8장을 숙독하는 것 만으로도 비싼 돈 주고 원서로 살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이다.
“사이보그 선언문 - 20세기 말의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주의-페미니즘”은 ‘사이보그’라는 익숙하지 않은 메타포와 사회 과학자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의 지식의 계보학을 펼쳐 보인다. 생물학, 자연과학, 동물학, 철학 등을 공부한 저자는 문학 텍스트와 테크놀로지, 생물학에 대한 지식들을 교차시키면서, 지극히 낯선 방식으로 정치적 상상력과 감각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가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앎의 가능성의 영역(intelligibility)'의 경계를 확장시키는 수사적 전략을 택했다면, 해러웨이는 ‘불경스러움(blasphemy)’과 ‘역설(irony)'의 화법을 구사한다. 이는 자신의 텍스트와 언설을 숭배나 동일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인 동시에, ‘모순적인 것과 양립 불가능한 것들 간의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의식의 발로인 듯하다. 또한 저자는 자신의 텍스트를 일종의 ‘허구’나 ‘신화’로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이 일종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것은 저자 스스로 만들어낸 이론의 지위를 탈중심화하면서 이론의 생산 역시 사회의 변화와 맞물리는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의도로 읽힌다.
이 글이 씌여진 1980년대는 레이건 정부가 이른바 ‘별들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미사일 공격망의 구축을 통해 전 세계에 패권주의적 권력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군사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펼쳤고, 컴퓨터와 전자공학, 생명공학 등의 발달이 후기 자본주의로의 진입을 알리고 있었다. 한편 페미니스트 아카데미아에서는 ‘페미니즘 제2물결’이 만개하면서, 여성주의 내부에서 인종, 계급, 성별 등의 ‘차이 범주’들의 통약불가능성이 서서히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라는 메타포를 1980년대의 사회적․유물론적 현실의 지도를 그려내는 허구로서, 그리고 서구의 ‘인간’ 규범을 재생산하는 동일성의 정치, 인정 투쟁의 정치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의 원천으로서 삼고 있다.
사이보그로서의 인간
헤러웨이는 “우리는 모두 사이보그이다”라고 주장한다. 사이보그란 인간과 유기체 간의 잡종이며, 서구적 의미에서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이보그는 자연과 문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 해러웨이가 정치학과 존재론의 기초로서 ‘인간(Man)’을 거부하면서 ‘사이보그’를 택한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20세기 후반의 사회적 상황에서 인간과 동물, 유기체와 기계, 물리적인 현실과 비물리적인 현실 간의 경계가 와해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간’ 개념에 의존한 정치학은 결국 서구적 전통에서 규범화된 인간 범주 이외의 모든 존재들을 타자화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무화하고 삭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진보적 정치가 ‘사이보그 신화’를 채택할 것을 제안하는 방식 또한 독특하다. 저자는 ‘사이보그 존재론’을 유일한 정치적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모순적 가능성으로서 제안하고 있다.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신화’에 거는 기대는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정치적 선택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과 욕망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해러웨이는 진보 정치의 기반은 ‘혈연’이건 ‘억압의 경험’이건 어떤 기원을 갖는 정체성이 아니라, ‘선택’ 혹은 ‘대항적 의식’에 의해서 연결되는 제휴(coalition)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거를 펼치기 위해 어떤 단일하고 특권적인 사유의 범주, 혹은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학들의 실패의 사례를 페미니즘의 역사 속에서 개괄한다. 맑시즘은 ‘노동’ 개념을 사회 변화에 필수적인 특권적 범주로 사유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이 ‘노동’이라는 개념적 범주를 여성에게 확장하여 ‘재생산, 모성, 양육행위’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반면, 인간과 사회를 설명해내기 위해 래디컬 페미니즘은 ‘계급’이나 ‘노동’이 아니라 ‘성별’을 특권적 범주로 삼았다. 외관상 사뭇 다르게 보이는 이 두 가지 방식이 해러웨이에게 모두 문제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양자 모두 ‘통합된 여성’이라는 범주를 총체적으로 구성하면서, 그 외에 다른 범주들(예를 들면 인종)을 배제하거나 삭제한다는 점이다. 해러웨이는 버틀러와 다른 방식으로 ‘여성’이라는 범주가 왜 정치학의 기반이 될 수 없는지, 실패하는 정치학이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지적한다. 해러웨이가 ‘사이보그’라는 메타포를 통해 시도하는 정치학은 분명하다. ‘동일화’에 근거한 정치학이 아니라 ‘선택’에 의한 정치학, ‘대항적 의식(oppositional consciousness)’ 근거한 정치학이다. 이러한 정치학이 가능하기 위해서 ‘분절된 정체성’이 그 기반이 되어야 한다.
“그녀는 무엇이 ‘여성의 경험’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성폭력을 명명하는 것, 실제로는 ‘여성’이 관계될 수 있는 한 성 그 자체를 명명하는 모든 것)에 대해 강력하게 주장하는 의식 이론을 발전시킨다. 페미니즘의 실천은 이런 형태의 의식, 즉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한 자기 지식의 구성이다.” (p159)
“여성은 여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성적 전유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욕망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품으로서 폭력적으로 분리되면서 소외되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 그녀의 이론은 다른 모든 여성의 정치적 발화와 행동의 권위를 주변화한다기 보다는 무효화한다.” (p159)
지금이야 페미니즘 내외부에서 맥키논에 대한 비판(MacKinnon Bashing)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저자가 이 글을 쓰던 당시 맥키논에 대한 해러웨이의 비판은 매우 도발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해러웨이가 지적한 바, 맥키논식의 정치적 의식화가 갖는 문제점은 맥키논이 ‘여성의 경험’으로 구성해 내고 있는 것 이외의 여성의 경험을 배제한다는 점, 그 이외의 ‘차이’를 삭제하거나 검열한다는 점 보다 더 근본적인 한계를 내포한다. 즉 페미니즘을 가능케 하는 여성의 존재론과 인식론(being female, women's experience)는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 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폭력의 희생자, 가부장제의 성적 전유의 대상으로서만 그 정치적 존재론을 설정하고 있는 이러한 이론은 그 이외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아예 삭제해 버리는 전체주의 담론이라는 것이다.
사이보그 정치학
페미니스트들은 정치적 연대를 위해 서로의 유사성 혹은 동일성을 필사적으로 추구해왔었다. 그것이 억압의 경험이건, 타고난 재생산 능력이건,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건 간에 페미니스트 정치학을 위한 토대로서 늘 특정한 ‘동질성’과 ‘전체성’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신화가 페미니스트들로 하여금 이러한 소모적인 노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해러웨이가 ‘지배의 정보과학’이라고 부른 무엇보다도 20세기 후반의 현실 속에 이미 인간은 성별이라는 단일 범주에 포섭되기에는 너무나 잡종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 특히 ‘유색 여성’의 경험을 통해 보면, 여성의 노동과 재생산, 몸, 섹슈얼리티가 이미 중첩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고, 이들의 삶 자체에 이미 테크놀로지가 들어와 있다(김은실 선생님). 해러웨이가 예로 들고 있는 제3세계 여성들, 미국의 흑인 여성들, 치카노 여성들, 한국의 10대 여성들의 노동은 이미 공/사, 문화/자연, 인간/자연, 유기체/기계 간의 구분이 모호한 영역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테크놀로지의 영향으로 국제적 노동 분업이 이뤄지고 있는 현실, 복지 국가의 붕괴와 여성의 빈곤화, 그로 인한 가족 형태의 변화 속에서 사회주의-페미니즘의 정치학을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
만약 우리가 이러한 권력망과 사회적 삶을 읽어내는 방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새로운 짝짓기, 새로운 제휴를 학습해야할 것이다. 동일시(identification)라는 관점, 통합적인 자아의 관점에서는 이를 읽어낼 수 없다. 쟁점은 흩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과업은 디아스포라(diaspora)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p170)
이른바 정보(information)가 권력과 통제전략을 구축하는 현실 속에서 해러웨이는 ‘동일화’가 아니라 ‘디아스포라’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20세 후반에 권력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정보를 주고받는 의사소통의 방해라는 점, 고도의 과학기술로 인해 사회관계가 재구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정치학의 방법론으로 제안하는 것은 글쓰기인데, 그것은 글쓰기야 말로 인간과 유기체, 기계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들에 대한 정보를 부호화하고, 부호화를 통한 정보의 생산, 의미화 과정, 정보의 교환을 통한 제휴야말로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를 가능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미국 쇠고기 반대를 위한 촛불 집회에서 다양한 정치적 주체들이 인터넷이라는 관계망을 통해, 다양한 의미의 구성과 재부호화과정의 주체로 구성되는 과정을 떠올렸다.
이 글이 1985년에 씌여졌다는 게 매우 놀라웠다. 이 글은 기존의 사회과학과는 매우 다른 인용의 실천(citation practice)을 통해, 서구의 휴머니즘이 제시하는 견고한 틀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방식의 인식론과 정치적 상상력을 가능케 한다. “새로운 테크놀로지 기술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적 생활’을 근절시키는 데 기본적인 역할을 한다”는 해석의 오류는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은 당시의 시대적 한계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제외하고는 해러웨이가 1980년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자신의 언어로 ‘부호화’해서 보여준 언어들은 2008년이라는 현재의 시대적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놀라운 예측력을 갖고 있다.
또한 이 글이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읽혀지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설명하는 사회과학의 남근중심적 설명체계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 역시 당혹감에 가까운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이는 Bare Life, '죽음으로 포함되지 않는', '정치적인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 생명들에 대한 사유를 확장해주는 아감벤의 개념이 전혀 새로운 것으로, 놀라울 정도의 통찰력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유행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과 자못 대조적이다. 아감벤의 책은 1985년 사이보그 마니페스토가 씌여진 지 10년이 지난 후에 나온 책이다. 그 10년의 시간 적 차이는 페미니스트 아카데미아에서 축적된 지식이 주류 지식 체계에서 '주변화'가 아니라 '무화'된 그 시간의 깊이를 상징하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처럼 여겨진다. 그 유명세에 비해서, 사이보그 마니페스토는 아카데미아에서 '매우 독특한 인식론적, 정치적 사유'로만 남아있었던 걸까? 학문의 경계들 간의 이 소통되지 않는 간극은 참으로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