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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inted Veil (Paperback)
서머셋 모옴 지음 / Vintage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동생이 읽고 나서 재밌다고 준 책. 소설이 영화화되고 나서 표지를 바꿔 다시 낸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예전 표지가 더 맘에 든다.
암튼,
나는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나중에 훑어보았는데, 영화는 소설과 내용도 사뭇 다를 뿐더러, 인종주의와 식민주의 관련해서 살짝 불쾌해지는 부분도 있더라.
어릴 적 성문 종합 영어에서 봤던가 아님 당시 유행하던 빨간색 표지의 영한 대역 문고에서 봤던가.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를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내용은 거의 기억이 안 나지만 문장과 문체가 매우 깔끔하고 수려하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동생은 이 책을 읽고 서머셋 모옴을 일컬어, '모파상에 버금가는 섬세한 인물의 심리 묘사'라고 극찬하더만. 모파상이야 뭐 스토리텔링의 강자이지만, 서머셋 모옴은 인물의 내면 심리 묘사와 인간의 내면에 대한 상상력과 이해에 있어서 모파상보다 한 수 위인듯.
"서머셋 모옴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야 여자!"
이 책을 읽고 나서 동생의 한 말이다. 그렇게 표현한 법도 한 것이, 이 소설은 1920년대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과 중국이 배경. 얼굴은 아름답되 영국의 중산층에서 천방지축 암 생각없이 사교 생활이나 누리며 자란 한 철딱서니 없기 그지 없는 한 젊은 여성이 사색적이고 내성적인 남편과 만나 결혼하고, 남편이 근무하는 홍콩으로 따라간다. 그녀가 사랑없이 결혼한 이유는 미모야 자기 보다 무척 딸리지만 '더 어린 나이'라는 자원을 가진 여동생이 잘 나가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자, 더 이상 부모에게 얹혀살 수 없게 되었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 파티 문화를 좋아하는 사교적인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폴로와 각종 스포츠로 근사한 몸매를 가꾼 한 중년 남성의 유혹에 넘어가 불륜을 저지르게 된다. 아내의 불륜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은 남편은 콜레라가 창궐하는 오지로 일부러 발령을 받아 아내와 함께 가게 되고, 그곳에서 병에 걸려 죽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철딱서니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적인 나르시시스트였던 그녀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고독과 고통, 외로움, 소외감, 원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다가 콜레라로 인해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스러져가는 그곳의 풍경과 세상의 비참, 그리고 이제껏 자신의 고통에만 빠져서 보지 못했던 다른 사람의 고통(남편)에 눈뜨게 된다. 영화는 뒷부분에서 남편과 이 여자의 로맨스에 초점을 맞추지만, 소설은 완전 다른 얘기.
남편이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남편이 자신의 불륜으로 인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서서히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었다. 살다보면 마음이 혹은 몸이 자신의 의지나 뜻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순간들이 많다. 그게 삶의 딜레마이자 비극의 씨앗이 아니겠는가. 자신과 바람을 핀 남자가 개차반이라는 걸 알면서도 몸으로는 끌리는 걸 어쩔 수 없는 게 그녀의 현실이자 딜레마. 그 남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콩까풀이 완전 벗겨졌는데도 성적인 이끌림은 그녀를 원하지 않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
Kitty: Do you despise me?
Walter: No, I despise myself
하기야, 인생사 자기 뜻대로 안되기는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 콜레라 전염 지역에서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완전히 외면한 채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남편에게 그녀는 "나를 경멸하냐?"고 묻지만, 그녀의 남편은 "경멸하는 건 나 자신"이라고 대답한다. 그녀의 남편이 바람핀 그녀와 깔끔하게 이혼하고 갈라서면 될 것을 구태여 복수하겠다는 심정으로 혹은 "너죽고 나죽자"는 심정으로 콜레라 전염 지역이라는 사지로 제발로 아내를 끌고 들어간 걸 보면, 개차반인 바람둥이인줄 알면서도 다른 남자에게 끌리는 여자나, 아내가 철딱서니 없는 경박한 여자라는 걸 알면서도 사랑할 수 밖에 없기에 그런 자신을 경멸할 수 밖에 없는 그녀의 남편이나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다만 진정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남편과 그녀 모두 그러한 공통점을, 그런 약점을 지닌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갑작스레 죽어버렸다는 것일 뿐.
소설은 이 여자의 관점에서 쓰여졌고,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알 수 없을 것 같은 내면의 풍경들을 어찌나 기가 막히게 꿰뚫어보고 있는지, 중간 중간에 나도 모르게 '호오오오....'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모파상의 화법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