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에요?”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로드』는 모든 것이 파괴된 장소, 인간 실존의 근원인 ‘장소’가 상실된 공간, 인간과 공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경험과 의미가 만들어지는 기반이 완전히 파괴된 공간에서, 과연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실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남자와 남자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어린 아들, 그 둘의 여정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아이는 대재앙 이후의 ‘상실의 공간’에서 태어났고, 그 이전의 삶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남자는 지도를 보면서 자신이 알았던 공간을 더듬고, 간혹 그 기억 속에 머물고자 하지만, 소년은 그들을 위협하는 모든 것이 두려울 뿐이다. 그들은 ‘남쪽 바다’를 향해 가지만, 이유는 분명치 않다. 잿빛 바다를 확인한 순간, 희미하게 남아있던 ‘남쪽 바다’에 대한 한줄기 빛마저 사라진다. 막상 그들이 발견한 바다가 ‘푸른 색’이 아니어도, 절망하지 않는다. 희망과 절망, 그들은 이미 그 두 단어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바다 너머를 상상하고 잠시 ‘저 너머’에 관한 대화를 나누지만, 그러한 상상을 오래 붙들고 있지는 않는다. 그건 그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것, 길을 계속가기 위한 재료였을지도 모른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남자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소년이 상실의 장소에 홀로 남겨져야하는 순간이 가까워지면서, 남자는 아들에게 “너는 불을 운반해야 돼”라는 말을 반복한다. ‘불을 운반하기 위해서’...제우스에게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전해줬기에, 쇠사슬로 묶인 채 매일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이 되면 간은 다시 회복되어 영원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프로메테우스의 운명. ‘길 위의 삶’에서 그들의 운명은 프로메테우스의 운명과 닮아있다. 식량이 떨어져 굶어죽을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먹을 것을 찾아내고, 다시 길 위를 걷는다. 그들에겐 그 영원한 고통의 운명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자유’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함께 데려가주세요, 제발”이라는 아들의 요구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만 “너는 불을 운반해야 돼”, “내가 여기 없어도 나한테 얘기할 수 있어. 너는 나한테 얘기할 수 있고 나도 너하고 이야기를 할거야.”라고 말할 뿐이다. 

“아빠하고 매일 이야기를 할게요. 그리고 잊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남자의 죽음. 자신이 알고 있던 유일한 장소, 그가 태어난 이후 그와 늘 함께 있었던 공간, 그에겐 ‘뿌리’이자 ‘집’이자, ‘실존’의 유일한 근원이었던 아버지라는 존재를 상실한 소년. 그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새로운 동행과 함께 다시 길을 나서기 전에, 소년은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와 함께 아버지와 대화를 이어가겠다는 약속을 한다. 저자 코맥 매카시는 ‘장소의 상실’ 이후의 희망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는 “되돌릴 수 없는 것, 다시는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을 그린 지도”에 대한 기억을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지도, 그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함께 했던 ‘길 위의 삶’에 관한 기억,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자간의 대화, 이것들을 통해서 ‘생성되어가는 세계의 지도’.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장소의 상실’ 이후에도 그렇게 인간에게서 인간에게로 계속 전해지지 않을까. 비록 그 인간들이 서로 다른 ‘상실의 공간’에서 왔고, 같은 지도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족. 오래 전에 봤던 영화가 기억이 났다. 동유럽, 아마도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화였던 것 같다. 배경이 체코와 독일이었으니까. 10년 전 쯤, 비디오 가게에서 겉표지가 마음에 들어 골랐던 이 영화를 봤을 때 받았던 인상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배경은 전형적 시골 농가였고, 만삭의 젊은 여자와 딸이 주인공이었다. 여자는 남편으로부터 매일 강간과 구타를 당하고, 딸과 뱃속의 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술에 취한 남편이 잠든 사이 몰래 집을 빠져나온다. 아이와 함께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들은 길을 떠난다. 그것이 로드의 주인공인 남자와 소년처럼 “불을 운반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중요한 건 그들 역시 “길 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영화의 모녀는 로드의 부자처럼 오래 함께 있지 못했다. 여자의 남편이 쫒아와 그녀를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소녀는 말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소녀는 이후에도 계속 길 위에 있어야 한다. 소녀는 “매일 편지를 쓰렴”이라는 엄마의 당부, 그 약속을 지킨다. 소녀는 ‘장소’를 상실했지만, 어머니에게 쓰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길을 만들고 지도를 만든다. 『로드』와 이 영화 모두 더할 나위 없이 비극적인 상황을 그리고 있지만 그 여운은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고기관 - 신선하고 환상적인 중국의 옛 이야기
김용식 옮김 / 미래문화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암튼 내가 요즘 설화와 괴담류의 이야기에 빠졌다. 그것도 옛날 이야기만 골라서 읽고 있다. (이게 다 독서 취향이 워낙 다양한 누구 덕분이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우짜든동 꼭 벌을 받고, 선량한 품성을 끝까지 잃지 않은 사람은 우짜든동 꼭 보답을 받는 권선징악의 결말(그려, 권선징악이 최고여!), 이러 저러한 삶의 애환들이 이러 저러한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면서 기승전결로 진행되는 이야기들, 꽃의 정령이 사람으로 둔갑하여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돕는 에피소드, 시와 풍류를 즐기는 상류층 남성들의 사회를 묘사한 이야기들...어쨌거나 머리도 식힐겸 '옛날 옛적'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진다.

중국의 8대 기서 중 하나라는데, 우리 나라에는 처음 소개된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을 어렸을 적에 읽었던 기억이 없다.  중국과 일본 영화를 보다 보면,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배우들의 표정에서 국가별로 어떤 특색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일본 배우의 얼굴에서는 섬세하고 뭔가 에너지가 응축된 느낌을, 중국 배우들에게서는 '여유'라고나 할까, 화통하다고 할까, 뭔가 통이 크고 에너지가 확 펼쳐진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혹자는 이를 '대국'의 표정이라고 하더라). 중국의 옛날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도 이와 유사하다. 이 책에는 대륙이라는 지리적 공간, 유교적 질서가 기반이 된 정치 체재, 충과 효의 덕목을 중시하는 도덕관, 이러한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가 잘 그려져 있다.

이 중국의 옛 이야기를 읽고 나면 여백이 주는 여운이 남는다.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거기엔 어떤 '여백'이 있다. 그 여백을 뭐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그 여백들에서 삶의 여유를 조금이나마 맛 보게 되는 것 같다.

암튼, 요즘 여백이 몹시도 그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윤택림 지음 / 역사비평사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언젠가 제주도의 해변 마을 한 가정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일상적인 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지만 그들과 나 사이에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거리감이 있었다. 이방인이었던 나에게는 그들로부터 침묵으로 가득한 심연 같은 것이 느껴졌었다. 사람들로부터 집단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나중에 제주도의 한 시민 단체 활동가에게 이런 느낌을 털어놓았더니 그는 ‘4.3’이라는 소통되지 않은 집단적 경험, 그것을 둘러싼 견고한 침묵의 카르텔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4.3의 경험은 사건과 사실로 설명되는 역사이지만, 그것이 일어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과 이후 세대를 포함하여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건의 경험, 말하여진 경험인 동시에 말하여지지 않은 경험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 권력에 의해 강요된 침묵이자 생존을 위해서 스스로 선택한 침묵이었을 것이다.

잃어버린 역사, 삭제된 역사, 누락된 역사, 말이나 글로 표현되지 않은 삶의 체험들(lived experience)를 언어화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굳게 닫혀있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은 긴장과 호기심, 막연한 두려움을 동반하는 행위가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상자를 열 것인가 말 것인가, 살짝 열린 뚜껑 사이로 보이기 시작한 내용물들을 무엇이라고 명명하고 해석할 것인가를 둘러싼 치열한 각축의 장을 열어젖히는 행위가 될 것이다. 나 역시 ‘빨갱이’와 관련된  침묵의 가족사를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누락된 역사(missing history)에 관심이 있기에, 저자가 ‘빨갱이 마을로의 과거여행’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했다. 또한 저자가 누락된 역사를 ‘복원’하는 방식, 그 과정에서 연구자로서 겪었던 복잡한 체험들이 유의미하게 다가왔다.

이 책은 기존의 민중사 연구의 지평을 비판적으로 확장하면서 충남 예산군의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대안적 근현대사를 모색한다. 1부와 2부 초반에 전개되는 이론적인 논의들은 다소 지루한 감이 있지만, 구술 자료의 텍스트화가 전개되는 중반부 이후는 생생한 현장감을 준다. 이 책과 마찬가지로 구술사, 생애사, 가족사를 연구한 낸시 에이블만의 글을 읽을 때 저자가 글의 상당한 분량을 지루하다 싶을 만큼 이론적 논의에 할당하고 있는 점에 대해 다소 의구심이 들었는데, 그것은 이 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두 사람 모두 주류 지식 체계에서 주변적이고 폄하되었던 방법론과 인식론, 즉 구술사, 생애사, 가족사를 통해 한국근현대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해 보았다.

저자는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의 수사를 차용하여 “개인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 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 가족과 생애사라는 사적이고 사소하고 비정치적이고 비학문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영역을 들여다봄으로써 한국의 근현대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이 연구가 진행되었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연구자에게 도전과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3부는 연구자가 현지 조사 과정을 포함한 연구 전반에 겪었던 연구자 자신의 경험을 성찰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는 2가지 서로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는 ‘빨갱이 마을로의 과거 여행’을 통해 저자가 재구성한 한국의 근현대사, 다른 하나는 연구자 자신의 연구 경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이 재구성한 지식은 두 가지 차원의 서사가 맞물려서 만들어내는 효과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지식체계에서 역사로 인식되지 않았던 사건이나 경험을 담론의 장으로 포함시키는 것, 아마도 그것은 비판적 학자들이 담당하게 되는 주된 노동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침묵된 역사, 누락된 역사 ‘복원’ 프로젝트는 연구자와 연구 참여자가 놓인 현재성, 입장들 간의 복합적 대화적 관계망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다층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문화기술지적 역사에서 시양리 마을 사람들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그대로 복원되어 마을 사람들의 역사 해석이 전달될 것이다....그럼으로써 이 문화기술지적 역사는 해석적 접근과 정치경제적 접근을 결합함으로써 남한 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시양리의 근현대사를 복원하는 것이다. (p24)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근현대사는 두 가지 진리체제, 즉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한 국가의 공식적 담론과 민중사로 대변되는 대항담론 간의 끊임없는 경합 속에 있었다. 저자는 민중사의 입장을 기본적으로 공유하면서도, 이 두 가지 진리체제 모두 ‘실제적인 지방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동일하게 획일적인 담론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비록 지방민의 목소리를 누락시키고 있는 두 가지 담론 구조 모두를 비판하고 있지만 저자가 민중의 역사를 ‘복원’과 ‘대변’하고자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민중사의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이 책은 6.25를 중심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재조명하고 있는데, 특히 이때 자주 등장하는 ‘복원’과 ‘대변’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저자가 분명히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수행하는 민중사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복원’ 가능한 ‘실체로서의 진실’과 ‘대변’ 가능한 ‘주체’를 가정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이후 민중사 연구에 대해 “민중사가 진정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18p)고 비판하고 있는 점, 연구자가 지방민의 시각을 대변할 수 있다고 본 점이 그것이다.

첫 부분에서 저자가 ‘복원’, ‘대변’이라는 단어를 문제화하지 않으면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지만, 책을 덮고 나서 그것 자체가 ‘기억과 재현’, 그리고 역사 쓰기에 대한 저자의 입장과 시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과연 연구자가 연구 참여자의 경험을 대변할 수 있을 것인가? 연구자가 대변((re)present)하고 복원할 수 있는 실체(present)가 있는 것인가? 저자는 이론적 논의에서는 ‘대변’과 ‘복원’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지만, 구술사를 텍스트화하고 있는 후반부에서는 지식의 정황성(situatedness)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식의 정황성, 그리고 ‘복원’ 혹은 ‘대변’이라는 두 가지 모순적 입장을 저자가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었다.

현지 조사에 대한 연구자의 성찰적 글이 담긴 3부는 현재 진행 중인 나의 연구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생각해 볼 거리들을 던져주었다. 1989년과 1996년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기억과 역사가 어떠한 관련성을 맺으며 상호주관적으로 구성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부분, 연구 현장 진입의 어려움과 연구자가 연구가 진행되는 내내 참여자들로부터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 등 저자가 현장 연구의 어려움을 기술하는 부분에서 ‘누락된 역사 쓰기’는 오랫동안 견고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던 다층적 힘들과의 불가피한 경합 과정을 포함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시 ‘잃어버린 혹은 누락된 역사’, ‘쓰여지지 않은 역사’ 쓰기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은 연구자가 구술 생애사에서 ‘침묵되고 생략되는 부분’을 포착하는 지점인 듯하다. (p241)

이 책의 미덕은 저자가 애써 복잡하게 설득하려고 하고 있는 자신의 이론적 입장이 아니라, 저자가 시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가능케 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사유의 확장 능력이 아닐까 싶다. 누락된 역사가 누락될 수밖에 없었던 정황들이 가시화되면서 현재성을 해석하고 구성하는 담론의 새롭게 구성되는 건 헤게모니적 담론 경합의 장에서 주변적이고 하찮은 것으로 폄하되었던 생애사, 구술사, 가족사를 통한 역사의 재구성 과정에서 가능했다. 특히 누락된 역사에 관한 연구에서는 연구 참여자의 구술을 듣고 쓰는 과정에서 말하여진 것과 말하여지지 않은 것의 간극을 포착하는 감각이 특히 요구되는 듯하다. 연구자가 누구이냐에 따라 침묵은 쉽게 열리기도 하고 유지되거나 더 강화된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 한 ‘군위안부 할머니’가 자신이 수년 동안 만나왔던 비혼의 젊은 여성 연구자에게는 별로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성적인 경험들을 처음 만난 동년배의 연구자에게 말하더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질적 연구 방법은 중심과 주변, 현재와 과거, 연구자와 연구참여자, 연구자들 간의 끊임없는 소통을 필요로 하는 작업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럭셔리 신드롬
제임스 트위첼 지음, 최기철 옮김 / 미래의창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의 인상에 대해서 평할 때 “럭셔리하다”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럭셔리하다’는 단어는 ‘섹시하다’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최근 우리 사회에서 그 사람의 인격과 품격에 대한 긍정적 함의를 내포하는 것으로 변환되었다. 이 책은 미국에서 사회 현상으로 정착된 호사 취향, 나아가 ‘호사스러움의 대중화 혹은 민주화’라는 범지구적 현상을 ‘호사스러움’의 역사, 저자 자신의 개인적 체험, 라스베가스라는 도시공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럭셔리 신드롬’이라는 문화 현상을 조명하는 방식에는 대학에서 영문학과 광고학을 동시에 가르친다는 저자의 학문적 배경이 반영되어 있다. 저자는 소설과 영화 텍스트, 광고 기법, 게다가 도시 공간까지 넘나들면서 분석을 시도한다. 그래서 좀 지루하고 산만한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이 책이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는 ‘명품을 소비하는 대중’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면서, ‘호사 취향’이 어떻게 대중적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에 대해 저자 자신의 현장 체험과 라스베가스라는 도시공간에 대한 분석을 통해 풀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원제 "Living it up : Our Love affair with luxury"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소비 주체인 인간이 명품과 맺고 있는 관계를 일종에 ‘연애’에 비유한다. 뷰캐넌 증후군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 데이지 뷰캐넌이 개츠비의 셔츠 더미 앞에서 넋을 잃고 매혹되는 심리적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서 저자가 만들어 낸 말이다. 저자는 스탕달이 뛰어난 미술품을 관람하다가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황홀경을 경험했다”는 데서 유래한 ‘스탕달 증후군’처럼 어떤 매혹적 대상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 경험, 그것이 바로 명품이 인간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본다.

명품 소비가 사회 현상으로 정착된 건 단지 명품 브랜드에 대한 지식 및 소비 행동과 관련된 양식들이 미국인의 상식으로 자리잡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명품 브랜드를 통해 소속감을 느끼고, 명품의 로고가 마치 신분의 상징물 노릇을 하게 된 데에는 단순히 이성적 소비 주체의 ‘합리적 소비’로만 설명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이고 비이성적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첫 눈에 반해버린 매혹적 상대를 만났을 때처럼,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마력. 저자의 딸과 아내가 ‘호사스러움이라는 문화적 현상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 명품 브랜드숍 현장을 방문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에는 멀쩡한 사람이 이 호사열병(Luxury Fever)에 감염되는 과정이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프리디 우먼”의 여주인공이 명품샵 점원으로부터 모욕과 멸시를 당했던 것처럼, 저자의 딸과 아내는 점원으로부터 상처 받고, 전시된 명품들을 보면서 “신고 있는 신발과 입고 있는 옷들이 창피하게 느껴지는” 심리적 현상을 경험한다. 이러한 모욕과 상처와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 바로 “갖고 싶다”는 욕구, “나도 이것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 

미국은 애초에 귀속적 신분과는 거리가 먼 뜨내기 이민자들의 나라이고,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자본과 마케팅 능력, 그리고 새롭게 탄생한 거대한 (중산층) 대중의 거대한 구매력, 그리고 과시를 통한 계급 경쟁이라는 거대한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반면 서구 유럽 대륙은 산업 자본주의 이후에도 계층 간의 문화적.상징적 질서가 유지된 바, 이른바 ‘upper class'의 아비투스, 호사에 대한 취향 감각이라는 자원이 남아 있었다. 미국의 마케팅 능력과 대륙의 호사 취향의 유산, 이 두 가지가 만나서 만들어낸 것이 사치 호사품이고, 마케팅의 힘 덕분에 호사품은 필수품이 되었다는 분석은 적절하고도 흥미로웠다. 

트위첼은 “사치는 나쁜 거야”라는 계몽적 언어와는 처음부터 거리를 둔다. 그는 다만 명품 소비를 통해 인간이 어떤 의미의 교환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안에 포섭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아마도 명품 소비에 대한 도덕적, 계몽적 시각을 일단 접어두었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온 인생 역정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소비하느냐에 의해 평가되는” 현상, 즉 명품의 소유가 인격 판단의 기준이 되는 현상에 대한 탁월한 분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호사에 대한 은근한 변론’이라는 제하의 결론에서 저자는 호사품 소비에 대한 찬반 의견,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나열하면서, 명품 소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저자의 ‘모호한’ 결론은 ‘호사스러움의 민주화’가 갖는 양가적이고 복잡한 함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우선 이러한 입장은 호사스러움의 민주화가 갖는 양가성에 대해 포착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장점이 있다. 귀속 신분에 의해서 먹고 마시고 살 수 있는 것들이 정해져 있는 신분제 사회와는 달리, 근대 소비 자본주의 사회는 누구나 다 돈만 있으면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있다. “사치 호사품은 저속하고, 천박하며, 역사도 없고, 기억도 없고, 보존할 가치도 없다. 그러나 기이하게 민주적이고 결속력이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소비의 민주화 덕분에 지구촌은 “지금까지 존재한 어떤 체제보다도 더 공평하게 신분을 분배하는데에 가까이 다가간 공동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유형의 민주화가 가속화될수록, 그렇게 명품 소비를 통해 상징적으로 구매한 신분은 누군가의 모멸감과 상처, 가난한 사람의 노동력과 자원에 대한 착취를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도덕적인 판단을 유보한 채 ‘호사스러움의 민주화’라는 문화적 현상을 고찰하겠다는 저자의 기획은 그 자체로 이 책을 양가적 텍스트로 만들어 버린다. 그 이야기를 지난 봄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는 한 다큐 영화라는 텍스트를 통해 풀어가도록 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성형수술 담론이 성형 및 미용 산업을 통해 구축되고 실천되는 과정을 추적한 [오버 더 힐]이라는 다큐가 반복적으로 오버랩되었다. 써니 베리만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소위 ‘아름다움의 민주화’라는 가지고 있는 ‘양가성’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아름다움은 선천적으로 혹은 귀속적으로 특정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지만, 비현실적인 미의 기준들이 미디어와 성형의학 담론을 통해 ‘정상성’을 획득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부자연스럽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포샵질이나 성형수술로 수정이 가능해진 외모, 이 다큐를 통해서 써니 베리만이 하고자 했던 작업은 성형수술을 하는 여성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으면서, ‘아름다움의 민주화’가 가져온 역설적 결과들을 가시화했다. 그러나 이 다큐는 그 자체로 역설을 내포하고 있고, 역설들을 만들어 내었다. 우선 다큐에는 성형 수술의 담론과 실천의 구조적 과정에 개입하고자 했던 감독 자신도 그 담론에 포섭되었던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다큐에는 ‘모델과 비교해서 당신의 엉덩이와 가슴과 아랫배와 소음순까지 얼마나 못생겼는지'를 설파하며 부위당 4000달러의 성형수술을 권유하는 '잘나가는 의사’의 논리에 감독 자신도 서서히 위축되고 설득당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한, 미디어와 성형 의학 담론에 의해 포샵질과 성형으로 변형된 외모가 정상성과 규범적 아름다움의 지위에 등극하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던 이 영화가 네덜란드에서 상영된 후 오히려 ‘질 성형 수술’ 붐이 일어났다. 

성형수술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계몽의 언어는 집어치우고, 차라리 성형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을 가시화해 보자는 기획. 좋다. 어차피 지금은 “진보의 '계몽'을 압도한 보수의 '욕망 정치'”가 대세이고, 그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러한 기획 역시 양가적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문화 분석에서 계몽적, 도덕적 시각의 배제는 필요하긴 하지만 이러한 입장이 한편으로는 또 다른 양가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문제는 [오버 더 힐]이 소음 성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소음 성형이 급증한 것, [미녀는 괴로워]가 “어쨌거나 성형은 하고 볼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성형 수술에 대한 욕구를 부추긴 것처럼, 『럭셔리 신드롬』이 명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호사병’에 대한 도덕적 알리바이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아마도 이 책은 광고 마케팅 기법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도 대단히 인기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광고학을 가르치는 저자가 이 책 여기 저기에서 광고 마케팅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저자의 인문학적 능력이 ‘대중적 상품’을 ‘명품’으로 둔갑시키는데 활용된 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연 ‘도덕적 판단’의 유보가 문화 연구자에게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 바로 그런 점에서 비판적 지식을 생산하는 문화 연구자로서 “명품 소비를 무조건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분명 ‘문제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제적 공포
비비안느 포레스테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199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풍경 1. ‘기륭 사태’에 대한 접근은 딸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해고당할까봐 잔업까지 하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직장, 몸이 아파 졸도해 앰뷸런스에 실려 갔다는 이유로 해고당해야 하는 직장이 정당한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식의 고용형태를, 우리 사회가 용인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문제제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근본적인 문제에 비한다면 심지어 기륭 노동자들이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부차적이다. <어느 인문학부 대학생의 글, 경향신문, 2008년 10월 30일>
풍경 2. 출근 시간, 만원의 지하철 안. 붐비는 인파 속으로 노인들이 하나 둘씩 자루를 들고 선반에 올려진 신문을 모으고 있다. 신문을 차지하려는 노인들의 손길은 경쟁으로 분주해 지고, 신문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절박하고 처절하다. 키가 작아 손이 닿지 않는 여성 노인은 닿지 않을 것이 뻔한데도 그것을 잡으려는 몸짓을 시도한다. 신문 쟁탈전, 그리고 그 쟁탈전을 스쳐가는 사람들, 그 사이의 공간을 주시하는 ‘나’는 짜증, 연민, 그리고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2008년 10월 30일, 30대 중반의 한 직장 여성(나의 지인)의 말>

이 책의 특징은 개념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적 공포’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기 하나, 현실에 대한 저자의 진단과 해석은 경제학적 식견이 아니라 인문학적 감각으로 기술되어 있다. 각 장별로 소제목도 붙어있지 않고, 심지어 목차조차 제시되어 있지 않기에 독자들은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려면 어떤 실마리나 가이드도 없이 그저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책장을 넘길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저자의 이해방식에는 그 어떠한 경제학적 지식도 동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저자가 질문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의 초점은 ‘경제’와 ‘노동’이지만, 질문은 ‘인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어떠한 ‘경제적 해결책’도 믿지 않으며, 그래서 장밋빛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혹하리만치 냉정하게, 그리고 분노에 찬 어조로 가난과 빈곤은 이윤의 축적이 노동의 소멸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임을 직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을 개괄해 보자면 이렇다. 한마디로 현재의 자본주의 프로그램 하에서는 대안이 가능하지 않다. 현 단계의 자본주의는 이미 ‘고용’의 소멸 속에서 작동하고 있고,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정부와 기업의 약속은 허위일 뿐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미 국가를 포함하여 IMF, OECD, 세계은행 등 부조리한 현실을 만들어내고 작동시키는 ‘움직이는 힘들’에 의해 ‘남아도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결과 대안이 있다”는 주술에 빠져있는 것이 핵심적 문제이다. 이러한 주술에서 깨어난다고 해서 실업과 빈곤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삶의 의미’, ‘인간의 품위’, ‘권리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이제 세상은 사회로부터 ‘이미 쫓겨난 자들’과 ‘앞으로 쫓겨날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사회로부터의 ‘등록 취소’라는 상황이 대중의 삶의 조건이며, 사회 안에 소속된 자들 역시 언젠가는 자신도 이 수많은 ‘등록 취소된 자들’의 무리에 합류해야할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한다. 불법적 존재, 잉여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수익성이 있다는 것’, ‘이용할만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모든 이들에게 강요되고 있다.

살아갈 권리를 갖기 위해 살아남을 수 있는 ‘자격’이 필요한가?” 살아남을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사회에, 그리고 그 사회를 지배하고 관리하는 경제구조에 ‘유용한’ 자들임이 증명되어야 한다. (p20.)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 실행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을 때, 그때는 ‘살아갈 권리’라는 것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 (p21.)

빈곤의 문제는 어차피 해결할 수 없으며, ‘사유하는 힘’만이 인간의 존엄성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라는 주장, 젊은이들에게 ‘취업’이라는 허황된 꿈을 주입하느니 차라리 인문학 교육을 하자는 제안은 한 소설가의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한 것일까? 진짜 절망은 절망을 피하려는 태도, ‘움직이는 힘들’의 거짓말에 속아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 그 주술에서 스스로 깨어나지 않으려는 태도라는 것은 ‘이미 배부른 자’의 건방진 제안에 불과한 것일까? 한 동료는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었다. 저자의 제안이 가망 없는 미래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실업자들인지, 대중을 미몽에 빠트리는 지배 담론과 경합하여 새로운 사유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지식인들인지, 즉 도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절망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시한부 마법에라도 걸려있는 것이 낫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적어도 저자의 주장은 그런 사람들에게 먹힐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또한, 책에 실려 있는 저자의 사진, ‘매우 있어 보이는 차림새’가 풍기는 저자의 이미지는 ‘절망할 용기’에 대한 제안에 분노와 불신을 자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빈곤과 실업 문제에 대한 구조적 해결책의 모색은 그 사회 정치인의 책무인 동시에 의무라는 점은 반박할 수 없으며, 이는 또한 모든 인민의 생존이 달려있는 절박한 문제이다. 저자가 이 문제를 너무 폄하해 버린 점, 단지 해결책에 대한 모색을 미몽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언한 점은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무력감을 강요하는 패배주의로 읽히는 측면도 있다.

1996년에 프랑스에서 한 중견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가 쓴 ‘경제적 공포’에 관한 이 책은 프랑스 사회에서 왜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책이 실업과 빈곤의 문제를 ‘경제 논리’에서 벗어나 ‘살아갈 권리’의 문제, 삶의 가치와 존엄성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륭 사태’를 바라볼 때, 한편으로는 고용창출을 맹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지방을 제거하듯이’ 사람을 잘라내는 정부와 기업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 보편의 문제인 ‘살아갈 권리’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사회의 희망은 바로 거기서 싹 트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지 ‘이윤을 낼 수 있는’ 신체적 힘도, 사회적 자원도 없다는 이유로, 노인들이 저렇게 하루 하루 절박하고 고단한 생존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 시험 성적 때문에 초등학생이 자살하는 상황, 이 상황들을 거대한 침묵과 무관심의 공간으로 남겨두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사회에 가장 먼저 요구되는 정치적 아젠다가 아닐까. ‘기륭 사태’의 문제를 ‘경제 논리’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었던 저 대학생이 인문학부 학생이라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사족. 이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머리와 가슴이 동시에 구멍이 뚫리고 휑해지는 증상을 겪었다. 그러나 그 구멍들 사이로 어떤 각성의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한국 사회가 경제 논리에 빠져 ‘사유할 수 있는 힘’의 부재 상태에 빠져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사람’, ‘인간’의 언어로 말하고 소통할 수 있는 힘을 강조하는 저자의 주장은 유의미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