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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공포
비비안느 포레스테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1997년 5월
평점 :
풍경 1. ‘기륭 사태’에 대한 접근은 딸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해고당할까봐 잔업까지 하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직장, 몸이 아파 졸도해 앰뷸런스에 실려 갔다는 이유로 해고당해야 하는 직장이 정당한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식의 고용형태를, 우리 사회가 용인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문제제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근본적인 문제에 비한다면 심지어 기륭 노동자들이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부차적이다. <어느 인문학부 대학생의 글, 경향신문, 2008년 10월 30일>
풍경 2. 출근 시간, 만원의 지하철 안. 붐비는 인파 속으로 노인들이 하나 둘씩 자루를 들고 선반에 올려진 신문을 모으고 있다. 신문을 차지하려는 노인들의 손길은 경쟁으로 분주해 지고, 신문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절박하고 처절하다. 키가 작아 손이 닿지 않는 여성 노인은 닿지 않을 것이 뻔한데도 그것을 잡으려는 몸짓을 시도한다. 신문 쟁탈전, 그리고 그 쟁탈전을 스쳐가는 사람들, 그 사이의 공간을 주시하는 ‘나’는 짜증, 연민, 그리고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2008년 10월 30일, 30대 중반의 한 직장 여성(나의 지인)의 말>
이 책의 특징은 개념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적 공포’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기 하나, 현실에 대한 저자의 진단과 해석은 경제학적 식견이 아니라 인문학적 감각으로 기술되어 있다. 각 장별로 소제목도 붙어있지 않고, 심지어 목차조차 제시되어 있지 않기에 독자들은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려면 어떤 실마리나 가이드도 없이 그저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책장을 넘길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저자의 이해방식에는 그 어떠한 경제학적 지식도 동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저자가 질문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의 초점은 ‘경제’와 ‘노동’이지만, 질문은 ‘인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어떠한 ‘경제적 해결책’도 믿지 않으며, 그래서 장밋빛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혹하리만치 냉정하게, 그리고 분노에 찬 어조로 가난과 빈곤은 이윤의 축적이 노동의 소멸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임을 직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을 개괄해 보자면 이렇다. 한마디로 현재의 자본주의 프로그램 하에서는 대안이 가능하지 않다. 현 단계의 자본주의는 이미 ‘고용’의 소멸 속에서 작동하고 있고,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정부와 기업의 약속은 허위일 뿐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미 국가를 포함하여 IMF, OECD, 세계은행 등 부조리한 현실을 만들어내고 작동시키는 ‘움직이는 힘들’에 의해 ‘남아도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결과 대안이 있다”는 주술에 빠져있는 것이 핵심적 문제이다. 이러한 주술에서 깨어난다고 해서 실업과 빈곤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삶의 의미’, ‘인간의 품위’, ‘권리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이제 세상은 사회로부터 ‘이미 쫓겨난 자들’과 ‘앞으로 쫓겨날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사회로부터의 ‘등록 취소’라는 상황이 대중의 삶의 조건이며, 사회 안에 소속된 자들 역시 언젠가는 자신도 이 수많은 ‘등록 취소된 자들’의 무리에 합류해야할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한다. 불법적 존재, 잉여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수익성이 있다는 것’, ‘이용할만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모든 이들에게 강요되고 있다.
살아갈 권리를 갖기 위해 살아남을 수 있는 ‘자격’이 필요한가?” 살아남을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사회에, 그리고 그 사회를 지배하고 관리하는 경제구조에 ‘유용한’ 자들임이 증명되어야 한다. (p20.)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 실행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을 때, 그때는 ‘살아갈 권리’라는 것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 (p21.)
빈곤의 문제는 어차피 해결할 수 없으며, ‘사유하는 힘’만이 인간의 존엄성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라는 주장, 젊은이들에게 ‘취업’이라는 허황된 꿈을 주입하느니 차라리 인문학 교육을 하자는 제안은 한 소설가의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한 것일까? 진짜 절망은 절망을 피하려는 태도, ‘움직이는 힘들’의 거짓말에 속아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 그 주술에서 스스로 깨어나지 않으려는 태도라는 것은 ‘이미 배부른 자’의 건방진 제안에 불과한 것일까? 한 동료는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었다. 저자의 제안이 가망 없는 미래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실업자들인지, 대중을 미몽에 빠트리는 지배 담론과 경합하여 새로운 사유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지식인들인지, 즉 도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절망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시한부 마법에라도 걸려있는 것이 낫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적어도 저자의 주장은 그런 사람들에게 먹힐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또한, 책에 실려 있는 저자의 사진, ‘매우 있어 보이는 차림새’가 풍기는 저자의 이미지는 ‘절망할 용기’에 대한 제안에 분노와 불신을 자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빈곤과 실업 문제에 대한 구조적 해결책의 모색은 그 사회 정치인의 책무인 동시에 의무라는 점은 반박할 수 없으며, 이는 또한 모든 인민의 생존이 달려있는 절박한 문제이다. 저자가 이 문제를 너무 폄하해 버린 점, 단지 해결책에 대한 모색을 미몽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언한 점은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무력감을 강요하는 패배주의로 읽히는 측면도 있다.
1996년에 프랑스에서 한 중견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가 쓴 ‘경제적 공포’에 관한 이 책은 프랑스 사회에서 왜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책이 실업과 빈곤의 문제를 ‘경제 논리’에서 벗어나 ‘살아갈 권리’의 문제, 삶의 가치와 존엄성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륭 사태’를 바라볼 때, 한편으로는 고용창출을 맹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지방을 제거하듯이’ 사람을 잘라내는 정부와 기업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 보편의 문제인 ‘살아갈 권리’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사회의 희망은 바로 거기서 싹 트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지 ‘이윤을 낼 수 있는’ 신체적 힘도, 사회적 자원도 없다는 이유로, 노인들이 저렇게 하루 하루 절박하고 고단한 생존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 시험 성적 때문에 초등학생이 자살하는 상황, 이 상황들을 거대한 침묵과 무관심의 공간으로 남겨두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사회에 가장 먼저 요구되는 정치적 아젠다가 아닐까. ‘기륭 사태’의 문제를 ‘경제 논리’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었던 저 대학생이 인문학부 학생이라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사족. 이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머리와 가슴이 동시에 구멍이 뚫리고 휑해지는 증상을 겪었다. 그러나 그 구멍들 사이로 어떤 각성의 힘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한국 사회가 경제 논리에 빠져 ‘사유할 수 있는 힘’의 부재 상태에 빠져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사람’, ‘인간’의 언어로 말하고 소통할 수 있는 힘을 강조하는 저자의 주장은 유의미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