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윤택림 지음 / 역사비평사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언젠가 제주도의 해변 마을 한 가정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일상적인 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지만 그들과 나 사이에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거리감이 있었다. 이방인이었던 나에게는 그들로부터 침묵으로 가득한 심연 같은 것이 느껴졌었다. 사람들로부터 집단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나중에 제주도의 한 시민 단체 활동가에게 이런 느낌을 털어놓았더니 그는 ‘4.3’이라는 소통되지 않은 집단적 경험, 그것을 둘러싼 견고한 침묵의 카르텔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4.3의 경험은 사건과 사실로 설명되는 역사이지만, 그것이 일어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과 이후 세대를 포함하여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건의 경험, 말하여진 경험인 동시에 말하여지지 않은 경험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 권력에 의해 강요된 침묵이자 생존을 위해서 스스로 선택한 침묵이었을 것이다.

잃어버린 역사, 삭제된 역사, 누락된 역사, 말이나 글로 표현되지 않은 삶의 체험들(lived experience)를 언어화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굳게 닫혀있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은 긴장과 호기심, 막연한 두려움을 동반하는 행위가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상자를 열 것인가 말 것인가, 살짝 열린 뚜껑 사이로 보이기 시작한 내용물들을 무엇이라고 명명하고 해석할 것인가를 둘러싼 치열한 각축의 장을 열어젖히는 행위가 될 것이다. 나 역시 ‘빨갱이’와 관련된  침묵의 가족사를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누락된 역사(missing history)에 관심이 있기에, 저자가 ‘빨갱이 마을로의 과거여행’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했다. 또한 저자가 누락된 역사를 ‘복원’하는 방식, 그 과정에서 연구자로서 겪었던 복잡한 체험들이 유의미하게 다가왔다.

이 책은 기존의 민중사 연구의 지평을 비판적으로 확장하면서 충남 예산군의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대안적 근현대사를 모색한다. 1부와 2부 초반에 전개되는 이론적인 논의들은 다소 지루한 감이 있지만, 구술 자료의 텍스트화가 전개되는 중반부 이후는 생생한 현장감을 준다. 이 책과 마찬가지로 구술사, 생애사, 가족사를 연구한 낸시 에이블만의 글을 읽을 때 저자가 글의 상당한 분량을 지루하다 싶을 만큼 이론적 논의에 할당하고 있는 점에 대해 다소 의구심이 들었는데, 그것은 이 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두 사람 모두 주류 지식 체계에서 주변적이고 폄하되었던 방법론과 인식론, 즉 구술사, 생애사, 가족사를 통해 한국근현대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해 보았다.

저자는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의 수사를 차용하여 “개인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 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 가족과 생애사라는 사적이고 사소하고 비정치적이고 비학문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영역을 들여다봄으로써 한국의 근현대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이 연구가 진행되었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연구자에게 도전과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3부는 연구자가 현지 조사 과정을 포함한 연구 전반에 겪었던 연구자 자신의 경험을 성찰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는 2가지 서로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는 ‘빨갱이 마을로의 과거 여행’을 통해 저자가 재구성한 한국의 근현대사, 다른 하나는 연구자 자신의 연구 경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이 재구성한 지식은 두 가지 차원의 서사가 맞물려서 만들어내는 효과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지식체계에서 역사로 인식되지 않았던 사건이나 경험을 담론의 장으로 포함시키는 것, 아마도 그것은 비판적 학자들이 담당하게 되는 주된 노동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침묵된 역사, 누락된 역사 ‘복원’ 프로젝트는 연구자와 연구 참여자가 놓인 현재성, 입장들 간의 복합적 대화적 관계망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다층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문화기술지적 역사에서 시양리 마을 사람들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그대로 복원되어 마을 사람들의 역사 해석이 전달될 것이다....그럼으로써 이 문화기술지적 역사는 해석적 접근과 정치경제적 접근을 결합함으로써 남한 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시양리의 근현대사를 복원하는 것이다. (p24)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근현대사는 두 가지 진리체제, 즉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한 국가의 공식적 담론과 민중사로 대변되는 대항담론 간의 끊임없는 경합 속에 있었다. 저자는 민중사의 입장을 기본적으로 공유하면서도, 이 두 가지 진리체제 모두 ‘실제적인 지방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동일하게 획일적인 담론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비록 지방민의 목소리를 누락시키고 있는 두 가지 담론 구조 모두를 비판하고 있지만 저자가 민중의 역사를 ‘복원’과 ‘대변’하고자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민중사의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이 책은 6.25를 중심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재조명하고 있는데, 특히 이때 자주 등장하는 ‘복원’과 ‘대변’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저자가 분명히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수행하는 민중사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복원’ 가능한 ‘실체로서의 진실’과 ‘대변’ 가능한 ‘주체’를 가정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이후 민중사 연구에 대해 “민중사가 진정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18p)고 비판하고 있는 점, 연구자가 지방민의 시각을 대변할 수 있다고 본 점이 그것이다.

첫 부분에서 저자가 ‘복원’, ‘대변’이라는 단어를 문제화하지 않으면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지만, 책을 덮고 나서 그것 자체가 ‘기억과 재현’, 그리고 역사 쓰기에 대한 저자의 입장과 시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과연 연구자가 연구 참여자의 경험을 대변할 수 있을 것인가? 연구자가 대변((re)present)하고 복원할 수 있는 실체(present)가 있는 것인가? 저자는 이론적 논의에서는 ‘대변’과 ‘복원’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지만, 구술사를 텍스트화하고 있는 후반부에서는 지식의 정황성(situatedness)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식의 정황성, 그리고 ‘복원’ 혹은 ‘대변’이라는 두 가지 모순적 입장을 저자가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었다.

현지 조사에 대한 연구자의 성찰적 글이 담긴 3부는 현재 진행 중인 나의 연구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생각해 볼 거리들을 던져주었다. 1989년과 1996년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기억과 역사가 어떠한 관련성을 맺으며 상호주관적으로 구성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부분, 연구 현장 진입의 어려움과 연구자가 연구가 진행되는 내내 참여자들로부터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 등 저자가 현장 연구의 어려움을 기술하는 부분에서 ‘누락된 역사 쓰기’는 오랫동안 견고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던 다층적 힘들과의 불가피한 경합 과정을 포함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시 ‘잃어버린 혹은 누락된 역사’, ‘쓰여지지 않은 역사’ 쓰기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은 연구자가 구술 생애사에서 ‘침묵되고 생략되는 부분’을 포착하는 지점인 듯하다. (p241)

이 책의 미덕은 저자가 애써 복잡하게 설득하려고 하고 있는 자신의 이론적 입장이 아니라, 저자가 시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가능케 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사유의 확장 능력이 아닐까 싶다. 누락된 역사가 누락될 수밖에 없었던 정황들이 가시화되면서 현재성을 해석하고 구성하는 담론의 새롭게 구성되는 건 헤게모니적 담론 경합의 장에서 주변적이고 하찮은 것으로 폄하되었던 생애사, 구술사, 가족사를 통한 역사의 재구성 과정에서 가능했다. 특히 누락된 역사에 관한 연구에서는 연구 참여자의 구술을 듣고 쓰는 과정에서 말하여진 것과 말하여지지 않은 것의 간극을 포착하는 감각이 특히 요구되는 듯하다. 연구자가 누구이냐에 따라 침묵은 쉽게 열리기도 하고 유지되거나 더 강화된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 한 ‘군위안부 할머니’가 자신이 수년 동안 만나왔던 비혼의 젊은 여성 연구자에게는 별로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성적인 경험들을 처음 만난 동년배의 연구자에게 말하더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질적 연구 방법은 중심과 주변, 현재와 과거, 연구자와 연구참여자, 연구자들 간의 끊임없는 소통을 필요로 하는 작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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