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구
김이환 지음 / 예담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일단 처음 몇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책을 덮을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정체불명의 검은 구가 나타나 도대체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설정도 기발하거니와, 읽기 쉽게 구분된 각장의 에피소드들 역시 나름의 재미를 담고 있다. 소설책에 이렇게 몰입해서 읽은 건 정말 오랜만이다. 젊은 작가의 상상력과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가 돋보인다. 4시간만에 읽었는데, 그건 내가 읽는 속도가 빨라서가 아니라, 이 책의 흡입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 누군가 40자평에 이 책을 읽으면서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렸다는데, 나도 그랬음.  

무더운 여름에 어울리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가의 시간 - 강만길 자서전, 2010년 제25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강만길 지음 / 창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평생 역사학자로 살아온 사람의 자서전이라면 조금 지루하거나 건조할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여러 면에서 ‘재미’를 가져다 준 책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한 인생’을 살아낸다는 것이 주는 묵직함, 더욱이 그 한 인생의 마감을 앞두고 스스로 돌아본다는 것이 주는 진지함, 아마 모든 자서전에는 이런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의 시간>은 1930년대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국민학교’를 다녔고, 6.25 동란, 4.19, 5.16, 광주항쟁 등 정치적 격변의 시기를 살아온 우리 부모의 세대 이야기이기에 감회가 달랐던 것 같다. 또한 바로 우리 윗세대의 이야기이건만 그 구체적 경험 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는 점도 새삼 깨닫게 된다. 

지식인과 지성인을 나누어서 개념화한다면, 만고불변 ‘역사의 길’을 제대로 아는 식자만이 지성인의 범주에 들 것이며, ‘역사의 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식자는 한낱 지식인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266~267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뜻하지 않은 고초를 겪으면서 본인의 학문 방향이 바뀌게 된 경위였다. 당시는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학문의 영역에서 제 갈 길을 가고자 했던 학자들마저 군사독재의 ‘독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기였다. 하물며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학자나 지식인들이 겪었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저자가 겪었던 고초는 역사학자로서의 학문적 소신과 견해를 드러낸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생각하는 것이 죄가 되었던 시대’에 자유로운 학문적 사유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지성인’과 ‘지식인’의 개념에 대한 저자의 구분 방식에 공감이 갔다. 저자가 말하는 ‘역사의 길’이란 지식인이 가져야할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들, 역사적으로 조명된 바 없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저자 특유의 시각으로 들려준 것도 좋았다. 특히 월북한 학자들이 처했던 상황이나 동기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치적 신념과 무관하게 학자로서, 혹은 직업인으로서, ‘제 갈 길을 가고자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월북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저자의 관심이 내게도 전이되었다. ‘좌우의 이분법’ 틀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빈곤에 맞서다 - 누구나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위해
유아사 마코토 지음, 이성재 옮김 / 검둥소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을 때, 기쁨으로 가슴이 떨리고 두근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빈곤’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하는 이 책은 그런 지적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좋은 책이다.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쉽고 명료한 언어로 빈곤의 문제를 해설하는 저자의 능력이 탁월하다. 저자의 뛰어난 필력은 오랜 반-빈곤 활동 경험과 학문적 소양이 상승 작용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빈곤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이 갖는 진정성과 치열하고 깊은 사유의 결과로 보인다.

경제적 부국인 일본에서 다수의 인구가 넷카페, 게스트하우스 등을 전전하며 머무를 곳이 없는 난민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이러한 일본의 현실을 한번 미끄러지면 바닥까지 추락하게 되는 ‘미끄럼틀 사회’로 진단한다. 아동학대, 부모 유기 혹은 살해 등의 범죄를 ‘마음’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접근하자는 것이 저자의 제안이다.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빈곤의 문제, 따라서 사회적 책임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빈곤에 대해 ‘가난=경제적 결핍’이라는 통념을 깨고 사회적 지위의 부재 혹은 박탈의 문제로 접근한다.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에 따르면 빈곤은 단순히 물질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잠재 능력을 박탈당한 상태”로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부자유”이다. 저자는 ‘다메’라는 개념을 통해 아마티아 센의 통찰력을 확장시킨다. ‘다메’란 일본어로 ‘고여있는 물(저수지)’에서 ‘고여있는 무엇’으로서, 일종의 유무형의 공공재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의지할 수 있는 가족, 친족,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다메’”라고 본다.(p94) 빈곤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다메’가 모두 사라지고 박탈당한 상태라는 것이다. 즉 수중에 돈이 없더라도 인간관계, 복지 시스템 등 안전망이 존재한다면 인간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제시키는 ‘빈곤’ 상태에 놓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 2004)”에서 가졌던 몇 가지 의문들이 해소되었다. 영화는 각각 아버지가 다른 아이 넷을 둔 싱글 맘이 아이들을 놓아두고 사라지면서, 보호자를 잃은 아이들끼리 살아가다가 결국 비극적 상황에 이르는 모습을 담았다. 내가 가졌던 의문은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점, 아이들은 마치 섬에 조난당한 사람들처럼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영화는 아이들을 떠난 그 엄마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유보했다. 불안정한 직업을 가진 싱글맘이 혼자서 아이 넷을 키우기란 버거웠을 것이다. 다만 내가 가졌던 의문은 왜 이 엄마의 버거움을 그 어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었을까 하는 점, 왜 이 엄마는 아이들을 떠나기에 앞서 누군가에게, 어딘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이 영화의 엄마와 아이들이 놓인 상황이 바로 ‘빈곤’의 핵심이며, 문제는 단지 그들이 가난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사회적 연결망의 부재가 가난한 사람들의 비가시성과 고립을 초래하고, 사회적 지위를 박탈하여 난민 상태로 만든 것이다.

일본 사회가 ‘미끄럼틀 사회’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단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 주장이다. 저자는 빈곤을 개인의 게으름 탓으로 돌리는 ‘자기책임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을 응석(어리광)으로 치부하는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자기책임론’이 빈곤 문제의 근원이라면, 상호부조와 사회적 연대를 되살려 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회복시켜주는 것이 그 대안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풍랑이 일 때 작은 어선들을 서로 매어 전복되지 않게 연결하는 것을 의미하는 ‘모야이’의 전통을 되살리는 것.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 그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난민들에게 안식처와 안전망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빈곤 문제 해결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빈곤 문제를 좀 더 확장된 틀에서 인식할 수 있게 됐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특히 빈곤 문제 전문가인 역자의 해설도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예슬 선언>의 전문을 읽긴 했지만, 정작 그 사람 됨됨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건 신문 인터뷰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선언문의 형식이라는 게 어떤 일련의 과정에 대한 최종적 판단과 결정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 과정에 이르는 복잡한 여정의 단상들과 여운들을 담기엔 한계가 있다. <김예슬 선언> 자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또 가슴에 깊은 파장을 남겼지만, 인터뷰에서 그 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 그 과정에 이르는 치열한 사유의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김예슬씨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구입했지만, 정작 그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김예슬 선언>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배경을 좀 더 상세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날 때부터 온전한 인간이었던 내가 왜 초등, 중등, 고등으로 분류되어야 하는지 묻고 싶다. 12년 동안 학교 교실에 가둬져 왜 대부분의 시간을 읽어버려야 하는지, 그게 왜 의무가 되어야 하는지 묻고 싶다. 하나 뿐인 경주 트랙이 아닌 수많은 길이 난 야생의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며 스스로 배워가는 것이 왜 꿈일 뿐이어야 하는지 나는 정말 묻고 싶다. p56.


그.러.나. 기대 이상이었다. “정말 인물이구나!” 25살의 젊은이가 쓴 글이라고 보기엔 세상을 읽어내는 혜안이 감탄을 자아낸다. 저자는 주변의 일상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고 있지만, 그의 글에서 흔히 똑똑한 사람이 빠지기 쉬운 자만이나 도덕적 우월감 같은 치기는 보지 못했다. 그는 ‘대학, 국가, 시장이라는 억압의 3각 동맹’이 만들어내는 무한경쟁과 질주의 트랙에서 자신의 불안하고 모순적인 위치를 예민하게 인식하면서, ‘큰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대학생)’에게 사라져버린 물음들을 되찾자고 제안한다.  

절절하고도 치열한 이 젊은이의 목소리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열망, 배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바람이 문장 마다 스며있다. 시대의 모순과 자신의 삶이 맞닿아 있다는 자각, 자기 앞에 놓인 무거운 고민을 직면하는 힘, 그 치열함과 진정성에 깊이 감동했다. 이렇게 내 가슴을 떨리게 만든 책은 정말 오랜만이다. 재생지로 만든 문고판 크기의 이 작은 책이 내 영혼에 큰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따뜻한 가슴, 시대에 맞서는 지적 패기와 용기를 가진 이 명민하고 열정적인 젊은이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환장할 봄날에 창비시선 232
박규리 지음 / 창비 / 200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양이, 그 고독한 탄생 앞에서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것이 분명하다
어디에 낳았을까 구경 좀 하려고 따라가면
고양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겁을 준다
멋모르고 근처를 얼쩡대던 강아지는 벌써
등짝에 피가 나도록 할퀴어버렸다
새끼만 낳으면 녀석은 뵈는 게 없다
그래, 가물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어둠 속에서 홀로 치러냈을 그 뜨거운 공포와
황홀한 두려움을 생각한다
그 고독한 탄생 앞에 나는 목이 메인다
눈동자는 고통 속에서 더욱 형형하고
날선 발톱은 이제 다시
아무 것도 놓지 않으리라
산고에 털이 다 빠진 녀석을 보며
고요히 내 가슴이 푸르게 멍든다
살아남은 것 외에
나의 생애는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냐
그래 스스로 새끼들을 앞세워
당당하게 올 때까지 눈만 퀭하니 치켜뜬 녀석을
다시는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되도 않는 원고를 쓰다 보면 눈이 뻑뻑하고 골이 띵해 온다. 온갖 난해한 개념과 딱딱한 문장의 세계를 한껏 누비다 잠이 들면, 그 많은 말들이 내 정신 세계를 점령해 버렸는지 꿈자리도 시끄럽고 현란하기 그지없다. 젠장, 흰머리도 부쩍 늘어버렸어! 내 영혼의 휴식을 위해 찾게 된 것이 바로 시집이다. 시라는 게 말이지, 여백이 많은 게 장점 아닌가. 페이지를 펼치면 글보다 빈 공간이 많아, 시각적으로도 느긋하게 긴장을 풀어준다. 게다가 짧고 압축적이고 간결한 언어는 주절주절 여러 말 늘어놓는 법 없이 정갈하게 놓여있다.  

그래, 매일 시집을 읽는 것이야!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짚어드는 시집마다 온통 꿀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제 여러 모로 에너지가 딸리는지 불행과 고뇌의 분위기가 가득한 시집은 책장을 넘기기가 버거울 때도 많았다.

박규리의 [이 환장할 봄날에]를 읽다가 문득 이렇게 외쳤다. “심봤다!” 오랜만에 나한테 맞는 시집을 만난 기분. 알고 보니 박규리는 그 역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시인이라고 하더라. 박규리의 시에도 역시 아픔이 담겨져 있지만,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후딱 읽어치우기가 아까워, 하나씩 읽고 한참을 음미했다. 그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그러고 나면, 찬찬히 주변을 관찰하게 되고, 매 순간의 일상이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새로 시집을 잡으면 먼저 목차에서 제목이 끌리는 시를 골라 읽는다. "고양이, 그 고독한 탄생 앞에서"는 이 시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이다. '고통 속에서 형형한 눈빛'과 마주하는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고양이나 인간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둠 속에서 홀로 치러냈을 그 뜨거운 공포와 황홀한 두려움'을 겪어내고, 산고에 털이 다 빠진 채 '날선 발톱'으로 세상과 맞선 존재 앞에서, 그 새끼를 구경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무색해진다. 그 존재가 고양이일지라도 말이다. 살아있음의 지독한 실존,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경외감, 관찰과 사유의 미학, 찰나의 순간에서 살아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주는 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