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환장할 봄날에 창비시선 232
박규리 지음 / 창비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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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그 고독한 탄생 앞에서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것이 분명하다
어디에 낳았을까 구경 좀 하려고 따라가면
고양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겁을 준다
멋모르고 근처를 얼쩡대던 강아지는 벌써
등짝에 피가 나도록 할퀴어버렸다
새끼만 낳으면 녀석은 뵈는 게 없다
그래, 가물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어둠 속에서 홀로 치러냈을 그 뜨거운 공포와
황홀한 두려움을 생각한다
그 고독한 탄생 앞에 나는 목이 메인다
눈동자는 고통 속에서 더욱 형형하고
날선 발톱은 이제 다시
아무 것도 놓지 않으리라
산고에 털이 다 빠진 녀석을 보며
고요히 내 가슴이 푸르게 멍든다
살아남은 것 외에
나의 생애는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냐
그래 스스로 새끼들을 앞세워
당당하게 올 때까지 눈만 퀭하니 치켜뜬 녀석을
다시는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되도 않는 원고를 쓰다 보면 눈이 뻑뻑하고 골이 띵해 온다. 온갖 난해한 개념과 딱딱한 문장의 세계를 한껏 누비다 잠이 들면, 그 많은 말들이 내 정신 세계를 점령해 버렸는지 꿈자리도 시끄럽고 현란하기 그지없다. 젠장, 흰머리도 부쩍 늘어버렸어! 내 영혼의 휴식을 위해 찾게 된 것이 바로 시집이다. 시라는 게 말이지, 여백이 많은 게 장점 아닌가. 페이지를 펼치면 글보다 빈 공간이 많아, 시각적으로도 느긋하게 긴장을 풀어준다. 게다가 짧고 압축적이고 간결한 언어는 주절주절 여러 말 늘어놓는 법 없이 정갈하게 놓여있다.  

그래, 매일 시집을 읽는 것이야!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짚어드는 시집마다 온통 꿀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제 여러 모로 에너지가 딸리는지 불행과 고뇌의 분위기가 가득한 시집은 책장을 넘기기가 버거울 때도 많았다.

박규리의 [이 환장할 봄날에]를 읽다가 문득 이렇게 외쳤다. “심봤다!” 오랜만에 나한테 맞는 시집을 만난 기분. 알고 보니 박규리는 그 역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시인이라고 하더라. 박규리의 시에도 역시 아픔이 담겨져 있지만,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후딱 읽어치우기가 아까워, 하나씩 읽고 한참을 음미했다. 그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그러고 나면, 찬찬히 주변을 관찰하게 되고, 매 순간의 일상이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새로 시집을 잡으면 먼저 목차에서 제목이 끌리는 시를 골라 읽는다. "고양이, 그 고독한 탄생 앞에서"는 이 시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이다. '고통 속에서 형형한 눈빛'과 마주하는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고양이나 인간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둠 속에서 홀로 치러냈을 그 뜨거운 공포와 황홀한 두려움'을 겪어내고, 산고에 털이 다 빠진 채 '날선 발톱'으로 세상과 맞선 존재 앞에서, 그 새끼를 구경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무색해진다. 그 존재가 고양이일지라도 말이다. 살아있음의 지독한 실존,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경외감, 관찰과 사유의 미학, 찰나의 순간에서 살아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주는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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