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 일리노이 주립대 학장의 아마존 탐험 30년, 양장본
다니엘 에버렛 지음, 윤영삼 옮김 / 꾸리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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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를 목적으로 브라질의 아마존 정글에서 살아가는 피다한 공동체에 들어간 저자가 오히려 무신론자가 된 이야기.

일간지에 실린 소개 글을 읽고 호기심에 당장 구입해서 읽어보았으나, 정작 책에는 독실한 기독교 선교사였던 저자가 신에 대한 믿음을 접게 된 경위가 뒷부분에 짧게 기술돼 있을 뿐이다. 오히려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초점은 피다한 공동체에 대한 언어학적 관심에 맞춰져 있다. 저자는 애초에 선교를 목적으로 복음주의 기독교 단체의 지원을 받아 성경을 피다한 말로 번역하기 위해 피다한 공동체에 들어갔다. 하지만, 번역의 불가능성을 인정한 저자는 오히려 언어학적 관심으로 선회한 듯하다.

책을 다 읽고 나니, 30년간 피다한 공동체 현장 연구를 이런 방식으로 기술한 점이 어쩌면 더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한 번도 의심해 보지 못했던 인식의 영역이 극적으로 변화된 경위였다. 저자의 관심이, 선교에서 피다한 공동체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상당히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음식을 보존하지 않는다. 도구를 소홀히 여긴다. 한번 쓰고 버릴 바구니만 만든다. 이것은 바로 이들의 문화에 ‘미래에 대한 관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p.152-3
히이삐이오. 이것은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사람이 ‘누구’냐는 사실보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 자체가 피다한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정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특히 영어에는 인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순간을 보편적으로 일컫는 말이 없다. 나타난 것, 사라진 것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주로 초점을 맞출 뿐, 인지범위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나긴 과정을 통해 나는 ‘히비삐이오’라는 말이 바로 경험적 인식의 경계를 일컫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인식의 범위 안에 들어오거나 나가는 행동, 경험의 경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이다. p.237

 피다한의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측하고, 추리하고, 마침내 해답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 자체도 재미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저자가 이해하게 된 피다한의 세계관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춤을 통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공동체의 거의 모든 이성과 성관계를 맺음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것, 소유 개념이나 숫자 개념이 없고, 미래에 대한 관심이 없고 오직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일견 매우 독특하고 예외적인 것처럼 보이는 피다한의 언어와 문화는 불교적 세계관과 무척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런과 섀넌이 거의 죽을 뻔했을 때 피다한 사람들이 어떠한 동정도 보내지 않는 모습을 보고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나는 감정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나는 피다한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것, 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p.116

자신의 가족이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자연이 이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나름대로 생존하기 위해 자연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투쟁들이 이토록 모두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이다. p.83

 특히 말라리아에 걸려 죽음에 임박한 아내와 아이를 배에 태운 채 바라본 아마존 정글의 풍경에 대한 저자의 단상, 자신의 가족들이 말라리아에 걸린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수수방관한 피다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Don’t sleep, There are snakes. ‘홀로 설 수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정글에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피다한 사람들.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자주 깨닫게 되는 것 하나, 윤리적 판단을 잠시 유보하면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저자의 종교적∙언어학적 견해에 동의할 것인가의 문제와는 별개로, 30년 간 지적 탐험의 궤도에 나타난 그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와 열정에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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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저승편 세트 - 전3권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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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심각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가볍지 않은 감동과 재미,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만화. 마흔도 채 안된 나이에 술 접대 업무에 시달리다 과로사한 노총각(김자홍)을 포함해, 저승 재판에서 그를 변호하는 저승의 국선변호사(진기한), 그리고 죽은 영혼들이 저승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신화적 인물들 등 다수의 주인공이 풀어가는 이야기. 결국 ‘구원’에 관한 이야기인데, 여기서의 구원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인간에 대한 연민에 기반하고 있다. 이승에서 크게 나쁜 일도 저지르지 않았고, 그렇다고 크게 좋은 일도 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중년 남자 김자홍. 그가 저지른 나쁜 일이란 결국 거대한 부조리의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이 책의 내러티브는 그가 저지른 나쁜 일에 면죄부를 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게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에 대한 공감이 있을 뿐. 나는 거기서 구원의 에너지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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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시즌 2 - 예비역들의 수다
주호민 글.그림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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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1은 저자가 갓 입대하여 제대할 때까지의 사이클을 따라가는 셀프 다큐 형식이라면, 짬2는 주제별로 다양한 군필자들의 경험을 모아서 들려주는 방식. 짬2는 짬1과는 다른 깨알 같은 재미가 있다. 그건 아마도 수다라는 형식이 갖는 미덕일 수 있을 텐데,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사람들 각자가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외부와는 격리된 공간에서 남자들끼리 일정 기간 함께 생활하는 일종의 유사-수용소와 같은 시공간의 경험은 그렇게 작가의 손을 거쳐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된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짬2에는 군대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 담겨져 있다. 20대 2년간 군대를 거쳐 간 젊은이들이 어떠한 삶의 조건에서 일상을 살아가게 되는지 다뤄져있다는 점도 좋았다. 특히 다단계에 빠진 군대 동기와 조우하는 에피소드가 여운을 남긴다. 이 작가의 책을 읽고 나면, 항상 좋은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주호민의 책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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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동력 1
주호민 글.그림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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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경쟁의 각박한 현실 속에서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만화. 세상에 젊은이들이 꿈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는 이야기는 많고 많겠지만, 「무한동력」의 내러티브가 와 닿는 이유는 뭘까.  

3장. 자네는 꿈이 뭔가? p164.
주인공: 그런데...꿈이 밥을 주진 않잖아요...
아저씨: 지금 자네에게 필요한 건 밥이 아니야.  죽기 직전에...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

하숙집 주인아저씨는 벌써 20년 넘게 생업은 뒷전으로 한 채 무한동력 영구기관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자면 그는 불가능한 것에 집착하는 괴짜일 수 있지만, 주인공을 비롯하여 그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겐 묘한 감동을 주는 존재이다. ‘불가능한’ 꿈에 대한 열정을 가진 중년 남자와 꿈에 대한 상상력을 상실한 채 현실에 안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 이 책에서는 언뜻 매우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들이 하숙집이라는 한 공간에 모여 살면서 뭔가 ‘좋은 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저자 특유의 솜씨로 그려져 있다. 특히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실은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던 하숙생 ‘진기한’이 인생의 화살표를 되돌리는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하숙집 강아지의 생명을 구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중 하나를 얻게 된다.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알게 된 것.

재미있고, 짠하고, 유쾌하고, 서글프고, 감동적이다.

사족. 전작 「짬」을 읽고 나서, 저자의 작품들을 섭렵하고 있는 중. 아마 나 같은 사람 많을 듯하다. 이 작가의 매력은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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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향전.숙영낭자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5
이상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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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소설은 조선 후기 가장 널리 읽힌 애정소설이라고 한다. 왕조 말기 정권의 레임덕이 심화되고, 민초들의 삶은 고단하기 그지없었을 터. 역시 달달한 로맨스는 세상살이가 고달플 때 큰 위로가 되는 법인가보다. 그런데 이 두 소설은 마냥 달달하기만 한 게 아니다. 오히려 여주인공이 어찌난 극심한 고난을 겪는지 그 고생이 헤라클레스의 그것 못지않다.

숙향전은 주인공의 일대기로 태어나서 5번의 위기를 넘기며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주인공 ‘숙향’은 택택한 집안에서 좋은 부모에게 태어나 사랑을 받다가, 5살 어린 나이부터 20살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도적에게 죽거나,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을 고비, 굶어죽을 고비를 겪는다.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내려갈 수 있는 바닥까지 떨어진다. 고향과 부모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사회적 신분이 박탈된다는 것. 요행을 얻어 남의 집 수양딸로 잠시 잘 지냈으나 출신성분을 알 수 없다는 치명적 약점으로 인해 다시 길거리로 나앉는다. 화마를 만나 다 큰 처녀가 홀딱 벗은 몸으로 돌아다니다가 술집을 운영하는 노인을 만나 몸을 의탁하게 된다. 이 오딧세이가 이렇게 인간사의 버전으로만 전해졌다면 그렇게까지 인기를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숙향이 천상의 선녀였으나, 다른 선군과 연애를 하는 바람에 둘 다 벌을 받아 인간 세상에 내려왔고, 그녀의 고난은 그 사랑이 연을 맺기 위해 치러내야 할 숙명이었다는 것.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숙향전의 조선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숙영낭자전은 전자에 비해 훨씬 환상적 요소가 적다. 게다가 신분차별이 엄격한 조선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남녀 간의 신분 차이가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과정이 상세히 그려진다. 더구나 죽음의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 시아버지, 그 갈등이 발생하는 장소도 시집이라는 공간이다. 영화로 치자면 진한 성애 장면이 여기 저기 나왔을 법한 이 숙영낭자전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이 어떻게 ‘효’나 ‘충’이라는 가치와 충돌하고, 입신양명이라는 남성성의 규범을 와해시키는 ‘반동적’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지 설득력 있게 묘사된다.

어릴 적, 나는 사실 옥황상제의 딸이었는데, 실수나 잘못을 저질러 인간 세상에 태어나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깜직한 상상을 하곤 했다. 주어진 상황을 감내하는 것 밖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껴질 때, 이런 숙명론이 주는 위안이 있다. 숙명론적 세계관, 인간 세상과 신들의 세상 사이를 오가며 벌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방식 속에서 주인공이 겪는 개고생은 가슴 아프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역사적 배경과 두 소설의 내러티브를 설명해준 역자의 해설도 재미있고 유익했다. 옛날이야기가 주는 재미, 그동안 참말이지 그리웠다! 다음엔 뭘 읽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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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aella20 2014-03-12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역시 ᆢ 너의 해설이 더 재미있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