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말고 당당하게 - 하종강이 만난 여인들 우리 시대 우리 삶 1
하종강 지음, 장차현실 그림 / 이숲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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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주제의 글들을 묶어 놓은 에세이집. 1부는 저자가 오랜 세월 노동 운동 현장에서 만난 여성들에 대한 에피소드를 모은 것이고, 2부는 노동 운동가로서 저자 개인의 삶의 이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여성들에 관한 내용들이다. 개인적으로 1부가 더 좋았다. 특히 어느 할머니 이야기”, “어린이집 선생님”, “바보들의 행진등 세편은 쉽고 편안하게 읽히면서도 가볍지 않은 깨달음과 감동을 준다.

 

할머니 혼자, 정말 아무도 없이,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죽은 자식이 누워있는 썰렁한 영안실을 지켜야 하는, 이런 기막힌 현실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할머니의 슬픔을 외면하고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p.34

 

맨 처음 실린 어느 할머니 이야기는 가슴 깊숙한 곳에 묵직한 뭔가를 심어 놓는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그 여운이 때론 울컥하게 만들고, 화가 나게도 하고, 감동하게도 만든다. “법이 도무지 쓸모없는”(p.24)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정의는 결국 혼자 남겨진 할머니 옆에 있어주는 것, 그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밖에 없다.

 

어린이집 선생님에피소드는 일자리 영역에서 공공성 파괴가 인간성을 어떻게 시험에 들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구조조정 바람을 타고, 일자리의 질이 가장 악화된 영역 중 하나가 공공부문 일자리이다. 많은 어린이집 경영권이 국가에서 민간복지재단으로 넘어가면서, 정규직 교사들이 계약직으로 바뀌고 일부는 일자리를 잃었다. 이 에피소드의 선생님은 그 와중에 해고됐는데, 그 이유는 재단의 부정부패에 항의했기 때문. 재단은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 선생님을 헐뜯는 자료를 제출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부분은 이 선생님에게 요구된 부조리한 양자택일. 즉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이 가르친 아이의 흠결을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아이를 보호하고 자신이 해고되는 를 받을 것인가. 이 선생님은 제자를 보호하고 자신이 희생을 감내하는 선택을 했다. 이 에피소드는 외주화가 이렇게 재단의 부조리를 눈감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성을 이렇게 난간으로 몰아간다는 점을 그 어느 이론보다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올해 임금교섭이 시작되자 남자 노동자들 몇 명이 나서더니 또다시 교섭을 회사에 위임하자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면 회사는 올해에도 남자들은 많이올려주고 여자들은 조금올려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런 행동이 전체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 그런 인간들이 있다. p.72

 

바보들의 행진은 작업장에서 여성들의 노조설립 혹은 조직화를 남성들이 방해하는 갈등 상황을 다룬 에피소드. 극단적 상황에서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거나 남성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치를 하는 여성들에 대한 저자의 감탄과 존경심이 살짝 드러난다. 생산직, 사무직, 비정규직 등 다양한 작업장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갈등 혹은 대치 상황들이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직종을 불문하고 여성들이 비슷한 일을 겪는구나 싶다. 역시 직장 내에서 여성과 남성 간의 인격적 차등화라는 주제는 자본의 이익 축적 전략이라는 논리만 가지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흥미로운 주제인데, 간략하게 다뤄져 있어 좀 아쉬웠다.

 

아이들과 청소년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고단하고 부조리한 현실에서 인간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 부조리한 선택을 요구받고 인간성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를 떠나서, 어른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을 아는 것 자체가 소중한 성장의 기회가 될 것 같다. 읽고 나면 선한 의지가 충전되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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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탈출, 하나의 꿈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14
이정학 지음 / 텍스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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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 사회 인구구성비에서 탈북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존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책을 고른 이유는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고, 그 탈북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사실 그간 이념과 종교를 떠나서는 탈북자에 관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

 

대부분의 탈북자가 그러하듯 저자 역시 기독교의 도움을 받아 탈북한 청년. 이야기는 한국에서의 정착 과정 보다는 북한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기, 탈북에 이르게 된 과정, 탈북 후 중국에서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종교적 색채가 배제된 점이 맘에 들었다. 78년생인 저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자못 충격적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공안 기능을 제외한 국가 기능이 거의 정지된 상태에서 그간 말로만 듣던 북한의 경제난 속에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생활고, 국가 경제를 돌릴 물질적 기반이 거의 바닥난 상태에서 국가가 요구하는 물품을 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상황, 군대에서 아사 직전에 병든 몸으로 귀향한 저자,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이 모든 상황은 단지 굶어죽지 않기 위해 탈출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총체적 동기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처럼 양 체제를 모두 경험한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폐타이어의 역할을 해야 한다. 폐타이어는 경제적 값어치가 별로 나가지는 않지만 배와 부두 사이의 충격을 완화시키는 엄청난 역할을 한다. (……) 통일 이후에 있을 북남 갈등을 완화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저자는 북한 독재 체제가 무너지고 통일이 이루어지면, 탈북자들이 동란 이후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삶을 살아온 남과 북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오히려 탈북 단체들이 북한 체제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대형 풍선에 담아 보내는 풍경이 떠올랐다. 자신의 고향, 떠나온 곳에 저주의 말을 퍼붓는 사람들의 심경은 어떤 것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수난을 겪은 이들에게 우선 필요한 건 위로와 환대가 아닐까. “북남 갈등을 완화시키는사명이라는 짐은 이미 큰 고통을 겪은 이들이 지기엔 너무 외롭고 힘든 요구가 아닐까. 북한 체제 전복과 비난을 사명으로 삼은 이들과 저자처럼 북남 평화를 사명으로 삼은 이들, 후자보다는 전자가 현실적으로는 대세임에 분명할 듯. 그리고 서로 다른 사명을 품은 이들 사이의 간극에 보이지 않는 가장 큰 힘은 역시 이들을 품는 남한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 통일의식, 역사관일터. 그럼 저자의 꿈이 이뤄지기 위해서 이웃으로서 우리는 어떤 뜻을 품어야 할까.

 

노트. 저자의 유년기 학교생활을 보니, 남자 아이들의 남성성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지금 남한의 남자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 북한 아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왜 이리 호전적 남성성을 추구하는 것일까. 아마도 물리적 힘이 거의 유일한 생존을 위한 사회적 자원이기 때문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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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아프다 -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코끼리에 대한 친밀한 관찰
G. A. 브래드쇼 지음, 구계원 옮김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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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인이 어릴 적 동물원에서 처음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울음을 터트린 경험을 들려준 적이 있다. 전시된 동물을 응시하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에게 동일시했던 당시 그 분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이례적인 반응일 터. 아마도 지나치게 예민한 아이, 상처받기 쉬운 아이, 강하지 못한 아이로 취급받거나, 혹은 인간이 아닌 동물에 동일시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을 수도... 어쨌거나 만약 아이가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고 충격을 받거나 슬퍼하면, 어른들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마도 나라면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하거나 화제를 전환시켜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생태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저자, G. A. 브래드쇼는 신경쇠약에 걸린 코끼리에 대한 연구라는 예사롭지 않은 주제를 통해 인간의 현대 문명에 내재된 윤리적 난제들을 전면적으로 건드린다.

 

“이러한 모든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 대한 가장 적합한 진단은 ‘마음이 완전히 부서졌다’, 또는 ‘산산조각났다’일지 모른다” (정신과 전문의들이 본 코끼리 제니) p.209

 

이야기는 인간에게 적용되는 외상학(traumatology)의 관점에서 코끼리가 겪은 경험의 신경생물학적·심리학적 영향을 고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코끼리에게도 마음이 있고, 모든 포유동물의 진화적 적응전략에 해당하는 유대와 애착이 코끼리 사회에도 존재한다는 것, 코끼리의 이상행동과 트라우마는 아프리카의 식민지화에 연원을 둔 인간의 폭력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 등이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되는 스토리. 이 책에서 독특한 점은 인간의 신경쇠약과 코끼리의 그것 간의 유사점을 단지 심리학적 증상의 측면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 정치적 측면으로 확장하여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인간 사회에서 발생한 남성의 폭력 행동과 수코끼리의 그것이 어떻게 닮아있는지 설명하는 부분. 요컨대 인간이 코끼리에게 개입하면서, 수컷 코끼리 발달 단계에서 핵심적인 두 번째 사회화, 즉 암컷의 무리에서 젊은 수컷의 무리로 합류하는 단계가 사라졌고, 이는 수컷 코끼리의 사회 환경을 붕괴시켜 이상행동을 초래했다는 것. 즉 소년들에게 남성 멘토 혹은 아버지가 없는 사회에서 청소년 범죄가 발생한다는 점을 수컷 코끼리의 범죄에 대입시키고 있다. 저자는 나아가 시종 일관 인간이 코끼리의 삶에 개입하는 문제의 심각성이 단지 개체수를 줄이는 말살행위 혹은 감금과 폭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 문화를 파괴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코끼리 문화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단지 인간의 심리학을 동물에게 적용시키는 단계를 넘어서 인간다움의 사유 방식에 근본을 흔들어 놓는다. 저자는 과학적 분석과 나치 수용소 관련 증언, 수필, 소설 등을 인용하는 인문학적 화법을 동시에 활용하여, 종을 초월하는 고통의 정치적 성격, 동물의 고통을 이용하여 번성하는 동물원이라는 사업에 대한 문제제기, 자신이 돌본 동물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동물을 잔인하게 대하는 동물원 직원들의 정신상태 및 행동과 나치 수용소 직원 및 나치 의사들의 그것과의 유사성 분석을 내 놓는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코끼리다라는 저자의 선언에 시나브로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전통적으로 연장자 암컷 무리에서 아기 코끼리를 함께 돌보며 키워냈던 코끼리 문화가 파괴된 후 보이는 증상들(어미가 새끼를 거부하거나 살해하는 것, 우울증 등)을 통해 거꾸로 인간의 신경쇠약을 재해석해보게 된다. 경험이 없는 젊은 여성이 혼자 아이를 낳아 고립된 환경에서 아이와 단둘이 생활하며 키운다는 건 코끼리나 인간에게나 두렵고 외로운 상황이 아니던가.

 

아프리카의 코끼리들과 가깝게 지내며 80여 마리의 고아 코끼리를 돌봐온 50여년의 세월 동안 무엇보다 놀라웠던 점은 코끼리들이 보여준 한없는 너그러움이다. 고아 코끼리들은 어미, 때로는 가족 전체가 인간의 손에 힘없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코끼리들은 인간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채 시설에 도착하지만 결국 야생에서 인간을 보호해 준다. 인간이라는 가족을 위해 물소와 정면으로 맞붙거나 야생의 사나운 코끼리들로부터 막아주는 것이다. 코끼리의 삶에서 사랑하는 코끼리가 살해되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코끼리는 놀라울 정도로 너그러운 동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코끼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절대로 잊지 않기 때문에 (이는 추정이 아닌 분명한 사실이다) 그 인자한 행동은 인간도 좀처럼 도달하기 힘든 높은 수준의 관용이다. 수십년 간 고아 코끼리를 키워낸 대프니 셀드릭 여사 220

 

코끼리의 의식과 인간의 의식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저자의 주장보다도 더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긴 건 인간으로 인해 "마음이 부서져버린" 코끼리들이 인간에게 보여준 관용이다. 주제의 신선함, 연구자의 태도, 내용의 깊이를 포함해 완성도가 높은 저서라고 본다. 또한 여러 가지 생각해 볼 거리들을 가져다 준 책이다.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좋은 책으로 꼽고 싶다. 

 

사족. 책을 다 읽고 나서, 서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저자가 이 연구를 하게 된 경위였다. 무릇 학자의 연구 궤도(academic trajectory)에는 몇 가지 불연속적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브래드쇼가 코끼리의 신경쇠약이라는 주제를 연구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1990년대 남아공화국에서 목격한 코끼리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이 연구를 시작한건 아마도 어릴 적 동물원에서 침팬지와 시선이 마주친 짧은 순간,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인간들보다 침팬지에게 더 친근감을 느꼈던 그 순간의 경험이 단초가 되었다고 서술한다. 연구 도중에 저자가 과학이라는 차가운 언어와 고통의 개인성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10대 시절에 읽었던 엘리 위젤의 책(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험을 증언한 [나이트])이 길잡이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역시 훌륭한 학자는 인식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이며, 이런 소양은 유년기부터 쌓여지는 것!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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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서바이벌 가이드 - 살아있는 시체들 속에서 살아남기 완벽 공략
맥스 브룩스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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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적한 연말에 뭔가 재밌고 기발한 책이 없을까 온라인 서점가를 배회하다 발견한 책. ‘가이드라는 제목에서 예측해 볼 수 있듯이 책은 철저히 살아남기위한 매뉴얼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은 형식 상 매뉴얼의 프레임을 고수하면서, 내용 면에서 충실할 뿐만 아니라 행간에서 드러나는 위트가 뛰어나다는 것. 조용한 곳에서 이 책을 읽다간 키득 거리다 민폐가 될 수 있다.

 

평생 좀비 판타지에 몰두한 저자의 상상계를 따라가 보면, 그것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긴장감을 갖게 된다. 좀비가 출몰하는 세상에서는 각종 무기 및 전투 기술, 방어·피난·공격 요령 등 기존의 생존 기술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수정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무릇 모든 지침서의 앞장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 이 책에서도 제시되어 있다. 좀비에 대한 미신과 진실’. 사람들이 특정 주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고 오류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명심하라, 당신은 유일한 정부이자 유일한 경찰이며, 그 일대의 유일한 군대이기도 하다.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눈앞의 위험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안 된다. 무엇을 발견하든, 어떠한 도전에 직면하든, 이 사실을 가슴에 새기도록 하라. p.264

 

맥스 브룩스가 한 평생 골몰한 좀비 판타지의 결과물인 이 책의 지극히 현실적인 화법은 판타지 내용과 틈새를 만들어내고, 저자는 그 틈새를 블랙 유머로 채운다. 뱀파이어, 좀비 서사가 각종 이야기의 주류로 등극한 지금, 그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전자보다 후자가 더 종말론적 세계관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코맥 맥카시의 로드에 암시적으로 잠깐 등장했던 지하의 좀비 인간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목적지도 모른 채, 세포 하나 긴장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생존자들에게 필요한 매뉴얼. 너무나 현실적인 느낌 때문일까. 종말론적 판타지를 현실계로 끌어내린 이 텍스트는 섬뜩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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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364일 블랙 로맨스 클럽
제시카 워먼 지음, 신혜연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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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머리 아름답고 부유하고 인기 많은 열일곱 소녀가 자기 생일에 자신의 시체를 발견한다. 기억을 잃은 채, 1년 전에 죽은 동급생 남학생과 함께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과 현재를 오가며 시공간 여행을 시작한다. 원제(Between)를 왜 [열일곱, 364]로 정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제목에 ‘17라는 나이가 들어간 건 꽤 적절한 것이었지 싶다. 추리, 로맨스, 청소년물의 요소가 적절히 버무려진 서사가 마치 한편의 미드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아마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10대를 소재로 한 내러티브의 핵심 정서 중 하나가 공포지만, 그 정서가 형성되는 메커니즘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듯. 미국의 경우, 성적이나 성적을 둘러싼 학교, 가족 관계에서의 갈등 보다는 계급적 문제가 더 큰 것 같다. 10대를 소재로 한 미국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클리쉐 중 하나인 미국 고등학교의 식당 풍경. 부유한 아이들끼리 무리지어 앉아, 전체 분위기를 압도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그 헤게모니의 자장 안에서 최대한 자신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한다. 이너 써클의 무리와 주변 집단 간의 경계선, 계급 질서를 확인시켜주는 사소한 해프닝 중 하나, 왕따를 당하는 아이 중 하나를 골라 못 살게 구는 애가 있고, 그 누구도 그런 시비에 개입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학교 안의 계급 질서에서도, 여성성의 위계 안에서도 핵심 지위에 있었지만, 결국 그것은 비극의 요소가 된다.

 

재밌다.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첫 장면에서, 호기심이 마구 솟아올라 주인공이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에 적극 동일시하며 읽게 된다. 속도감도 좋고, 달달한 부분도 있어서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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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aella20 2014-03-12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의 해외판?ㅎ

micaella20 2014-03-12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 읽어 보고 싶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