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원할 자유 - 현대의학에 빼앗긴 죽을 권리를 찾아서
케이티 버틀러 지음, 전미영 옮김 / 명랑한지성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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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의 아버지는 2001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7년을 앓다가 돌아갔다. 7년간 집과 병원을 오가며 아버지를 간병한 그녀의 어머니는 심장병 진단을 받자,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라며 일체의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책은 그 10여년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지극히 보편적 상황이지만, 그녀가 건드리는 문제의식은 자못 낯설고 충격적이다. 최근 현대 의학이 만들어낸 죽음의 형식을 비판적으로 조명한 책들이 더러 나오고 있는데, 그 중 이 책 󰡔Knocking on Heaven's Door󰡕󰡔도시에서 죽는다는 것󰡕(김형숙) 이후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이다. 저자의 오랜 체험이 늙고 병든 노부모를 둔 딸, 저널리스트, 장기 가족 돌봄 제공자의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어 흡입력이 상당하다.

 

일흔일곱 살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엄마는 정치적으로 무력하고 문화적으로 존재감이 없는 무급 가족 간병인이 되었다.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일흔네 살 이상의 사람들이 미국 인구의 9퍼센트에 달한다. 60.

 

무단이탈 행태를 보인 남동생들에 대해 내가 느낀 실망,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의학적 결정들, 아직 닥치지 않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상실들에 대해 불길한 예감을 품으며 느낀 생경한 슬픔에 휘둘리고 있었으니까. 61.    

 

이야기는 79세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노부모와 중년기의 세 자녀 간의 역할과 관계가 재구성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저자는 외면하는 남자 형제들을 대신하여 노모의 간병 동지이자 남편의 역할을 맡게 된다. 엄마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성인이 되어버린 저자와 엄마와의 관계는 간병 기간이 길어질수록 위태롭고 공격적이고 애틋해진다. 분노, 원망, 애정이 복잡하게 얽힌 이 상호의존적 관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저자가 안내하는 지점은 모든 일상이 간병에 맞춰져 있는 장기 가족 돌봄 제공자들이 어떤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한계에 직면 하게 되는가이다.

 

아버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인지 기능과 신체적 자율성을 잃어가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된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오랜 간병에 지쳐버린 어머니는 욕실에서 아버지를 씻기다 폭발하고, 어머니의 손찌검에 아버지는 아이처럼 징징 울어댄다. 상처받은 딸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장기 가족 돌봄 제공자의 상당수가 환자를 학대한 경험이 있고, 그들 역시 정신적·신체적 질병에 취약해진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여, 그것이 특정인의 일탈적, 예외적 행동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 책의 특징은 노인 환자 가족으로서의 체험 세계가 사적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민영화된 의료 체계에 대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인간다운 죽음에 대한 물음과 통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령화 세상에서 유병 장수하는 인간을 돌보는 일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부담은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인류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임계 상황에 이르렀다. 사회적 합의가 어떠한 방향으로 이뤄지건 존엄한 죽음’, ‘죽음을 원할 자유는 도덕적 금기로 남아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무더위가 절정이었던 올 여름, 나는 이 책을 두 주 넘게 붙들고 있었다. 나처럼 아버지의 암 발병과 투병,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주는 무게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벌써 사반세기가 지났건만 아빠를 돌보면서 받았던 상처는 여전하다. 그러나 이 책을 그렇게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것은 그 기억이 건드려진 탓도 있지만 그 보다는 인간 실존의 바닥까지 닿게 하는 깊고 복잡한 울림을 좀 더 오래 음미하고 싶어서였다.

 

나의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 한달 동안 밤마다 어서 데려가 달라고 생애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하느님에게 소리 내어 기도했다. 절박한 마음에 나는 병원에 상주하는 수녀님을 찾아가 아빠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했더랬다. 당시 아빠가 돌아가실 수 있다는 생각은 감히 해 보지 못했건만 아빠의 고통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간절해졌다. 그러한 경험 탓인지  품위있는 죽음에 대한 저자의 간절한 염원이 깊이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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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살다 - 12년 9개월
이은의 지음 / 사회평론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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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살다, 129개월

 

전 국민이 IMF의 충격에 사로잡혀있던 1998년 삼성에 입사해서 2010년까지 129개월을 삼성 맨으로 살았던 한 여성의 자서전. 책의 초중반까지는 여러 모로 마치 드라마 미생의 안영이버전 같다. 신입 사원 교육을 받고 자동차 생산 라인이 있는 공장에 배치되어 자신과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온 현장의 중년의 생산직 남성들과 조우했던 일, 입사 동기들과의 우애, 해외 영업직에서 경험한 도전과 충족감, 자신보다 짬밥을 몇 년이나 더 먹은 고졸 여사원들 사이에 있었던 긴장 등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다가 상사로부터 성희롱이 발생한 시점, 책의 중반부터 오롯이 직장 내 성희롱 경험자의 서사로 압축되어 전개된다.

 

지은이가 겪었던 성희롱은 직장 내 성희롱 분쟁 사건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전형적 사례다. 요즘 인터넷에서 암 유발자로 회자되는 마 부장캐릭터가 지은이의 상사였던 것. 정상적인 직장이라면 이렇게 사내에서 직원의 고충이 발생하면, 고충 처리 시스템을 작동시켜 매뉴얼대로 처리했어야 했건만, 어찌된 일인지 지은이의 회사는 시종일관 고충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철저하게 부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성희롱을 참지 않은 죄로 지은이는 무려 5년 이상 부당한 배치전환, 고용상의 불이익, 노골적인 피해자유발론, 폭언, 따돌림, 무시, 투명인간 취급 등 2차 피해 목록에 나올법한 모든 경험을 하게 된다.

 

흔히 어떤 식의 피해에 노출된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우울하고 슬픈 느낌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오히려 어떤 드라마틱한 긴장감 때문에 심장이 살짝 쫄깃해지는 것을 느끼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 큰 회사가 어쩌면 저렇게 치사하고 무자비할 수 있을까 싶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계속 발생하게 되는데, 지은이가 그런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과 태도가 당차고도 창의적이다. 게다가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온갖 상황들에 대한 지은이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지점이 많았다. 지은이에게는 어려운 상황을 지나온 사람만이 줄 수 있는 통찰력이 있다. 이 책을 통해 구조적 부조리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어떤 갈등이 발생하게 되는지, 부당한 거대 권력으로 인해 개인이 어떤 희생을 치르게 되는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성차별적 구조조정 방식이 고졸 여직원과 대졸 여직원 간의 갈등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부분도 좋았다.

 

수난사의 미덕 한 가지. 지은이는 힘겨운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직장 생활 전체를, 의지했던 많은 사람들을”(217) 잃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지지하고 도와주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세상의 비참 속에서 구원은 역시 보통 사람들안에 있더라. 그래서일까. 책장을 다 넘기고 나서 짠한 마음과 함께, 묘한 기쁨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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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을 보는 눈 - 한국 사회 빈곤에 대한 편견을 깨자 세상을 읽는 눈
신명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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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목적은 빈곤 담론 분석 및 빈곤의 원인에 대한 구조적 분석을 통한 빈곤의 정치화인 듯하다. 최근 한국에서 새롭게 등장한 빈곤 현상에 대한 심층 분석을 기대하고 이 책을 구매했다. “한국 사회의 가난에 대한 진실과 거짓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기 때문. 막상 읽어보니 빈곤의 현상과 원인에 대한 미시적, 거시적 분석이 한국이라는 로컬에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았다

 

사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현한 새로운 빈곤의 유형과 빈곤 개념화, 신자유주의적 자본 축적 체제와의 연관성에 대한 논의는 이미 여러 권의 다른 책에서 접한 바 있었다. 그래서 신 빈곤 관련 저서들을 여러 권 접한 바 있는 나의 입장에서는 다소 식상한 면이 없지 않았다. 이 책의 특징은 한국의 빈곤 문제를 빈부 격차뿐만 아니라, 복지 정책 및 담론, 교육, 빈곤 문화 담론, 의료 정책, 건강 불평등 등의 이슈와 연결시켜 해설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빈곤 문화이론을 다룬 7, 노숙인의 생애사를 소개한 8, 빈곤의 한국적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주택문제와 빈곤의 연관성을 조명한 9장이다

 

7장에서는 처음 빈곤문화개념을 발명한 미국의 인류학자 오스카 루이스에 대한 저자의 리뷰가 와 닿았다. 오스카 루이스는 1950-60년대 가난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생활습관 및 가치체계라는 뜻으로 처음으로 빈곤의 문화라는 개념을 사용한 학자라고 한다. 멕시코 빈민촌에 들어가 참여관찰 자료를 토대로 한 그의 연구는 이후 󰡔산체스네 아이들󰡕(1961)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실 루이스 자신은 빈곤이 빈민들 자신의 책임이고 따라서 사회가 도와줄 가치가 없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깊이 이해했고 그들과 따뜻한 교감을 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만난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드리운, 보이지 않는 질곡의 구조를 탐색하는 대신, 눈앞에 보이는 병리적 현상을 기술하는 데 골몰한 탓에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희생자를 비난하는담론의 원조가 되고 말았다. 억울한 점도 있겠지만, 어쨌든 본인이 자초한 부분도 없지 않다. p.134

 

저자의 리뷰를 요약하자면, 오스카 루이스의 빈곤 문화 연구의 특징은 구조를 탐색하는 대신 눈앞에 보이는 병리적 현상을 기술하는 데 골몰”(p.134)하는 것이다. 오스카 루이스 자신은 가난한 이들에게 깊은 연민과 애정을 품고 있었음에도, 그가 만들어낸 지식은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희생자를 비난하는담론의 원조가 되었고, 저자는 이에 대해 본인이 어느 정도 자초한 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문화 연구자로서 이 대목이 크게 와 닿았다. 연구 방법론의 문제는 지식이 소비 혹은 유통되면서 형성되는 담론 생산에 직결된다. 오스카 루이스의 빈곤 문화 연구 및 이후 빈곤 연구에 미친 영향에 대한 저자의 리뷰는 미시적 분석과 기술적(descriptive) 화법이 결합될 경우 지식 생산의 흐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지식 생산을 통해 사회적인 것에 개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연구자라면 연구 방법론은 단지 연구 전략의 차원을 넘어서는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됐다.  

 

이 책의 목차 중에서 8장 노숙인 이야기에 주목한 이유는 󰡔한국의 가난󰡕(김수현, 손병돈, 이현주)에서 알게 된 사실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노숙인 중 60%는 평생 가족을 형성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며, 노숙인 중 30% 가량이 고아원 출신이고, 60% 가량이 결손가정이나 알코올 의존증 부모를 두었거나, 가정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한국의 가난󰡕을 읽기 전에 노숙인은 실직 후 가족 해체로 인해 거리로 내몰린 중년 남성이라는 통념을 갖고 있었기에 깊은 충격을 받았고, 이는 빈곤 문제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된 계기가 되었다

 

최근 한국도시연구소의 보고서는 2011년 현재, 거리노숙인이 2600여명, 노숙인 시설 거주자가 11300여명, 피시방·찜질방 등 비숙박용 다중이용시설 거주자가 62400여명, 쪽방이나 여관·여인숙·고시원 거주자가 145600여명 등으로, 모두 222000여명의 사람이 주거취약계층이고 이들을 모두 노숙인 등으로 규정할 것을 주장한다. p.144

 

이 책, 󰡔빈곤을 보는 눈󰡕의 미덕은 노숙인을 통해 본 한국의 빈곤을 다루기에 앞서 과연 노숙인이란 누구인가, 즉 노숙인의 범주를 질문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내용은 노숙인의 범주에 거리노숙인뿐만 아니라 노숙인 시설 거주자, 피시방·찜질방 등 비숙박용 다중이용시설 거주자, 쪽방이나 여관·여인숙·고시원 거주자까지 포함할 것을 제안한 한 보고서를 소개한 부분이다. 직장, 학교 때문에 고향을 떠나 서울살이를 하는 동안 고시원이나 지하 하숙방에 머물렀던 나와 내 형제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빈곤 문제가 주거불안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나의 삶과 맞닿아 있는지 새롭게 깨달았다. 한국은 노숙인과 비-노숙인, 빈자와 빈자가 아닌 자 간의 경계가 점점 무의미해져 가는 공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알코올중독, 가족해체, 실업, 주거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노숙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책에서 인용한 노숙인의 생애사를 따라가 보면, 이들은 사방이 연이어 혹은 동시에 무너지는 과정을 거쳤고, 어느 한곳 이들을 구출할 수 있는 존재나 공간이 없었다는 점에서 새삼 놀라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빈곤 문제를 통해 바라본 한국 은 모든 곳이 일시에 무너지고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빈곤의 원인이 복합적인 만큼 그 해법도 복합적인 것이 되어야 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은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일 것이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우리 모두 빈곤 문제의 공범이 아닐까 싶다. 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해지면서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양상의 빈곤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사회에 출현한 새로운 빈곤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는 논의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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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시장 - 생명공학시대 인체조직의 상품화를 파헤친다
로리 앤드루스.도로시 넬킨 지음, 김명진.김병수 옮김 / 궁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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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명 공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신체 조직이 어마어마한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상품이 되어 가는 사회의 위험성을 경고한 책. 사회학적 분석과 함께 거시적, 미시적 층위의 실제 사례들을 르포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다. 책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날로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생명 공학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인가? 저자들의 주장인 즉, 현재의 양상을 종합해 보건대 그렇지 않다는 것. 저자들은 혈액, 피부, 골수, 정액, 난자 등 인간의 신체 조직을 통해 유전 정보를 확보하고, 이를 의료 상품으로 전환시키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주요 쟁점들을 제시한다

 

먼저 집고 넘어갈 부분은 가장 일반화된 상식, 즉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질병 정보 등 인간의 유전 정보를 더 많이 알아낼 수 있게 되면 인간은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대중적 신념. 그러나 생물학적 검사 결과에 노출된 사람들의 증언은 그렇지 않다. 무력감, 죄의식, 두려움 등 복잡한 감정적 문제를 겪게 되어 아는 것이 병이 될 뿐 일체의 이득이 없는 상황이 더 많다는 것

 

게다가 저자들이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는 연구자 혹은 병원 등의 기관이 신체 조직을 확보하고 유전 정보를 얻어내어 지식으로 가공하거나 상품으로 전환시키는 등의 전 과정에서 발생하거나 초래되는 인권 침해 문제다. 책을 읽어보니, 흔히 인지된 동의로 불리는 당사자와의 공정한 계약 없이 함부로 신체 조직을 가져가거나, 다른 용도로 활용하거나, 심지어 거기서 얻어낸 정보에 특허를 받는 일이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책 소개 글에서 제시된 미국인 존 무어의 사례도 그중 하나. 백혈병 진단을 받은 그는 의사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골수, 피부, 정액 샘플을 채취하는 점을 의심했고, 나중에 자신에게 특허번호가 부여된 사실을 알고 나서 의사들을 부정 의료 및 절도 혐의로 고소했다고 한다. 이런 일을 당한 사람들은 이를 자신의 몸에 대한 절도’, ‘강탈’, ‘착취등 프라이버시 침해 경험으로 명명했다

 

생명 공학 발달 과정에서 따르는 인권 침해의 문제를 글로벌한 관점 혹은 집단 대 집단의 관점에서 조명하면 좀 다른 그림이 나온다. 선진국의 연구자가 제3세계 주민의 혈액을 뽑고 튄후 거기서 얻어낸 정보로 특허를 출원하면, 결국 그 수익은 선진국의 국민을 위해 이용된다. 이는 제국주의 시대에 1세계가 식민지로부터 천연자원을 약탈해 간 것과 다름없는 경제적 착취라는 것

 

흥미로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이를 마치 강간을 당한 것 같은 느낌으로 설명했다는 점이다. 생명 공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출현한 각종 생물 범죄(biocrime)’에서 이런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새로운 현상인데, 이보다 더 주목해야할 지점은 침해의 내용이 개인의 몸에 대한 권리를 넘어서 문화권, 인격권, 사회권, 경제권 등 다양한 영역을 포괄한다는 점이다. 개인의 DNA 정보는 각종 사회적 차별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 사람이 보험에 가입할 때나 취업할 때 제한을 받을 수 있고, 교육 기회를 박탈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저자들의 핵심 메시지는 생물학적 감시 체계 구축을 통한 통제 사회로의 전환이다. 생물학적 검사가 갖는 가장 중요한 함의는 기존의 사회 규범에 맞지 않거나 병든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는 것. 저자들은 그로 인해 차별받는 유전적 하층 계급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일찍이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감옥, 기숙학교, 수도원, 전함, 정신병원, 병영 등 사람들이 외부세계와 차단된 채 동일한 상황에서 명확하고 상세한 규율에 따라 함께 일하고 살아가는 장소를 전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으로 명명한 바 있다. 결국 그와 같이 사회 구성원 전체가 생물학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의 기준의 감시와 통제 하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결론이다. 그런 사회에서 인간은 결국 일종의 수용자와 다름없는 신세가 되기 때문에, 저자들은 인체 시장 사회의 도래를 어빙 고프만의 전체적 기관과 같은 완벽한 통제 사회에 비유하고 있다. 인체 시장 사회에 대한 인상적이고도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로 읽힌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각종 사례들은 주로 미국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책을 읽고 나니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건드리고 있는 미국의 의료 체계 변화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의료 민영화 시스템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정점에 놓여 있으며, 인체의 시장화를 매개로 하는 각종 이익 집단의 활동이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정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다니기 시작한 병원에서 병원 곳곳에서 대대적으로 DNA 검사를 홍보하는 것을 보았다. 홍보 문구들은 미리 유전적 질병 요소들을 알아내어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로 광고하고 있는데, 단지 개인적 건강을 위해 검사에 동의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착취당한 사례들을 알고 나니 이런 풍경이 예사롭지 않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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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생명공학 논쟁 - 생명공학 논쟁으로 본 한국 사회의 맨얼굴 21세기 생명정치 총서 2
김병수 지음 / 알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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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생명 공학이라고 하면 사실 머리에 쥐가 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어렵게만 느껴졌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생명 공학 연구 동향뿐만 아니라 관련 정치 쟁점들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등장하고 작동하는지에 대해 기본적 윤곽을 이해하게 됐다

 

1부에서는 줄기세포, 유전자 감식, 유전자 식품 등 누구나 미디어를 통해 한번쯤 들어보았을 키워드/쟁점들을 중심으로 생명 공학 연구가 우리의 삶과 어떻게 밀접하게 닿아 있는지를 서술한다. 2부에서는 세계 최초’, 경제 성장 우선론에 집착하는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가 어떻게 연구 부정행위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는 황우석 사태로 귀결되었는지 보여준다. ‘황우석 사태는 한국의 민낯을 드러낸 부끄러운 사건으로만 기억되었다. 그러나 시민 사회를 비롯한 다양한 행위자들의 개입을 통해 그동안 가려졌던 연구 부정행위가 밝혀지고 황우석이라는 국민 영웅이 희대의 사기꾼임이 드러나는 과정,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생명 윤리 법이 제정되거나 관련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죽 따라가 보니, 한국 사회의 역동성이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생명공학 지식 구성 과정에 한국 시민 사회가 어떻게 역동적으로 개입했는가를 기술한 3부도 흥미롭게 읽었다

 

소설가 장정일이 오랜 독서 경험의 결과 책의 가독성은 글쓴이의 열정에 비례하더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책이 그랬다. 열대야로 인한 불면의 밤, 새벽 3시에 잠에서 깬 후 읽기 시작해서 5시간 만에 다 읽었다. 이 책이 쉽고 재미있게 읽힌 이유는 생명 공학과 관련된 기본적 정보들이 핵심 쟁점을 중심으로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생명 공학 감시 운동의 깊이 참여했던 저자의 열정 때문인 듯하다. 좋은 글은 특정 정보에 대한 전달 능력 외에도 호기심을 갖게 하거나 질문을 던지게 하는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본다

 

미국에서 한 남자가 일곱 건의 알리바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DNA 검사만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억울하게 복역한 사례는 유전자 중심적 사고가 사회적으로 확산될 때 개인에게 야기될 수 있는 수많은 비극 중 하나다. 이런 일은 한국에서도 이미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SBS에서 방영한 한 다큐 프로그램에서 명백한 알리바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DNA 검사로 인해 범죄자가 된 한 10대의 사례를 다룬 바 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유전자 결정론이 얼마나 나의 의식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에서는 기존의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인지 프레임을 대체할 만한 DNA 검사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제시하지 않아, 상당히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한국 사회에서 생명 공학과 관련되어 형성된 대중의 상식 혹은 고정관념을 다룬 책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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