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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살다 - 12년 9개월
이은의 지음 / 사회평론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삼성을 살다, 12년 9개월
전 국민이 IMF의 충격에 사로잡혀있던 1998년 삼성에 입사해서 2010년까지 12년 9개월을 “삼성 맨”으로 살았던 한 여성의 자서전. 책의 초중반까지는 여러 모로 마치 드라마 미생의 “안영이” 버전 같다. 신입 사원 교육을 받고 자동차 생산 라인이 있는 공장에 배치되어 자신과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온 현장의 중년의 생산직 남성들과 조우했던 일, 입사 동기들과의 우애, 해외 영업직에서 경험한 도전과 충족감, 자신보다 ‘짬밥’을 몇 년이나 더 먹은 고졸 여사원들 사이에 있었던 긴장 등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다가 상사로부터 성희롱이 발생한 시점, 책의 중반부터 오롯이 직장 내 성희롱 경험자의 서사로 압축되어 전개된다.
지은이가 겪었던 성희롱은 직장 내 성희롱 분쟁 사건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전형적 사례다. 요즘 인터넷에서 “암 유발자”로 회자되는 “마 부장” 캐릭터가 지은이의 상사였던 것. 정상적인 직장이라면 이렇게 사내에서 직원의 고충이 발생하면, 고충 처리 시스템을 작동시켜 매뉴얼대로 처리했어야 했건만, 어찌된 일인지 지은이의 회사는 시종일관 고충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철저하게 부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성희롱을 참지 않은 죄’로 지은이는 무려 5년 이상 부당한 배치전환, 고용상의 불이익, 노골적인 피해자유발론, 폭언, 따돌림, 무시, 투명인간 취급 등 2차 피해 목록에 나올법한 모든 경험을 하게 된다.
흔히 어떤 식의 피해에 노출된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우울하고 슬픈 느낌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오히려 어떤 드라마틱한 긴장감 때문에 심장이 살짝 쫄깃해지는 것을 느끼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 큰 회사가 어쩌면 저렇게 치사하고 무자비할 수 있을까 싶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계속 발생하게 되는데, 지은이가 그런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과 태도가 당차고도 창의적이다. 게다가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온갖 상황들에 대한 지은이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지점이 많았다. 지은이에게는 어려운 상황을 지나온 사람만이 줄 수 있는 통찰력이 있다. 이 책을 통해 구조적 부조리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어떤 갈등이 발생하게 되는지, 부당한 거대 권력으로 인해 개인이 어떤 희생을 치르게 되는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성차별적 구조조정 방식이 고졸 여직원과 대졸 여직원 간의 갈등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부분도 좋았다.
수난사의 미덕 한 가지. 지은이는 힘겨운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직장 생활 전체를, 의지했던 많은 사람들을”(217쪽) 잃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지지하고 도와주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세상의 비참 속에서 구원은 역시 ‘보통 사람들’ 안에 있더라. 그래서일까. 책장을 다 넘기고 나서 짠한 마음과 함께, 묘한 기쁨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