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와 장소상실 논형학술총서 14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 논형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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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다는 것은 의미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표지 뒷면)

『장소와 장소상실』이라는 책 제목은 범상치 않은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제목이 풍기는 매력에 비해, 책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현상학을 끌어와서 일상적 경험이 일어나고 있는 생활세계이자 인간 실존의 근간인 장소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은 병렬적이고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수많은 저자들에 대한 인용의 연속, 그리고 아마도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루한 개념 분류 작업은 이 책이 아카데미아에서 ‘장소와 인간’ 간의 관계에 질문을 던진 선구자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동일한 주제에 대한 선행 연구가 없었던 그 시기에, 논문으로서 구성 요건을 갖추기 위해 필요했던 인식론적 지도그리기였을 것이다. (혹은 자기 방어였을지도...)

뒷부분으로 가면서 (특히 7장에서) 저자는 ‘경험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조사하고 설명하려고 드는’ 합리주의, 그리고 “어디에서나 질서를 추구하고 발견할 수 있다”는 사회과학의 방법론 및 인식론을 비판한다. 합리주의에 입각한 지식 생산의 방법론이 지배적이었던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이러한 저자가 선택한 현상학적 방법론은 이러한 지식 풍토에 도전장을 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주변적이었던 자신의 인식론적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개념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인문학자인 나의 지인은 이 책이 ‘너무 사회학적’(당연하지)이라는 평을 했지만, 최근 줄곧 ‘사회과학’ 서적만 읽어왔던 나로서는 ‘장소’와 ‘인간’ 개념에 대한 저자의 ‘인문학적’ 접근방식이 오히려 새롭게 다가왔다.)

장소의 기본적 의미, 장소의 본질은 위치에서 오는 것도, 장소가 수행하는 사소한 기능들에서 오는 것도,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공동체에서 오는 것도, 피상적이고 세속적인 경험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이들 모두가 장소의 일반적이고 필수적인 특징이긴 하지만, 장소를 인간 존재의 심원한 중심으로 정의하는 대체로 무의식적인 의도성에 장소의 본질이 있다. (3장)

어쨌든, ‘장소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placeness)’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인간’을 사유하는 방식을 확장시켰다는 사실 만으로 이 책은 앞부분의 지루함을 견딜 가치가 있다. 이 책에서 ‘장소의 본질’ 혹은 ‘장소의 의미’는 ‘장소’, ‘장소감’, ‘장소 정체성’ 등의 단어를 통해 설명된다. ‘장소’는 단지 위치를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며, 장소감은 장소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구분해낼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장소의 정체성은 ‘물리적 환경, 인간의 활동, 의미 간의 변증법적 결합’에 의해 구성된다. 저자는 이를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의 입을 빌어, “개인은 자신의 장소와 별개가 아니다. 그가 바로 장소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럼 ‘장소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무장소성의 개념은 ‘참된 장소감(혹은 장소 경험)’과 그렇지 못한 장소감의 구분에서 출발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자기 실존에 대한 자유와 책임을 인식한다”는 의미로 ‘현존재’라는 존재 양식을 설명한 바 있다. 저자는 이 ‘현존재’라는 개념을 끌어와 ‘참된 장소감’을 설명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에 책임을 지는 ‘참된 인간’이 갖는 장소에 대한 참된 태도, 즉 “장소에 대한 심오하고 무의식적인 정체성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장소감이란 “내부에 있다는 느낌이며,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의 장소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뜻한다.

이와 반대로 ‘장소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이란 “깊이가 결여되고 평범하고 평균적인 경험의 가능성만 제공하는 장소” 경험을 뜻한다. 무장소성 혹은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의 대표적인 예는 키치(‘거주를 위한 기계’가 되어버린 집, 관광), 대중문화(디즈니화, 박물관화, 미래화, 대중매체 등)이다. 이러한 저자 에드워드 렐프는 ‘무장소성’과 ‘장소’ 모두 실존적 삶의 조건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저자가 문제삼는 것은 무장소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배적인 현상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무장소성의 확산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장소의 생활 세계 설계’의 변화를 통해서 대안을 추구할 것은 제안한다. 인용의 대가인 저자는 아마도 “장소 박탈에 대항할 가장 좋은 무기는 사람들의 장소에 대한 감성을 재생시키는 것”이라는 데이비드 브로워를 인용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제시한 듯하다. 물론 비록 저자가 무장소성을 추동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적 구조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과 도전을 제시하지 않았고, 따라서 ‘어떻게’ 대안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었지만, ‘사람들의 장소에 대한 감성’을 재생시켜야한다는 결론에는 전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장소와 인간이 맺고 있는 역사성, 시간성, 깊이, 맥락성이 삭제되고 오로지 ‘경제적 가치’라는 획일적 기준에 의해 장소성(따라서 인간성)이 구획되고 표준화되는 이 시점에서, 인간은 과연 어떠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가? 여기서 저자가 진정성/비진정성, 장소/무장소라는 이항대립간의 단절성과 연속선을 동시에 강조한 점, 양자 모두 존재와 실존 양식으로 똑같이 중요하다고 지적한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비진정성이 진정성 만큼 인간 실존에 필요하고 중요하고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특징’이라고 보았지만, 현재적 시점에서 그것이 문제인 것은 무장소성이 장소성을 압도하는 지배적 현상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무장소성의 지배화, 확산이 대체 ‘인간’에게 왜 문제적인 것일까? 저자는 장소 개념을 ‘물리적 환경, 인간의 활동, 의미 간의 변증법적 결합’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것은 장소의 상실은 불가피하게 장소와 인간의 상호 소외를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해 구제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저자의 논거를 따라가다 이렇게 주장해 볼 수도 있겠다. 아마도 그 이유는 무장소성이 장소성을 압도해 버림으로써 양자 간의 변증법적 결합이 어려워지고, 그러한 변증법적 긴장이 없는 공간에서 인간은 실존적 삶을 살아가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무장소성의 지배화, 그 공간에서 인간과 장소는 그저 ‘거주를 위한 기계’로 전락해 버리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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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기 -상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최연 옮김 / 소화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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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당시에 무려 60만부가 팔렸다는 이 책은 “나는 숙명적으로 방랑자이다. 내게는 고향이 없다”로 시작된다. 아무리 근대가 ‘떠돌이 인간(재미삼아 학명으로 만들어보자면 homo wanderer쯤 될까?)’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시대였다고 하지만, 나이 어린 여자의 몸으로 감히 ‘고향 없음’과 ‘방랑’을 선언하기란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다.

태생적으로 ‘고향’이 없고, 게다가 돈도 집도 없고,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이라고는 ‘여자의 몸’ 밖에는 없는 어린 여자. 저자 하야시 후미코의 자전적 소설인 이 책은 한 여성의 유년기부터 20대 중반까지의 방랑기를 다루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이 책에서 저자가 일기의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는 문체였다. 당시 일본에 ‘사소설’이라는 장르가 활성화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내면 깊은 곳까지 침잠하여 섬세하고도 치열한 언어를 구사한 이 책이 1920년대에 작성된 것이라는 게 놀라웠다. 요즘 이 시기의 일본 소설에 푹 빠져있는 지인의 말을 빌자면,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근대적 언어를 갖춘 소설이 이미 1900년대에 등장했다는 것. 메이지유신과 더불어 일본에서 근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1860년대였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암튼 1930년 당시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어떤 재미, 어떤 감상을 느꼈을까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일본의 근대화가 ‘위로부터’ 시작된 것이었고, 국민, 문화 등 ‘일본적인 것’에 관한 서사가 유신 엘리트에 의해 생산되고 유포된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어쨌거나 이 책의 재미는 당대 도덕이나 규범의 문법 등 모든 것을 일체 ‘확 깨는’ 통쾌함을 맛볼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태생적으로 안주하는 것, 주저앉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것 같다. ‘솔직함’이야말로 자유로운 영혼만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이 아닐까 싶다. 추측컨데, 아마도 당대 독자들이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큰 매력은 ‘솔직함’의 미덕이었을 것이다. 저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속 주인공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행상을 시작하여, 술집 종업원, 가정부, 여공, 사환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시, 소설, 동화를 읽고 쓰는 것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는다. ‘문학’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문학’이 주는 낭만적 세계에 대한 동경도, “비록 몸은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내 정신만은 고귀한 취향으로 가득하다”는 식의 자기 방어적 자만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저 문학에서 그녀가 맛볼 수 있는 ‘기쁨’, 그것은 굶주림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부박한 밑바닥 인생에서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다소 거칠고 투박하지만 솔직하기 그지없는 저자의 문체가 맘에 들었다. 주인공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유곽에 몸을 팔면 어떨까 하는 유혹을 느낀다. 동거하는 남자로부터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녀는 비루한 외로움 때문에 남자와 쉽사리 헤어지지 못한다. ‘남자에게 얻어먹는 것은 진흙을 씹는 것보다도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늘 자신을 저버리고 등쳐먹는 남자들 사이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관조한다. 방세는 밀려있고 당장 내일 끼니를 해결할 돈도 없을 때, ‘결혼’에 대한 제안은 유혹적이다. 이 방랑자의 일기는 그렇게 어떤 것에도 안주할 수 없는 영혼을 가진 한 사람이 그 온갖 비루한 실존적 모순과 갈등 속에서 오직 문학에만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삶을 어렵게 이어가는 모습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배고픔과 성욕,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학과 삶에 대한 열정에 그토록 솔직했던 여성, 그것은 저자 하야시 후미코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타임 머신이 있다면 1930년대로 돌아가 이 책에 매료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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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의 일상 - 생명공학시대의 건강과 의료
백영경.박연규 지음 / 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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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1.『프랑켄슈타인』에서 『블레이드 러너』,『전갈의 아이』 그리고『쌍둥이별』까지

다른 행성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개발된 ‘리플리컨트’(복제인간)이 유혈폭동을 일으키자 유전공학기술에 의해 창조주에 위치에 등극한 인간은 복제인간 사냥에 나서면서 인간과 복제인간 간의 싸움을 다룬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사이에 있는 마약왕국의 우두머리에게 여분의 장기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클론 소년이 양육되고, 그곳을 탈출하면서 겪는 이야기인 『전갈의 아이』(원제: The House of the Scorpion, 2002), 그리고 “백혈병에 걸린 언니 케이트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태어나게 된 열세 살 안나가 다시는 자신의 몸에 손대지 못하도록 부모님께 소송을 걸겠다고 변호사 캠벨 알렉산더를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쌍둥이별』(2004).

근대의 출발점인 19세기 초반에 나온 프랑켄슈타인 서사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 동물, 기계 (그리고 아마도 괴물)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지면서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해 왔다.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생김새나 지능 면에서 철저하게 ‘비인간’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괴물의 형상을 한 프랑켄슈타인은 아직 ‘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과학기술의 미발달 단계의 반영일수도, 제국주의 세력의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식민지 확장 과정에 탄생한 인종주의의 반영일수도 있을 것이다. 괴물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창조주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상처받고, 그러면서 또한 인간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지만, 끝내 인간의 무리에 끼지 못하고 소멸을 맞이한다. 이후에 나온 서사들 역시 인간과 복제인간 간의 전쟁,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그 갈등의 국면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은 서서히 비인간화되고, 오히려 복제인간이 그러한 ‘인간적’ 능력을 갖게 되면서 달라진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와해될 뿐만 아니라, 그 지위가 오히려 역전되거나, 비인간이 ‘인간다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되는 서사들. 과학기술의 발전이 생명공학 단계로 진입하면서 야기된 황폐한 풍경들을 사회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인문학의 언어와 직관이 먼저 포착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단상2. 인간의 ‘민영화’,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프랑켄슈타인의 일상: 생명공학 시대의 건강과 의료』은 전문가주의, 국가주의, 경제논리 담론에 밀려 제대로 제기되지 못했던 질문들과 쟁점들, 국면들을 아주 잘 정리하고 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기에 책을 접하는 순간, ‘드디어!’라는 말이 나왔더랬다. 그 ‘복제 및 생명공학연구와 결부된 몇 가지 쟁점’을 정리하면서 글로벌 연대의 밑그림을 제시한 세라 섹스톤의 글은 그동안 의문점으로 남았던 쟁점들에 대해 중요한 통찰력을 제시해 주었다. 황우석 사태를 기점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일련의 ‘생명공학’ 관련 사건이나 쟁점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분절화되어 물화되고 상품화되는 ‘인간의 민영화’에 과연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라는 난제, 이것은 ‘경제근본주의’, 신자유주의, 국가주의, 가부장제 논리들이 함께 뒤얽혀 있어 좀처럼 쉽게 풀릴 것 같지가 않았고, 어디서 어떻게 개입해야하는지도 참으로 난감한 문제로 다가왔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을 읽고 난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지난 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1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세계를 재생산하는 여성의 몸을 둘러싼 생체 정치학]이라는 제하의 워크샵에서 캐서린 월드비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여성의 재생산 생물학이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하에서 민영화된 투자의 중요한 형식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재생산 능력을 공급하는 여성들의 행위성을 ‘재생산노동’ 혹은 ‘생물학적 노동’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토론에서 월비는 금지주의 정책 하에서 ‘성매매 여성’들이 피해자화되는 현상과 유비시켜 ‘클리닉과 생체윤리학적 기준에 대한 국제적 가이드라인’의 필요성과 줄기 세포 산업에서 공급자 역할을 하는 여성을 재생산 노동자로, 그리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경제적 행위자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토론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제약 산업의 논리로 이용될 우려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캐서린 월드비의 주장과 토론을 지켜보면서, 이런 방식의 사회과학적 서사와 개입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서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한동안 교착상태에 머물렀던 생명과학기술, 성형수술에 대한 사회과학적 논의는 최근 미용산업구조, 건강관리서비스 및 생명과학기술 산업구조 등 ‘구조’의 문제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아마도 그것은 그 시스템을 애초에 만들어내고 재생산하는데 동원되는 논리와 신화의 허구성을 가시화하는 작업이 현 시점에서 요구되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개입이 필요하다는 생각,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고민의 필요성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새라 섹스톤의 글은 생명과학이 투기자본의 영역을 끌어들이고 확장하면서 ‘바이오경제’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게 되기까지, 이를 정당화하거나 비가시화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신화들이 있었는지를 밝히고 그 신화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폭로한다. 물론 그 폭로는 아직은 ‘의심’의 수준에 불과하다. 아직 실체적 진실을 입증하기엔 거대한 국가 및 기업 권력 연합체가 구축하고 있는 견고한 동의 시스템에 대한 보다 면밀한 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소 ‘의심’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색스턴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특히 건강관리서비스, 제약산업의 구조가 병들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건강하고 구매력 가능한 사람들’에게서 이윤을 뽑아내는데 목적이 있다는 주장, 규제 논리가 오히려 복제연구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될 가능성에 대한 지적, 어느 한 국가에서 윤리적으로 지지받는 규제가 가난한 나라에서는 착취의 논리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경고. 이러한 지적들은 국가 간의 불평등한 경제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대안이 아니라, 지역, 경제적 수준, 성별을 뛰어넘는 연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는 윤리적 요청으로 이어진다. 섹스톤의 글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러한 연대의 필요성을 설득해 낼 수 있는 지도, 즉 현재 생명과학기술과 산업의 발전을 둘러싼 쟁점들의 지도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사족. 이 책은 ‘생명공학시대의 건강과 의료’에 대한 쟁점과 개입의 지점들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미덕에도 불구하고 편집상 중요한 결함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이틀에 ‘백영경.박연규 쓰고 엮음’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 책의 목차에는 각장의 저자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목차에서 원저자의 이름이 누락된 것은 여러 글을 엮어 만든 책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이 생명과학기술에 대한 글로벌 연대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면, 더욱 원저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밝혀주는 것이 필요하다. 영국, 인도, 한국이라는 ‘로컬’에서 벌어지고 있는 양상들과 문제점들을 그곳의 연구자 및 활동가들이 어떻게 포착하고 개입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인식은 책의 목차를 펼치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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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der Trouble :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 (Paperback) - 『젠더 트러블』원서 Routledge Classics 49
주디스 버틀러 지음 / Routledge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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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트러블 번역본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지가 어언 반년이 지났는데, 아직 출판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주디스 버틀러에 대한 해제나 인용을 접할 때의 단상은 한국 내에서 이 텍스트가 그다지 여성주의 정치학의 전통에 깊이 천착하면서 읽히고 소비되는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텍스트를 읽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지만, 이 텍스트가 애초에 쓰여진 맥락에 대한 파악은 중요하다고 본다. 이 책은 1980년대부터 서구 페미니즘 아카데미아 내부에서 치열하게 제기된 '여성' 범주, 'sex/gender'의 이원적 범주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그 출발점을 갖고 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지식의 지평을 뒤흔들어놓은 '혁명적' 텍스트로 평가하고 있고, 나 역시 이 책이 주는 통찰력과 학문적 상상력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물론 버틀러의 화법에서 다소 '남근적' 어조가 거슬리기는 하지만, 이 책이 다나 해러웨이, 조안 스콧의 논의와 함께 당대 페미니즘 인식틀을 흔들어 놓고 성숙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제대로 된 번역본이 나온다면 이 책을 읽는데 크게 도움이 되겠지만, 여성주의 인식론과 정치학에 관심이 있다면 원서와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1. '여성' 범주, 페미니즘의 주체에 관한 소고

주디스 버틀러는 처음부터 “페미니즘 이론 및 정치학에서 전제되고 있는 ‘여성’이라는 범주가 과연 여성주의에 필수불가결한 것인가?”라는 페미니즘 이론 및 실천의 근간을 흔드는 도전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젠더 트러블」이라는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처럼, 그는 ‘젠더’ 범주들에 대한 비판적 계보학적 지도를 제시함으로써 범주로서의 ‘여성’이라는 주체 없이도 새로운 페미니즘의 지평이 가능하다는 점을 제시한다. 1장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에서 버틀러의 논의는 페미니즘 이론에서 전제되고 있는 ‘여성’이라는 범주, 그리고 ‘섹스/젠더’간의 구분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분석적으로 담론적 ‘순환의 폐허’라는 실패를 가져왔음을 피력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우선 페미니즘에는 하나의 보편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 전제하에 사용되고 있는 ‘여성’이라는 범주를 둘러싼 문제점들은 단지 그 범주가 보편적 가부장제나 공통의 억압 등 또 다른 전제들을 불러온다는 점을 넘어선다. 버틀러는 사법적 권력의 기능이 제한, 금지, 규제, 통제 등의 작용을 통해 그것이 재현하고자 하는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푸코의 논의를 빌어, 페미니즘의 주체로서 ‘여성’이라는 범주를 ‘담론 혹은 법 이전의 주체’로 사용하는 문제, 바로 그 사법적 권력의 효과라는 점을 놓치게 되는(혹은 은폐하게 되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비판의 출발점은 여성주의 이론들이 섹스나 젠더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질문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섹스의 이원성을 담론 이전의 영역으로 설정함으로써 섹스의 내적 안정성과 이원적 틀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문화적 ‘구성’의 의미를 둘러싼 쟁점들 외에도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성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비물질적 의지가 활성화시켜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수동적 매개체’나 도구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버틀러는 정치적 전략으로 ‘여성’이라는 범주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여성’이라는 공통의 범주가 있다고 미리 가정하는 정치학은 대화의 가능성을 방해하는 정치학, 즉 실패하는 정치학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결국 ‘여성’이라는 범주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바로 그러한 불완전성으로 인해 그것 자체가 규범적 이상으로 작동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여성주의가 토대주의적 정치학이 되지 않으려면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하나의 전제로 설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자신의 논거를 펼치기 위해 구체적으로 보봐르, 이리가레, 위티그 등의 이론가들이 ‘여성’ 범주와 ‘섹스/젠더’ 구분을 사용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추적한다. 버틀러에 의하면 이 이론가들이 얼핏 매우 다른 이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원론을 효과적으로 해체하지 못한다는 점, 젠더 비대칭성을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다는 점, 그리하여 결국 젠더 비대칭성과 이원론 안에서 끊임없이 맴돌 수밖에 없는 이론적 폐허를 만들어낸다. 먼저 보봐르의 경우,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칠 때 ‘정신/몸의 이원론’을 의지하고 있으며, ‘행위(deed)’ 이전의 ‘행위자(doer)’로서 주체의 존재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한편 이리가레는 ‘하나가 아닌 섹스’라는 테제를 통해 주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실체의 형이상학과 서구의 헤게모니적 재현에 대한 비판하고 있다. 이리가레는 남근이성중심적 의미화 경제에서 여성은 재현될 수 없는 것, 언어적 불투명성과 부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리가레 역시 남성중심적 의미화 경제를 전체화하고 적을 하나로 동일화함으로써 ‘억압자의 전략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는’ 역담론에 불과하다. 즉 버틀러는 이점에서 이리가레가 남근중심주의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버틀러는 유물론적 페미니스트인 위티그에 대해 가장 신랄한 비판을 하는 듯하다. 버틀러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위티그는 여성이 보편적 주체의 지위에 설수 있도록 ‘섹스’의 해체를 요구한다. 그 해체의 과정에서 ‘여성’은 특수하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관점을 모두 취해야만 한다. 자유를 통해서 구체적인 보편성을 깨달을 수 있는 주체로서 위티그의 레즈비언은 실체의 형이상학에 전제된 인본주의적 이상의 규범적 약속을 쟁점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확증한다.” 위티그의 이론에서 버틀러가 지적하는 실패의 지점은 ‘자기 동일성을 지닌 실체로서의 섹스’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자유’라는 특성을 지닌 ‘사람’ 인식적 주체를 전제함으로써 ‘섹스’라는 범주를 생산하고 자연화하는데 책임이 있는 실체의 형이상학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에서 버틀러는 보봐르, 이라가레, 위티그 등의 이론가들의 젠더 범주 계보학의 지도를 통해 이러한 이론들이 결국은 ‘젠더’라는 환영적 구성물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고 일갈하는 듯하다. 사회적으로 구축되고 유지되고 있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인식가능성(intelligibility)가 균열되는 순간은 ‘허큘라인 바뱅’과 같은 ‘비일관적’, ‘비연속적’ 존재들의 문화적 출현이다. 그러나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y)이 매트릭스에 균열을 가져오지 않는 이론은 남근이성중심주의의 모방적인 복사 혹은 패러디에 불과하며, 그러한 이론에 기반한 정치는 절망의 정치라는 것이다.

버틀러는 젠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며, being이 아니라 doing이라고 본다. 즉 사법적 규제의 실천들이 만들어내는 효과인 동시에, 남근이성중심주의와 강압적 이성애가 만들어낸 완벽한 허구이다. 버틀러는 여성주의는 이러한 수행적 과정으로서의 젠더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교활한 정치적 작용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패러디에서 정치로’라는 제목의 결론에서 버틀러는 페미니즘의 정치를 구성하는 젠더 존재론은 없다고 못을 박는다. 섹스의 이분법을 자연화하는 의미화관습을 해체하는 효과적 전략으로 그는 ‘Undoing Gender'를 제안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2. 페미니즘의 intelligibility 확장하기

Gender Trouble의 1999년 개정판 서문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장장 20페이지에 걸쳐 1990년 초판 발생 이후 10년간 이 책이 일으킨 반향에 대한 소회, 이 책이 소비되고 해석되는 방식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애초에 Gender Trouble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어떤 의도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상술하면서, 버틀러가 여기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1989년 원고 작성 당시 자신의 의도는 당시 여성주의에 만연해 있었던 이성애적 가정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러한 논의의 핵심은 여성주의 학문의 내재적 비판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지 여성주의라는 학문을 송두리째 폐기처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여기서 버틀러는 자신의 논의를 젠더의 ‘사회적 구성성’을 둘러싼 여성주의 이론의 논쟁, 즉 정확히 여성주의 계보학에 위치시키고 있다. 또한 이원적 젠더, 혹은 젠더의 이원성이라는 인식론적 틀을 깨지 못하는 페미니즘의 한계가 대륙 철학인 후기 구조주의, 특히 후기 구조주의 프랑스 페미니즘의 미국식 전유 방식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기획은 ‘후기 구조주의를 여성주의적으로 재정식화하는 것’임을 밝힌다.

젠더 트러블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 혹은 오해 중 하나는 페미니즘의 토대로서의 ‘여성’ 범주의 지위를 해체하는 것이 곧바로 페미니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일 것이다. 버틀러의 젠더 관련 논의를 비판적 학문으로서 지속적인 페미니즘의 논쟁의 역사 속에서 읽어나가는 것, 그리고 동시대의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접점 혹은 긴장 국면 속에서 젠더를 둘러싼 앎의 가능성의 영역(intelligibility)를 어떻게 변화시켜나갔는지에 주목하면서 읽어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 젠더 이원성을 와해시키는 방식, 페미니즘의 토대 범주로 작동해 왔던 여성 범주에 대한 비판적 해체 등 버틀러의 핵심 논의들을 이러한 지형 속에서 읽어나감으로써, 정치적 영역으로서의 학문적 영토 내에서 이론을 생산하고 읽어내고 인용하고 확장하는 학문적 생산자의 포지션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어빙 고프만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버틀러의 수행성에 관한 논의와 무척 닮아있으면서도 뭔가 몹시 다르다는 막연한 느낌을 가졌었다. 고프만과 버틀러의 논의가 아카데미아에서 매우 다른 이론적, 정치적 함의를 갖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저자의 포지션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결국 “이론의 외양은 그것의 문화적 전유를 통해서 변화되어 왔다”는 버틀러의 지적처럼, 어떤 개념이나 범주는 어떤 다른 범주 혹은 지적 전통과 논쟁하고자 하는가하는 점, 즉 학문적 접점이나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다른 지적 전통과의 비판적인 대화 관계(dialogic relation) 속에서 그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다.

젠더 트러블이 난해한 텍스트로 받아들여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버틀러의 독특한 화법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견해를 먼저 제시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해 가는 버틀러의 화법은 “이론의 역할은 인식론과 정치학의 정전이나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능력의 지속적인 확장을 통한 사회 변화를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인 듯하다. 젠더 트러블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버틀러의 이론적 지향점은 이론의 규범적 지위 싸움이 아니라 에피스테메 매트릭스 재구축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알 수 있음의 범위와 한계를 밝히고’, 그리하여 그 규범적 인식의 틀 밖에서 질문할 수 있게 하여, ‘알 수 있음(intelligibility)’의 경계를 끊임없이 문제 삼는 것이 바로 버틀러가 추구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버틀러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사회를 변화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서구 페미니즘 이론 내에서 페미니즘이 토대로 삼고 있던 ‘여성’이라는 개념,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정합성’의 문제를 계보학적으로 해체하고 그 인식론적 한계를 폭로함으로써 ‘frameworks of intelligibility’의 판을 새롭게 짜고자 하는 버틀러의 시도는 ‘인간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정치학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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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과 국민 사이 -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서경식 지음, 이규수.임성모 옮김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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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는 사람보다 먼저 고통을 느끼고 죽음으로써 위험을 알린다. 식민지배의 역사 때문에 일본 사회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은 말하자면 ‘탄광의 카나리아’와도 같다.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역사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다. p10.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윤리적 요청을 예민하게 자각하게 하는 텍스트들이 있다. 그것은 내가 지금껏 모르고 있었던 어떤 경험 세계에 대한 인식에 대한 요구일수도, 내가 당연하게 수용해 왔던 그 모든 신념과 지식에 대해 마땅히 문제제기해야 한다는 압력일수도, 글쓴이와 내 존재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에 대한 요청일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프란츠 파농의 텍스트를 읽을 때와 유사하면서도 더욱 강렬한 윤리적 요청을 의식했다.

서경식은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났고, 대학교 3학년 때 서울에 유학 간 두 형(서준식, 서승)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정치범으로 구속된 후 그들이 국가 권력에 의해 고문당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과정을 견뎌야 했던, 마침내 1988년, 1990년에 마침내 그들이 출옥했을 때 마흔이라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탄광의 카나리아’에 비유한다. 탄광의 갱부들이 갱내 일산화탄소 농도를 알기 위해서 갱으로 들고 들어갔다던 카나리아 새장. 지식인으로서 그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은 바로 그곳이다. 그는 “‘일본인의 서사’와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승자의 서사’로 뒤덮혀 가는 일본 사회에서 재일조선인 입장에서의 대항서사를 만들어가는 일을 스스로의 역할로 삼았다”고 말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식민지배의 유산과 망령에 사로잡힌 일본사회와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 그리고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폭력성이 난무하는 작금의 글로벌 세상에서, 그의 글은 위험을 경고하는 ‘카나리아의 노래’와도 같다는 것. 아니 그렇게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임무는 마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성직자들의 ‘서원’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서경식의 글이 갖는 진정성은 여러 모로 분열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실존적 상황을 직면하는 힘, 그 힘에서 나온다. 그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 피억압자가, 분열적이고 모순적인 존재가, 그 억압에 대해, 그 분열과 모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고난에 대한 직면은 그 상황에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하겠다는 의지와 결단 없이는, 즉 고난과 마주하는 고난을 감내하겠다는 각오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실존적 의지에 원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아마도 ‘분노’인 듯하다.

그가 무엇보다도 가장 분노하는 건, (전후 독일 및 일본 사회의, 그리고 아마도 한국 사회의) ‘무지’와 ‘의도적 태만’이다. 살아남은 난민들로 하여금 자살에 이르게 한 것은 ‘인간적 연대를 맺는데 실격했다’는 절망감이었다. 전후 독일인들의 ‘무지’와 ‘의도적 태만’이야말로 범죄행위라고 고발했던 프레모 레비. 서경식은 그 고발의 화살이 이제 누구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질문한다. 그의 글은 한반도와 일본을 향해 외치는 고발과 비판의 목소리인 동시에, 희망과 구원에 대한 절절하고도 피맺힌 열망이기도 하다.

그에게 일본의 ‘국제화’, ‘다문화공생사회’ 등의 구호는 차별과 소외로 고통받는 국민-국가 내부의 난민의 존재를 은폐하는 악질스런 기만으로 읽힌다. 참정권이 없는 사람들, 거주지로부터 언제나 쫒겨날 수 있다는 위협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삶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는 일체의 수사에 대한 그의 비판은 여러 모로 많은 통찰력을 준다.

특히 일본 사회의 ‘다문화주의’ 논의가 ‘민족-문화’의 선험적 연결성을 전제함으로써 오히려 재일조선인과 선진자본주의국가에 사는 ‘제3세계인’에게 분열적 경험을 생산한다는 주장은 한국 사회의 현재와 당면한 미래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국가가 주도하는 ‘다문화주의’ 정책, 주류 시민과 비주류 시민(혹은 반난민)의 ‘공생’을 강조하는 정책은 외국인이 자국 내에 유입된 역사적, 정치경제적 상황을 비가시화하고 탈정치화하는 동시에 실제로는 주류 사회로의 통합을 강요함으로써 분열과 모순으로 가득한 ‘반난민’을 생산한다. ‘다문화정책’이라는 구호 하에 노무현 정권부터 줄곧 한국 정부의 ‘다문화주의’ 수사. 이것은 특정 인간을 불법적 존재로 분류하고 차별하는 한국 사회의 폭력적 인식에 대한 성찰을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도덕성의 경계’가 지금 시험대 위에 올랐다”는 지적과 함께 서경식이 제기하는 윤리적 요청, ‘민족․문화․국가’의 비연속성에 대한 인식을 삭제해 버린다.

사족. 프란츠 파농을 읽기 위해 불문학을 공부했다던 그의 글은 문학적인 동시에 사회비판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건 말을 알아듣기 이전부터 ‘조센징’이라는 모욕과 질시를 인식해야 했던 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던 수많은 책들, 그 많은 다양한 범주의 번역서들의 존재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부터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번역을 지원해왔다고 한다. 그러한 전통 덕분인지 일본 출판계는 발빠른 번역 작업으로 유명하다. 서경식 뿐만 아니라 그의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수많은 재일조선인들(와세다 대학 교정에서 분신한 양정명, 강간살해범으로 몰려 사형당한 이진우, 그리고 정치범으로 몰려 옥고를 치른 서승과 서준식 형제)의 母語는 일본어였고, 일본어로 번역된 수많은 디아스포라 예술가, 지식인의 작품들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파농,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 파울 첼란을 비롯하여 아랍,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의 아시아출신 유대인 등 다양한 난민의 경험 세계는 그들에겐 생존의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디아스포라를 속박하고 있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인도하는 경험 세계가 그 속에 있고, 그 경험 세계의 지도를 통해 ‘나’와 ‘우리’에 대한 감각을 키워갈 수 있었으리라. 나의 유년기, 청소년기를 돌아보면, 접할 수 있는 해외 문학작품들 자체가 많지 않았고, 그나마 서구 지식 체계에 의해 ‘대가’로 인정된 작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책 좀 읽었다는 또래들의 독서 경험은 일본에 비하면 동질적이었다. 서경식이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접했던 번역서들은 다양했고 풍부했다. 한국 땅에서 ‘반난민’의 삶을 살아가야할 수많은 미래의 ‘서경식들’을 위해 다양한 장르의 훌륭한 책들, 도서관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소를 빼앗긴 그들에게 풍부한 사유의 세계라도 가능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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