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과 국민 사이 -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서경식 지음, 이규수.임성모 옮김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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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는 사람보다 먼저 고통을 느끼고 죽음으로써 위험을 알린다. 식민지배의 역사 때문에 일본 사회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은 말하자면 ‘탄광의 카나리아’와도 같다.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역사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다. p10.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윤리적 요청을 예민하게 자각하게 하는 텍스트들이 있다. 그것은 내가 지금껏 모르고 있었던 어떤 경험 세계에 대한 인식에 대한 요구일수도, 내가 당연하게 수용해 왔던 그 모든 신념과 지식에 대해 마땅히 문제제기해야 한다는 압력일수도, 글쓴이와 내 존재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에 대한 요청일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프란츠 파농의 텍스트를 읽을 때와 유사하면서도 더욱 강렬한 윤리적 요청을 의식했다.

서경식은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났고, 대학교 3학년 때 서울에 유학 간 두 형(서준식, 서승)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정치범으로 구속된 후 그들이 국가 권력에 의해 고문당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과정을 견뎌야 했던, 마침내 1988년, 1990년에 마침내 그들이 출옥했을 때 마흔이라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탄광의 카나리아’에 비유한다. 탄광의 갱부들이 갱내 일산화탄소 농도를 알기 위해서 갱으로 들고 들어갔다던 카나리아 새장. 지식인으로서 그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은 바로 그곳이다. 그는 “‘일본인의 서사’와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승자의 서사’로 뒤덮혀 가는 일본 사회에서 재일조선인 입장에서의 대항서사를 만들어가는 일을 스스로의 역할로 삼았다”고 말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식민지배의 유산과 망령에 사로잡힌 일본사회와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 그리고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폭력성이 난무하는 작금의 글로벌 세상에서, 그의 글은 위험을 경고하는 ‘카나리아의 노래’와도 같다는 것. 아니 그렇게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임무는 마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성직자들의 ‘서원’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서경식의 글이 갖는 진정성은 여러 모로 분열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실존적 상황을 직면하는 힘, 그 힘에서 나온다. 그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 피억압자가, 분열적이고 모순적인 존재가, 그 억압에 대해, 그 분열과 모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고난에 대한 직면은 그 상황에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하겠다는 의지와 결단 없이는, 즉 고난과 마주하는 고난을 감내하겠다는 각오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실존적 의지에 원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아마도 ‘분노’인 듯하다.

그가 무엇보다도 가장 분노하는 건, (전후 독일 및 일본 사회의, 그리고 아마도 한국 사회의) ‘무지’와 ‘의도적 태만’이다. 살아남은 난민들로 하여금 자살에 이르게 한 것은 ‘인간적 연대를 맺는데 실격했다’는 절망감이었다. 전후 독일인들의 ‘무지’와 ‘의도적 태만’이야말로 범죄행위라고 고발했던 프레모 레비. 서경식은 그 고발의 화살이 이제 누구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질문한다. 그의 글은 한반도와 일본을 향해 외치는 고발과 비판의 목소리인 동시에, 희망과 구원에 대한 절절하고도 피맺힌 열망이기도 하다.

그에게 일본의 ‘국제화’, ‘다문화공생사회’ 등의 구호는 차별과 소외로 고통받는 국민-국가 내부의 난민의 존재를 은폐하는 악질스런 기만으로 읽힌다. 참정권이 없는 사람들, 거주지로부터 언제나 쫒겨날 수 있다는 위협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삶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는 일체의 수사에 대한 그의 비판은 여러 모로 많은 통찰력을 준다.

특히 일본 사회의 ‘다문화주의’ 논의가 ‘민족-문화’의 선험적 연결성을 전제함으로써 오히려 재일조선인과 선진자본주의국가에 사는 ‘제3세계인’에게 분열적 경험을 생산한다는 주장은 한국 사회의 현재와 당면한 미래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국가가 주도하는 ‘다문화주의’ 정책, 주류 시민과 비주류 시민(혹은 반난민)의 ‘공생’을 강조하는 정책은 외국인이 자국 내에 유입된 역사적, 정치경제적 상황을 비가시화하고 탈정치화하는 동시에 실제로는 주류 사회로의 통합을 강요함으로써 분열과 모순으로 가득한 ‘반난민’을 생산한다. ‘다문화정책’이라는 구호 하에 노무현 정권부터 줄곧 한국 정부의 ‘다문화주의’ 수사. 이것은 특정 인간을 불법적 존재로 분류하고 차별하는 한국 사회의 폭력적 인식에 대한 성찰을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도덕성의 경계’가 지금 시험대 위에 올랐다”는 지적과 함께 서경식이 제기하는 윤리적 요청, ‘민족․문화․국가’의 비연속성에 대한 인식을 삭제해 버린다.

사족. 프란츠 파농을 읽기 위해 불문학을 공부했다던 그의 글은 문학적인 동시에 사회비판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건 말을 알아듣기 이전부터 ‘조센징’이라는 모욕과 질시를 인식해야 했던 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던 수많은 책들, 그 많은 다양한 범주의 번역서들의 존재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부터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번역을 지원해왔다고 한다. 그러한 전통 덕분인지 일본 출판계는 발빠른 번역 작업으로 유명하다. 서경식 뿐만 아니라 그의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수많은 재일조선인들(와세다 대학 교정에서 분신한 양정명, 강간살해범으로 몰려 사형당한 이진우, 그리고 정치범으로 몰려 옥고를 치른 서승과 서준식 형제)의 母語는 일본어였고, 일본어로 번역된 수많은 디아스포라 예술가, 지식인의 작품들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파농,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 파울 첼란을 비롯하여 아랍,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의 아시아출신 유대인 등 다양한 난민의 경험 세계는 그들에겐 생존의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디아스포라를 속박하고 있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인도하는 경험 세계가 그 속에 있고, 그 경험 세계의 지도를 통해 ‘나’와 ‘우리’에 대한 감각을 키워갈 수 있었으리라. 나의 유년기, 청소년기를 돌아보면, 접할 수 있는 해외 문학작품들 자체가 많지 않았고, 그나마 서구 지식 체계에 의해 ‘대가’로 인정된 작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책 좀 읽었다는 또래들의 독서 경험은 일본에 비하면 동질적이었다. 서경식이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접했던 번역서들은 다양했고 풍부했다. 한국 땅에서 ‘반난민’의 삶을 살아가야할 수많은 미래의 ‘서경식들’을 위해 다양한 장르의 훌륭한 책들, 도서관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소를 빼앗긴 그들에게 풍부한 사유의 세계라도 가능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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