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차이, 사이, 틈새 - 성매매공간의 다면성과 삶의 권리
(사)막달레나공동체 용감한여성연구소 기획, 김애령 엮음 / 그린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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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역사에서 여성 인권과 관련된 각종 법들은 일련의 비극적 사건이 계기가 되어 만들어졌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살인범이 된 후에 비로소 성폭력과 가정폭력이 ‘사회문제화’되기 시작했고, 성폭력특별법과 가정폭력특별법이 제정되었다. 2000년 군산 화재사건은 대중에게 성매매 여성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유혹자로 규정했던 기존의 윤락행위방지법의 관점을 재고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004년 성매매방지법과 함께 성판매 여성은 ‘윤락녀’에서 ‘피해자’로 재정의된 것. 물론 그것은 여성을 자발적 판매자=범죄자/강요된 판매자=피해자로 이분화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지만. 어쨌건 이 법의 등장 이후, 성매매 여성을 ‘피해자’로 호명하는 법제도의 담론, 그 실효성과 문제점에 대해 의심과 궁금증을 갖고 있던 참이었다.

성매매는 섹슈얼리티 논의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영역이다. 그래서 쉽게 입장을 취하기가 어렵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 지점, 기존의 프레임 안에서 논의되지 않았거나 질문되지 않았거나 모호했던 영역을 파고든다는 점이다. 우선 이 책의 저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와 방법론이 새로운 사유의 영역을 열어주었다고 본다. 저자들은 기존의 학술 저서에서 흔히 사용되는 ‘성매매 여성’이라는 용어 대신, ‘성판매 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또한 독특한 것은 성매매가 이뤄지는 공간, 즉 ‘성매매공간’에 대한 저자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들의 시선은 ‘성매매 공간’이라는 삶의 현장에서의 권리, 그곳에서의 여성들의 삶과 경험, 이야기로 향해 있다.

하지만 여성들을 찾아 온 이방인들은 왜 그 일을 하게 되었는지, 착취와 감금이 사실인지에 대해 궁금해 했고, ‘이곳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묻지 않았다. p58.



피해자/가해자, 보호의 대상/처벌의 대상의 이분법에 포박되어 있는 인권 담론의 틀에서, ‘성판매 여성’의 경험 세계는 피해자의 그것으로 환원된다. 반면, 저자들이 바라보는 지점은 피해-여성을 보호하거나 구원해줄 법과 제도가 아니라, 그 여성들의 생애의 구체적 시공간이다. “성매매공간에서의 삶의 권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인권은 성산업 안에서도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백재희)은 논쟁적일 수는 있겠으나, ‘피해자일 때에만 삶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법과 정책의 아이러니’를 사유할 수 있게 해 준다.

피해는 사건이고 범죄이지, 존재 규정은 아니다. 성매매 공간에 피해자인 여성과 자발적 성노동자인 여성이 각기 다른 분리된 집단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p94.  

또한 성매매방지법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글(김애령)도 좋았다. 성매매방지법의 등장과 함께 성판매여성의 법적 지위가 성매매처벌법에서는 범죄자로, 성매매피해자보호법에서는 피해자로 규정되는 모순은 ‘처벌’의 대상과 ‘보호’의 대상이라는 양극단에서 과연 성판매 여성의 삶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심을 갖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법적 처벌 강화가 범죄의 예방과 성산업 축소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저자의 질문은 중요하다고 본다. 삶의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성판매 여성’의 인간다움은 가능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좋은 책이다. 저자들의 열정, 인간에 대한 애정, 치열한 고민과 사유의 흔적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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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빈곤 -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퓨어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수영 옮김 / 천지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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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인간의 최고 의무이자 도덕적 품위의 선행조건이며 법과 질서를 보증하는 것이고 빈곤이라는 불행의 치료제라는 신성화는 지난날 노동집약적인 산업과 공명했다. 노동집약적 산업은 생산을 증대하기 위해 더 많은 노동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합리화되고 인원을 감축한 자본집약적, 그리고 지식집약적 산업은 노동력을 생산성 향상의 방해물로 본다. p129.

오늘날 노동윤리는 ‘의존’이란 개념을 불명예로 전환시키는 도구이다. p158

지금까지 읽은 바우만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았다. 물론 후기 산업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 이른바 ‘잉여적 존재’를 지칭하는 ‘쓰레기’라는 단어가 주는 불편함이 이 책에서도 반복되긴 하지만.

어쨌건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치의 핵심에 신빈곤(the new poor) 현상이 있는 듯하다. 바우만은 근대 산업 사회의 역사적 이행 과정에서 ‘빈곤’의 의미가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는지를 이 책에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읽고 나서 그동안 의심스러웠거나 궁금했던 것들, 예컨대 요즘 정치권이 돌아가는 방식, 범죄 뉴스가 다뤄지는 방식에 대해 통찰력을 갖게 됐다.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근대가 ‘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 이행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인간을 정의하는 핵심 규범이었던 ‘노동윤리’가 지금은 가난을 범죄화하고 탈정치화하는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신자유주의적 정부는 공공성을 해체하고 복지 기능을 삭제함으로써 ‘작은 정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민영화의 필연적 결과인 빈곤을 비가시화하고 이에 대한 사회의 윤리적 책임을 소거하기 위해 규제 권력(policing power)을 키우는 ‘큰 정부’라는 것. 여기서 바우만이 주목하는 건 ‘빈곤’에 대한 내러티브, 즉 ‘극빈층’, ‘가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수사학이 변화했다는 점이다.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민영화를 추진하는 이 정부에서 유달리 ‘법과 질서’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 언론에서 아동 성폭력 사건이 교묘하게 계층혐오의 언어로 둔갑하는 이유(전자팔찌, 김길태 사건을 떠올려보라), 고시원을 혐오시설로 간주하여 반대하는 주민들, 각종 사회 문제가 결국 ‘불법화’, ‘범죄화’로 귀결되는 현상,...책을 읽으면서 이런 것들이 떠올랐고, 바우만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상당 부분 명료하게 정리되었다.

또한 최근 정책 이슈에서 ‘낯설게’ 등장한 ‘기초소득’에 대한 논의의 지적 배경에 대해 이해하게된 것도 이 책에서 얻은 수확이다. 빈곤에 대한 정책적 대안으로 기초소득이나 누진소비세가 거론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빈곤에 대한 사유방식의 변화이다. ‘개인의 소득 자격이 실제 소득을 벌어들이는 능력과 다를 수 있다’는 시각, 임금노동을 중시했던 노동윤리 시대의 논리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지위와 존엄성을 중시하는 시각, 정책의 변화는 그러한 사유의 혁명 혹은 전환을 통해서 가능할테니까.

최근 접한 신빈곤 개념 중에서, ‘인간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없는 상태’라는 인문학적 정의(유아사 마코토)가 가장 마음에 들었었다. 사실 사회과학적 설명은 왠지 썰렁하거나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책은 읽으면서 꽤 짜릿했다. 1925년에 태어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바우만, 노년에 많은 사람에게 큰 지적 통찰을 줄 수 있는 책을 낼 수 있다는 것, 참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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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하는 뇌 - 여자의 뇌를 자극하는 화장의 비밀
모기 겐이치로 & 온조 아야코 지음. 이근아 옮김 / 김영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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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뇌’ 관련 서적들이 뜨고 있는 모양이다. 제목에 ‘뇌’가 포함된 신간들의 마케팅은 대부분 자기 계발 담론에 편승한 듯하다. “이제 아름다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똑똑해지기 위해서 화장하라!”라고 말하는 이 책의 표지 마케팅도 마찬가지. 점점 썰렁해지는 출판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인 듯하지만, 어쨌든 통속적인 제목과 마케팅에 비해 내용은 의외로 충실하다. 책을 읽으면서 광고와 책의 내용이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어 좀 황당한 기분이 들기도.

뇌과학자 저자 2명이 여성의 ‘화장’ 행위가 자아의 형성, 인지적 기능, 사회성에 미치는 영향 등을 분석한 책. 화장이라는 행위와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여성성에 대한 사회과학적 논의(주로 비판적인)는 많이 읽어봤지만, 뇌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책은 처음이다. 화장품 회사의 펀드로 진행된 연구이기에 이 연구 자체가 결국 화장품 마케팅에 도구적으로 활용되기 위한 건 아닌가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과학자인 저자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발휘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는 한 표를 던지고 싶다. 화장이 높은 수준의 지적 활동이라는 점, 그것이 인간의 사회성을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라캉의 거울 이론, 시몬느 드 보봐르의 <제2의 성>, 심지어 일본의 고대 신화까지 동원하여 이야기의 얼개를 짜고 있다. 과학적 개념과 인문학적 지식이 자연스럽게 교차되면서 하나의 새로운 내러티브가 만들어지는 것.

일본 학자가 쓴 책을 읽을 때 이런 현상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쌓인 거대한 ‘앎’의 역사 토대 위에서 사유의 깊이가 나온다는 느낌. 그래서 이야기가 탄탄하고 깊이 우러난 느낌을 준다. 학자들이 외국으로 유학을 가지 않고도 자국 내에서 석학이 나올 수 있는 구조와 문화적 분위기가 부럽다. 일본 내의 지적 기반과 토대에 대한 승인과 자부심이 엿보인다. 그래서 서구의 지식을 인용하더라도 거기에 끌려가지 않고 끌어온다는 느낌을 준다.

한편으로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만 보면 대단히 일본적인 텍스트임에는 분명하다. 저자들이 화장이라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감춤의 미학과 여성성을 결부시켜 찬양하는 태도, 이 모두 인공적인 것에 뿌리를 둔 일본의 미학적 전통을 연상시킨다. 어쨌거나 외모를 가꾸는 행위의 긍정적인 측면만 부각시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남는다. 사람들이 화장하고 성형수술을 하는 이 거대한 흐름은 점점 더 옳고 그름의 잣대로만 평가할 수 없는 복잡한 영역으로 가는 듯하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러한 행위를 통해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고 있는가를 주목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들에 따르면 화장하면 할수록 지적으로 감성적으로 성숙해지고 사회성도 발달하고 성숙한 사회가 된다. 개인, 나아가 사회 전체의 메타 인지력, 사회적 지성이 발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장이 일상화되고 화장 기술이 발달한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된다고 넌지시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외부의 기준에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는 인간의 자아를 설명할 때 마냥 좋게만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 남의 눈치를 보는 행위에서 사회성 발달만 긍정적으로 평가했지, 자아의 ‘소외’라는 요소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게 이 책의 흠이라면 흠이다. (화장업계의 돈줄이 연구 결과물에 어떻게든 작동한 게야!) 뭐, 그렇다고 화장에 관한 모든 저서가 화장 행위의 양면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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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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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 속의 송어

가브리엘 루아의 중편 소설. 깐깐하기로 소문난 김화영 선생님이 번역하셨음. 선생님은 지금 은퇴 후 명예교수로 계신다는데, 좋은 번역을 지속적으로 내 주시니 감사할 뿐.

이 소설은 가브리엘 루아의 교사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라고. 18살, 처음 시골 마을에 부임한 여교사, 그리고 천방지축, 야생마처럼 날뛰는 늦깎이 남학생. 우짜든동 잘 가르쳐보겠다는 의지에 불타는 초짜 교사와 자연의 부름에 민감한 감수성을 가진 14살 소년. 소년과 청년의 문턱에 이른 소년이 자신의 선생님을 흠모하게 되는 스토리.

메데릭보다 그의 그림자가 먼저 교실의 문턱에 이르렀고, 그 다음에 메데릭 자신이 여러 날, 또 여러 날 동안 자신의 갈 길을 찾아 헤맨 저 골똘한 눈빛을 가진 길쭉하고 젊은 애어른의 모습으로 문틀 속에 들어섰다. 내 눈에 그는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하는 수 없이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인상이었다. 그의 입의 윤곽, 두터워진 입술-아랫입술 위의 그 그림자는 어디로 갔는가?-은 그의 용모를 완전히 바꾸어놓고 있었다. 얼굴 아래쪽은 이제 어딘가 로드리그와 닮은 점이 뚜렷했다. 그러나 부드럽고 쓸쓸하고 아득한 몽상 속에 잠긴 듯한 두 눈은 어쩌면 그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을 순진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아직까지 어른과 아이가 서로를 제압하려고 할 정도로 그렇게 맞물려있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아무래도 함께 보조를 맞추고 갈 것 같지 않은 그 둘에 대해서 똑같이 마음 아파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p254.


두 눈을 꼭 감고 힘들게 숨을 쉬고 있는 메데릭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신음 소리라도 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제 곧 태어나려고 하는 성인의 무자비한 압력에 밀려 죽어가는 한 어린아이를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기어코 달려가서 메데릭의 삶의 그 위협받는 몫을 구원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p258.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시기, 10대들이 겪는 변화를 유려한 문체로 잘 그려냈다. 책을 덮고 나서 이 짧은 소설이 내게 이토록 매혹적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건 아마도 캐나다의 대자연 속에서 유년기와 젊은 시절을 보낸 작가, 자신의 일부인 그 풍경을 이 소설 속에서 너무나도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무지 어떻게 해도 길들여지지 않는 이 아이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적대감과 선생님의 관심과 애정이 대비를 이룬다. 마치 학교라는 인위적이고 제도화된 공간과 창밖의 대자연의 풍경이 그러하듯이.

‘찬물 속의 송어’라는 제목도 참 마음에 든다. 메데릭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원시적인 숲, 송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 머무르는 그곳으로 선생님을 초대한다. 어떻게 송어가 이렇게 차가운 물 속에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손으로 잡아도 버둥대지 않는지, 소설은 그 의문에 대한 과학적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경이로운 자연 현상에 대한 감격과 환희를 공유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나는 이 부분이 참 좋았다. 송어를 가져다 구워먹자는 선생님의 장난기어린 제안에 당황하여 이렇게 가만히 자신을 ‘믿고 있는’ 생명체를 어떻게 먹을 수 있냐고 더듬거리며 되묻는 이 소년.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나는 무릎 위에 얹어놓은 꽃다발에 눈길을 던졌다. 보드라운 풀줄기가 리본처럼 주위를 둘러묶고 있어서 아직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내 뺨에 가져다 댔다. 섬세한 향기가 배어들었다. 그것은 태어나자마자 벌써 죽어가기 시작하는 젊고 연약한 여름을 말해주고 있었다. p270-271.


‘태어나자마자 벌써 죽어가기 시작하는 젊고 연약한 여름’이라...소녀에서 여자로 변해가던 시기의 혼란과 두려움, 설레임이 떠올랐다. 아마도 이 시기는 생애에서 찰나처럼 짧지만 가장 강렬한 순간이 아닐까. 줄거리는 어찌 보면 뻔한 내용일 수 있다. 나는 책을 덮고 하루 종일 미묘한 감흥을 겪었다. 그 기분을 놓치기가 싫어 『내 생애의 아이들』에 실린 다른 단편들을 읽지 않고 잠시 보류해 두었다. 책을 읽고 나면, 러시아 민속 음악을 들을 때처럼 황량하고도 고독한 감정을 비롯하여 복잡한 울림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프랑스어로 쓰여진 글이지만, 캐나다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글이라서 그런지 여느 프랑스 소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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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 - 수전 손택의 마지막 순간들
데이비드 리프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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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수전 손택의 아들인 데이비드 리프가 그의 어머니, 수잔 손택이 돌아간 지 3년 만에 쓴 책이라고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수전 손택은 40대부터 몇 번씩 죽음의 고비를 맞았다. 그때마다 삶에 대한 ‘지독한’ 열정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왔다고 한다. 이 책은 30여년에 걸친 어머니의 투병 과정을 함께 해 온 아들이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쓴 책인 듯하다. 누구에게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상처가 된다. 슬픔, 분노, 죄의식 등 지은이가 겪은 감정들은 가족을 여읜 경험을 한 사람들에겐 일반적인 것들일 게다. 예고된 죽음은 투병 과정을 지켜보면서 받게 되는 상처가 큰 반면 사고 등으로 인한 갑작스런 죽음과는 달리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이별’이라는 건 삶을 마감하는 당사자와 가족들이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 따라 매우 다른 형식을 띤다. 바로 이 점이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였다.

손택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자의식, 삶에 대한 놀라운 집착, 이런 어머니를 보면서 아들이 겪었을 감정의 소용돌이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을 직면하지 않는 사람들을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한 태도로 인해 가까운 사람들이 겪게 되는 상처 때문이다. 이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해소되지 않은 관계의 찌거기, 미안함과 원망이 교차되는 복잡한 감정적 잔여물...이런 것들이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 된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죽음에 대한 태도를 두고 그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유보하게 된다. “아직도 할 말이 많고 이뤄야할 업적들이 많은데 이렇게 갈 수 없다”, 그토록 불행해하면서도 끝까지 삶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았던 손택. 그런 어머니를 둔 아들은 분명 힘겨웠을테지만, 어쩐지 그런 손택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이 생긴다.

책을 덮고 나니,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드네. 어머니가 돌아간 지 3년 만에 이런 책을 써내는 걸 보면...손택은 자신의 죽음은 부정했으나, 그로인해 자신이 겪어야할 고통은 두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지독하게 겪어내었다. 데이비드 리프 역시 어머니의 투병과 죽음의 여정을 함께 하며 자신이 겪은 힘겨운 과정들을 이 책을 통해 재구성했다. 이는 작가들이 가진 미덕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런 저자의 ‘깡다구’는 손택을 닮은 듯하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정신차리는데 7년 이상 걸렸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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